194화. < Chapter 35. 신인왕의 2학기 - 5 >
하이랭커의 랭킹갱신은 3년에 한 번 열리는(물론 국제정세변화에 따라 보다 빨리 열리게 되는 경우도 제법 있었다.) 세계초인회의에서만 이루어진다.
다만 그 전에 갱신이 일어나는 경우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닌데, 하나는 세계초인회의 개최까지 시일이 많이 남은 시점에서 탑 랭커 과반수의 동의를 얻어 시행되는 경우.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기존의 랭커가 죽어 그 아래 랭커들의 순위가 끌어올려지는 경우다.
신은혁의 국제초인랭킹이 4위가 된 것은, 기존의 세계랭킹 4위였던 사창 에밀 마르코프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다들 모였나?”
“불과 몇 년 만에 뉴 페이스가 많아졌구만.”
“몇 년이 뭐야, 고작 두 달 만에 모든 게 바뀌었다고.”
비록 이전 파리 테러 사태에서 탑 랭커 두 명이 배신하고 심지어 그중 한 명은 죽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나기는 했으나, 본래 지구의 초인 무력을 대표하는 7인의 탑 랭커의 구성원은 그리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었다.
탑 랭커가 흔들리면 세계가 흔들리고, 탑 랭커가 죽으면 세계증시가 요동친다.
그들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세계의 안정 유지에 도움이 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파리 테러 사태에서 기존 멤버 둘이 빠져나간 걸로도 모자라 이번에 또다시 탑 랭커가 죽는 일이 생겼다.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고, 탑 랭커들은 대책논의 겸 새로운 탑 랭커 선정에 대한 논의를 겸해 과반수의 동의를 구하여 한 자리에서 모임을 갖기로 했다.
“이번 모임에 다들 참석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랭킹 1위인 만큼 의장을 맡은 신은아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가면을 쓰고 참석한 강신혁은 주위 눈치를 보며 적당히 박수를 쳤다.
모임이 열린 장소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루브론 호텔의 소회의실.
한국에서 모임이 열린 이유는 지극히 간단한데, 랭킹 1위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이전 랭킹 1위 역시 한국인이었던 만큼 모임을 한국에서 갖는 데 불만을 가지는 이는 없었다.
“여기도 오랜만이네. 저번에 모였을 땐 오주영이 뻔뻔한 낯짝으로 거기 앉아있었는데.”
“그 싸이코 새끼, 정말 끝까지 이해 못할 짓만 하다 갔어.”
“그런 배신을 저지른 새끼가 동양인이었단 말이지. 뇌제야 뭐 납득한다 쳐도 왜 빈자리에 새로 또 동양인을 넣어야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없는 것으로 보였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았나보다.
그보다도 지금 강신혁 본인에게 딜이 들어오고 있지 않은가?
강신혁은 조용히 고개를 돌려 방금 그 말을 한 자를 주목했다.
‘역시 이놈인가, 한 번 맞춘 부위를 또 맞추면 반드시 치명타가 터진다는…… 십자낙인. 이미 40대 중반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겉보기엔 30대 초반정도로밖엔 안보이네.’
기존 탑 랭커 7위, 십자낙인 울리히 힌첸.
봄버 걸이 빠지면서 6위로 올라올 수 있었으나 강신혁이 5위를 차지하면서 결국 순위 고정이 되었다가, 이번에 4위 랭커가 죽어 순위가 6위로 오르게 된 남자였다.
“뭘 봐?”
혼잣말로 욕을 할 땐 독일어였지만 지금 강신혁에게는 영어로 대꾸하고 있었다.
그러나 히어로 유니버스에 가입하면서 모든 언어를 취급할 수 있게 된 강신혁은 완벽한 악센트의 독일어로 그에게 대꾸했다.
“시비를 걸고 싶으면 주둥이만 놀리고 있지 말고 덤벼. 아니면 닥치고.”
“하."
강신혁이 그렇게 강하게 나올 줄은 몰랐던 걸까, 그는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제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일어날 수가 없었다.
강신혁이 소울 커넥터로 쏘아낸 다섯 줄기의 거미줄이, 그와 의자를 바닥에 꽁꽁 묶어 고정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 덤빌 거야? 그럼 닥치겠다는 뜻으로 생각해도 되겠지?”
“크윽...!”
몸이 꿈쩍도 하지 않자 그는 자신의 특성을 발동하려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그에 반응해 실시간으로 조여드는 영력의 실은 경악스럽게도 마력의 움직임마저 속박하며 그의 목을 졸라왔다.
강신혁의 차가운 눈빛이, 거기서 더 나대면 뒤는 없을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제길."
애초에 강신혁이 언제 실을 쏘아냈는지도 인지하지 못한 시점에서 자신의 패배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심지어 그 강도마저 쉽사리 해결할 수 없을 만큼 단단하다면, 강신혁이 마음만 먹으면 자신이 죽은 목숨이라는 얘기가 아닌가.
마음속으로부터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만 울리히 힌첸은 곧 몸의 힘을 늘어트렸다.
강신혁은 간단한 손짓으로 그를 구속하던 실을 풀며 흥, 코웃음을 쳤다.
“탑 랭커간의 반목은 좋지 않습니다. 또한 탑 랭커가 되는 기준은 국적이 아닌 무력이라는 것을 다들 유념해두시길.”
“물론.”
“그의 능력은 그날 충분히 봤으니까.”
상황을 지켜보던 신은아가 둘 모두를 공평하게 째려본 후 의장으로서 선언했다.
지금 상황을 지켜본 다른 랭커들은 모두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은밀한 출수에 완벽한 억제력까지, 기습을 당하면 설령 자신이라도 살아남는다는 보장이 없었으니.
이제 강신혁의 랭킹에 불만을 품는 이는 없으리라.
정확히 신은아와 강신혁이 의도한 바였다.
- 은아 님의 귓속말 : 잘했어.
- 내가 연극 동아리를 했어야 하는 건데.
- 은아 님의 귓속말 : 신영에 그런 동아리는 없지만 말이야.
당연하지만, 방금 일어난 일련의 촌극은 신은아와 강신혁이 짜고 벌인 짓이었다.
두 달 전, 탑 랭커 두 명이 사라지고 다른 탑 랭커 두 명이 인증되는 과정은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이루어졌다.
뇌제 신은아는 누구도 모를 이가 없을 만큼 신위를 크게 떨쳤으니 그녀가 오주영의 뒤를 이어 퍼스트 랭커의 좌를 차지하는 데 불만을 품는 이가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그나마 상대적으로 만만한 것이 신은혁.
물론 그도 게이트에 강제침입을 하거나 오주영의 목을 베는 등 크게 활약했지만, 그만한 힘을 계속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도 아닌 신은혁의 입으로 직접 밝힌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특히 내 밑의 순위로 깔리게 된 랭커들이 불만을 품을 가능성이 높았지.’
4위 랭커가 죽어 새로운 탑 랭커 영입 및 기존 랭커의 순위 재조정이 일어나는 이때 시비가 걸릴 가능성은 무척 높았고, 강신혁은 애초에 무력행사를 할 각오를 하고 이곳을 찾은 것이다.
“그러면 오늘은 새로운 탑 랭커 영입과 앞으로의 요르문간드 대책에 대한 논의를 해보도록 하죠.”
“대책이라 봤자.”
탑 랭커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현역에 꼽히는 랭킹 3위의 중국인 남성, 다크 커튼 장진명이 한숨을 불어내며 말했다.
“요르문간드가 게이트를 통해 그 출입자의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는 건 이제 거의 확실한 얘기인 것 같고……. 스스로 알아서 조심하는 수밖에 없잖아? 설마하니 탑 랭커씩이나 되는 우리가 한데 뭉쳐 다니자는 웃기지도 않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설마. 단지 그쪽이 여기 움직임을 읽어내고 움직인다면, 우리도 그에 대항할 수단을 하나 정도는 갖추고 있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을 뿐입니다.”
신은아가 침착하게 대꾸하고는 갑자기 자신의 폰을 들어 문자를 보냈다.
그러자 소회의실의 문이 열리고 붉은 머리의 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긴 머리는 언제나처럼 포니테일로 묶었고, 몸에 달라붙는 흰색 블라우스에 검은 넥타이를 걸치고 있는 것이 아주 매력적이었다.
“헬로 에브리원!”
“연금술사?”
신은아와 강신혁을 제외하고 그 자리에 있던 전원이 몸을 움찔했다.
적어도 기분 나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각국의 내로라하는 초인들 사이에서도 아이돌적인 존재야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매력적인 초인을 꼽을 때면 언제나 첫손에 꼽히는 것이 그녀였으니까.
외모로는 신은아도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이 차이는 무엇일까.
어쩌면 신은아는 너무나 강한 존재이다보니 이성으로 생각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네가 무슨 일이지?”
랭킹 2위, 스톤 그라운드 닉 할랜드가 기꺼운 기색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는 미국인이다.
아시아인이 셋씩이나 랭킹을 차지하고 있는 이 공간에서 같은 미국인의 등장에 반겨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잠깐, 설마 그녀가 새로운 탑 랭커라는 건 아니겠지? 연금술사의 특수한 능력은 인정하지만 탑 랭커는 무력으로 선정된다고 말한 건 당신이야.”
이번에 랭킹 5위가 된 남자가 툴툴거리며 하는 말에, 신은아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새로운 탑 랭커의 후보군은 최소한 랭킹 한 자리수 내에서 결정될 겁니다. 그녀는 요르문간드 대책을 위해 불렀습니다.”
“요르문간드 대책? 인형사처럼 우리 모두 연금술사의 포션으로 도핑이라도 하자는 건가?”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을. 내 포션으로 그만큼 강해질 수 있는 건 우리 인형사 뿐이야.”
회의실 안으로 들어온 클레어가 쿡쿡 웃음소리를 내며 말하며 강신혁의 자리로 다가왔다.
그가 자연스럽게 자신 옆의 빈 의자를 빼주자 그녀가 그곳에 앉았다.
그것을 보는 이중 몇 명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앞서 말했듯 클레어는 초인들 사이에서도 아이돌로 꼽히는 존재니까.
……덤으로 신은아의 눈에서도 불꽃이 튀고 있었지만 무시했다.
“왜 인형사에 한정된다는 거지? 이전부터 쭉 그 포션에 대한 요청을 하고 있었는데.”
한편 닉 할랜드는 클레어의 포션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 듯 클레어에게 따졌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우리 궁합이 맞으니까지. 그 부분은 이미 충분히 공식적으로 얘기했잖아. 미국 정부의 요청에도 내놓을 수 없는 데엔 확실한 이유가 있는 거야.”
“끄응…… 왜 하필이면 한국의.”
닉 할랜드가 침음을 흘렸다.
클레어는 포기하라는 듯 손을 휘휘 저어보이며 화제를 전환했다.
“그보다 통신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내가 이 자리에 참석한 건 그것 때문이니까.”
“통신기?”
"그래."
클레어가 신은아와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곤 품에서 소형의 무선 이어폰처럼 보이는 것을 꺼내들었다.
“……요즘 세상에 에어팟?”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바보야. 게이트 내에서 외부의 인간과 통신할 수 있게 만든 통신기야.”
클레어의 말을 사람들은 바로 이해하지 못해 잠시 침묵했다.
직후 장진명이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그런 게 가능하단 말인가!”
“극비리에 개발 중인 나라는 몇몇 있지만 여태까지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는데!”
“그런데 짜잔! 제가 성공했습니다!”
“미국 정부도 모르게!?”
“미국 정부 지원을 안 받았으니까.”
툴툴거리며 대꾸하는 클레어의 모습에 닉 할랜드는 어처구니가 없어 고개를 내저었다.
“한국으로 귀화라도 할 생각이냐?”
"날 배신자로 만들지 말아줄래? 정부랑 얽히면 이래저래 곤란해진단 말이야. 대량 양산이 불가능하다는 점도 포함해서. 아, 그리고 귀화는 지금 내 연애사정이 어떻게 풀리느냐에 따라 달라질 예정이야.”
“이이익……!”
잘 나가다가 옆으로 새는 말에 신은아가 노골적으로 꿈틀거리며 클레어를 째렸다.
노골적으로 서로를 째려보는 두 여자.
요즘 들어 둘 사이에 이러는 일이 많아졌기에 강신혁은 자신은 이 일에 전혀 관련이 없다는 듯 태연히 통신기를 집어들며 말했다.
"방금 그녀의 말대로, 통신기는 현재 양산이 불가능합니다. 더구나 제작에 천문학적인 비용이 소모되는데다 아직 완전하지도 않은 만큼 시범운용이 필요하죠.”
“그걸 당신이 어째서…… 아, 혹시?”
“맞아요. 제가 그녀의 협력자입니다. 우리 둘의 공동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죠.”
게이트 내부의 인간과 외부의 인간이 소통하는 방법.
여태까지 그것은 히어로 유니버스를 통하는 방법이 유일했다.
클레어는 이전부터 히어로 유니버스 시스템처럼 게이트의 통신 장애를 넘어 통신을 가능하게 해주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고, 영력을 각성하고, 자신보다 더욱 영력을 잘 다루는 강신혁을 만나 처음으로 그것의 실현 가능성을 얻었다.
강신혁은 혹여나 이것이 히어로 유니버스에서 금지한 일이 아닐까 걱정했지만 관리자는 이것에 전혀 터치를 해오지 않았다.
오히려 헤일로나 미랑 등 오래된 회원들은 수준이 높은 세계에서는 제한적으로나마 게이트를 초월해 소통하는 방법이 존재한다는 얘기를 해주어 강신혁을 안심시켰다.
그래서 근 한 달 간 본격적으로 연구를 했고, 성과가 나올 즈음에 에밀 마르코프의 사망 사건이 터진 것이다.
“시범운용, 즉 우리끼리 말인가.”
“아직 안정되지 않아서 사용자의 마력을 상당히 빨아먹습니다. 탑 랭커라면 문제없이 다룰 수 있겠죠.”
“덤으로 설령 요르문간드의 함정에 빠진다 해도 다른 탑 랭커에게 구조요청을 보낼 수 있단 얘긴가.”
“하지만 구조요청을 받는다고 게이트로 바로 달려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부분에서 클레어가 훗, 하고 검지를 세우며 선언했다.
“그래서 텔레포트 기능을 첨부한 거야.”
“이건 제가 협력했습니다.”
신은아가 담담히 말하며 클레어가 꺼내든 통신기를 이 자리에 있는 전원에게 돌렸다.
닉 할랜드를 비롯한 다른 랭커들은 그것을 받아들며 헛웃음을 흘리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이런 게 만들어지고 있었다니……."
“영광으로 생각해, 당신들이 탑 랭커인 덕분에 이 통신기를 인류 처음으로 받게 된 거니까.”
“앞으로 요르문간드에 탑 랭커가 허무하게 희생되는 일은 없어야만 합니다. 이 통신기를 중심으로 우리는 앞으로 상호 긴밀히 협조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신은아는 자신 몫의 통신기를 세게 쥐며 엄숙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그녀의 깊은 마력이 담긴 목소리에 일동은 전율하여 몸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당분간 이 통신기에 대해선 함구해주셨으면 합니다. 어차피 시험품도 더 없을뿐더러, 분석한다고 멋대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괜히 분해했다가 망가트리면, 그쪽 나라로는 앞으로 통신기가 지급되는 일이 없을 겁니다.”
“이봐, 연금술사……."
“미안.”
클레어가 자신을 애타게 바라보는 닉 할랜드에게 혀를 빼꼼이 내밀어보이며 말했다.
“지금은 미국보다는 세계를 생각할 때야.”
“후우……."
“그러면 얘기가 정리되었다고 믿고 오늘의 본론에 돌입하도록 하죠.”
신은아가 낭랑하게 선언했다.
“바로 새로운 탑 랭커를 선정하는 일입니다. 현 7위부터 10위까지의 인재 중에서 실질적으로 가장 무력이 강한......."
그날의 모임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지구에 있는 세 명의 히어로 유니버스 회원이 본격적으로 지구를 바꾸기 시작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