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 Chapter 34. 모루의 은총 - 5 >
- 타인의 근원을 하나의 무기의 형태로 빚어내는 특별한 경험을 완수했습니다. 영력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음과 동시에 야금술의 극의에 이르지 않으면 감히 시도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 오직 하나의 존재만을 위한 맞춤무기의 제작에 성공했습니다. 그 성능이 실로 경악스럽지만, 다른 사용자를 허락하지 않으며 제작자조차도 그 구조를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만큼 무기로서는 결함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야금술 스킬의 숙련도가 크게 성장합니다. 타인의 근원을 품고 가공하는 경험 속에서 영력이 성장했습니다.
[은랑염조]
[즉정불가]
[특수능력 - 태양의 씨앗, 혈염인(血炎刀), 이하 확인 불가]
*태양의 씨앗 - 불의 정화가 담겨있다. 사용자의 불꽃을 흡수하여 스스로를 강화한다. 자세한 효과는 알 수 없다.
*혈염인 - 불과 피로 단련한 칼날. 사용자가 상처 입을수록 단단해지며, 보다 강한 불꽃과 접할수록 예리해진다.
모루 위에 놓인 것은 날이 한없이 붉은 양손검이었다.
검날은 온전히 미랑의 발톱을 가공하여 만든 것인데, 날의 길이만 따져 무려 2미터에 달하는 장검이었다.
손잡이는 폼멜과 크로스가드를 포함하여 70센티미터 정도로, 이번에 그가 잡은 뱀의 척추를 가공하여 만들었기에 새하얬다.
날을 두드리는 과정에서 내내 불로 단련했기 때문인가, 붉은 날은 지금도 타오르는 것처럼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만약 화염저항을 갖추지 않은 이가 이것에 닿는다면 고통을 참기 어려우리라.
- 우우우우웅
'.......'
계속해서 검에 영력을 주입하고 있던 강신혁은 그것이 완성되는 순간 내지르는 탄생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모루라는 이름에 걸맞은 역작을 탄생시켰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동시에 이것은 결코 온전한 자신의 힘만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물건이었음을 인지했다.
“완성이…… 된 건가?”
마무리 작업을 하는 내내 강신혁의 곁에서 직접 불꽃을 만들어내고 있던 미랑은 강신혁의 손이 멈춘 것을 보고 긴장된 안색으로 물어왔다.
강신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주곤 검을 들어 미랑에게 내주었다.
미랑은 날과 손잡이의 길이를 합치면 무려 2m70cm에 달하는 그 거검을 어렵지 않게 한손으로 받아들더니, 다른 손으로 검날을 쓸어내리며 탄성을 내질렀다.
“대단해…… 모루, 이렇게 근사한 검을 빚어내다니. 그대는 실력이 떨어졌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었지만 전혀 그렇지 않잖은가.”
“미랑 덕분이에요. 더구나 주인을 가리는 무기인 만큼 무기의 본질과는 조금 거리가 있죠.”
“하지만 무척이나 그대다운 검이야.”
미랑은 검을 몇 번인가 허공에 휘둘러보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만족스레 웃었다.
“이 검과 함께라면 괜찮을 것 같아. 하지만 조금 길을 들여야겠으니…… 당분간은 이곳에 머무르며 모루에게 신세를 져야겠네.”
“신세를 지는 건 저죠. 고마워요, 미랑.”
미랑의 능력이라면 자신의 근원을 담은 검을 다루는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으리라.
그는 강신혁이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혹시나 요르문간드가 그를 노리지 않도록 지켜주겠다는 말을 직접 하기가 부끄러워 이렇게 돌려 말한 것이었다.
“그럼 무슨 일이 있으면 부르시게, 모루.”
“알겠어요. 너무 멀리 나가지는 마시고요.”
“후흐, 알겠네.”
강신혁은 그가 같이 있어주겠다는 것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요르문간드로부터 안전해지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지만, 매일같이 자신에게 달라붙는 츠쿠요에 대한 견제가 되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이유였다.
만약 미랑이 없었더라면 강신혁은 상당히 위험했을 것이다.
아직도 그는 츠쿠요에게 익숙해지지 못했다.
츠쿠요가 그를 보고 있을 때 문득 눈이 맞으면, 마치 그녀 앞에서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신은아가 강신혁 앞에서 자신을 오롯이 드러내고 기대어온다면, 츠쿠요는 강신혁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무조건적으로 긍정하는 여자였다
둘 다 부담스럽기는 매한가지였지만 굳이 말한다면 츠쿠요 쪽이 강신혁을 좀 더 글러먹게 만들 가능성이 높았다.
“드디어 제 차례인가요, 모루?”
“왔군요.”
미랑이 공방을 나서자마자 츠쿠요가 방 안에 모습을 나타냈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한다면 아마도 그녀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그래도 아마 그의 상황은 24시간 내내 파악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니 그녀에게 무어라 말을 하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리라.
“모루, 왜 그러시나요?”
“아뇨. 그냥.”
츠쿠요처럼 대단한 인물이 어째서 그에게 꽂힌 것인가 궁금해졌지만, 그 이유를 물어보면 또 귀찮은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뻐서 봤어요, 예뻐서.”
“어머나!”
그래서 츠쿠요라면 알면서도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는 말로 둘러댔다.
역시나 효과는 굉장했다.
“어쩜, 모루가 직접 저를 칭찬해주시다니……!”
츠쿠요는 그녀를 알고 있는 다른 모든 이가 보았더라면 제 눈을 의심하다 못해 뽑아버릴 만큼 호들갑을 떨며 몸을 배배 꼬았다.
평소 창백한 그녀의 뺨이 붉게 달아오르고, 눈가에는 눈물까지 살짝 맺혀 있는 것이 그녀가 정말로 감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강신혁은 살짝 썩은 눈으로 그런 그녀를 보며 속으로만 한숨을 내쉬곤, 부모가 정해준 사람과 억지로 결혼을 하게 된 신랑이 신부에게 내밀듯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그럼 이제 당신의 물건을 만들어볼까요.”
“부탁드릴게요, 모루……."
반면 츠쿠요는 일생 짝사랑하던 남자와 속도위반 결혼을 하는 여자처럼 손을 부들부들 떨며 가까스로 뻗어 그의 손을 맞잡았다.
츠쿠요가 그렇게나 원하던 철선의 제작에는 무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소모되었다.
@@@
츠쿠요의 의뢰를 수행한다는 것은, 그녀의 근원을 헤집는다는 것은.
바로 강신혁의 근원을 갈아엎는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말이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미랑의 무기를 만들던 때 이상으로 그를 이루는 모든 스테이터스가 그녀에게 영향을 받아 성장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자의 근원과 오래도록 접하며 영력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도가 높아집니다.
- 체내를 휘도는 기운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다른 존재로부터 학습합니다. 황룡투기의 이해도가 높아집니다.
- 황룡투(SS+) 스킬의 숙련도가 S랭크로 성장합니다! 신체가 모든 무예를 펼치기에 적합한 형태로 서서히 변화합니다. 모든 신체 스테이터스에 긍정적인 보정이 주어집니다. 민첩이 SS-랭크로 성장합니다!
- 레지스트 파이어(SS+) 스킬의 숙련도가 SS랭크로 성장합니다! 불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도가 높아집니다.
이러다가 영력이 SS랭크가 되는 것이 아닐까 싶은 그 시점에, 츠쿠요의 의뢰가 완수되었다.
미랑의 의뢰로 만든 검이 그나마 특수능력 두 개라도 알아볼 수 있는 물건이었다면, 완성된 철선은 제작자인 강신혁조차 조금도 분석 할 수가 없는 미지의 물건이었다.
그러나 츠쿠요가 그것을 받아들며 진심으로 놀라워하며 기뻐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물건 자체는 성공적으로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아아, 당신과 다시 헤어져야만 하다니.”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는 법이잖아요.”
츠쿠요는 철선을 받은 후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 들었지만, 아무래도 그녀쯤 되는 존재는 오래 자신의 세상을 비울 수는 없는 것인지 꼬박 3주를 채우고 정말로 미련을 뚝뚝 흘리며 떠나갔다.
“이 세상의 균형이 그저 저주스러울 따름이에요. 아아, 나의 모루. 하지만 당신이 하는 말이기에 들을 수밖에 없네요.”
“히어로 유니버스에는 대체 왜 이렇게 균형의 수호자가 많은 거야?”
“다시 만나게 되는 그 날엔 꼭 모루를 더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기를 바라요.”
"......."
츠쿠요는 마지막까지도 강신혁을 불안하게 만들고 떠나갔다.
그녀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관리자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히어로 유니버스의 지원 시스템을 점검하겠다는 말을 했지만, 강신혁이 보기에는 앞으로도 츠쿠요와는 자주 마주치게 될 것만 같았다.
- 불여우를 추적해 격살하는 퀘스트를 기필코 만들어내고 말겠습니다.
“어…… 힘내요, 관리자님.”
츠쿠요의 철선을 만들어준 후로도 강신혁은 노가다의 연속이었다.
성벽은 진즉 완성되었다지만 그 성벽을 계속해서 지키려면 결국 병사들 본인부터가 강해져야 하는 법.
강신혁은 투창기와 투창을 기본으로, 병사들이 쓸 검과 방패, 갑옷, 마지막으로 공성 병기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한 무구들을 찍어냈다.
찍어냈다는 것은 바로 강신혁이 단조를 포기하고 틀에 금속을 부어 굳히는 형태의 작업, 주조에 도전했음을 뜻한다.
아무리 왕국의 규모가 작다고 해도 강신혁이 일일이 쇠를 두드려 물건을 만들어주기엔 병사의 숫자가 너무 많았던 탓이다.
“음, 이거 생각보다 할 만한데요?”
- 야금술을 익힌 대장장이의 주조는 단지 쇳물을 틀에 부어 굳히는 데에서는 끝나지 않으니까요. 100,000HP 보너스!
“관리자님, 방금 왜 보너스를 줬는지 제가 따질 거라고 생각하셨다면 큰 오산이에요.”
- 150,000HP 보너스!
- 200,000HP 보너스!
“삼연속이라고……!?”
주조 방식으로 아이템을 만들면 직접 두드려 만드는 단조보다는 아무래도 완성도에 있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가이아 시스템에 등록된 엄연한 스킬인 야금술은 단조뿐만 아니라 주조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쳐, 똑같이 주조를 해도 평범한 대장장이보다 월등히 훌륭한 아이템이 탄생하도록 보조해주었다.
더욱이 강신혁의 야금술은 영력에 기반을 두고 있는 기술.
액체 금속을 부어 식히고 굳히며 다듬는 모든 과정에 영력이 곁들여지니 그 품질이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정적인 것은 그의 특성이다.
수호황룡은 일시적으로든 영구적으로든 그와 접하는 모든 것을 강화하는 만큼, 단조가 되었든 주조가 되었든 그의 손에서 탄생하는 물건은 저마다의 개성을 갖게 되었다.
- 야금술 스킬의 숙련도가 S+랭크로 성장합니다! 야금술과 관련된 모든 행동에 30%의 속도 보너스가 추가로 주어집니다.
어마어마한 양의 작업을 하다 보니 기어이 야금술도 한 번 더 성장했다.
S+랭크가 되며 특전을 받고부터는 양산 작업에도 불이 붙어, 강신혁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모든 작업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 후로는 다시 단조 작업으로 돌아와 히어로 유니버스에 팔 물건과 기타 개인적으로 만들고 싶은 물건들을 만들면서, 비로소 자신이 지니고 있는 다른 스킬들, 특히 라이트 마스터리에 대해 고찰할 개인적인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덤으로 꼭 해두고 싶은 다른 일이 있었기에, 따로 시간을 빼서 그것을 연구했다.
“좋아, 겉보기에는 그래도 이게 제일……."
“모루, 시간이 괜찮다면 일용품에 대한 의뢰도…… 그건 술인가? 뭘 그렇게 잔뜩.”
“마침 잘 왔어, 지크. 이거 다 마시고 감상을 들려줘.”
"!?"
“술이라고 했나, 모루?”
"!?"
그렇게 한 달 반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미랑은 자신이 약속한대로 한 달 반이라는 시간을 채우고, 강신혁보다 30분쯤 먼저 키엘론을 떠나게 되었다.
“모루,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겠네. 자네가 준 선물은 잊지 않겠어.”
“저야말로 큰 선물을 받았는걸요.”
“선물은 무슨, 그런 걸 고맙게 받아주니 민망할 뿐이야.”
강신혁은 미랑이 이 세계에 지원을 와주었으니 그 보답으로 검을 만들어준 셈인데, 미랑은 그것과는 별개로 강신혁에게 셈을 치르려고 했다.
강신혁은 한사코 거부했고, 미랑은 결국 HP로 셈을 치르는 것을 포기하고 그에게 물건을 하나 넘기고 도망쳤다.
바로 그의 송곳니였다.
“이건 당분간 제가 다루는 건 무리겠죠……."
- 발톱보다도 강한 기운이 깃들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아무리 회원님께서 미랑 회원의 근원을 분석했다고 해도, 이것을 다루기 위해선 보다 순수하게 불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필요가 있습니다.
“츠쿠요 덕분에 불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무리겠죠.”
- 그렇습니다. 저항하는 정도가 아니라 불을 직접 다루는 정도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역시 파이어 마스터리를.”
- 하지만 그건 당분간 보류하죠.
“그러니까 왜!”
강신혁은 한숨을 폭 내쉬며 송곳니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공방을 정리하고, 이 세계에서의 마지막 30분을 보낼 곳으로 발을 옮겼다.
그곳은 왕성의 꼭대기에 마련된 첨탑.
이미 선객이 와 있었는데, 바로 밀리아였다.
“이 땅에…… 다른 몬스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강신혁의 기척을 눈치챈 것일까, 드레스를 입은 밀리아가 성벽 너머의 땅을 먼눈으로 바라보며 혼잣말하듯 말했다.
강신혁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미안하게 됐네.”
“모루, 네 탓은 아냐.”
밀리아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이 세상에 다시 물을 찾아왔기 때문이야.”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밀리아가 물을 다루는 권능을 각성한 그 날, 그녀는 물의 보주를 이용해 온 세상을 물로 채웠다.
그녀의 권능에서 비롯된 물은 생명력을 품고 세상 곳곳에 스며들고, 일부는 강이 되었으며, 일부는 바다가 되었다.
미약한 생명력으로 간신히 숨만 쉬고 있을 뿐이던 대지는 생명력 넘치는 물을 받아들여 새로이 삶을 얻었다.
이 세상에는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아니 비단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힘겹게 삶을 이어가던 모든 생물은 이제 더 이상 물을 마시지 못해 굶어죽을 일이 없게 되었다.
“땅이 줄어들고 물이 늘어나며 자연히 땅지옥의 영역은 줄어들었고…… 그 빈자리를 다른 몬스터들이 채우게 된 거지. 하지만 그것 뿐만이 아냐. 몬스터뿐만 아니라 땅짐승들도 마찬가지로 다시 번성할 수 있게 것이고, 내가 아직 거두지 못한 인류의 생존자도 기회를 얻었지. 그러니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해야 할 일을 했어.”
“그건 그렇지.”
“나는 네게 따지려던 게 아니라, 단지 고맙다는 말이 하고 싶었을 뿐이다.”
잠시 꾸물거리던 밀리아가 말을 이었다.
“세상을 새로 시작할 수 있었던 건, 우리 인간들이 이 땅에 다시 설 수 있게 된 건 오롯이 네 덕분이니까.”
“과한데.”
“과하지 않아.”
그녀는 잘라 말하곤 강신혁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에 맺힌 눈물방울을 보고 그는 조금 움찔했지만 그것에 대해 괜히 언급하지는 않았다.
“난 네게 정말로 감사하고 있어, 모루. 이렇게 말해도 너는 모르겠지만.”
"......."
“그래, 넌 모르겠지. 내가 매일 밤 어떤 기분으로……."
뭐라 말을 이으려던 그녀는 이내 입술을 질끈 깨물고 화제를 전환했다.
“세상이 또 변화를 맞이했으니, 네가 있는 세상과의 시간비율도 곧 재조정될 거야. 관리자에게 확실히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렇겠네.”
“네가 반년을 보낼 동안 이곳에서 7년이 흐르는 일은 이제 더는 없을 거란 얘기지.”
“그거 좋은 일인 거냐?”
“이익!"
눈치 없이 대꾸하는 강신혁에게 밀리아가 뭔가를 팍 내던졌다. 안면에 클린 히트하기 직전 그것을 잡아낸 강신혁은 그 정체를 깨닫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의 보주……?”
“이 세상은 이제 물이 부족해질 일이 없어. 우리에겐 필요 없는 것이니 네가 가져가라.”
"농담을. 넌 물을 다루는 특성을 갖고 있잖아.”
강신혁의 말에 밀리아는 인상을 더욱 찌푸리며 외쳤다.
“가져가라면 가져가라. 물의 보주를 내가 가지고 있어봤자 요르문간드의 표적이 될 뿐이다. 그러니 네가 가지고 가버려."
“아무리 그래도 국보를……."
“가지고 가라니까!”
“넵."
거절은 충분히 했다.
강신혁은 얌전히 물의 보주를 품에 챙겼다.
밀리아는 그것을 보며 슬며시 미소 짓고는 말을 이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내 힘도 담아 더욱 강화했으니 이번 차원 퀘스트의 보상으로는 부족함이 없을 거야.”
“자랑이네.”
“이제 가. 받을 건 다 받고 줄 것도 다 줬으니, 더 붙잡아두고 있을 이유가 없어. 여유도 없고.”
“이번엔 키스 안 하냐? 입맞춤.”
“흐음…… 스스로 그런 말을 해? 이번엔 아마 입맞춤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만.”
밀리아는 자신의 풍성한 금발을 옆으로 쓸어 넘기며 눈을 가늘게 뜨고 강신혁을 째렸다.
“그래도 하겠어?”
“아니, 미안. 돌아갈게.”
"그래.”
강신혁이 망설임 없이 대꾸하자 밀리아는 그제야 표정을 풀고 웃었다.
“네가 돌아가거든 ‘귓속말’을 할 테니, 답해주어야 한다.”
“그래. 안 바쁠 때면.”
“그거면 됐어.”
밀리아가 만족한 표정으로 웃는 모습이 나이에도 안 맞게 제법 귀여웠다.
예쁘긴 정말로 예쁘구나, 강신혁은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며 웃었다.
그런 그녀가 다른 세상의 주민인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무척이나 아까운 일이다.
그러니 강신혁이 그녀를 거절한 것은 결코 잘못된 선택이 아닐 터다.
“아, 그렇지. 돌아가기 전에…… 자, 나도 선물.”
"음?"
강신혁은 그녀를 위해 만든 물건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은은한 푸른빛의 금속, 즉 브레나이트로 만들어진 삼지창이었다.
무척이나 가볍고 끝이 날카롭다. 그러면서도 터무니없이 단단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히어로 유니버스에서 구할 수 있는 온갖 수중 몬스터의 소재를 더해 만든 삼지창에는 물의 속성 공격력을 증폭시켜 주는 효과가 첨부되어 있었다.
미랑과 츠쿠요의 물건을 만든 후에 만든 물건이라 상대적으로 못해 보이기는 했지만, 무려 SS등급에 해당하는 아티팩트였다.
“이건……."
“원래 물의 보주와 함께 다루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네 특성이라면 이것만 다뤄도 충분히 강할 거야."
“그 정도가 아니다. 이건, 이건 정말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생각했던 것보다도?”
“아."
밀리아가 명백히 말실수를 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물건을 만드는 것을 본 이는 미랑과, 요즘 그의 실험대가 된 지크뿐이었는데.
설마 하니 미랑이 밀리아와 독대를 했을 리는 없고…….
“지크는 네 호위를 그만뒀다고 안 했냐?”
“어……."
밀리아가 머뭇거리며 그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러나 그가 빤히 바라보자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실토했다.
“호위는 그만뒀지만 왕실의 고문으로……."
“자세히 말해봐.”
“모루와 나를 이어주겠다며 조금씩 조언을.”
"......."
뭐? 이번 일로 느낀 게 있어서 기사를 관둬? 주저앉지 않았으면 좋겠어?
지금 보니 지크는 자연스럽게 강신혁과 밀리아를 이어주기 위해 연극을 하고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어쩐지 일을 그만둬서 심심하다며 자꾸 공방에 찾아오더라니, 염탐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니!
“밀리아 너……."
“뭐,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냐! 어차피 이제 이별인데 다시 날 차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정말 잔인한 남자구나!"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는 밀리아.
강신혁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이내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지크가 자포자기한 게 아니라니 됐어. 안심했다.”
“……왜 나보다 지크를 더 걱정하는 것 같지?”
“넌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잖아. 히어로 유니버스의 회원이 아무나 되는 줄 아냐?”
"윽......."
“그러니까, 난 이제 갈게.”
이번에야말로 미련 없이, 강신혁은 돌아섰다.
“이건 정말 납득이 가지 않아.”
“안녕.”
밀리아는 입술을 삐죽이며 뭐라 투덜거리는 듯 했지만 그를 붙잡지는 않았다.
강신혁은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주곤 차원 퀘스트의 종료를 선언했다.
순간 시야가 어두워지더니 다음 순간엔 마이 룸으로 돌아와 있었다.
밖으로 나가면 지구의 익숙한 기숙사 방일 것이다.
“후, 끝났다.”
- 요르문간드와의 추가적인 충돌이 일어나지 않아 다행입니다.
“앞으로도 질리도록 겪게 되겠지만요.”
이번 차원 퀘스트로 인해 강신혁도 히어로 유니버스와 요르문간드의 관계에 대해 대충 감을 잡았다.
히어로 유니버스의 회원인 자신은, 아니 지구가 가이아 시스템에 속하게 된 순간부터 그를 포함한 지구인 모두가 요르문간드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발버둥치는 수밖에.”
- 회원님께선 모든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으실 수 있을 겁니다.
묘하게 확신어린 투로 말하는 관리자에게 강신혁은 말없이 미소로 대꾸할 뿐이었다.
그때, 그에게 귓속말이 날아들었다.
- 물여우 님의 귓속말 : 아직 우리나라의 청혼 방식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던 것 같아.
- 물여우 님의 귓속말 : 우리나라에서는 여성이 먼저 남성에게 선물하는 것으로 청혼을 한다. 가보인 경우가 많구나.
- 물여우 님의 귓속말 : 선물을 거절하면 청혼을 거절하는 것이고, 선물을 받으면 여자의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가겠다는 뜻이 된다.
- 물여우 님의 귓속말 : 하지만 여자의 선물을 받은 남자가 자신도 여자에게 선물을 주게 되면, 그것은 반대로 여자를 자신이 데리고 와 살겠다는 뜻이지.
- 물여우 님의 귓속말 : 후후, 이것 참 곤란하구나. 곤란한 남자야.
강신혁은 줄줄이 날아드는 귓속말을 보며 쓴웃음을 지을 따름이었다.
그야 지크가 간첩 노릇을 하고 있던 시점에서부터 대충 뭔가 숨겨진 뜻이 있겠지, 생각은 하고 있었으니.
하지만 츠쿠요에 비하면 하는 짓이 귀엽지 않은가.
강신혁은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곤 ‘다음에 두고 보자’며 짧게 답장했다.
- 역시 죽여야겠습니다.
그리고 관리자를 뜯어말리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써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