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 Chapter 34. 모루의 은총 - 1 >
전투는 그 후로도 십여 분 더 이어졌다.
늑대가 울음소리를 낼 때마다 하늘이 진동하고, 그가 하늘을 밟고 질주할 때마다 은색의 섬광이 번쩍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천둥과 번개로 오해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 끝이다!
그러던 중.
늑대가 입을 열어 아까 바실리스크가 토한 빛의 브레스보다 훨씬 방대한 기운을 품은 순수한 불꽃의 숨결을 토해냈다.
- 화아아아아아
태양을 통째로 녹여 앞으로 쏟아낸다면 저렇게 될까?
너무 밝아 보는 것만으로 눈이 멀어버릴 듯한 붉은 불꽃이 하늘을 뒤덮었다.
그것은 모든 뱀을 일순에 사르고, 나아가 그 너머에 도사리고 있던 거대한 기운마저도 깔끔하게 멸했다.
- 아, 아아
- 아쉽게도.
아마도 그것이 게이트를 구성하는 핵이었을 것이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대지 구석구석 스며들어 진동한 직후.
하늘을 절반 즈음 가리고 있던 검은 구멍이 깔끔하게 소멸하고.
핏빛의 저녁노을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
안전한 곳에서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던 강신혁도 전율하여 몸을 떨었다.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어찌 독립된 개체가 다른 귀물의 힘도 빌리지 않고 저런 무지막지한 기운을 쏟아낼 수 있는 것인지 믿기지가 않았다.
- 지원이 오기 전에 바실리스크를 단독 토벌하고 보상을 챙겨 다행이었군요.
“확실히. 미랑이 일찍 왔더라면 제가 검을 한 번 휘두를 기회도 없었겠어요.”
과정은 어려웠지만 그 전투에서 얻은 것은 많았으니 관리자의 메시지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바실리스크가 뿜어냈던 빛의 브레스는 그나마 라이트 마스터리로 해석하고 해소할 구석이라도 있었다.
그러나 저 불꽃은 숙련도 S랭크에 달하는 그의 레지스트 파이어로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모루, 지켜보고 있었는가?”
게이트가 완전히 소멸한 것을 넋을 놓고 지켜보던 와중, 돌연 그의 귓가에 젊은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거대한 늑대의 모습은 이미 그곳에 없다.
강신혁은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보며, 그곳에 담담한 표정으로 선 이를 보고 확인하듯 물었다.
“미랑이죠?”
“맞네. 날세.”
강신혁이 굳이 그에게 그런 말을 던진 이유는 그가 더 이상 늑대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강신혁과 같은 젊은 인간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그 이름에 어울리는 실로 아름답고도 탐스러운 은발을 허리까지 기르고 있었으며 눈은 에메랄드처럼 반짝였다
어디 한 군데 모난 구석이 없이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특히 선량해 보이는 눈매와 보기 좋게 기울어진 입가가 호감을 자아내는, 굉장한 미남.
머리색과 눈색이 같은 정도로 바로 본인임을 확신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강신혁은 영력으로 그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그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잘 봤어요. 정말 어마어마하게 강하던데.”
“이 세상의 제약 탓에 모든 힘을 드러낼 수는 없었네. 물론 요르문간드의 첨병을 물리치는 데에는 이 정도로도 충분했지만.”
그보다도, 하고 미랑은 강신혁의 손을 잡으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강신혁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려는 자신을 억눌렀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얼굴은 사람을 겁에 질리게 한다는 사실을 새로이 깨달았다.
물론 이성은 예외다. 클레어가 바로 그 예다.
“직접 만나게 되어 무한한 영광일세, 모루. 그대가 VIP가 되자마자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에 나를 비롯해 그대와 만나고 싶었던 많은 회원들이 무척 실망했었다네. 하지만 설마 위대한 업을 완수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만날 기회가 오다니. 가이아의 조화에 감사를 표해야겠지.”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요.”
"부끄럽지만 나는 손이 둔한 탓에, 그대가 새로이 거래 게시판에 내놓은 물건을 하나도 갖질 못했다네. 이번에 이렇게 지원에 응한것 또한 그대와 직접 만나 물건 제작을 의뢰하기 위해서였지.”
그 정돈 그냥 귓속말로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려고 했지만, 강신혁 자신이 직접 ‘당분간 개인 의뢰는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래서 미랑은 강신혁과 직접 만나 부탁하면 들어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이렇게나 빨리(울트라맨 한 편이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의 텀이 있었지만) 달려왔다는 얘기다.
“고마워요. 물론 지금도 전생을 따라가려면 멀었지만 어느 정도 괜찮은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긴 하네요.”
“오오, 정말인가!”
솔직히 방금 미랑이 불꽃을 토해내는 것을 보며 자신이 무슨 아티팩트를 만들어도 이 남자의 눈에 들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 그들을 도우러 온 이를 매정하게 뿌리치는 것보단 죽이 됐든 밥이 됐든 만들어보는 게 나을 터였다.
그동안은 미랑이 이곳에 머무르며 이들을 지켜주지 않을까 하는 계산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잠시 기다려줄 수 있을까요? 저들과 얘기를 해야 해서요.”
“아아, 그래. 나는 기다리고 있지. 하지만 멸망을 앞두고 있던 세계에서 히어로 유니버스의 새로운 회원이라니, 정말 재밌는 일이군.”
미랑은 여전히 거대화한 상태로 물의 보주를 쥐고 있는 밀리아의 모습을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강신혁은 대체 그가 어떤 부분이 웃겨 웃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좀 더 넓은 우주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먹히는 개그인지도 모르겠다.
“밀리아.”
강신혁은 미랑을 놔두고 밀리아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는 지금도 정신없이 물의 보주를 컨트롤하고 있었다.
보다 정확히는 이 세상에 흩뿌려진 독혈을 모조리 한데 뭉쳐, 그 안에서 순수한 물의 성분을 증발시켜 독의 정수만을 남기는 작업을 수행 중이었다.
“잘 왔다, 모루.”
강신혁을 발견한 밀리아가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그녀의 덩치가 워낙 커진 탓에 평소 그녀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음에도 공기가 사정없이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것을 담을 용기가 필요해. 부탁할 수 있겠는가?”
- 독혈의 통제가 가능해졌으니 이제 히어로 유니버스 거래 게시판에서 판매하는 연금술용 플라스크에 나누어 담기만 하면 되겠군요. 이제 막 가입했을 뿐인 물여우에게는 엄두도 못 낼 액수입니다만.
“얼만데요?”
- 특수 용액 플라스크이니 750ml 플라스크 하나당 1만 HP입니다. VIP 특별 할인가 6,500HP에 모십니다!
확실히 이제 막 히어로 유니버스에 가입한 밀리아에겐 엄두도 못 낼 액수이긴 했다.
그것이 지금의 자신에게는 푼돈이 된 것이 실로 우습다.
강신혁은 즉석에서 플라스크를 스무 개 정도 구입했다.
물 부분을 날려버리고 정수만을 남긴 데다 독혈의 부피가 줄어든다고는 해도, 애초에 덩치가 거대한 뱀이었던 탓에 전투 과정에서 놈들이 흘린 피의 양이 결코 만만치 않았던 탓이다.
“나한테 줘. 고생했어.”
"으, 으으."
밀리아는 고생했다는 강신혁의 말에 볼을 조금 붉히며(하지만 거인이 되어 있었기에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무척 잘 보였다.) 허공에 구체 형태로 뭉친 독액을 강신혁에게로 밀어 보냈다.
그것은 매우 짙은 녹색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처음 독혈을 맞았을 때와 달리 지금은 강신혁에게도 상당히 위협적으로 보였다.
- 순수한 독의 기운만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제아무리 뛰어난 연금술사라도 이 정도로 순도를 높이는 것은 불가능하겠지요.
‘그런데 그걸 밀리아가 해냈다고요.’
- 물여우는 수마력과 함께 물을 다루는 굉장히 강력한 특성을 각성하였습니다. 각 회원의 개인정보는 기밀인 만큼 자세히 알려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솔직히 관리자 입장에서도 무척 짜증……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개인정보는 몰라도 감정은 아예 숨길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강신혁이 독액의 구체를 자신이 만들어낸 바람으로 감싼 후 수호황룡 특성과 영력으로 억압하여 크기를 축소시키는 동안에도 관리자의 메시지는 이어지고 있었다.
- 물의 보주는 물여우의 선조가 탄생시킨 귀물입니다. 왕족만이 물의 보주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것도, 왕성 안에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던 것도 모두 후손에게 힘을 물려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희망을 잃은 세계에서 핏줄은 점점 연해져갔고, 모든 것이 끝나 세계의 막이 내리기만을 남겨놓고 있던 상황에서…….
"......."
- 회원님이 백마 탄 왕자가 되어 나타나신 겁니다.
‘그런 얘길 듣고 싶지 않아서 입 다물고 있었던 건데 말이죠.’
강신혁은 축소에 성공한 후, 바람의 틀을 마치 스포이트처럼 변형하여 독액을 플라스크에 천천히 옮겨 담기 시작했다.
- 본디 물여우는 어디까지나 세계의 명맥을 이을 가능성을 갖고 있었을 뿐, 스스로 세상을 일구어나갈 자질은 갖추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회원님의 능력은 근원에 간섭하여 그것을 자라나게 만들고 강화하는 능력. 그것에 노출된 물여우는 끝내 핏줄의 힘을 끌어 내 개혁에 성공한 것입니다.
‘그 덕에 히어로 유니버스도 가입하고 말이죠. 출세했네요.’
- 선조를 뛰어넘은 수준입니다. 과연 회원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른 세상에서는 여태까지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는데, 어째 이곳 키엘론에서는 강신혁이 행한 일들이 정말로 세계의 존속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했었다.
그런데 이젠 세계를 책임질 구세주마저 그의 영향으로 탄생했다고 하니, 그 여파를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졌다.
‘영향을 줬다고는 해도 결국 밀리아의 가능성이 깨어난 것뿐이니까. 저는 차원 퀘스트를 하러 왔을 뿐이고.’
- 정리하자면 그렇습니다만.
관리자도 강신혁이 부담스러워하는 것을 느꼈는지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나 독액의 정리를 마친 그가 천천히 지상으로 하강하자, 도시의 주민들이 강신혁을 바라보며 절을 올리는 것이 아닌가.
“감사드립니다!”
“사도시여, 우리의 여왕에게 힘을 주셨으니 저희의 기도를 바치겠나이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신의 도움까지……."
“늑대신께 감사를!”
강신혁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사람들의 인사를 받았다.
아니라고 부정해서 통할 수준이 아니다.
실제로 그는 방금 거대하게 변해 이 도시에 떨어져 내리던 바실리스크의 브레스를 받아냈을 뿐 아니라, 그를 도와주러 미랑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여왕 밀리아가 거대화한 것도 강신혁과 대화를 나눈 뒤가 아니던가.
사실 여부는 논외로 두고, 강신혁 덕에 모든 일이 일어났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타당하게 보였다.
“모루, 그대는 차원 퀘스트를 별로 하지 않았나 보군.”
“미랑.”
당황하고 있는 강신혁의 모습을 알아차린 것일까, 저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미랑이 또다시 한순간에 강신혁의 코앞에 나타나며 말했다.
“하계의 인간이 우리를 신처럼 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네. 오히려 그들에게 더욱 좋은 일이니 빠르게 익숙해지는 것이 좋아.”
“그들에게, 더욱 좋은 일이다?”
“물론. 필멸자들이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것에 신이란 이름을 붙이거든. 그러지 않고 그것을 억지로 이해하려는 자는, 대부분 망가져. 그러니 저것은 저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만들어낸 보호막인 거야.”
미랑은 강신혁에게 그런 말을 하고는 고개를 조아리는 인간들에게 대충 손을 흔들어주었다.
전투를 벌일 때는 그렇게나 날뛰었으면서 지금은 그야말로 품격 있는 귀족처럼 행세하는 미랑의 모습에, 인간들은 더더욱 소리를 높여 찬양하고 감사를 표했다.
아마 그 가운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인 미랑에 대한 경외, 공포도 다수 섞여있을 터였다.
“그러면……."
강신혁은 고개를 들어 아직까지도 거대화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밀리아를 가리켰다.
강신혁이 독액을 맡아 처리해준 후, 그녀는 물의 보주를 가지고 다른 작업을 시행하고 있었다.
도시에 호수와 강을 만들고, 나아가 이 세상의 많은 부분에 물의 터전을 만들어내는 작업.
“그녀는 어떻게 되는 거죠?”
“인간에서 신위에 오른 자로 취급받겠지. 모루 그대는 설마 저런 모습을 보여준 이가 다시 인간의 위치로 내려올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가?"
- 오늘 이후로 이 세상에는 다시 맑은 비가 내리게 되겠지요. 물여우는 이 세상의 인간들에게 있어 물의 여신이라 칭해도 이상하지 않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강신혁의 마음을 읽어내기라도 한 듯 가볍게 놀리는 어조로 말하는 미랑.
그의 말에 보충설명을 해주는 관리자.
“그건…… 조금.”
강신혁은 무슨 말인가를 입 밖에 내려다가, 결국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사람들 틈바구니에 ‘신’이 홀로 남게 된다면 그건 너무 쓸쓸하지 않겠는가, 라니.
그건 이미 전날 그녀를 거부한 이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닌 것이다.
"그대여, 그러면 이제 내가 갖고 싶은 물건에 대해 얘기를 해도 될까?”
“그럴까요. 아무래도 작업은 더 이어질 것 같으니.”
강신혁은 세상에 물길을 내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여신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올려다보며 쓰게 웃고는, 미랑을 자신의 공방으로 안내했다.
밀리아가 모든 작업을 마치고 원래 모습…… 그러니까, 다시 이 세상의 법칙에 속박되어 작게 줄어든 것은 밤이 깊어서였다.
덤으로 오닉스는 모든 병사를 데리고 무사히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