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 Chapter 33. 이면과 닿다. - 1 >
두 개의 낫을 든 황혼의 수확자는 몬스터가 억수로 나타나는 현장에서도 맹활약할 수 있지만, 그의 진가는 뭐니 뭐니 해도 본업인 농사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아니 본업은 아니지만.’
- 농부보다 더 농부 같은 회원님의 모습에 50,000HP!
‘활동하기 편한 옷을 찾다 보니 이렇게 되었을 뿐이거든요?’
황혼의 수확자, 강신혁은 몸빼바지에 늘어진 티셔츠를 입은 채 머리에는 이전 허수아비를 만들 때 만들었던 밀짚모자를 눌러썼다.
거기에 사람 키보다도 커다란 낫을 두 개나 짊어지고 있으니 그 언밸런스함이 가히 정점에 이르러 있었다.
[폴링 사이드(Falling Scythe)]
[SS랭크]
[특수능력 - 수확, 추수, 대지의 소통]
*수확 - 대상을 수확할 때에 한해 치명타 확률이 극도로 높아진다. 반복 작업을 할 때마다 무기의 성능과 효과가 영구적으로 증폭된다.
*추수 - 무기를 잡고 있을 때에 한해 이동속도와 공격속도가 30% 증폭된다. 가을이 되면 그 효과가 두 배가 된다.
*대지의 소통 - 땅에 기운을 나눠주거나 나눠받는 것이 가능하다. 땅을 밟고 있을 때 힘이 강화된다.
땅에 기운을 쏟아 부어 작물이 잘 자라나게 하며, 다 자라난 작물을 수확할 때도 이만한 물건이 없는 희대의 아티팩트, 폴링 사이드.
[그로잉 사이드(Growing Scythe)]
[SS+랭크]
[특수능력 - 성장, 증폭, 포착, 분열]
*성장 - 대상을 강화한다. 모든 능력이 30% 상승한다.
*증폭 - 대상을 거대화한다. 모든 능력이 30% 상승한다.
*포착 - 목표물을 정하면 결코 놓치지 않게 된다.
*분열 - 여럿으로 나뉘어 작업 능률을 더한다.
크고 실한 작물을 자라나게 하며, 마찬가지로 그것들을 수확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는 실용성 높은 아티팩트, 그로잉 사이드.
“모루, 너는 정말 어디로 튈지 알 수가 없는 남자구나.”
강신혁은 일단 그 두 개의 낫에 영력과 황룡투기를 잔뜩 불어넣어, 지크에게 안내받은 광대한 밭을 일단 한 번 갈아엎었다.
사실 곡팽이나 삽, 혹은 전 세계의 농사꾼이 동경하는 한국 최고의 농기구 호미(HOMI)라도 있었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지금부터 새로 아티팩트를 만들어 폴링 사이드나 그로잉 사이드보다 더한 효과를 지닌 연장을 뽑아낼 자신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낫으로 밭을 가는 극한작업을 시행한 것이다.
“고작 하루 만에 일대를 완벽하게 보호하는 강철의 성벽을 만들어낸 것으로도 모자라 이젠 혼자서 10만을 먹여 살릴 수 있는 규모의 밭을 개간하는 건가, 어처구니가 없군.”
낫의 원래 용도는 아니지만, 어쨌든 이렇게 하는 것으로 땅에 낫의 기운을 스며들게 할 수 있었다.
우선 폴링 사이드로 대지에 영력에서 비롯된 생명력을 잔뜩 채워 넣는다.
성벽이 태양광을 받아 자가발전하며 영역 내의 모든 대지에 기운을 북돋아주고 있었으니, 미로토즈보다는 훨씬 쉽게 지력(地刀)을 북돋아줄 수 있을 터였다.
그 다음, 도시의 주민들이 긁어모은 농작물의 씨앗을 종류별로 구획을 나누어 심는다.
이번에도 역시 호미 대신 수백, 수천 개로 분열한 그로잉 사이드를 이용해 땅을 파내고 그 안에 원드 마스터리로 씨앗을 적절하게 뿌려 심었다.
이것으로 그로잉 사이드의 성장 관련 특수능력이 모두 적용되어, 앞으로 자라날 작물에 좋은 영향을 끼칠 터였다.
굉장히 섬세한 작업이면서도 영력이 많이 소모되는 작업인 탓에 강신혁은 무의식중에 한숨을 토해내고 말았다.
“후, 이거 제법 수련이 되네.”
작업을 대략 절반 정도 진행한 시점에서 영력이 다했다.
일단 연장을 놓은 강신혁은 히어로 유니버스에서 판매하는 영력 회복용 에너지바(3차 해방 이후로 구입 가능하게 된 물건으로, 초코맛이었다.)를 우물거리며 휴식을 취했다.
“마법사……? 모루는 7년 사이 마법사가 되어 온 것인가?”
“지크 경은 또 멍청한 소리를 하는구나. 반년밖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나.”
“끈질기구만 정말.”
아까부터 자꾸 뒤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남녀를 휙 돌아보자 그들, 지크와 밀리아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당신들 둘 다 바쁜 사람 아니야?”
“튼튼한 성벽을 세우고 10만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밭을 만드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밀리아가 왕의 위엄을 담아 당당하게 대꾸했다.
강신혁은 어처구니가 없어 고개를 내저었다.
“권력자는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어도 그게 지 업적이 되니 참 좋겠어.”
“맞다. 하지만 부하가 일을 잘못했을 경우 책임을 져야 하는 것 또한 권력자다.”
밀리아가 맞는 말을 하곤 돌돌 말린 옆머리를 휙 쓸어 넘겼다.
어째서 그 부분에서 잘난 척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빤히 보고 있자니 밀리아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이 나라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에 대해 내가 누구보다도 잘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이제 슬슬 저 성벽에 대해 설명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해야 할 설명은 모두 했다니까? 그냥 가만히 놔두면 돼. 작아질 일 없을 거야. 출입구나 성벽을 확장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얘기해줬잖아.”
“아무리 그래도 고작 하루 만에 이런 어마어마한 규모의 성벽을 완공했는데 그것이 앞으로 영원할 것이란 말을 듣고 순순히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럼 믿지 말든가.”
사실 강신혁도 영력의 구조를 이해하지 못했더라면 밀리아처럼 불안해했을 것이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그녀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되겠지.
하지만 밀리아는 여전히 납득을 못한 얼굴로 그를 추궁해왔다.
“이전 네가 성벽을 방패로 만든 것이나 검을 거대하게 만들었던 것까지 포함해 기본적인 원리라도 알아야 안심할 수 있겠어. 정말로 신의 힘이라도 된단 말인가?”
“흠…… 그건 그리 어렵지 않지.”
특별한 지식도 아니다.
강신혁은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법칙과 격을 지닌 물건들이 어떻게 원래의 형태를 되찾을 수 있는지에 대해 그녀에게 해설해주었다.
밀리아는 영력을 다루는 재능도 없는 데다 세상 바깥의 세상이라는 개념을 모르고 있던 만큼 역시나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그것을 기억하려 안간힘을 썼다.
“즉 다시 작아지면 모루를 부르면 된다는 얘기구나!”
“역시 이해를 못 하는구나.”
그 옆에 있는 지크는 이해를 완전히 포기한 얼굴로 말했다.
“아티팩트에 보호받고 있는 왕국이라, 어처구니가 없어. 이 나라에 생명력이 돌아오고 있는 것도 아티팩트 때문이라고?”
“가망이 없는 세계였으면 아무리 그래도 아티팩트 하나 정도로 이렇게 극적인 변화는 불러올 수 없겠지.”
그러고 보면 분명 관리자는 밀리아가 살아남은 덕에 이 세상의 가능성이 다시 생겨났다는 식의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녀의 능력, 혹은 물의 보주와 관련되어 있는 것일까.
그것까지는 알 수 없지만, 앞으로 이 세상의 생명력이 회복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분명했다.
“나라의 모든 우환이 모루, 네가 온 것만으로 해결이 되어버리는구나.”
“오버하기는. 땅지옥과 맞서 싸워야 하는 건 여전할 텐데.”
“저런 든든한 성벽이 있는데 우리도 땅지옥 따위에게 밀려날 수야 있겠는가. 목책만 가지고도 여태까지 버텨온 우리 병사들을 얕보지 마라, 모루.”
강신혁의 설명에 안심이 된 것인지 제법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곤 팔짱을 끼며 선언하는 밀리아의 모습이 나이에도 맞지 않게 제법 귀여웠다.
“그러고 보니.”
“음? 무엇이지.”
“남장은 왜 관뒀냐?”
워낙 자연스레 여자의 모습으로 맞아주어 잊고 있었지만 분명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밀리아는 그녀의 죽은 오빠인 밀란의 흉내를 내고 있었을 터.
강신혁이 거기에 관해 묻자 밀리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끝까지 감추는 것은 무리일 것이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만, 생각했던 것보다도 들키는 게 빨랐다. 생존자 중 일부가 어떻게든 후사를 봐야 한다며 내 침실에 여자를 밀어 넣으려는 통에……."
“오우. 그래서?”
“그래서!?”
그 뒤로 어떻게 됐느냐고 묻는 듯한 강신혁의 눈길에 밀리아가 분노하여 그를 걷어찼다.
물론 SS-랭크의 체력을 가진 남자를 걷어찬 대가로 그녀는 제 다리를 부여잡고 펄쩍펄쩍 뛰어다녀야 했다.
“자, 여기 포션 마셔.”
“큿,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정도가 있지....... 네가 나빴던 것이다, 모루.”
“나는, 여자란 게 들통 났으면 그 뒤론 남자를 들여보내려 하지 않았냐고 묻고 싶었던 거야.”
“그것도 무례한 질문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남자 권력자의 방에 여자를 들여보내는 것과 여자 권력자의 방에 남자를 들여보내는 것은 상당히 다른 문제다, 모루.”
그렇게 듣고 보니 그에게도 상당히 다른 문제로 느껴졌다.
“하지만 물의 보주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것은 왕가의 피를 이은 자 뿐이니까. 후사를 보기는 해야겠지.”
“나라가 망하고 젊은 귀족들은 대부분 옥쇄하여, 살아남은 이들 중에는 폐하와 어울리는 이가 없다는 게 문제다.”
헛기침을 하며 말을 잇는 밀리아 옆에서 지크가 보충설명을 넣었다.
강신혁은 잠시 둘을 비교하듯 보고는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지크와 밀리아 모두 열 받은 표정이 되었다.
“빌어먹을 신의 사도 같으니.”
“넌 정말 사람을 화나게 하는 선수가 되었구나!”
“뭐, 고생해라. 그래도 잘 찾아보면 좋은 사람이 있겠지.”
그 즈음에서 휴식을 마친 강신혁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밀리아의 얼굴에 짧은 순간 스치고 지나간 표정은 못 본 것으로 했다.
“그…… 여기서 작업을 계속할 건가?”
한동안 침묵하던 밀리아가 다시 양손에 낫을 드는 강신혁의 모습을 보며 재차 말문을 틔웠다. 강신혁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기초 작업은 내가 끝내둬야지. 그 후로는 여기 사람들한테 맡길 거야. 어차피 노는 사람 많지?”
“세계가 멸망하는 와중에 이때까지 살아남은 이들은 전부 훌륭한 전사다. ……다만 성벽 덕분에 상시 경계에 주둔하는 병력을 조금 줄일 수는 있게 되었지.”
“잘 됐네. 그중 일부는 이쪽으로 돌리고, 또 일부는 나한테 떼어줘.”
“어째서?”
“브레나이트.”
그 말에 또 고개를 갸웃하던 밀리아가 뒤늦게 아! 하고 감탄사를 냈다.
글쎄 그 패턴은 이미 한 번 했으니까 지양해줬으면 좋겠는데.
“이제 그걸 채광할 여유가 나겠지. 만족스러운 양을 얻으면 남는 걸로 새로 공성 무기도 만들어줄게.”
“공성 무기!”
그야 매력적인 제안이겠지.
밀리아의 표정에서 완전히 구름이 걷히는 것을 본 강신혁은 내심 안도하며 낫을 휘둘러 밭에 씨앗을 심어나갔다.
- 회원님은 점점 나쁜 남자가 되어 가시는군요.
‘불여우라고 하실 땐 언제고.’
- 물론 저 불여우는 불여우가 맞습니다만, 저렇게 노골적인 유혹을 깔끔하게 내치실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관리자는 어디까지나 관리자로서 회원님의 3대 욕구에 이상이 없는지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방금 은근슬쩍 고자냐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아니겠지.
24시간 강신혁을 관찰 가능한 관리자라면 그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터다.
‘괜히 다른 여자한테 시선 줬다가 클레어가 삐지면 안 되잖아요.'
- 부디 회원님의 의지가 앞으로도 굳건하시길 바랍니다.
‘불길한 소리 하지 마요.’
강신혁은 남아도는 황룡투기까지 모조리 밭에 쏟아주고 나서야 작업을 마쳤다.
매일같이 오르드 왕국의 땅을 침범해오는 땅지옥 무리는 그 날도 인간을 노리고 습격해왔으나, 성벽의 압도적인 높이와 강도 앞에 끝내 그것을 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투창에 두들겨 맞은 끝에 전멸했다.
여기에 강신혁이 전날 사놓은 수십 톤의 식량을 베풀어 잔치를 열게 하니, 신의 사도를 찬양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 덕에 강신혁은 다음날 수십 명의 지원자를 받아 광산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