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 Chapter 32. 새로운 차원 퀘스트 - 4 >
키엘론은 지구보다 격이 낮은 세상이라는 것이 관리자의 설명이었다.
기본적으로 세상의 크기가 지구보다 훨씬 작아 격도 낮을 수밖에 없다고.
다만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만물이 작은 것은 세상의 의지, 혹은 권능이라 불러야 할 간섭력 때문이라는 점이다.
다른 세상의 사람인 강신혁이 키엘론에 들어와서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크기가 줄어든 것처럼, 이 세상의 물건이나 사람도 다른 세상에 가면 키엘론의 억압에서 풀려나 원래 있어야 할 모습을 찾게 된다.
이것이 그가 이 세상에 들어와 걸리버의 소인국 여행기를 찍지 않고 끝난 이유였다.
동시에 이 세상에서 만든 브레나이트 단창을 지구로 돌아가서도 평범하게 쓸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면 세상의 크기가 작은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지만.’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물건이나 존재가 세상의 억압을 이겨내고 이 세상에서도 원래의 크기를 유지할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당장 히로익 실드는 타고난 영력의 격, 즉 영격이 높아 이 세상에서도 원래의 크기가 유지되었다.
그래서 키엘론 사람들이 보기에는 거대한 성벽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걸 역으로 생각하면 어떨까. 일단 성벽의 미니어쳐를 만들어서 그 크기를 ‘원래대로’, 즉 왕성과 시내 전체를 보호할 수 있는 거대한 크기의 성벽으로 불린다는 방법은!”
“굉장히 바보 같은 말처럼 들리는군.”
밀리아는 어처구니가 없어 그렇게 대꾸했다.
“물론 그 방패 성벽의 건이나, 네가 당시 검을 거대하게 만들었던 전적도 있으니 아예 불가능하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 하지만 그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성벽 형태의 아티팩트라니 들어본 적도 없어.”
“하지만 한 달 반 안에 땅지옥들로부터 성과 사람들을 완벽하게 보호할 수 있는 성벽을 노가다로 건축하는 것보다는 훨씬 현실적이잖아.”
“그래, 그러니 성벽 말고 무구를 만들어줘. 이전의 투창기와 같은 것이 100개만 더 있으면 땅지옥을 막아내는 것도 한결 수월해질 거야.”
“글쎄 그것도 할 거라니까. 하지만 성벽이 먼저야.”
강신혁의 굳센 의지에 밀리아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하지만 이윽고 피식 웃음을 흘리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전엔 네가 이런 괴짜인지도 몰랐는데. 이런 때에 네 새로운 일면을 알게 된 것에 기뻐하고 있는 나는 조금 이상한가?”
“응. 왜냐면 난 괴짜가 아니니까.”
“정말 넌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대답을 하지 않는 사람이구나.”
밀리아가 흥, 코웃음을 치며 돌아섰다.
찬란한 금발이 풍성하게 출렁거리는 것이 지극히도 인상적이었다.
“그럼 이만 돌아가자. 네 방을 안내해줄 테니.”
“그래.”
- 불여우년.
강신혁은 나지막이 읊조리듯 시야 구석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관리자의 메시지를 무시하며 밀리아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방을 벗어나기 전,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분수대 안의 물의 보주를 바라보았다.
저것을 보며 뇌리를 스친 발상이 있었는데, 너무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바람에 지금은 그것이 기억나지 않았다.
‘됐다, 중요한 일이라면 나중에 생각나겠지.’
알현실로 돌아온 후 병사에게 자신이 묵을 방을 안내받은 강신혁은 가장 먼저 설계도를 작성했다.
“일단은 이 세계와 지구의 크기 차이를 파악해야겠는데요.”
- 신살검을 거대화시켜보면 답이 나오겠지요.
좋은 생각이었다.
강신혁은 자신이 먹을 저녁식사를 가져온 병사를 붙잡아 자신이 허공에 거대한 검을 출현시킬 예정이며 단순히 확인해볼 것이 있어 그러는 것이니 다들 놀라거나 도망칠 필요가 없다고 일러두었다.
병사가 경악하면서도 밖으로 나가 그 사실을 순순히 전파하고 다니는 사이, 그는 병사가 가져온 식사를 먹었다.
정체모를 새고기가 듬뿍 들어간 스튜. 아마 이 세상의 공중 몬스터일 것이다.
뼈가 붙은 고기를 푹 끓이고 적절히 양념을 하면 맛이 없을 수가 없다. 닭과는 조금 다른 감칠맛이 아주 훌륭했다.
“하지만 배는 별로 안 차네.”
강신혁은 근접계 능력자답게 밥을 상당히 많이 먹는다. 그에게 이 정도 식사는 간에 기별이 갈까 말까 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에 관리자가 웬일로 태클을 걸었다.
- 모든 식량을 수렵으로만 해결하고 있는 것이라면 식량난도 심각할 겁니다.
그러니 제법 큰 그릇에 고기를 꽉꽉 채워 내어준 이곳의 대접은 굉장히 융숭한 편이라고 할 수 있는 것.
강신혁은 고개를 끄덕여 관리자의 말에 동조했다.
“하긴 성내로 들어오는 중에도 딱히 논이나 밭을 발견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강도 말라 있었고.”
싹이 자라날 생명력이 토양에 있는가는 차치하고, 강이 말랐다는 것은 이 나라에, 혹은 이 세상에 충분한 양의 비가 내리고 있지 않다는 증거다.
하긴 물의 보주를 확보하기 전에는 식수도 부족했다는데 비가 내리긴 얼마나 내렸겠는가.
“제가 지금 식량을 제공해봤자 근본적인 해결은 되지 않겠죠.”
- 그렇습니다.
그래도 당장 내일이 불투명한 이들에게는 오늘 행복해지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을 터다.
강신혁은 자신에게 남은 HP의 상당량을 투자하여 히어로 유니버스에서 판매하는 일반식을 수십 톤 단위로 구매했다.
특히나 싱싱한 과일과 채소, 곡물을 많이 샀다.
영력을 회복시켜주는 음식이야 물론 비싸지만, 이런 일반식은 히어로 유니버스에서도 상당히 싸게 판매하고 있었다.
- 똑똑
구매를 마쳤을 즈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가도 되겠나, 모루? 지크다. 나를 기억할지 모르겠다만……."
“들어와, 지크.”
문이 열리고 갑옷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병사들의 것보다 그래도 한층 좋아 보이는 갑옷이 남자의 신분을 짐작하게 했다.
하지만 분명 강신혁이 기억하고 있는 얼굴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는 키엘론에 머무르는 동안 강신혁이 가장 많이 보았던 남자였으니까.
“오, 지크. 이제 병사인 척하는 건 관뒀나보네.”
“그건 제법 일찍 관뒀다. 오랜만이군, 모루.”
“게다가 늙었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말만 골라하는 친구로군.”
지크는 주군과 비슷한 말을 중얼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곧 그를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신의 검을 불러오겠다고 말했다던데.”
“신의 검? 아.”
지크를 비롯한 병사들에게는 그날 땅지옥을 끝장냈던 거검이 신의 검으로 보였어도 무리가 없으리라.
그 낯간지러운 단어의 의미를 파악한 강신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래. 좀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단 이번엔 그걸로 땅지옥을 모조리 쳐부순다거나 하는 건 무리니까 알아둬.”
“폐하께 이미 들었다. 성벽을 만들겠다고 하던데, 아마 그것과 관련된 일이겠지. 정말 가능하겠나?”
“물론.”
“……이봐, 모루.”
지크가 문을 닫고 강신혁에게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중년 남자와 근접거리에서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것은 조금 부담스러운 경험이었으나 그는 도저히 물러나줄 것 같지가 않았다.
“우리가 지난 7년간 얼마나 노력해왔는지는, 너도 이 성내 도시를 조금이라도 둘러보았더라면 알았을 거다.”
“물론이지. 그래서 나도 한 팔 거들겠다는 거 아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네 원조가 없었으면 우리는 끝장이 났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위태로운 상황이었고, 지금도 그래.”
늘상 일어나는 전투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오늘 있었던 전투가 상당히 중요한 고비였던 모양이었다.
하긴 그러니까 하필이면 그 순간에 차원 퀘스트가 나타났겠지.
강신혁이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 지크가 혹여 누군가에게 들릴 새라 주위를 경계하더니 그에게만 들릴 만큼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진즉 한계에 이르렀다. 제아무리 네가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고 하나 이 상황에서 우리가 안정적으로 살아남을 길을 제시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폐하께서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네게 의존하고 계신 거겠지.”
- 이 벌레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회원님의 능력을 의심하다니 당치도 않은 말입니다.
관리자가 강신혁의 심정을 대변했다. 요즘 관리자의 말투가 조금 거칠어진 것은 강신혁 때문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니 무리라고 판단되는 시점에는…… 부디 망설이지 말고, 너의 세상으로 폐하를 데려가줘. 그분은 충분히 고생하셨다. 여태껏 해온 헌신의 대가로 어차피 멸망하게 될 세상에서 떠난다고 해서, 새로운 세상에서 미루어왔던 개인의 행복을 찾는다고 해서 그 누가 폐하를 원망할 수 있겠나.”
- 심지어 불여우를 회원님께 붙여놓으려고까지 하다니! 이젠 무리입니다, 더는 참을 수 없습니다! 죽일까요?
강신혁은 관리자의 폭주를 무시하며 지크에게 대답했다.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어.”
“내 청을 들어주는 건가. 고맙다.”
지크가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강신혁은 굳이 그의 생각을 수정하느니 가만히 놔두기로 했다.
어차피 며칠만 있으면 그를 포함한 전원이 알게 될 터였다.
저들이 이 7년간 변화한 것보다, 강신혁이 반년간 변화한 폭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아무튼 검에 대한 건 다 전파가 된 거지?”
“그래. 얘기는 해두었다.”
“좋아, 그럼.”
강신혁은 창문을 열고 신살검을 뽑아 내던졌다.
신살검에 영력을 담고, 윈드 마스터리로 바람을 일으키자 신살검은 마치 엔진이라도 달린 것처럼 똑바로 하늘로 치솟았다.
“하, 예전엔 투창기로 던지지 않았던가.”
“그런 건 구식이지. 요즘은 전자동이 대세야.”
사실 전자동은 아니지만 지크는 어차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신살검을 던지고 얼마나 지났을까, 강신혁은 자신과 신살검 사이에 연결된 영력의 끈을 통해 약간의 영력을 흘려보냈다.
이전엔 죽어라 영력을 짜내며 염원해야 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당시 신살검은 고작 C랭크였고, 지금은 SS-랭크까지 힘을 되찾았다.
굳이 강신혁이 영력을 불어넣지 않아도, 단지 조금의 자극을 주며 그러기를 바라는 것만으로 응당 있어야 할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가능했다.
거검이 키엘론의 상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와아아아아아아!”
“신의 검이다!”
“신의 사도께서 스스로를 증명하셨다!”
신살검이 거대화하여 상공에 모습을 드러내자 돌연 바깥이 시끄러워졌다.
아마 얘기를 들은 인간들이 검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강신혁이 고개를 뻗어 밖을 내다보니, 무슨 여의도에 세계불꽃축제를 보러 모여든 인간들처럼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신살검을 우러러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얼굴에 가득한 것은 환희, 그리고 결의였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세계불꽃축제 보러 가야겠네. 클레어랑 같이 가야지.’
“역시 저렇게 되는군.”
강신혁이 지금 상황과는 전혀 관계없는 생각을 하며 클레어와의 데이트를 망상하고 있는데 옆에서 한숨을 쉬는 목소리가 들렸다.
지크를 돌아보니 그가 바깥에서 환호하는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우중충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네가 방금 간단하게 만들어낸 저 거대한 검이, 우리 인간들에게는 또 부질없는 희망의 불꽃이 되어줄 것이다. 그 끝은 같은 절망이라는 걸 알면서도 또다시 발버둥을 칠 용기를 얻고 말았어.”
“당신은 못 보던 사이 엄청 염세적으로 변했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라면 누구나가 그럴 거야. 아마 폐하께서도.”
그러니 부디 아까 내가 한 말을 잊지 말아줘, 하고 그는 강신혁의 어깨를 두드리며 재차 당부하고는 떠나갔다.
워낙 쿨하게 떠나가는 모습에 강신혁은 차마 식량을 준비했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그를 보내주고 말았다.
“뭐, 성벽 만들고 나서 할까.”
- 알아야 할 것은 모두 알아내셨습니까?
“네."
강신혁은 허공에 떠 있던 신살검을 도로 작게 만들어 방 안으로 회수하며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허리띠 사이즈로 만들면 될 것 같네요. 사이즈 조절도 가능하니 나중에 도시 규모를 늘리고 싶어도 안성맞춤이죠.”
- 회원님의 천재적인 발상에 경탄을 금치 못하는 관리자의 110,000HP 보너스!
그렇게 해서 강신혁의 금속 허리띠 제작이 시작되었다.
재료는 마법금속 케나이언과, 슬슬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SS-급 몬스터 난쟁이들의 붉은 금속질 손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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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엘론인가.]
[정말 귀여운 남자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