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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화. < Chapter 32. 새로운 차원 퀘스트 - 3 >

“오랜만이군, 모루.”

병사들 가운데 강신혁을 알아보는 이가 있어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괜히 자신의 존재를 설명하느라 진을 뺄 일도 없이 곧장 ‘여왕’에게 안내된 것이다.

“누구세요?”

강신혁은 자신을 히어로 유니버스 아이디로 부르는 여자를 마주하며 살짝 헷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밀리아다. 밀리아 반 오르드다.”

그래도 여왕이라고 돌을 깎아 만든 옥좌 위에 앉아 그를 맞이한 그녀가 강신혁의 대응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설마 했는데 정말 네가 밀리아라고……?”

“그래.”

밀리아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하지만 강신혁으로선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퀘스트를 수행할 당시에 그녀는 항상 투구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투구를 벗은 모습도 잠깐이나마 보긴 했지만 그땐 완연한 소녀의 모습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비록 여전히 딱딱한 갑옷 차림이라고는 하나, 그녀는 키로 보나 얼굴로 보나 분위기로 보나 성숙한 여성이 되어 있었다.

어깨 너머로 물결치는 찬란한 금발, 헤어졌던 당시와 비교해 보다 크고 깊어진 두 푸른 눈.

당시에도 예쁘다고는 생각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을 압도하는 귀족적인 분위기까지 더해져 살짝 현실성이 없는 미모가 되어 있었다.

“다시 보니 확실히 밀리아 같긴 한데……."

“7년이 흘렀다.”

여왕, 밀리아가 툭 내던지듯 말했다.

그녀는 팔걸이에 얹은 팔에 턱을 괴며 강신혁을 삐딱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헤어지기 전이었으면 같잖았을 텐데, 지금은 실로 그림이 되니 과연 권력자의 핏줄이란 얕볼 수가 없었다.

“네가 멋대로 우리에게 희망의 씨앗을 뿌려놓고 사라진 후로 우리가 아등바등 발악하며 간신히 그 싹을 틔우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변하지 않는 게 무리이지 않겠나?”

“그 표현에는 오해의 여지가 제법 있을 것 같은데!”

곰곰이 뜯어보면 강신혁에게 감사를 표하는 말이지만 언뜻 듣기로는 그의 책임을 추궁하는 말처럼 들린다. 그것도 묘한 해석의 여지를 담아!

당장 그를 안내해준 병사들도 흠칫하며 그를 노려보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강신혁이 질색하자 그녀는 비로소 표정을 무너트리며 미소를 지었다.

“농담이다. 우리가 고생하며 지샌 세월을 모르는 모습으로 천연덕스레 나타난 네게 조금 심술을 부려보고 싶었던 것뿐.”

“여왕이 되더니 말솜씨만 늘었구나.”

“7년이 흘렀으니까. 멋모르던 소녀가 뻔뻔한 낯짝의 여왕이 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지.”

7년이라, 하긴 현실로는 반년이 조금 넘게 흘렀을 뿐이지만 그동안 이 세상과 지구의 시간비율은 널뛰기하듯 진동했을 테니, 14배가 넘는 시간이 흐른 것도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었다.

어쩐지 이전에 만났던 병사들도 조금씩 나이가 들어 보이더라니,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니 납득할 수 있었다. 살아남느라 개고생 한 탓에 빨리 늙은 게 아니었구나.

오히려 안티에이징을 무척 잘한 편이다. 존경스러웠다.

“그동안 너의 세상에서는 얼마나 흘렀지?”

“반년 정도.”

“반년인가. 그래도 그것보다는 더 지난 줄 알았는데.”

밀리아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윽고 그녀는 가볍게 손짓을 해 어전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을 물러나게 했다.

……사실 어전이라고 해도 반쯤 무너진 알현실의 천장에 지지대를 대서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어설픈 것이었지만, 그래서 더욱 비장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기도 했다.

둘만 남게 되자 그녀는 좀 더 편한 얼굴로 그에게 물어왔다.

“사정은 알고 온 것인가? 또 그때처럼 우리를 도와주러 온 거야? 여기에 더 이상 네가 찾는 물건은 없을 텐데.”

“물건 때문에 온 건 아냐. 어쨌든 너희를 도와주려 온 건 맞으니 부탁할 일이 있으면 뭐든지 말해봐. 직접 전투에 가세하는 건 불가능 하지만.”

“가세는 불가능…… 하지만 그래도.”

밀리아가 옥좌에서 일어나 강신혁과 같은 눈높이로 내려왔다.

아무래도 그를 상대로 계속 폼을 잡고 있기는 스스로도 거부감을 느꼈던 모양이다.

“땅지옥을 막던 병사들에게 큰 도움을 줬다고 들었는데.”

“단지 내 능력으로 전력을 일시적으로 강화시켜줬을 뿐이야. 그 정도 도움이라면 얼마든지 줄 수 있지.”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 강화. 이들이 강신혁의 능력을 이용해 이 땅에서 살아남고자 한다면 그런 ‘소극적인 원조’로 만족해서는 안 될 터였다.

“안 그래도 땅지옥과의 전투가 격렬해져가고 있어. 만약 거기서 병사들이 무너졌다면 오르드 왕성을 버렸어야 할지도 몰라.”

“이 성은 역시 오르드 왕국의 것이구나.”

들어오는 순간부터 느낀 것이지만 성의 규모로 보나 자재로 보나 몇 년 안에 뚝딱 지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뭣보다 새로 지은 것이었으면 이렇게 무너진 곳이 많지도 않았으리라.

“이 성을 고집하는 이유는 있어? 성벽은 진즉에 무너져서 목책을 두르고 있는 것 같던데.”

“있지. 물의 보주의 능력이 이곳 오르드 왕성에서 극대화되기 때문이야.”

그러고 보니 그런 게 있었구나.

강신혁은 반년 전 밀리아가 밀란이라는 이름으로 병사들을 이끌고 생존연합과 전투를 벌였던 이유를 떠올려내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보여주지.”

조금 망설이던 밀리아가 결심한 듯 말하더니 그를 이끌었다.

알현실 뒤로 난 문을 열자 복도가 길게 나 있었다.

놀랍게도 강신혁은 복도 전체에서 짙은 마력을 감지할 수 있었다.

“왕족만이 이 안에 들어올 수 있다. 아, 그래. 왕족의 동행자라면 최대 한 명이 추가로 출입할 수 있지.”

“대단한 결계네.”

사실 강신혁은 자신의 영력으로 이 결계의 근원을 해석하고 무력화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굳이 그것을 입에 내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밀리아는 자랑스럽게 어깨를 펴며 말을 잇고 있었다.

“선조께서 최초로 결계를 설치하신 이래 자손들이 대대로 강화해왔다. 그 덕에 왕성이 반파되는 와중에도 이 복도는 무사할 수 있었지.”

“왕성 전체에 걸었으면 더 좋았으련만.”

“그랬으면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 왕국이 파산했을 것이다.”

밀리아는 코웃음을 치며 복도를 나아갔다.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 같던 복도를 3분 정도 걸었을까, 당돌하게 공간이 확 넓어졌다.

바닥에 깨끗한 원형의 마법진이 그려진 방이었는데, 어디를 보나 빠져나가는 문이 없이 꽉 막힌 공간이었다.

즉 이 공간은 알현실을 통해서밖에 출입할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분수?"

“그렇다.”

마법진 위로는 자그마한 분수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깨끗한 물이 펑펑 솟아나 다시 떨어져 내린다. 분수대의 물은 계속 같은 양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저 물을 순환시키고 있을 뿐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분수대 중앙에 맑은 푸른빛의 구슬이 둥둥 떠올라 있었는데, 물은 그것에서 솟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분수 밑에 수관이 있어 생성된 물을 흘려보내고 있는 것이겠지.

“여기서 생산된 물이 왕국 전체에 공급되는 거냐?”

“왕국 전체라고 하는 것은 조금 과장되겠군. 7년 동안 생존자들을 부지런히 끌어 모았지만 그래봐야 5만 명 정도. 물의 보주가 생산하는 물로 먹여 살릴 수 있는 것은 그 두 배 정도가 한계다.”

“그래도 터무니없는 수준이잖아?”

“맞다.”

밀리아는 뿌듯한, 그러나 어딘가 아련함이 묻어나는 얼굴로 분수대 중앙에서 물을 뿜어내는 물의 보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왕국이 무너졌을 때는 감히 이 왕성에서 버틸 생각도 하지 못했지. 우린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세력만을 데리고 왕성에서 도망쳤어. 마법진의 도움 없이 물의 보주가 생산할 수 있는 양은 고작해야 3천 명 분. 도망치던 당시 우리 인원이 2천 명이 안 되는 수준이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겼지……."

“하지만 이젠 아니게 된 건가.”

“그래, 모루.”

단호하게 대꾸하며 돌아선 밀리아가 강신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해왔다.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 우린 이제 이 성에서 물러설 수 없어. 반드시 이곳을 지켜내야만 해. 도움을 준다면 무엇이든 하겠다. 내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내어주겠어.”

사실 강신혁은 물의 보주가 제법 탐이 났지만 그걸 가져가서야 성을 지키는 의미도 없게 된다.

처음부터 이들로부터 보상을 뜯어내는 게 목적이 아니었기에, 결국 그는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표정이 불만족스럽게 보인 것인지, 밀리아는 질끈 입술을 깨물며 재차 입을 열었다.

“원한다면 나의 몸이라도……."

“아니 그건 됐어.”

“그 즉답이 마음에 걸리는군! 대답 자체는 무척 고맙다만, 반응속도가 무척 마음에 걸려!”

그건 상황 상 그런 말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강신혁은 분명 그녀를 위해 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째려보는 밀리아의 모습에 세상의 불합리를 느끼며 대꾸했다.

“이 퍽퍽한 세상에 몸을 소중히 하라는 헛소리를 늘어놓지는 않겠다만, 마지막 수단을 꺼내들기 전에 좀 더 고객의 니즈에 맞춘 제안이 없을까 고민해봐.”

“나라고 아무에게나 몸을 내미는 여자가 아니다. 그만큼 네 도움이 절실하고, 이 왕국에 남은 보물이 없는 것을 어쩌라는 말인가.”

방금 자연스레 자신의 몸은 보물이라는 얘기를 한 것 같은데.

물론 그녀 정도의 미녀라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으니 반박은 할 수 없겠지만.

강신혁은 태클을 걸지 않으려 애쓰며 말을 이었다.

“꼭 보물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으니까 고민해봐. 브레나이트 같은 거 있잖아?”

브레나이트. 이곳 키엘론에서만 생산되는 마법금속이다.

마법금속은 원래 아무리 성질이 단순한 것이라도 귀금속으로 분류된다.

많은 세상의 회원이 등록하는 히어로 유니버스에는 종종 마법금속이 올라오지만, 대개는 희귀한 만큼 높은 가격대가 형성되어 있어 쉬이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더구나 브레나이트 정도면 타고난 성질만으로도 중위권 이상은 충분히 먹어주는 마법금속이지. 아니지, 당시 내 실력이 허접했던 걸 감안하면 원래는 훨씬 더…….'

당시 강신혁은 이들로부터 받은 브레나이트로 단창을 제작했고, 그의 낮은 야금술로도 상당히 높은 랭크의 물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소중한 경험이었고, 뭣보다 고마웠던 보상 중 하나였다.

더구나 지금이라면 같은 브레나이트를 가지고도 훨씬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을 터였다.

“브레나이트?”

그러나 정작 그 말을 들은 밀리아는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그러더니 3초 정도 침묵에 잠겨있던 후에야 비로소 떠올랐다는 듯 손뼉을 쳤다.

“그렇군, 그게 있었구나!”

“정말로 이제야 떠올린 듯한 표정이네. 오르드 왕국 특산품이라고 안 했어?”

“물론 특산품이었지. 하지만 채광을 할 수 없게 된지 너무 오래된 탓에 의식에서 빗나가 있었다.”

“왜?"

“광석과 땅지옥을 구분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야. 채광을 하러 들어간 이는 모두 죽었다.”

그것 참 어마어마한 이유였다.

그녀는 어딘가 기대하는 표정으로 강신혁에게 물어왔다.

“아직 채굴 가능한 광물은 충분히 남아있다고 들었다만. 들어가 보겠어?”

강신혁은 거기서 잠시 스톱 선언을 한 후 관리자에게 물었다.

‘이 경우 어떻게 돼요? 땅지옥과의 직접 교전은…….'

- 직통으로 들키겠지요. 직접 싸우기보단 병사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땅지옥과의 전투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이 상황에 병력을 빼내서 광산으로 가라고?

악마들이나 할 수 있을 법한 발상이었다.

“좋아, 그럼 브레나이트를 받는 건 나중에 하자고. 일단은 이곳을 뜯어고치는 것부터 해야겠어.”

“뜯어고쳐? 난 네가 우리 병사들의 무구를 만들어줬으면 했다만.”

“그것도 할 거야. 하지만 그 전에.”

강신혁은 땅지옥들의 공격을 막아내기엔 너무나 허접했던 경계의 목책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짓곤 말했다.

“성벽을 먼저 세워볼까 하는데.”

“거대한 방패의 성벽?”

“아니."

강신혁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히로익 실드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더욱이 그것으로는 고작 한 면을 막아낼 수 있을 뿐이 아닌가.

그가 세우려는 것은 거대한 강철의 성벽이었다.

그것을 아티팩트로 만들어낼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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