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 Chapter 32. 새로운 차원 퀘스트 - 2 >
키엘론.
그곳은 분명 강신혁이 처음으로 차원 퀘스트를 진행했던 세상이었다.
“차원 퀘스트가 새로 발생했다고요? 히로익 실드는 수거해왔는데 왜?”
- 회원님께서 과거 방문하셨던 기록이 남아있는 세상이기에, 해당 차원에서 발생한 문제에 관해 회원님께 가장 먼저 간섭할 권한이 주어집니다.
“문제?”
- 회원님께서 생각하시는 그것이 맞습니다. 요르문간드입니다. 독립된 차원에서 히어로 유니버스에 도움을 청하는 경우 100% 확률로 그들이 얽혀 있습니다.
매번 요르문간드라고 하면 질리니 슬슬 패턴을 세분화할 때도 된 것 같다고 강신혁은 생각했다.
요르문간드 부속 우로보로스 부대 같은 느낌으로.
강신혁이 시시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그의 침묵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관리자가 메시지를 이었다.
- 물론 이제 그 세상에는 회원님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거절하고 싶으시다면 거절하셔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관리자님의 생각은 어때요?”
- 관리자의 의견을 존중하는 회원님께 보너스 70,000HP!
하루라도 강신혁에게 HP 보너스를 주지 않으면 성이 풀리지 않는 관리자는 일단 그에게 HP를 선물한 후에 메시지를 이었다.
- 키엘론은 지구보다도 수준이 낮은 하위세계에 속합니다. 처음 차원퀘스트를 받으셨을 때도 사실상 회원님께 위험한 일은 거의 발생하지 않았죠.
마지막에 만난 거대 땅지옥은 조금 위험했지만 피하려거든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다.
사실상 그것은 과제를 다 해결하고 마주한 보너스 문제 같은 느낌이었다.
그것을 훌륭히 풀어낸 덕분에 특성이 진화할 수 있었고, 지금의 강신혁이 있을 수 있게 된 것이기도 하지만…….
-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회원님으로 인해 키엘론에도 아주 많은 변화가 발생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변화는 그간 회원님께 일어난 변화에 비하면 지극히 미약합니다.
“즉 그곳에서 제가 위험에 처할 일은 없다는 거네요.”
편한 마음으로 놀러갈 수 있는 다른 세상.
그 세상 사람들에게는 잔혹한 일이지만, 지구와 비교해 무력의 기준이 낮은 세계인지라 그 세상에서 가장 강한 능력자라 해도 강신혁이 막 능력을 각성했던 시기와 비교해 그리 나을 게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강신혁에게는 어떻겠는가. 사람들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스스로 자제해야 할 정도였다.
- 그렇습니다. 물론 그 차원에 어울리지 않는 과한 힘을 발휘하실 경우 요르문간드에서도 회원님께 맞는 적을 보내올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에, 무력을 휘두르는 데 있어서는 다소 주의를 하셔야 합니다만.
그런 식의 제약이 주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강신혁은 흥미를 느끼며 관리자의 말을 재촉했다.
- 반면 얻으실 수 있는 것은 저번과 비슷합니다. 바로 시간입니다. 한때 세상이 안정되어 지구와의 시간비율이 1:5까지 떨어졌던 키엘론은 지금은 1:15까지 다시 시간비율이 치솟았습니다.
“1대15라니 대체 뭐가 그들을 그렇게 괴롭히죠?”
- 돌연변이 땅지옥입니다. 자연 변이라면 시간축이 흔들릴 정도의 격변은 일어나지 않으나, 이번 돌연변이는 자연적이지 않습니다.
그래, 뭐 그런 녀석이 튀어나오리라 예상은 했지.
-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살아남아 문명을 재건하는 인류를 수호하며 위험요소를 배제하는 데에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차원 퀘스트입니다. 실질적인 전투를 수행하실 일은 없으며, 다만 회원님께서 지니고 계신 야금술이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과연, 좋네요. 가죠.”
망설임은 적었다.
마침 지금은 금요일 저녁 여섯 시 정도고, 클레어와 신은아의 출장으로 주말에는 아무 스케줄이 잡혀있지 않음을 감안하면 월요일 등교 시간까지는 시간이 남는다.
1대15의 시간비율이면 어림잡아도 저 세상에서 한달 반 정도는 머무를 수 있으니, 어지간한 일이라면 모두 해결할 수 있겠지.
시간은 언제나 그에게 부족한 자원 중 하나였다. 라이트 마스터리나 영혼독을 비롯해 시간을 들여 진득하게 점검하고 싶은 스킬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겸사겸사 히어로 유니버스에 내놓을 만한 물건을 만들 시간도 나겠지.
“다만 이런 소식은 기왕이면 오늘 아침이나 어제 듣고 싶었는데.”
- 아무 때나 차원 퀘스트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어쩔 수 없죠. 바로 가요. 아, 잠깐.”
그러고 보면 이번 주말에도 이나희와 작업을 하기로 했던가? 강신혁은 이나희한테 주말에 일이 생겨 작업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문자를 보냈다.
[나희 선배 : 아]
[나희 선배 : 아 진심]
[나 : 미안해요]
[나희 선배 : 내 무기 곧 완성이었는데]
[나 : 평일로 돌려야겠지만 그래도 괜찮으면 월요일에라도 ㄱㄱ?]
[나희 선배 : 완성될 때까지 안 재울 건데]
[나: 오케]
[나희 선배 : 좋아 그럼 봐줌]
[나희 선배 : (고양이가 꼬리로 하트를 만드는 이모티콘)]
- 죽이죠.
“이거 그냥 이모티콘!”
지금의 관리자처럼, 여자가 보내는 하트 이모티콘을 잘못 해석하면 참사를 낳을 수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질풍노도의 10대 청소년이라면 또래 여자애가 보내온 하트에 망상을 부풀리는 일도 있을 법 하지만…….
대개는 아무런 의미가 없이, 그저 대화를 끝내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물론 아무렇지 않게 보내온 하트 이모티콘을 무시했다가 나중에 왜 자신이 보내는 신호를 알아주지 않았느냐며 멋대로 투정을 부리는 경우도 있다.
사실상 직접적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두 가지의 상반된 결과가 혼재하는 슈뢰딩거의 하트 이모티콘이라고 할 수 있었다.
- 키엘론으로 이동합니다.
관리자가 상자를 열고 고양이를 꺼내어 죽이지 않기만을 바라며 강신혁은 실로 오랜만에 키엘론으로 이동했다.
잠시 감았다 뜬 그의 두 눈에 보이는 것은 얼기설기 짰지만 제법 높이가 있는 목책이었다.
듬성듬성 짜인 목책 너머로 제법 많은 숫자의 인간들이 보였다.
이 세상 키엘론의 인류였다.
“막아라! 이곳이 뚫리면 여왕 폐하께서 위험해지신다!”
“투창 부대 투창 준비! 쏴!”
“투창이나 먹어라 이 외계 괴물아!”
그는 기겁하며 물러났다. 목책 너머에서 수십 개의 단창이 날아들었기 때문.
그가 있는 쪽으로 날아드는 단창 중에는 어째 묘한 그리움을 느끼게 하는 것들도 있었는데, 강신혁은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가 제작한 창이기 때문이었다.
- 캬아아악!
- 키힉!
강신혁이 그 자리에서 빠르게 움직여 창들을 피해내자, 단창들이 바닥에 푹푹 박히며 아무것도 없는 일대에서 비명소리를 짜냈다.
아무것도 없는데 비명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으므로…… 불과 조금 전까지 강신혁이 있던 곳에 모습을 감추고 숨는 몬스터, 땅지옥이 숨어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 쿠오아아아아아!
‘올라오네.’
아니나 다를까, 바위, 혹은 흙무더기, 심지어는 목책의 부서진 잔해로 위장하고 있던 수 미터 크기의 땅지옥들이 몸에 단창이 꽂힌 채 괴성을 지르며 본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저건 숨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변신술이잖아!?
“화살을 쏴!”
“놈들을 죽이고 단창을 회수해야 한다!”
“검방부대는 앞으로 나서! 목책 사이로 놈들을 찔러!”
현장은 아주 정신이 없었다. 과연 강신혁이 이쪽으로 바로 떨어진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저들 중 누구도 강신혁을 눈치 챈 기미가 없었다.
목책 너머에 있는 인간들은 격전 와중에 정신이 없어 만에 하나라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치자.
그래도 땅지옥들은 누가 자기 머리를 밟고 서 있는지 정도는 파악을 해야 정상이 아닌가?
- 뀨?
“그래, 너 때문이었냐.”
오닉스 이 녀석, 마음대로 쓰레기 창고를 드나들 수 있도록 허가해준 이후로 행동력이 늘어났다 싶더라니 키엘론으로 넘어오는 순간 알아서 밖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그리곤 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은신을 발동,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김에 [동화]를 발동하여 강신혁의 모습까지 감춘 것이다.
솔직히 100점 만점에 120점까지 줄 수 있는 센스였다.
아무리 안전한 세상이라고 해도 그냥 당돌하게 나타나는 것과 은신 상태로 자연스레 잠입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으니까.
“잘했어, 오닉스.”
- 뀨우뀨뀨뀨웃!
“쓰레기 창고 안에 있었던 덕에 차원이동을 느낄 수 있었던 거냐?”
- 뀨!
드물게도 오닉스의 의사를 강신혁이 해석하는 데 성공했다!
실은 상황과 오닉스의 분위기로 때려 맞춘 것뿐이었다.
“그러면 이 상황을…… 으음, 어떻게 해야 하지.”
오닉스 덕분에 전장의 뜨거운 분위기에서 한 발짝 물러나 냉정히 상황을 판단할 수 있게 된 강신혁은 목책을 사이에 두고 필사적인 투쟁을 벌이는 인간들과, 그런 인간들을 잡아먹기 위해 위장까지 풀고 덤벼드는 땅지옥을 보며 침음을 흘렸다.
- 돌연변이입니다. 본래 땅지옥은 가만히 숨어 먹잇감을 기다리는 생물이지요. 하지만 인간들이 우수한 불여우의 지도를 따라 안전한 주거지를 되찾고, 회원님이 남겨주신 투창기로 안정적으로 식량을 수급하게 됨에 따라 놈들은 조급해졌습니다.
“방금 자연스럽게 불여우라고 하지 않았어요?”
- 그리고 세계가 안정화되며 새로운 생명의 싹이 틀 가능성이 태어났을 때, 요르문간드 또한 그것을 눈치 챘습니다. 그들 또한 회원님과 마찬가지 이유로 이 세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했으나, 계기를 주는 것만은 충분히 가능했습니다.
“그게 땅지옥의 돌연변이화인가요?”
- 지성이 입에서 꿀처럼 흘러넘치는 회원님께 30,000HP 보너스!
관리자는 혹시라도 나중에 퀴즈 출제자는 하면 안 될 것 같다.
- 그렇게 땅지옥은 종족 전체가 돌연변이화했습니다. 보다 완벽한 은신이 가능해졌으며, 변장이 가능한 개체가 나타났으며, 심지어는 빠른 이동속도를 얻기까지 했습니다.
“완전 지옥이잖아 그거.”
실제로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땅지옥 무리와 인간들의 전투는 치열하기 그지없었다.
비록 이전의 그 거대 땅지옥과는 달리 한 마리 한 마리의 덩치는 조금 작은 놈들이었지만, 무척 잽싼데다 뾰족하게 부풀어 오른 두 앞발로 연달아 찔러대는 공격이 실로 위협적이었다.
‘직접 개입은 안 된다고 했었지, 하지만…… 이대로 있으면 저들이 밀리겠는데.’
이대로 지켜보고만 있는 것은 죄악감이 느껴져 견딜 수가 없다.
뭣보다 그래서야 차원 퀘스트를 받은 의미가 없었다.
그렇다면 강신혁이 어디까지 간섭할 수 있느냐가 중요해지는데…….
- 회원님께서 직접 무기를 휘둘러 적들을 죽이지만 않으면 괜찮습니다.
그때 그의 마음을 읽어낸 것처럼 관리자가 대답했다.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그런 식이라면 얼마든지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강신혁은 안도하며 곧장 움직였다.
오닉스의 도움으로 은신을 유지하며 목책에 다가가, 가만히 손을 얹었다.
그리고 자신의 특성을 전력으로 발동했다.
“엇!?”
“갑자기 목책이 황금빛으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어!”
수호황룡의 힘으로 목책에 용의 힘을 부여했다.
하지만 손맛이 부족했다. 아마 그리 극적인 변화는 얻지 못했으리라.
‘바탕이 되는 목책의 근원이 그리 강하지 않은 탓이다. 내 특성은 대상의 근원이 확실하고 강건할수록 증폭도가 높으니까…….'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던 목책이 땅지옥들의 연달은 태클, 뾰족한 다리 공격에도 불구하고 끄떡하지 않게 된 것이다.
“추, 축복이다!”
“신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내리셨어!”
“신께서 우리를 보고 계신다. 저놈들을 이길 수 있다!”
어째서 이곳 사람들은 금방 신앙에 기대는 건지!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을 떠올리며 강신혁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정작 하는 행동은 그들의 부응에 답해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재차 특성을 발동해, 자신의 권능이 닿는 영역 안에 있는 모든 인간과 그 무장을 강화시켜주었으니까.
“정말 괜찮은 것 맞아요? 문제없는 거죠?”
- 물론입니다. 하지만 타인의 근원에 원격에서 간섭하는 회원님의 특성은 정말이지 차원 퀘스트에 최적이로군요.
관리자가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고작 특성을 두 번 발동한 것만으로 전황이 완전히 뒤바뀌어버렸으니까.
“신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우리에게 직접 힘을 선사하셨다!”
“지금이다, 놈들을 죽이자! 투창 부대!”
“쏴!"
전신을 은은한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병사들이 있는 힘껏 투창을 쏘아냈다!
그들의 몸과 마찬가지로 황금으로 물든 단창이 일제히 쏟아져 내려 땅지옥들을 꿰뚫었다.
- 캬아아아악!
- 키에엑!
- 키히, 히에에엑!
괴물들이 일시에 내지르는 비명소리의 심포니가 그렇게 감미로울 수가 없었다.
그 이후로는 파죽지세였다.
검방 부대가 내지르는 황금으로 물든 검은 땅지옥들의 단단한 갑각을 단숨에 찢어놓았으며, 땅지옥의 뾰족한 다리는 더는 목책을 부술 수도, 방패를 가를 수도 없었으니.
“온몸에 힘이 넘쳐난다!”
“우오오오오오!”
병사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날뛰며 땅지옥들을 쓸어버렸다.
그가 이곳에 오기 전까지 족히 몇 시간은 지속되었을 전투가, 고작 5분 만에 정리되고 말았다.
“헉, 허어억……."
“힘이……."
전투가 끝난 후, 강신혁은 자연스럽게 그들에게서 특성의 힘을 거두었다.
만약 영구적인 축복이 내려졌다고 여기기라도 하면 곤란할 테니까.
“우리가 이겼다.”
“다 끝난 건가? 정말로?”
“그래, 적어도 이번 전투는 말이지.”
전투를 마치고 단창을 회수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아버리는 병사들.
“후우."
"음?"
한 명의 희생도 없이 상황이 종료된 것을 보고 강신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어째선지 그 순간 병사들이 일제히 그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억!” “응?”
그리고 목책 너머에 있는 강신혁과 분명하게 눈이 맞았다.
강신혁이 거대 땅지옥을 해치웠던 당시, 그 현장에 있었던 병사였다.
“허어어억!”
“시, 신의 사도시다!”
“설마 사도께서 직접 강림하시다니!”
“사도시여!”
“엥?”
은신은 그가 한숨 한 번 토한다고 취소되는 게 아니었을 텐데 어째서 들켰단 말인가.
강신혁은 의아해하며 자신의 어깨 위에 앉아있는 오닉스를…… 돌아보다가, 녀석이 더 이상 자신의 어깨 위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 뀨! 뀨우우우!
어느덧 땅바닥에 착지한 녀석은, 죽어 자빠진 땅지옥들의 뾰족한 다리를 갉아먹으며 환호성을 올리고 있었다.
강신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도시여, 이게 얼마만이란 말입니까!”
“저희는 그동안 신께서 저희를 버리신 줄 알았는데……."
“아아, 다시 와주셨군요!”
- 뀨뀨우! 뀨우우우!
그럼 그렇지, 간만에 잘한다 했다.
많이 먹어라 이 돼슴도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