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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화. < Chapter 29. 교차하며 가속하다. - 5 >

요르문간드의 파리 대공습은 UN 게이트 대책기구의 대표 사무엘 조이너와 많은 파리의 시민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으나, 초인들의 분투로 인해 게이트 발생규모에 따른 예상피해의 불과 30% 수준으로 종식되었다.

탑 랭커 중에서 두 명, 특히나 그중에서도 세계랭킹 1위인 오주영이 소속길드인 뱅가드와 인류를 배신하고 요르문간드에 붙었다는 사실은 세상을 경악하게 만들었으나, 뇌제와 죽음의 인형사라는 새로운 탑 랭커가 직접 오주영을 처단함으로써 아직 인류에게 희망이 남아있음을 증명했다.

이성을 지닌 몬스터의 대집단 요르문간드의 급진적인 행동으로 인해 인류는 세상이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절절히 인지하게 되었다.

인류가 간신히 지켜오던 문명의 존속에 빨간불이 켜진 지금. 각국은 파리의 참사를 가슴에 새기며 향후 대책을 세우느라 날밤을 지새우게 되었다.

그리고 강신혁을 비롯해 이번 회의에 참가했던 이들은 며칠간 더 파리에 머무르게 되었다. 초인협회가 다시 세계초인회의를 열 것이라고 공지했기 때문. 수업을 합법적으로 더 빼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학생들은 그저 환호할 뿐이었다.

덤으로 5성 호텔의 무료 체류 기간이 늘어난 것도 순수하게 기쁜 일이었다.

“그래서......."

피해수습이 얼추 끝나고 호텔로 돌아온 그날 밤. 자신의 방을 몰래 빠져나온 강신혁은 같은 호텔의 최상층에 머무르고 있는 신은아의 방을 찾았다.

그곳에는 클레어도 함께 있었다. 처음부터 함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신은아가 강신혁을 불렀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그녀의 방에 돌격 해온 것이었다.

“제 별명은 결국 죽음의 인형사로 등록된 거예요?”

“응. 검은 독거미와 마지막까지 치열한 접전을 벌였지만 그쪽은 과부거미가 생각난다는 말 때문에 밀려났어. 그리고 상표권 때문에.”

신은아가 내민 초인협회의 대책회의 요약문을 읽으며 강신혁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하는 말에, 캔커피를 마시던 신은아는 작게 미소 지으며 그렇게 답했다. 그녀는 처음 자신에게 뇌제라는 별명이 붙었던 때를 떠올리고 있었다.

“랭킹은 5위야. 축하해. 그걸 직접 말해주고 싶어서 불렀어. 사실 협회는 널 직접 부르고 싶어했지만, 내가 막았어.”

나탄 보댕을 무사히 처리한 후, 강신혁은 엘레노어, 이나희, 카렌과 함께 돌아와 피해자들을 구출하는 데 전념했다. 이때는 이미 전부 가면을 벗고 신영의 학생 신분으로 활동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체격을 변화시킨다 해도 네 명이 나란히 가면을 쓰고 모여 있으면 신분을 측정하기가 너무나 쉬울 테니까.

덤으로 명색이 신영에서 고르고 골라 보낸 학생인 그들이 참사 현장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것은 학교의 평가를 실추시킬 우려가 있었다.

아무튼 그 덕에 죽음의 인형사 신은혁은 현장에서 감쪽같이 모습을 감춘 것이 되어 있었다. 그가 마력을 지니고 있다면 마력을 측정할 줄 아는 이들의 그의 정체를 특정할 수 있었겠지만 신은혁의 마력을 읽어낼 수 있었던 이가 누구도 없었던 덕에 그렇게 되지 않았다.

“5위. 단숨에 탑 랭커야, 탑 랭커.”

“별로 기쁘지 않은데…… 어차피 초월포션으로 도핑한 결과이기도 했고.”

강신혁은 이 결과가 솔직히 사기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도 많이 성장했다. 성장했지만, 스테이터스와 스킬을 종합하면 솔직히 이제 겨우 하이랭커(물론 그가 성장한 기간을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성취였지만)를 자신할 수 있을 정도.

실력보다 과한 평가가 따라와 봤자 피곤할 뿐이다. 그나마 강신혁이라는 진짜 신분이 공개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건 포션으로 도핑을 한 결과라고 이미 밝혀졌는데.”

"물론 그렇긴 하지만, 세상 어떤 포션으로도 그렇게 극적인 변화를 불러올 수는 없으니까. 아무리 그게 내가 만든 포션이라도 말이야.”

이번엔 클레어였다. 그녀는 친구 방의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며 자신의 폰으로 영상을 시청하고 있었다. 강신혁은 그 영상에 시선을 주지 않기 위해 애쓰며 그녀에게 대꾸했다.

“하지만 난 영력을 다루니까.”

“응. 넌 내 포션이랑 궁합이 무척 좋으니까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었겠지만 사람들은 그걸 모르잖아? 그래서 네 원래 실력도 탑 랭커에 합당한 수준이라고 추정한 거야. 포션 몫을 빼고도 5위라는 얘기지.”

“맞아. 포션을 마신 후의 활약만 따지면 나와 비등한 수준이었어. 이것도 한국의 초인이 세계랭킹에서 1, 2위를 나란히 차지하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이 어떻게든 후배를 깎아내린 결과야.”

“내가 그걸 직접 봤어야 했는데. 그래도 영상이 남아서 다행이야.”

흐뭇하게 웃으며 영상을 다시 재생하는 클레어의 모습에 강신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태클을 걸었다.

“역시 그거 SSS급 게이트 안의 영상이었어!? 클레어가 없었는데 대체 어떻게 촬영한 건데!”

“네 스틱을 해킹해서 녹화기능을 살짝 만졌지.”

“연금술사가 아니라 완전히 슈퍼해커잖아……."

“내가 사과할게, 슈퍼해커라고는 부르지 마.”

둘이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그 옆에서 신은아가 둘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클레어가 응? 하고 고개를 들었다.

“은아야, 왜 그래?”

“아니 그냥…… 너희 거리감이.”

“가까워 보여? 실제로 가까워서 그런 것 아닐까?”

클레어의 가벼운 도발에 신은아가 이를 갈며 강신혁을 끌어당겼다. 아마도 그런 거리감이 아닐 텐데 생각하면서도 강신혁은 맥없이 그녀에게 끌려갔다.

“후배한테 무슨 짓 하면 가만 안 둬.”

“무슨 짓을 하려는 건 은아 너 같은데…… 아.”

클레어가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어젯밤에 이나희라는 애가 신혁이한테 멋대로 키스했다는 얘길 듣긴 했는데. 인챈트라면서.”

“……알았어.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잠깐! 잠깐만 기다려 봐요!”

전신의 마력을 끌어올리며 그대로 방 밖으로 나가려는 신은아를 강신혁은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속으로는 클레어의 계략에 전율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차도살인지계라는 것인가!

“이나희, 절대 잊지 않겠어.”

“원수진 것도 아니고 그쯤 해둬요……."

“하지만 후배의 소중한 첫 키스를……."

강신혁이 그 부분에서 움찔하자 신은아도 움찔했다.

“처음이…… 아냐?”

“남자의 과거를 세세히 캐려고 드는 여자는 매력 없어, 은아야.”

클레어의 그 말에 어째선지 신은아가 아니라 강신혁이 다시 움찔했다. 그도 내심 클레어의 전 남친이라는 존재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던 참이었으니까! 지금 그는 그 의문을 원천적으로 차단당한 기분이었다.

물론 묻는 것이 실례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이가 차이 나고, 경험의 차이가 나는 만큼 더 더욱……!

‘전생을 따지면 역전이 될지도 모르지만, 내 전생의 기억은 대부분 무구를 만든 기억뿐이니까…….'

아마도 모루의 기억 중에서 지금 자신의 능력을 향상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부분부터 먼저 동기화되고 있어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물론 그 가운데 희미하게나마 전생의 아내와 가족에 대한 기억도 섞여있었지만, 그것들은 대개 희미하게 떠올리기만 해도 너무 슬픈 기억뿐이라 솔직히 어른스러운 경험 운운 이전의 문제였다.

강신혁 자신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떠올리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어느 정도 모루의 과거를 되찾은 지금도 일부러 그 기억에 마개를 덮어 봉해두고 있었다.

‘괜히 떠올렸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새콤달콤 씁쓰름한 기분이었는데 순식간에 차분해지고 말았다. 그것을 눈치 챘는지 못 챘는지,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며 은아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정말 얘는 일단 뭐에 집중하면 조절이 안 된다니까……. 신혁이한테 부담 주면 나한테 혼난다?”

“크윽…… 알았어, 하지만 클레어가 먼저 시작한 거야.”

“그래그래, 나도 잘못했어.”

클레어는 침대에서 일어서더니 인벤토리를 열어 테이블에 이런저런 컵이며 칵테일 도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신혁이 보내고 우리끼리 한 잔 하자. 신혁이 계속 붙잡아두고 있으면 교사들한테 들키겠다.”

“연금술사와 뇌제가 머무르는 방에 혼자 들어가 있던 신영 학생…… 초대형 스캔들이네.”

“여차하면 밝혀버려.”

“아냐, 절대 안 해. 그럼 두 사람 다 잘 자요.”

강신혁은 한숨을 쉬곤 두 사람에게 팔랑팔랑 손을 흔들어주며 방을 나왔다. 나오려고 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지 않았다.

“어라?”

"응?"

신은아가 다가와 문을 만져보았으나 이번에도 열리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능력을 발현하려 했으나 그것을 클레어가 다급히 말렸다.

“그런 짓 했다간 사람이 올 거 아냐, 바보야. 들어가 있어. 내가 해볼 테니까.”

“정말……."

신은아가 투덜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잔 배치를 마치고 현관으로 나온 클레어가 현관을 만지자 놀랍게도 문이 스무스하게 열렸다.

“어……?”

"흐."

클레어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강신혁이 문 밖으로 나왔다. 양옆을 둘러볼 것도 없이, 최상층이 전체로 하나의 스위트룸으로 되어 있는 구조였기에 사실 사람들에게 들킬 염려는 없었다.

“그럼 다음에 봐.”

“응. 아, 목에 뭐 묻었다.”

"응?"

강신혁이 클레어를 돌아본 그때,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어, 아……."

“난 이게 처음이야. 그럼 잘 자!”

그 자리에 굳어버린 강신혁을 놔두고 문이 닫혔다. 문이 닫히기 전 그녀가 그의 귓가에 뭐라고 속삭인 것 같았지만 넋이 나가버리는 바람에 제대로 듣지 못했다.

사실 그 내용은 뭐가 됐든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클레어가 그에게 먼저 다가와 키스를 했다는 것이다.

‘그래, 과거 같은 건 신경 쓸 필요 없지.’

중요한 건 현재니까. 그래, 클레어가 자신을 좋아해주고 있는 현재.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미래로 이끌어 가느냐. 그래, 그거야.

- 회원님.

“어라, 관리자님?”

그리고 마치 그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관리자의 메시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강신혁은 몽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 말씀을 드리는 것이 늦어 죄송합니다.

“뭐가요?”

- 이상사태에 차원 규모로 정보를 수집하고 돌아왔습니다. 주로 회원님의 정보가 노출된 건에 대해서입니다.

“아…… 네, 그러고 보니까 그때부터 말이 없었죠. 관리자님은 원래 뭔가를 알아보시는 데 늦는 법이 없으셨는데.”

- 정말 죄송합니다. 권능이 닿지 않는 영역이었습니다.

강신혁은 거기까지 듣다 말고 조금 이상한 점을 느꼈다.

"관리자님, 오늘은 이상하게 제게 많은 얘기를 해주시네요. 권능이라든가, 정보를 수집했다든가, 평소엔 그런 말씀을 안 하셨는데.”

- 그야 오늘 기념비적인.......

까지 눈앞에 나타났던 메시지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 회원님께선 SSS급 게이트에서 요르문간드의 간부와 만나 훌륭히 물리치셨습니다. 더욱이 VIP회원으로서 동화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어 정보규제를 어느 정도 해제했을 뿐입니다. 실제로 동화율이 40%를 돌파하셨지요.

"음?"

그 말을 듣고 동화율을 확인해보니 정말로 동화율이 44.5%까지 치솟아 있었다. 이전에 확인했을 때에 비해 족히 10% 가까이 상승한 것.

어째서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던 강신혁은 곧 원인을 깨달았다. 아마도 자신의 영력으로 신검 오주영의 검을 완벽히 파악하고, 심지어는 통제하여 자신의 수중에 넣었던 것이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 영혼독을 얻으며 영력이 높아진 것도 영향이 없지는 않을 테고.

- 동화율 50%에 실시되는 3차 해방이 가깝습니다. 관리자는 규제의 해제를 아주 조금 앞당겼을 뿐입니다.

“네, 그렇다면야 뭐……."

- 그러니 우선 보너스 50,000HP!

“우선? 방금 우선이라고 했어요?”

여태까진 그래도 아주 소소한 이유라도 있었는데 이번엔 그것조차 스킵해버리다니!? 더구나 사상최고액의 보너스였다!

- 이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수행하실 차원 퀘스트와도 연관이 있는 일입니다.

“네, 뭐……."

-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야누스 회원님이 행방불명이 되셨습니다. 히어로 유니버스의 권한이 닿지 않는 곳으로 떨어지셨다는 얘기입니다. 따라서 그분으로부터 정보가 유출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웃을 수 없는 소식에 강신혁은 단박에 침착했다.

야누스에게 연락을 넣어보았지만 답이 오지 않았다.

아주 조금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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