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 Chapter 29. 교차하며 가속하다. - 2 >
파리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영화라고 해도 믿을 그 장면 속 거리에 엘레노어와 함께 내동댕이쳐져, 이나희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희, 괜찮아?”
“아…… 응.”
엘레노어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친구를 살폈다. 본부 건물에서 뛰어내리면서 가면을 뒤집어썼는지 얼굴 생김새가 미묘하게 달라졌을 뿐더러 눈도 붉게 물들어있었다. 이전 한국의 대역류에서 활약한 모습 그대로였다.
“나도 써야겠네.”
이나희는 마침 잘됐다는 듯 자신도 후다닥 가면을 뒤집어썼다. 마치 얼굴을 감추려는 것 같아 엘레노어는 더욱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사실 이나희는 바로 방금 자신이 강신혁을 대상으로 했던 대담한 행동으로 인해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려던 것일 뿐이었다.
둘에게 그 이상 깊은 대화를 나눌 여유 따윈 없었다. 거리에서 넘쳐나는 몬스터의 물결이 그녀들에게도 닿기 직전이었던 것이다.
“어디로 향하지?”
낮은 건물 위에서 그녀들의 머리 위로 뛰어내리던 몬스터를 발견한 즉시 랜스로 꿰어버리며 엘레노어가 말했다. 그 말에 이나희가 잠시 우물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 아버지 가게, 가면 안 될까?”
“응, 그럼 거기.”
이나희의 사심이 담긴 발언에 엘레노어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앞에서 카렌이 외쳤다.
“상젤리제 거리라면 나쁘지 않네요! 이전 있었던 일 때문에라도 거긴 초인들이 많을 거예요, 그럼 그쪽으로!”
“어라, 너 그 가면 어떻게 된 거야!?”
그제야 눈치 챈 것이지만 카렌 역시 가면을 쓰고 붉은 눈과 검은 머리로 위장하고 있었다! 이나희가 엘레노어를 바라보자 그녀가 멋쩍어하며 말했다.
"어쩌면 앞으로 이 가면을 또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신혁과 상담했더니 나랑 항상 함께 있는 카렌도 하나 갖고 있는 게 좋겠다고 선물해줬어.”
내심 강신혁에게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에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는 엘레노어. 그런 말을 하며 괜히 자신의 가면 위를 쓰다듬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그에게 받은 것을 자신이 클레어에게 받은 가면과 바꿔치기한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제법 노골적인 어필에 이나희는 그래? 하고 샐쭉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강신혁에게 키스를 하고 나온 것을 자랑할까 하는 충동이 불쑥 솟구쳤지만, 자신이 멋대로 기습했을 뿐인데 그걸 자랑하는 것도 덧없이 느껴져 그만두었다. 그때를 회상하자 다시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 정말 다행이다.
“그 새끼 제대로 속았을까? 안 속았겠지, 인챈트라니 그런 개뻥은 진심 무리였지……. 병신년인가봐 진짜.”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나희?”
“아, 아무것도 아니야. 출발하자.”
아무래도 SS급 이상의 게이트가 발생한 것은 초인협회 본부뿐인 모양이었다.
밖에 나타난 몬스터의 수준은 높아봤자 S랭크였고, 가면을 쓴 덕에 힘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엘레노어는 랜스 일격으로 대부분의 적을 침몰시킬 수 있었다.
“카렌, 영국은 지금 어떤 상황인지 확인할 수 있어?”
“확인해봤는데 별 이상은 없는 것 같았어요. 한국도 마찬가지고요.”
“몬스터 놈들의 동원 전력에도 한계는 있겠지. 프랑스에만 이만한 수의 게이트가 한 번에 나타났는데.”
“……저기 몬스터야, 잡을게.”
셋은 이래저래 몬스터들과 싸워가며 길을 헤매거나 하면서도 끝내 상젤리제 거리에 이르렀다. 초인협회 본부가 있는 1구에 비해서도 어째선지 몬스터의 숫자가 더 많은 것처럼 보였다.
“쯧!”
그나마 다행한 점이 있다면 전체적으로 랭크가 낮은 몬스터들이 많았다는 것. 이나희도 왼쪽 허벅지의 가터 링에 끼워놓았던 짧은 스태프를 빼들었다.
그녀로선 인챈트를 제외한 모든 마법에는 별로 자신이 없었지만 사실 그녀가 생각하는 기준이 높을 뿐 그만하면 신영의 마법학과 전체를 통틀어 상당히 준수한 수준이었다.
특히 잡몹을 정리하는 데에는 제격이었는데, 정작 이나희는 이전 클레어의 마총을 썼을 때에 비해 마력 효율이 떨어진다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런데 나희, 그 스태프는 꼭 허벅지에 끼워놓아야 해?”
“응, 은밀하게 감춰놓기 딱이잖아?”
“그 목적뿐이야?”
“그리고 허벅지에서 이렇게 슬쩍 꺼내는 게 멋지니까. 사실 가슴골에 끼워 넣는 거랑 어느 쪽으로 할까 고민했는데 그러기엔 너무 길더라고.”
엘레노어는 기가 막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스태프가 지나치게 짧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만약 강신혁이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이나희가 딱히 변태인 것이 아니라 그저 중2병의 흔적이 남아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금방 간파 해주었겠지만 중2병에 대해 잘 모르는 엘레노어라면 오해를 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도착했다.”
"......음?"
일대의 약한 몬스터들을 정리하며 빠르게 내달린 끝에 전날 찾았던 가게에 도착한 일행은, 그러나 그 안에 들어가기 전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멈추어 섰다.
“안에 뭐가 있어.”
“엘리?”
“조심해, 나희.”
카렌이 즉각 이나희의 앞을 막았다. 주위를 경계하며 가게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선 엘레노어는 순간적으로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엘리?”
“들어오지 마.”
“아니, 들어와 줬으면 해.”
단호히 말하며 이나희를 밖으로 밀어내려는 엘레노어였으나, 매끄러운 불어가 그녀의 말꼬리를 잡아먹듯이 따라붙었다.
“널 기다리고 있었거든.”
“으게에……."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들은 이나희는 질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설마 그 스토커가 여기까지 따라붙었어?”
“네가 여기로 올 거라고 믿고 있었어. 역시 우린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상점 건물에 걸려 있던 환각 마법이 덧없이 사라지고, 반쯤 무너진 폐허 중앙에 서 있는 나탄보댕의 모습이 이나희에게도 아주 잘 보이게 되었다.
나탄 보댕의 특성은 S급의 [마도간섭]. 봄버걸이 지니고 있는 [마력변질]의 하위호환격 특성으로, 주위 마력에 직접 간섭해 흩어놓는 만큼 환각마법처럼 일정한 영역에 걸려 있는 마법을 푸는 데에는 아주 제격이었다.
“운명은 지랄, 멋대로 남의 집에 침입했을 뿐이잖아. 네 스토커 기질은 아무래도 뒈질 때까지 낫지 않으려나보다.”
“또 그렇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구나. 오, 그나저나 그 마스크 제법 귀엽구나.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건 아쉽지만.”
분명히 정통 불어로 대꾸해주고 있는데도 나탄 보댕은 그녀의 말이 마치 들리지 않는 것처럼 깔끔하게 무시하고 제 할 말만을 하며 머리를 쓸었다.
잘생긴 그에게는 제법 잘 어울리는 동작이었지만 지금 그가 멋대로 그녀의 소중한 공간에 침범해 저러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저 더럽게 역겨울 뿐이었다.
“그래서, 가면을 쓴 귀여운 아가씨. 지금은 학교 안이 아니야.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는 얘기지. 알고 있어?”
“그야 물론 알고 있지. 그래도 그땐 귀찮은 스토커였지만 지금은 네가 범죄자라는 거!”
“나희 선배, 화난 건 알겠는데 지금…… 위험해요.”
한편 카렌은 어느 순간 고개를 번쩍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이를 악물고 속삭이듯이 그녀에게 말했다.
자신의 특성으로 감각을 강화한 그녀이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 이곳에, 어마어마한 숫자의 몬스터가 몰려오고 있다는 것을.
피하기엔 이미 늦었다. 하늘에도 몇 마리인가의 와이번이 날아다니고 있는 것이 보였다.
“미친놈, 너 요르문간드에 들어갔냐?”
이나희가 그를 경멸하는 눈초리로 쏘아보며 말했다. 나탄 보댕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만이 나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제대로 키워줄 수 있을 테니까.”
“1학년한테 발리더니 제대로 맛이 갔구나. 진짜 병신이 됐어.”
"......."
“후배가 봤으면 개웃었을걸? 어쩜 하는 짓이 삼류 악역 그대로냐면서."
날카롭게 쏘아붙인 말에 나탄 보댕이 입을 다물고 몸을 부들부들 떨며 상당히 알기 쉽게 감정을 표출했다. 아무래도 강신혁과 관련된 화제는 그에게 역린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능력을 발동하고 있는 것만은 칭찬해줘야 하리라. 엘레노어가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지금 당장 공격해도 득을 보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 소년…… 인정하지, 운이 좋아 어찌어찌 나를 이길 수단을 타고났다는 점만은. 아주 기이하고 신비로운 힘이었어.”
그 기이하고 신비로운 힘이란 바로 영력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곧 나도 다룰 수 있게 될 거야. 내가 그와 직접 겨룰 수 없다는 것만이 아쉬운 일이지. SS-급 게이트에 갇혔다지?”
“걔가 너 같은 병신도 아니고 그 정도로 죽을 리가 있냐.”
희망사항이었지만, 그런 자신의 속내마저 숨기듯 이나희는 일부러 강한 어조로 말했다. 덤으로 그를 도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가 찐하게 키스까지 해주고 왔거든. 게이트 클리어하고 나오면 그 다음 단계까지……."
그 순간 나탄 보댕의 마력이 폭발했다. 그에 따른 일행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극적이었다.
이나희가 평소 인챈트하여 가지고 다니는 작은 원형 방패 형태의 아티팩트, 애칭 ‘냄비뚜껑(클레어가 다루는 드론을 보고 감명을 받아 만든 원격조작형 방어 마도구였다.)’이 동시에 다섯 개나 떠올라 그녀 주위를 감싸고, 카렌이 레이피어를 뽑아쥐고 그녀 앞을 막아섰으며, 엘레노어는 느슨해진 마도간섭을 뚫고 벗어나며 나탄 보댕을 향해 혼신의 찌르기를 가했다.
- 콰아아앙!
두 종류의 폭음이 울렸다.
하나는 마력으로 빚어진 수십 개의 창이 날아들어 냄비뚜껑들이 형성한 방어막과 부딪혀 폭발하는 소리였으며, 하나는 엘레노어가 쏘아낸 랜스가 나탄 보댕의 머리통을 꿰뚫기 전 그의 몸을 뒤덮듯이 나타난 검은 안개와 충돌하며 난 소리였다.
“그림자의 포식자. 당신, 악마한테 혼이라도 팔았어?”
엘레노어의 강한 일격을 견뎌내지 못하고 흩어지는 안개. 공격에 실패했음에도 엘레노어의 말투는 여전히 담담했다. 그러나 가면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붉게 물든 눈만은 여과 없이 그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엘레노어, R. 알제…… 역시 너였군.”
한편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탄 보댕은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상궤를 벗어난 초월적인 일격의 위력을 느낀 것이다.
그녀의 말마따나 방금 공격을 대신 받아낸 것은 S랭크의 몬스터인 섀도 이터. 특출난 방어력을 갖추고 있어 이렇게 간단히 파괴될 만한 녀석이 아니었는데!
가뜩이나 투왕전에서 그녀에게 져 투왕을 차지하지 못했던 것이 트라우마로 남아있던 그이다. 나탄 보댕은 당장이라도 자신의 심장을 찔러올 듯 번쩍이는 그녀의 랜스를 마법탄으로 쳐내며 뒤로 살짝 물러섰다.
"혼 따윈 팔지 않았어. 그들이 내게 붙여준 호위지. 난 제법 좋은 대우를 받고 있거든, 알제. 나라에서 쫓겨난 당신과는 달리, 이렇게.”
- 끄어아아아아아!
- 키히이이이!
나탄 보댕이 손가락을 튕기자 이미 완벽하게 주변을 포위하고 거리를 좁혀오던 몬스터들이 일제히 울음소리를 울렸다. 뒤에서 다가 오는 트롤을 경계하듯 스태프를 들어 올리며 이나희가 박수를 쳤다.
“연습 많이 시켰나보네. 멋지다. 그래서 유감이야, 네가 스토커 짓만 안 했으면 친구로서 조금 친해질 수 있을지도 몰랐는데.”
“친구? 그런 건 필요 없어. 말하지 않았나,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고. 더는 네 투정을 받아주고 있을 생각이 없어.”
“투정?”
“넌 내 말을 들어야 해. 내 것이 되어야 해.”
와이번 두 마리가 일제히 하강했다. 한 마리는 엘레노어를, 한 마리는 카렌을 노리고 있었다.
평범한 와이번이 아니라는 건 척 보면 알 수 있었다. 시커멓게 물든 놈들의 동체에 내달리는 불길한 붉은 선. 이나희는 그것에서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힘의 흔적을 느꼈다.
“내가 그렇게 정했어!”
나탄 보댕이 끝내 나중에 이불을 걷어차며 후회하게 될 말을 내뱉으며 눈을 부릅뜨는 그때, 엘레노어와 카렌이 동시에 움직였다.
나탄 보댕은 둘을 견제하려 일시에 특성을 최대출력으로 발동했다. 엘레노어는 그 간섭을 받으면서도 그에 대항하듯 마력을 끌어내 움직일 수 있었지만 카렌은 불행히도 그 정도의 능력이 되지 않았다.
"큭......!"
“카렌!”
이나희가 이를 악물고 냄비뚜껑을 조종하려 했지만 조금 전 충돌 탓에 전부 망가져버린 상황.
‘후배가 있었으면 이 정돈 아무렇지도 않게…… 아아, 진짜!’
눈앞에서 아끼는 동생이 죽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이나희는 이를 악물고 그녀를 몸으로 보호했다. 나탄 보댕의 목적이 자신이라 면 적어도 바로 죽이려 들지는 않을 것이란 계산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 음…… 목 위로만 남기면 돼. 아니, 가슴까지는 남기고 싶은데.”
“뭐 이 개새끼야?”
차마 예상치도 못했던 발언에 이나희가 눈을 부릅떴다. 죽어도 저 변태 새끼한테 몸을 내주기는 싫었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좀 움직여봐! 좀! 인챈트, 인챈트!’
이나희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인챈트를 발현했다.
자신의 인챈트로 조금의 회로만이라도 되살릴 수 있다면, 아티팩트의 기능의 일부만이라도 되살릴 수 있다면 어떻게든 치명상은 회피할 수 있을 터였다.
냄비뚜껑 하나만 움직일 수 있다면.
하나만. 하나만이라도!
- 조건을 만족하여, 기존의 특성 [인챈트(A+)]가 진화합니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메시지가 이나희의 눈앞에 떠오른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