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 Chapter 28. 당신은 알고 있어요 - 6 >
SSS급 게이트가 지구에 열린 것은 두 번째. 신은아는 그때도 현장에 있었다.
물론 당시 그녀는 조금 더 어렸고, 능숙하게 힘을 다루지 못했던 탓에 별 활약을 하지 못했지만.
그때 상황을 마무리한 것은 다른 탑 랭커였다. 현 국제 초인 랭킹 1위, 신검 오주영.
당시 이미 50살의 나이였던 그는 그럼에도 20대 초반의 외형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자신이 마스터로 군림하는 뱅가드의 정예 전투원들과 함께 당당하게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들을 물리쳤다.
그의 특성은 역사에 전해지는 가장 유명한 검의 능력을 자신의 무기에 구현하는 것…… 바로 [엑스칼리버(SS+)].
사실상 가장 높은 랭크라 알려진 SS+랭크의 특성을 가진 그의 능력은 강한 빛의 마력과 절단력을 무기에 부여하며, 동시에 그에게 괴력을 부여했다.
참으로 알기 쉽고, 극명히 강한 능력. 하지만 빛의 검으로 괴물을 베어내는 오주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신은아는 늘 생각했었다.
‘저것보단 할부지가 만든 검이 훨씬 대단해.’
그리고 그 생각은 그때로부터 1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신은아는 여전히 당시의 젊은 외견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는 오주영이 뱅가드 소속의 하이랭커들과 한데 뭉쳐 SSS급 게이트 앞을 틀어막는 것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할망구, 상태는 어때!”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멀쩡하다 이놈아!”
오주영의 외침에 이번 세계초인회의의 의장을 맡았던 은퇴 초인, 샬럿 자드 마콩이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과거 여제라 불렸던 그녀의 능력은 [초재생(SS)]. 강신혁이 한때 지니고 있던 특수능력인 재생력의 상위호환이라고 할 수 있는 특성으로, 일격에 죽지만 않으면 무엇에 당하든 금세 회복되고 심지어는 일정 수준의 내성까지 획득해버리는 사기적인 능력이었다.
놀라워해야 할 점은 과거 현역으로 활동하던 시절 이미 많은 독에 당해 내성을 획득했던 그녀가 이번엔 비록 순간이라지만 피거품을 뿜을 만큼 큰 데미지를 입었다는 것. 즉 그만큼이나 요르문간드의 이번 공습이 치명적이라는 얘기였다.
“랭크 측정은!?”
“본대도 아직이야! 지금부터 측정할 필요 없어, 일단 밀어붙여!”
게이트 바로 앞에 저지선을 구축한 뱅가드였으나 13층의 SS-급 게이트에서 일어났던 일이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나고 있었다. 침식되어 완전히 환경이 변모한 14층 회장 안 이곳저곳에서 몬스터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
그나마 14층에는 일반인이 처음부터 얼마 없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그들 전원이 중요한 신분을 갖고 있는 인물들이라는 사실. 한 명이라도 죽었다간 거센 풍파가 밀어닥칠 터였다.
“SS급을 우습게 뛰어넘는 놈들이 펑펑 쏟아져 나오네…… 제길, 이렇게 되면 공간침식이라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한 마리도 못 빠져나가게 잡아죽여주마!”
“막는 거라면 나한테 맡겨라!”
“이쪽으로 오지 못하게 해. 막아! 젠장, 해독 마법 다시 걸어줘!”
그들만이 아니다. 세계랭킹 2위 스톤 그라운드, 3위 다크 커튼을 비롯한 탑 랭커들이 모두 모여 게이트를 틀어막으려 일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현장이 아비규환이 되지 않고 그나마 최저한의 질서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그 덕분이었다.
‘아직은 괜찮을까.’
SSS급 게이트의 침식이 시작된다는 메시지를 본 순간 그녀는 자신의 힘을 감추는 것을 포기했다. 지금 이 현장은 지구의 미래를 책임지고 있는 이들이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들이 죽어나가게 놔두면서까지 힘을 감춰봤자 의미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직은 상황이 괜찮아보였을 뿐더러, 이 회장 안에 반드시 있을 ‘배신자’를 찾아내야만 했기에…… 그녀는 여력을 남겨둔 채 마력을 조종, 민간인을 보호하는 데 주력했다.
언제든 무한한 마력의 창고를 개방할 수 있도록 열쇠를 닦으면서.
“클레어, 일단 포션을 부탁할 수 있을까?”
“응. 네 전용으로 만들어두고 있었어.”
클레어는 오늘 신은아와 함께 랭크 갱신을 할 예정이었기에 그녀와 같은 장소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게이트 침식이 일어난 지금도 물론 함께 있었다. 하이랭커이지만 전투력은 그에 못 미치는 그녀는 신은아에게서 떨어지는 그 순간부터 위험했다.
“응, 이거. 마력의 질을 끌어올려줄 뿐만 아니라…… 아무리 많은 양을 뿜어내도 몸이 터지지 않게 보호해줄 거야.”
“고마워, 클레어 뿐이라니까.”
SSS급 게이트 침식으로 지옥에 갇혀버린 상황에서도 여전히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신은아는 자신에게 포션을 건네주는 클레어의 손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언제나 밝게 웃고 농담을 즐기는 그녀라도 겁을 먹는구나, 신은아는 그 사실에 묘한 감회를 느끼며 클레어의 한 손을 꼭 잡았다.
“지켜줄게, 걱정하지 마.”
“와, 멋져.”
클레어가 그녀의 말에 킥킥 웃었다. 그러다 이내 미소가 흐릿해졌다.
“고맙지만 그게 아니라…… 신혁이, 걱정 되서.”
"응."
신은아 역시 그 말에 인상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라고 왜 그 생각을 하지 않았겠는가. 오히려 당장이라도 이곳을 벗어나 13층에 있을 강신혁을 구하러 내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이 게이트에서 벗어날 방법도 모를 뿐더러 벗어날 수 있다고 해도…….
“이 사람들, 여기에 두고 나갈 수 없으니까……."
“어떻게 해야 돼, 아아아아아. 하지만 귓속말을 하면 반대로 이쪽을 걱정할 것 같단 말이야. 신혁이 눈치 좋으니까…… 아아, 진짜.”
신은아의 말에 답답함이 더해진 것일까, 클레어가 한 손으로 제 머리칼을 마구 엉클어트렸다. 반쯤 울상이었다.
신은아는 처음 보는 클레어의 그런 모습에 멍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어째선지 초조한 마음이 들어, 그녀는 가볍게 친구를 디스했다.
“첫사랑하는 소녀도 아니고.”
“그 말 고스란히 돌려줄게.”
“난 진짜 첫사랑이니까.”
“야, 그건 나도……!”
“오, 클레어.”
클레어가 무심코 큰 소리를 내려던 그때 둘 사이에 끼어드는 이가 있었다. 회의 도중 발언했던 국제 초인 랭킹 13위 주노 발렌타인이었다.
“클레어, 여전히 예쁘네! 하필이면 여기서 만난 건, 뭐 운이 조금 안 좋았지만?”
“아, 은아 네가 그런 말을 하니까 이상한 거 왔잖아.”
“내가 뭐, 옛날부터 잔뜩 놀려댔으니까 보답이야.”
"으득......."
클레어는 신은아의 대꾸에 이를 갈았다. 그야 확실히 예전부터 자신이 그녀를 이런 쪽으로 많이 놀리긴 했지만, 그건 맨날 할부지 타령만 하는 신은아를 현실로 되돌려주기 위해 남자를 만나라고 했을 뿐이고!
……하지만 까놓고 말해 둘의 연애 경험치는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그 날로 SS급의 특성을 각성해 일반과는 격리되어야 했던 클레어가 연애를 무슨 수로 했겠는가. 한국에서 바를 차린 것도 그녀 인생 처음으로 하는 대도전인 것이다.
“오우, 많이 긴장되나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한국어니까. 지금 너랑 말 섞고 싶은 생각 없으니 가줬으면 좋겠어, 발렌타인.”
다만 둘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면, 신은아는 애초에 사람의 접근을 불허하는 분위기를 두르고 있어 누구도 쉬이 말을 걸지 못하는 고고한 여성이라면 클레어는 반대로 외향적인 성격과 화려한 외모로 인해 불행하게도 남자의 접근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
물론 그렇다고 그녀가 자신의 성격을 뜯어고치거나 외모에 불만을 가질 리는 없었지만, 자신에게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붙거나 웃지 못 할 스캔들이 떠돌아다니는 것만은 예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일 중 하나였다.
그중 대표적인 스캔들이 바로 지금 그녀들에게 다가온 남자, 주노 발렌타인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지 말고. SSS급 게이트라고. 널 지켜줄 용감한 기사에게 키스 한 번 해주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잖아, 그렇지?”
“난 필요 없으니 가서 오우거 X이나 빨아.”
주노 발렌타인은 한때 클레어에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끈질기게 그녀에게 구애를 해서 클레어를 하이랭커가 되기도 전부터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클레어에게는 심히 불명예스러운 일이었지만, 워낙 일이 커지는 바람에 대부분 인간들은 둘이 정말로 연인관계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심히 끈질기고 짜증나는 그의 구애가 불법적인 영역에 이르기 직전, 클레어는 결국 신은아의 힘을 빌려 주노 발렌타인을 격퇴했다.
둘의 우정은 깊어졌고, 주노 발렌타인은 신은아의 진정한 힘의 일부를 알게 된 극소수의 인간이 되었지만 그 일은 결코 외부로 흘러 나가는 일 없이 조용히 덮어졌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한창 잘 되어가던 연인이 깨졌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도 클레어의 전 남친이라고 하면 대부분 이 남자를 말하는 것이다.
“요즘 좀 잠잠하더 니 또 지랄이야? 그것도 SSS급 게이트에서까지. 혹시 너야?”
클레어의 말에 신은아까지 덩달아 주노 발렌타인을 노려보았다. 방금 클레어의 ‘너야?’라는 질문은 ‘네가 배신자냐?’라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주노 발렌타인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너무 그러지 마, 허니.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다보니 반가워서 그랬을 뿐이야. 한국에 대체 뭐가 있는지 나도 가보고 싶을 지경……."
"......."
“하지만, 음, 이미 기사님이 있었군.”
신은아의 눈빛이 매서워지자 그의 얼굴도 제법 차분해졌다. 그녀의 경천동지할 능력을 잊기에는 아직 그도 젊었다. 심지어 그녀가 그때보다도 더욱 강해졌음을 알게 된다면 지금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다가오는 것도 불가능했을 터였다.
“난 항상 진심이라고. 네가 원한다면 나는……."
“원하지 않아. 너도 초인이라면 떠들 시간에 저기서 튀어나오는 녀석들이나 사냥하는 게 어때…… 아.”
클레어의 말이 끝나기 직전, 한쪽에서 크게 터지는 소리가 났다.
UN게이트 대책기구의 사무엘 조이너의 머리통이 터져나가는 소리였다.
“아하! 내가 아니란 걸 알아서 정말 다행이야, 그렇지?”
“말할 시간에 총이나 쏴, 멍청아!”
주노 발렌타인의 쌍권총이 불을 뿜었다. 탄이 명중하기 전 민간인의 머리를 터트린 사람은 다른 이들도 죽이려는 듯 손가락을 튕기다 말고 탄환을 인식하고는 빠르게 그 자리에서 빠져 나갔다.
“내가 몬스터를 사냥하고 있었으면 빨리 막지 못했을 거야, 어때.”
“그 시간에 경계하고 있었으면 사무엘 조이너가 죽지도 않았을 거야!”
“아하하하하하하! 반응속도 하나는 진짜 빠르네! 여전해, 주노! 하지만 어설퍼!”
바닥을 폭발시켜 허공으로 튀어 오르며 웃음을 터트리고 있는 그 여자의 정체는 국제 초인 랭킹 6위의 봄버걸 미즈시마 엘라 유키. SS급의 [마력변질] 특성을 갖고 있는 강력무비한 초인으로, 당대의 가장 강한 여성 초인이었다.
정체된 지 오래되어 10년만 지나면 뇌제에게 여성 초인 탑의 자리를 물려줘야 할 것이라는 얘기가 많았지만, 적어도 당대의 최강은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탑 랭커 중에서도 위험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그녀가 인간을 배신한 것이다.
“하필이면 저 여자가……!”
클레어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마력변질은 말 그대로 자신의 영향 하의 마력의 성질을 바꾸어버리는 것으로, 그것을 활용해 상대의 마법을 무효화하거나 게이트의 작용을 비틀거나, 가장 간단하게는 마나에 폭발력을 부여해 터트리는 등 범용성도 높고 살상력까지 높아 게이트 안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는 가장 경계해야 할 적 중 하나였다.
“봄버걸이 배신했다! 사무엘 조이너를 죽였어!”
“빌어먹을, 만화 같은 건 그 별명만으로 충분하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썩을 년이!”
“아하하하하하하하하! 1차 목표는 달성했으니까 지금부터…… 거창하게 해보자구!”
“나이 오십 먹은 아줌마가 역겹게 웃지 마!”
하지만 정말이지, 웃을 수 있는 것은 봄버걸 뿐이었다.
사무엘 조이너의 죽음으로 초인들이 그녀를 민간인들로부터 떼어내는 데에만 주력하게 된 그때, 그녀의 마력이 게이트를 감싸…… 게이트의 마력을 일대에 보다 대폭적으로 퍼트리기 시작한 것이다!
- 열렸다.
- 이제야 열렸는가, 느리군. 느리기 짝이 없어.
- 하지만...... 충분해.
본래 침식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지만, 봄버걸은 일대의 마력을 강제로 변질시키는 것으로 그 과정을 대폭 앞당겨버렸다.
주노 발렌타인이 쏘아낸 탄환이 그녀를 유도, 추적했지만 탄환이 목표물에 도달했을 땐 이미 그녀를 지켜줄 많은 몬스터가 생성된 후였다.
“시작할까!”
- 좋지.
인간과 몬스터가 같은 편에 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회의에서 그렇게 떠들어대던 의제가 이렇게나 깔끔하게 요약되다니! 신검 오주영이 허탈하게 웃으며 그녀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이래서 일본을 진즉 밀어버렸어야 했는데.”
“국가와 개인은 별개로 놓고 봐야지, 안 그래?”
“나가면 진짜 좆될 줄 알아, 개년아.”
SSS급에 이르는 몬스터들이 주위를 빽빽이 채우며 나타났다. 클레어는 본능적으로 신은아에게 달라붙었고, 주노 발렌타인 역시 자신이 없었는지 은근슬쩍 신은아 곁으로 다가왔다.
“은아야.”
"응."
신은아는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갱신을 시작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