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 Chapter 28. 당신은 알고 있어요 - 2 >
- 회원님, 지금부터 전투를 음성으로 지원하겠습니다. 우선 히어로 유니버스에서 제공하는 A랭크의 마폭탄을 17개 구입, 깨진 유리창 너머 11시 방향 730미터 지점으로 모조리 던져주세요.
“그거 방금 나희 선배가 나간 방향이잖아요. 대체 무슨 전투를 지원한다는 거예요.”
파리의 초인협회 한복판에 SSS급의 게이트와 SS-급의 게이트가 열린 심각한 상황인데도 관리자의 태도는 지극히 가벼웠다.
물론 관리자는 이전부터 강신혁을 제외한 다른 인간들을 상대로는 비교적 싸늘한 태도를 취하곤 했지만, 관리자의 이런 말이 강신혁의 부담감을 조금쯤 덜어주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시뇩아.”
“모르는 사람인 척해라, 모르는 사람인 척.”
강신혁은 툴툴거리며 백인하의 부츠를 상대로도 자신의 특성을 발동했다.
수호황룡은 자신과 아군을 모조리 강화하는 특성. 그의 투기와 영력이 동시에 뻗어 나와 자신의 부츠를 감싸는 것을 느낀 백인하는 강신혁을 지그시 째려보았다.
“저번 전투에서는 전력이 아니었겠다?”
“모르는 사람인 척하라고. 자, 지금부터 시작.”
강신혁이 어째서 이 상황에서 굳이 마스크를 쓰고 신은혁의 행세를 하는가, 그 이유는 간단했다.
상대적으로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특수능력을 갖춘 신살검과는 달리(물론 실제 능력은 터무니없는 수준이지만 그것들 전부 딱히 외적인 특징이 없이 얌전했다.) 그가 신은혁의 모습으로 다루는 무장들은 전부 개성이 너무나 극명하다.
강신혁의 신분으로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썩 좋지 않은 관심이 쏟아지는 수준. 지금부터 사용할 두 개의 낫은 더더욱 그러했다. 애초에 낫 중 하나는 이전 대역류 당시 신은혁의 모습으로 수거한 것이기도 했다.
쓸모없는 추적을 막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능력을 모조리 쏟아내기 위해서라도 신은혁이라는 신분은 제법 훌륭한 방패막이였다.
- 지나치게 밀집된 공간에 몇 개의 게이트를 연달아 만들어낼 때부터 짐작했지만…… 회원님, 침식입니다. 주의하세요.
백인하의 강화 작업을 끝마친 강신혁이 가볍게 낫을 휘둘러 주위에 움직이는데 방해가 되는 것을 치워내는데, 돌연 관리자가 그런 메시지를 날려 왔다. 강신혁의 귀가 쫑긋했다.
“침식?”
- 게이트의 형태에는 기본적으로 방출과 흡수, 두 가지가 있습니다. 방출은 게이트 너머의 공간과 이곳을 이어 몬스터를 쏟아내는 것이고 흡수는 외부의 인간을 게이트 안에 형성된 아공간으로 불러들이는 것이죠.
그것들은 이미 알고 있는 정보다. 가만, 그렇다는 건 혹시 게이트에 그 두 가지 형태만 있는 게 아니란 말인가? 그의 의문을 긍정하듯 관리자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 방출형 게이트를 완전히 방치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계십니까?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들이 일대를 점령하고 나면 게이트 안의 마력이 완전히 이곳으로 옮겨와 환경을 변화시키죠. 방출형 게이트를 막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거고요.”
현재 아프리카 대륙이 처한 상황이 바로 그렇다. 방출형 게이트의 다량발생을 막아내지 못해 게이트 내부의 환경이 지구로 옮겨온 결과, 분명 지구이지만 지구가 아닌 환경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곳에서는 지금도 많은 몬스터들이 서로 싸우거나 교접하거나 하며 세력을 불리고 있다. 새로운 몬스터가 탄생하고 있고, 인간들의 숫자는 줄어들고 있다. 현세의 지옥도가 있다면 바로 그것…… 잠깐.
“설마 침식이……?”
- 강제로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입니다. 일대는 아공간화하며, 게이트를 소멸시키지 않는 한 빠져나갈 수 없게 됩니다.
강신혁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저쪽의 게이트 때문인지, 아니면 이쪽의 게이트 때문인지…… 황당하게도 분명 존재했던 천장이 사라지고 어느덧 거대한 동굴의 천장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 창문도 사라졌습니다.
어떻게든 강신혁에게 키스를 하고 도망친 이나희를 격추하고 싶었던 것일까, 게이트에 침식되어 동굴 벽으로 변모하는 유리창을 보며 관리자가 안타까움이 담긴 메시지를 보냈다.
“설마 이 게이트……."
“들어본 적 있어…… 이거, 침식이다!”
“실제로 겪는 건 처음이야. 젠장, 요르문간드 놈들.”
침식형 게이트라는 말은 어지간한 초인들도 모르는 단어였으나 이 자리엔 하이랭커가 대다수였던 탓에 그걸 알고 있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걸 아는 이들도 모르는 이들도 지금은 공평하게 이를 박박 갈고 있었다.
지금 13층에 남은 사람들의 숫자는 대략 40. 그중 절반이 초인이었고 남은 반에서 절반 정도가 돈을 받고 요인을 호위하는 용병, 나머지가 그들에게 호위를 받는 비능력자였다.
“SS-급 게이트다. 전투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한 곳에 모여 있어!”
“침식이야, 게이트를 부수기 전까지는 나갈 수 없으니 난동 피우지 말고 얌전히 있으라고! 제기랄, 꿈에도 안 꿔본 SS-급 게이트를......."
“뱅가드 3팀장 엘런 미셀입니다. 우선 포지션을 나눠 진형을 구성하겠습니다! 아, 거기 움직이지 마세요! 게이트 곧 열려요!”
기왕이면 게이트가 열리기 전에 모두 도망쳐줬으면 좋았을 텐데, 회장 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 독이 되었다. 그나마 더글러스 페인처럼 솔선수범해 대피를 이끈 이가 없었으면 상황은 더욱 심각했으리라.
‘그러고 보니 그놈 없네요.’
- 있었어도 별 도움이 안 됐을 겁니다.
냉정한 관리자의 말에 동의하며, 강신혁은 어떻게든 초인들을 한데 묶으려고 애쓰는 뱅가드 3팀장에게 슬쩍 시선을 주었다. 그러나 딱 보아도 그의 뜻대로 따라주는 이들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포지션은 무슨 포지션이야, 하이랭커를 지휘해본 경험 있기는 해?”
“개성도 무기도 다 다른데 지금 막 만난 사람들끼리 진형을 짠다니 불가능이야, 불가능. 어이, 다들 자기 목숨이나 챙겨!”
“게이트 열린다! 거기 용병들, 비능력자들 한데 몰아넣고 벽이라도 만들어서 지켜!”
“무리야. SS-급 게이트라고. 저런 찌끄레기들로는 1초도 못 막아.”
“도망도 안 치고 뭐한 겁니까? 게이트 관광이라도 하게?”
만약 지구상에서 가장 소통이 되지 않는 공간이 있다고 하면 그건 틀림없이 바로 지금 이 공간이었다. SS-급 게이트라는, 일단 한 번 나타나면 전 세계적인 이슈가 되는 끔찍한 재앙을 눈앞에 두고 일반인도 하이랭커도 공평하게 이성을 잃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강신혁은 침착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었다.
“중급 증폭 포션 세트 주세요.”
- 구입했습니다.
그는 손아귀에 잡히는 세 개의 스테이터스 포션을 모조리 들이켰다. 이로써 힘은 SS랭크, 민첩은 SS-랭크, 체력은 SS랭크가 되었다. 신은혁 모드일 때 착용하는 베놈 프린세스 소울에 붙은 특수능력, 독희로 인해 민첩도 한 단계 상승, 세 개의 스테이터스가 모두 SS랭크로 맞추어졌다.
S랭크에 달하는 황룡투기, 그것을 증폭시켜줄 S+랭크의 영력까지 감안한다면 일단 SS-급 게이트에 도전하기 위한 최소조건은 갖추어진 셈이다. 동시에 그것은 하이랭커의 최소조건이기도 했다.
이때 그의 특성 수호황룡으로 인한 능력치의 추가 상승율은 굳이 계산하지 않는다. SS-급 게이트에서 나타날 적들도 저마다 강력한 고유개성을 지니고 있을 테니까.
‘스테이터스 포션의 유지시간은 1시간. 그 안에 끝낼 수 있을까?’
아니, 생각할 필요도 없으려나.
강신혁은 이를 악물고 다시 한 번, 특성을 발동했다.
13층 회장에 남아있던 모든 이를 황금의 용이 덮쳐, 그들 전원의 능력을 끌어올렸다.
SS랭크의 특성이 지닌 진정한 힘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뭐야, 이거!?”
“모든 스테이터스가 강화됐어, 이런 하이랭커 수준의 인챈터가 있었다고……!?”
“그건 나중에 찾아, 게이트가 열린다!”
- SS-급 게이트, ‘제41 병영’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강신혁이 특성을 발동한 타이밍은 아주 적절했다. 일부러 게이트의 반응이 극대화되는 순간을 노려 특성을 발동한 덕에 누구도 감히 ‘인챈트’의 근원을 찾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게이트에 덤벼들어야만 했으니까.
- 인간들의 영역.
- 우리의 대지다.
- 우리의 땅!
저번 대역류 때도 그랬지만 역시나 게이트에서 말을 할 줄 아는 몬스터가 뛰쳐나오는 광경이란 심히 불쾌했다. 공통된 감상이었는지, 게이트 너머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기분 나쁘게 생긴 검은 피부의 난쟁이들을 향해 초인들의 일제 폭격이 이루어졌다.
- 꾸에에엑!
- 키힉! 킥키힉!
- 쿠케헤헤헤!
웃음과 신음이 섞인 고함이 터져 나왔다. 강신혁은 일제폭격으로 인해 땅이 뒤집어지는 가운데, 피어나는 먼지구름 너머 적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두 개의 대낫을 고쳐 쥐었다.
“저 녀석들, 겁나 단단한데.”
“그런 것 같지.”
모르는 사람인 척하라는 데도 아직까지 그의 근처에 머무르고 있던 백인하가 혀를 차며 중얼거리는 말에 강신혁도 무심코 동의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저 중심에 있었으면 먼지가 되어버렸을 만큼 강한 에너지가 한데서 폭발했는데도 놈들 중 죽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 수 있겠냐?”
“해야지.”
백인하는 마지막으로 부츠 끈을 조이고는 입가를 느슨하게 하며 말했다.
“나도 초인이잖아.”
“엄밀히 따지면 아직 예비지.”
“씁. 먼저 간다.”
백인하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직후 난쟁이 중 한 마리가 백인하의 발차기에 맞아 반대쪽 벽까지 튕겨나가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그뿐만이 아니다 다른 초인들 역시 일제공격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뜻이 앞뒤 안 가리고 뛰쳐나가며 난쟁이들을 일제히 공격했다. SS-급 게이트가 이 정도에서 끝날 리가 없다. 줄여놓을 수 있을 때 숫자를 줄여놓아야만 했다.
난쟁이들은 날카로운 손톱이 달린 손과 발을 휘두르며 저항했지만, 강신혁의 특성의 효과까지 받아 강화된 하이랭커들은 어떻게든 놈들을 상대해내고 있었다.
- 끼히! 끼이히히!
“큭, 빌어먹게 단단하지만…… 상대 못할 정도는 아냐!”
“나와 봐, 큰 거 간다……!”
- 끼이히이이이!
강신혁이 굳이 나설 것도 없이 난쟁이들이 정리되고 있었다.
자신도 끼어들까, 고민했지만 아직 ‘충분치’ 않았기에, 지그시 낫을 땅에 박고 차례를 기다리기로 했다.
‘조금 넓은 곳이었으면 푸른 소도 꺼냈는데.’
유감이었다. 대낫을 휘두르는 건 그 바이크 위에서 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때였다. 난쟁이들이 곳곳에서 죽어나가며 내지르는 단말마에 맞추어 공간 전체에 진동이 내달렸다. 아니, 오히려 심장이 맥박 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 회원님, 나옵니다!
“뭐가요?”
강신혁 역시 게이트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이 비대해지는 것을 감지하기는 했으나, 뭐가 나온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관리자의 대답이 조금 충격적이었다.
- 진짜 적들입니다.
“……그럼 저것들은 뭔데요?”
- 영화 피라X를 보시면 처음 나타나는 식인 물고기에 사람들이 학살을 당합니다만, 엔딩 부분에서 간신히 놈들을 피해 도망나왔나 싶더니 사람 크기만 한 피라X가 나타납니다.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입니다.
“대충 무슨 상황인지는 알겠는데 왜 하필이면 그런 B급 영화로 예를 드는 거죠!?”
그때였다. 게이트를 ‘통하지 않고’ 동굴 한중간, 그러니까 전투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 있던 곳에 아무런 징조도 없이 바로 대왕 피라X…… 검은 피부의 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 우리의 대지. 여기가, 시작이다.
거인의 복부가 찢어지고 거대한 입이 벌어지며, 그 안에서 무시무시한 무엇인가가 눈을 떴다.
강신혁은 거기에 냅다 대낫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