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 Chapter 28. 당신은 알고 있어요 - 1 >
신은아를 올려 보낸 강신혁은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술잔을 서버에게 부탁해 다른 무알콜 음료로 바꾸었다. 받아든 잔은 반투명한 핑크빛 액체가 담겨 반짝이고 있었다.
어째 이것도 느낌이 쎄해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는데, 어느덧 옆으로 같은 잔을 든 은발의 아름다운 여성이 다가왔다. 이나희였다.
“하이랭커 두 명 사이에서 양다리 걸치는 거 재밌어?”
“그런 독단과 편견에 가득 찬 발언은 그만둬줄 수 있을까요?”
강신혁은 툴툴거리면서도 그녀가 들이대는 잔에 자신을 잔을 맞부딪혀 건배했다.
“그냥 친하게 지내는 거예요. 물론 클레어 누나한테는 제가 대시하고 있는 거 맞지만.”
“그래서 희망은 좀 보여?”
"응."
강신혁은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어제 데이트 같은 경우는…… 그건 클레어가 강신혁에게 이성적인 호의가 없다고 하면 여우 주연상을 주어야 할, 사나이 마음을 가지고 논 죄로 고소를 당해도 할 말이 없을 그런 데이트였다.
“그래, 청춘이네. 여덟 살 연상을 상대로.”
“나이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니까요?”
“그럼 뭐가 중요한데. 가슴?”
이나희의 지나치게 대담한 질문에 강신혁은 역시 지금 들고 있는 잔에 술이 담긴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일단은 자신도 솔직하게 대꾸하기로 했다.
“제가 말하려던 건 다른 거지만…… 그것도 중요하긴 하죠.”
“변태.”
“잘 기억해둬요, 선배. 세상엔 가슴을 좋아하는 남자와 가슴을 신경 쓰지 않는 척하는 남자 두 종류밖에 없어요.”
강신혁의 대답을 듣고 이나희는 생각했다. 적어도 엘레노어보단 자신이 우위에 있는 것 같다고.
“그런데 어라, 엘레노어 선배랑 같이 있던 것 아니었어요?”
이나희는 자신의 마음을 읽힌 것 같아 깜짝 놀랐으나 강신혁은 단순히 화제를 돌릴 겸 물어본 것뿐이었다. 괜히 찔리는 마음에 크흠, 헛기침을 한 그녀가 답했다.
“영국 왕실 쪽 인사한테 붙잡혔는데, 백인하가 구출해서 일단 뒤로 빠졌어. 나는 배고파서 혼자 돌아다니던 중.”
앞부분은 사실이었지만 배고파서 혼자 다니고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사실 신은아가 올라가고 강신혁이 프리가 되는 것을 본 그녀가 일행에서 몰래 빠져나와 그에게로 다가왔을 뿐이었다.
“백인하가 구출했다고? 아, 그랬죠.”
뒤늦게 백인하의 대외적 신분을 떠올린 강신혁이 고개를 주억였다. 세계 10위권 길드인 백양의 프린스라면 영국 왕실을 상대로도 얼마든지 당당하게 나갈 수 있을 터.
역시 빽이 좋은 친구는 두고 볼 일이다. 그가 엘레노어에게 바랐던 것도 바로 백인하처럼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은 친구를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강신혁처럼 집도 절도 없는 신인왕이 아니라.
“더글러스 페인은?”
“그 남자는 그때 다른 쪽에 있었어.”
“그 사람은 진짜 바본가?”
“바보지. 우리 학교에 왕 타이틀 달고 있는 놈 치고 바보 아닌 놈이 없어.”
“지금 나랑 엘레노어 선배도 바보라는 것 맞죠? 빨리 알려줘야…… 아, 저기 있네.”
회장을 둘러보니 구석에 엘레노어와 카렌, 백인하가 같이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는 척을 하려 손을 들어 올리는데 이나희가 잽싸게 그것을 붙잡아 내리며 그의 몸을 살짝 자신에게로 끌어당겨 외부에 드러나지 않게끔 했다.
“우리끼리 얘기 좀 해.”
“무슨 얘기? 선배가 나 따 시킨 얘기?”
“응. 그…… 미안.”
[한 달여 전 한국에서 일어난 대역류 사태 이후로도 각국에 대역류의 징조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이는 이전까지의 대역류가 해당 지역에 국한되어 일어났던 것과 달리, 몬스터의 이상발생이 전 세계에 걸쳐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나희가 아주 살짝이지만 그에게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다음 의제에 대해 논하는 의장의 목소리가 회장 안에 담담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강신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나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유는 말할 생각이 없고? 선배가 갑자기 나간 이유는 둘째 치고 엘레노어 선배까지 빼낸 이유.”
“어…… 꼭 말해야 하나? 사과한 걸로 봐주면 안 될까?”
말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강신혁은 어깨를 으쓱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에 묻죠 뭐. 이거나 받아요.”
“뭔데 이거? 억.”
강신혁이 그냥 넘어가주자 안도하던 이나희는 그에게서 받은 명함 더미를 보며 신음을 냈다. 그녀도 바보는 아닌지라 이 명함에 쓰인 글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주 잘 알았다.
“루아낭, SD화학, 메르쿠리우스…… 이거 전부 우리 쪽에서 짱짱한 기업이잖아.”
“나중에 연락하기로 했어요. 어쩌면 우리 뒤에 있을 이만우 선생님을 노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한 번 만나고 나선 실력을 보여주면 되니까.”
“너……."
아무리 월드 루키즈 크리에이터 아티팩트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고 해도 이런 사람들이 알아서 그들을 만나러 와주지는 않는다. 세계초인대회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신은아라는 만만치 않은 거물을 대동하고 있었기에 쉽게 접선하고 끈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명함 한 장 한 장의 가치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모를 만큼 이나희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녀는 그것을 품에 소중히 집어넣었다.
“같이 만나러 가줄 거야?”
“혼자서 자신 없으면요.”
“자신 있지만! 자신은 있지만, 같이 가자는 거야.”
“그렇다면야.”
동업 얘기의 연장선이라 이거지. 강신혁은 웃으며 잔을 비우곤 답했다.
“그래요 그럼. 선배가 졸업하기 전까진 확고한 라인을 만들어놓으면 좋겠네요.”
“아…… 응.”
이나희 역시 조금 수줍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처음 동업 얘기를 꺼냈을 때처럼 미적지근한 분위기가 두 사람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나희!”
어떻게 이 상황을 타파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마침 엘레노어가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그녀가 조금 화를 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마도 착각이 아니리라.
“나희랑 해야 할 얘기가 생긴 것 같아.”
“나는 무슨 얘기인지 잘……."
[그러면 다음으로…… 컥!?]
그때였다. 모니터 너머에서 회의를 진행하던 의장이 대뜸 피를 뿜었다.
"응?"
너무 초현실적인 광경에 강신혁은 지금 이게 실제 상황이 아니라 영화인가, 하는 얼빠진 생각을 했다. 하지만 현실이었다. 의장의 입에서 끓어오르는 피거품은 CG도 연기도 아니었다.
“독이다.”
“몬스터의 독이야!”
모니터를 주시하던 이들 중 일부가 금세 답을 냈다.
“여기도 위험할지 몰라!”
“습격이다! 빌어먹을, 대체 어떻게 반입한 거지?”
금세 회장이 혼란에 휩싸였다. 미리 배치되어 있던 가드들이 사람들의 대피를 도와야 할 텐데, 눈치를 채고 보면 그들이 차례차례 쓰러지고 있었다. 독은 이미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독이다.”
“엘리, 독 저항 아티팩트 필요해?”
“괜찮아, 나희. 그 정도는 이쏘. 그보다 시뇩은.”
“전 걱정할 것 없어요.”
희귀도 SS+랭크, 숙련도 A+랭크의 레지스트 포이즌. 아마 이 회장 안의 누구보다도 독에 대해선 안전할 터였다.
“신혁아!”
“넌 괜찮아 보이네. 카렌은?”
“나, 아티팩트가 있기는 한데 등급이 낮아서……! 일단 전하, 이곳을 나가셔야 해요!”
사색이 된 카렌은 그런 주제에 자신보다는 엘레노어를 챙기려 했다. 강신혁이 단호히 말했다.
“네 아티팩트 꺼내봐. 나희 선배, 인챈트.”
“아, 그래! 일시 성능 강화라면!”
카렌이 목에 걸고 있는 크리스탈 목걸이를 밖으로 빼내자 이나희가 다급히 손톱을 뻗어 거기에 일시 인챈트를 걸었다. 강신혁은 인챈트가 끝나기를 기다려 그 목걸이를 대상으로 특성을 발동, 목걸이의 성능을 끌어올렸다.
“어때.”
“뭐야, 엄청 괜찮아졌어……!”
‘관리자님.’
- 지금 회장에 흘러들어오는 수준의 독은 중급 해독약으로 회복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14층에 퍼지고 있는 독은 최상급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은아는 괜찮은가요?’
- 신은아 회원과 클레어 보일 회원의 레지스트 포이즌 능력으로 막아낼 수 있는 수준입니다.
그렇다면 되었다. 강신혁은 일단 중급 해독제를 한 병 구매해 아직 안색이 좋지 않은 카렌에게 그것을 먹였다. 주위에도 해독 마법을 보유하고 있는 초인이 있었는지, 중독된 사람들이 조금씩 건강을 되찾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독기는 끊이지 않고 들어오고 있으므로 독 저항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닌 이상은 끊임없이 중독 현상에 시달릴 터. 아예 결계를 시전하려는 초인도 있었지만 그래서야 내부에 갇히는 꼴이라는 말에 그만두고 있었다.
“대피해, 일단 이 건물에서 빠져나가!”
회장의 혼란은 가중되어만 갔다. 하지만 모니터 속 화면은 더욱 가관이었다. 끔찍한 독의 확산을 막으려 초인들이 분투하는 와중에, 무려 회의장 한중간에 게이트가 나타나 있었으니까.
“저게 독의 근원인가!”
“이봐, 무작정 도망만 칠 게 아냐. 독을 막을 수단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14층으로, 게이트를 막아야 해!”
“외부에도 게이트가 나타나고 있는데…… 젠장!”
세계초인회의가 벌어지고 있는 지금 이 타이밍에 파리의 한복판에 대역류가 일어나고 있었다. 오늘 의제 중 일부가 자연적으로 증명 된 순간이었다.
게이트 이상발생에는 뒤의 의도가 있다는 것. 그리고 아마도 반 초인연합이 이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
- SSS급 게이트입니다, 회원님. 14층에는 절대 가까이 다가가시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외부의 게이트를……."
- 이곳에도 게이트가 생겨납니다. 등급은 SS-. 최선의 무장을 갖추세요.
관리자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14층으로 향했을 신은아의 안전을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솟구쳤지만 지금 당장 이곳도 급하기는 매 한가지였다.
만약 이 13층의 초인들이 전력이었다면 SS-급 게이트라도 어떻게 해볼 수 있었겠지만, 회장이 혼란스러운 와중에 이미 바깥으로 빠져나간 사람들이 많은 지금 강신혁까지 빠질 수는 없었다.
‘수호황룡의 힘에, 그것까지 꺼내든다면 어떻게든 대적가능할 거야. ……좋아, 할까.’
그는 짧은 고민을 마친 후 친구들을 이용해 잠시 자신의 모습을 가렸다. 직후 그는 신은혁의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시뇩이 너……?”
“아……!?”
친구들을 벽으로 사용했으니 그들만은 강신혁이 장비슬롯을 전환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이미 알고 있던 엘레노어와 이나희는 어색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지만 백인하는 기가 막힌 표정을, 카렌은…… 첫사랑에 실연한 소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 너 이럴 때 할 말은 아닌데…… 나쁜 놈!”
“이럴 때 할 말 아닌 거 알면 가만히 있어. 백인하, 움직이자.”
“칫, 전투 환경 한 번 끝내주네.”
백인하가 툴툴거리며 아공간 아티팩트에서 자신의 장비를 꺼내 걸쳤다. 투왕전 때 착용했던 장비보다 한층 업그레이드된 아티팩트였다.
- 12층에도, 11층에도 게이트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회원님, 이 건물은 지킬 수 없다고 상정하고 움직이세요. ‘14층에 나타난 게이트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그럴 것 같네요!’
관리자의 말에 한숨을 내뱉으며 대꾸한 그는 점차 커지며 막강한 기세를 드러내는 게이트를 살피며 인벤토리에서 두 개의 대낫을 꺼내들었다.
“무기 데뷔무대 한 번 화려하네.”
- 대낫의 데뷔무대는 이곳이 아니라 미로토즈가 아니었습니까.
‘그건 노 카운트로 해주세요.’
“와, 그것도 멋지다…… 헉, 아냐! 안 돼!”
하나하나 키보다도 큰 대낫을 한 손에 하나씩 드는 강신혁의 모습을 뒤에서 멍하니 바라보던 카렌이 그런 말을 중얼거리다 말고 자신의 뺨을 때리며 스스로의 감상을 부정했다.
“카렌, 다른 사람들과 함께 대피해.”
“아, 아뇨! 전하도 함께 가셔야 해요!”
“아니, 나는 싸울 거야.”
“엘레노어 선배, 미안하지만 바깥을 부탁해요.”
창을 꺼내들며 그와 함께 싸울 준비를 하던 엘레노어를 강신혁이 말렸다. 그녀가 반감에 눈을 치떴다.
“내 전투력도 부족하진 않아.”
“선배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라, 선배의 능력이라면 여기보단 바깥에서 싸우는 게 나을 거예요.”
"큭."
더욱이 그녀는 전투 지속력에 있어서 다소 처지는 경향이 있다. 스스로도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엘레노어는 강신혁의 말에 기세를 잃었다.
“카렌, 빨리 선배 데려가.”
“그런 멋진 모습으로 신혁이 목소리 내지 마! 우와아아앙!”
“카렌, 카, 카렌!?”
카렌이 울음을 터트리면서도 엘레노어를 끌고 달려 나갔다. 차마 저항하지 못하고 그녀에게 끌려가는 엘레노어.
그 사이 더글러스 페인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하면, 다른 귀빈들을 인솔해 대피시키고 있었다. 물론 잘 하고 있는 짓이지만, 그렇지만!
“좋아, 둘 다 인챈트 완료.”
“우오, 나희 누님 능력 개쩌네요.”
“누님이라고 하지 마라.”
한편 카렌이 호들갑을 떠는 사이 이나희는 냉정하게 강신혁과 백인하에게 인챈트를 실시했다.
부츠가 인챈트로 족히 2할 이상 강화된 것을 느낀 백인하가 감격하며 달라붙으려 들자 코웃음을 치며 밀어낸 그녀는, 자신에게 인챈트가 된 것조차 눈치 채지 못하고 게이트를 주시하고 있는 강신혁의 등을 툭툭 쳤다.
“야, 후배.”
“네? 아, 선배도 엘레노어 선배랑 같이 바깥에……."
그가 돌아본 순간, 이나희는 그의 입술에 달라붙어 짧은 키스를 남기곤 물러섰다.
“이건 불사의 인챈트. 그럼 나도 간다, 인챈트까지 걸었으니까 절대 죽지 마!”
잽싸게 뒤돌아 은색의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달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강신혁은 당황과 곤혹을 잘 버무려 외쳤다.
“아니 이거 무조건 죽는 복선이잖아!?”
“……뭐지, 나는 죽어도 된다는 건가? 시뇩아, 나 울어도 되냐?”
- 부, 불여우……! 불여우가 너무 많아……!
14층을 비추는 모니터 안에서 게이트가 개방되는 모습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파리 전역에 나타난 게이트가 일시에 몬스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