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 Chapter 27. 파리의 장인 - 5 >
“신영 기사학과 1학년 강신혁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호오, 이 소년이. 반가워요, 루아낭 알죠? 나 루아낭 홍보팀장 세이라예요.”
“신영 기사학과 1학년 강신혁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요즘 유명하죠. 그런데 초인협회에서 이미 지원을 하고 있었군요. 과연 뇌제님, 눈이 좋으십니다.”
“잘 부탁합니다. SD화학 에드거 베킨스입니다.”
“신영 기사학과 1학년 강신혁입니다.”
강신혁은 자신의 소속과 이름을 말하는 자동응답기가 되어 신은아와 함께 회장을 돌아다녔다. 신은아가 소개시켜주는 인물들은 한 명 한 명 무시할 수 없는 신분을 갖고 있었기에 강신혁도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이나희 선배한테 소개를 해줘야 할 사람들도 몇 명 보이네.’
이나희가 아티팩트 장인으로서 성장하고자 한다면 필히 알아두어야 할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안 그래도 아티팩트 업계와 관련된 사람들은 강신혁이 올해 아티팩트 경연에서 대상을 수상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중에 연락을 달라는 얘기를 해오는 경우가 많았고, 강신혁 역시 이나희와 함께 얘기를 해보겠다며 그들에게 긍정적인 뜻을 전했다.
어쩌면 이나희도 알아서 움직이고 있지 않을까 했지만 슬쩍 뒤를 돌아보니 엘레노어와 함께 과자나 주워 먹고 있는 모습이, 저 여자에게 활약을 기대하기는 무리로 보였다. 나중에 얘기를 해주며 한껏 잘난 척을 할 생각을 하니 앙금이 조금 풀렸다.
“그, 그런데 선배?”
"응?"
신은아가 이전 손녀 모드에 버금가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평소 그녀를 알고 있던 사람들이 움찔하며 주위로 물러날 정도였다. 애교어린 그녀의 모습에 제법 익숙한 편인 강신혁조차 조금 긴장할 정도로 귀여웠지만…… 동시에 묘한 박력이 있었다.
“그게, 손은 언제까지 잡고 있을 거예요?”
“계속.”
“계속 손을 잡고 다녀도 다른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을까 싶은데……."
“계속.”
“그렇구나.”
“응.”
- 불여우.
저항은 무위로 돌아갔다. 강신혁은 부디 신은아와 신은혁과 강신혁의 삼각관계 스캔들이 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녀가 이끄는대로 회장을 돌아다녔다. 관리자의 속삭임은 안타깝지만 무시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세계초인회의가 시작할 시간이 되었다.
- 제 15회, 세계초인회의가 시작됩니다.
무기질적인 음성이 홀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곳곳에 설치된 스크린이 환해지며 14층 회의장 내부가 비추어졌다.
한 명 한 명 세계적인 유명세를 지니고 있는 100명의 초인들이 거대한 원형의 테이블에 둘러앉아있는 모습이 실로 장관이었다.
- 의장의 인사가 있겠습니다.
이번 회의의 의장은 프랑스 초인협회의 협회장(엄밀히 말하면 초인협회 프랑스 본부장이었지만)인 샬럿 자드 마콩.
과거 여제라는 별명으로 초인계에 군림했던 그녀는 여성 초인 가운데에서는 제일 유명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으로, 현역으로 활동할 땐 늘 3위권 안에 머물렀던 탑 랭커 중의 탑 랭커였다.
그래서 프랑스는 여성 초인들의 기가 아주 셌는데, 차기 여성 초인 최강의 칭호는 뇌제 신은아가 가져올 것으로 유력하게 점쳐지는 만큼 프랑스에서는 그 타이틀을 뺏기지 않기 위한 여성 초인들의 치열한 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회의 의장을 맡은 샬럿 자드 마콩입니다. 먼저 회의에서 준수되어야 할 사항들에 대한 안내를 간략히 하죠.]
백발의 초인이 입을 열어 담담히 말했다. 스크린을 통해 전해지는 무게어린 목소리에 강신혁은 내심 감탄했다. 옆의 신은아는 여전히 그의 손을 쥔 채 스크린 속의 여제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 회의의 주요 의제는 반 초인연합 - 요르문간드에 대한 대처, 현재 전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게이트 이상 사태의 대처. 고대 아티팩트 개발 부문의 보고…… 마지막으로 하이랭커의 랭크 갱신입니다.]
그 말에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14층 회의장뿐만 아니라 지금 강신혁과 일행이 위치한 13층도, 그리고 아마도 12층과 11층도.
요르문간드나 게이트 이상 사태에 대해서는 이미 모두 인식하고 있기에 그리 놀라울 일이 없었으나, 중요한 점은 하이랭커의 랭크 갱신이었다.
세계초인회의는 3년에 한 번씩 열리며, 하이랭커의 랭크 갱신은 이때에만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회의 때마다 이 의제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하이랭커의 위치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얘기다.
“랭크 갱신? 대체 누가.”
“그러고 보면 뇌제가 몇 년 사이 부쩍 강해졌다지.”
“한국에서 대역류가 있었잖아. 강함을 증명하기엔 충분한 기회였을 거야.”
이곳저곳에서 명탐정들의 시선이 날아들었지만 신은아는 그 시선을 담담히 받아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오늘의 주인공 중 한 명이 될 것이라 충분히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일각에선 이런 목소리도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봐, 그 마스크 맨도 있잖아. 죽음의 인형사라고 했던가?”
“아, 신은혁!”
강신혁은 순간적으로 움찔해 몸을 움츠렸다가, 이런 짓을 했다간 오히려 정체가 들킬 뿐이라는 생각에 자세를 고쳤다.
- 당당한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회원님. 이 기회에 모두에게 회원님의 우월한 능력을 드러내세요. 자, 가면을 쓰세요.
‘싫어요.’
- 10,000HP 보너스!
‘보너스 줘도 안 할 거예요!’
강신혁에게 쏟아지는 관심을 즐기는 듯한 관리자의 메시지를 무시하면서도 사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곧 이상한 소리가 들려 왔다.
“협회에서 공식 입장을 냈어. 그의 능력은 다수를 상대하는 데에는 최적이지만 마력의 수준 자체는 그리 높지 않다더군.”
“흠, 하지만 그만한 숫자를 감당할 수 있는 초인이라면 마력이 다소 낮아도 하이랭커로 인정해줄 수 있다고 보는데. 협회 놈들 생각은 모르겠어.”
“결국 재앙으로부터 인류를 구하는 건 절대적인 강자니까. 하이랭커의 기준은 엄격해야 한다고.”
협회에서 대체 언제 신은혁에 대한 공식 입장을 냈다는 것인지 강신혁은 무척 궁금했다.
아마 신은아와 관계되어있겠지만…… 협회의 랭킹 측정 기준이 마력이라면 그도 납득할수 있는 일이다. 강신혁에겐 마력이 아예 없으니까.
‘한창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외부요원이 측정했나보네.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위험한 거 아냐? 신은혁도 마력이 없다는게 밝혀졌다면 누구나가 강신혁과 신은혁을 연결해 의심할 수 있을 테고…….'
강신혁은 잠시 고민했지만 그의 옆에 있는 신은아의 표정이 한결같은 것을 보며 고민을 버리기로 했다.
어차피 그를 관리하고 있는 것은 그녀다. 신은혁의 마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높지 않다’고 밝혀진 것도 그녀가 관계한 덕분이겠지. 그렇다면 앞으로도 그녀를 믿을 뿐.
신영을 졸업할 때쯤이면 밝혀져도 큰 문제가 없을 만큼 그가 성장해 있을 테고.
“후배, 회의가 시작돼.”
그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신은아가 그의 손을 더 세게 잡아왔다.
하지만 손을 잡으면서 손깍지를 끼는 것은 좀 그렇지 않을까. 그냥 손을 잡는 것까진 어떻게 신뢰관계라고 포장하는 것이 가능해도 이건 그냥 연인관계라고 광고하는 것 같지 않은가…….
“안 돼.”
강신혁이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어떻게는 손깍지 상태를 회피해보려 하는데 신은아가 그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안 놔줘.”
“은아 선배?”
“포기해.”
“또 어리광이야?”
“애교야.”
- 불여우우우!
그걸 스스로 주장한단 말인가? 하지만 분하게도 그런 그녀가 귀엽게 느껴졌기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반 초인연합은 인류가 패퇴한 아프리카 대륙을 기점으로 삼아 활동하고 있습니다만, 최근 그들이 아프리카의 몬스터 세력과 함께 움직이는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이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왔던 몬스터 무리와의 연결이 증명된 것입니다. 먼저 몬스터의 지성 연구에 관한 보고를…….]
회의는 처음부터 큰 폭탄을 터트리며 시작되었다. 회의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서로 떠들고 있던 사람들은 지금 모두 조용히 스크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간혹 잔 속의 술을 홀짝이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
강신혁은 무심코 자신의 손에 들린 잔을 바라보았다. 무알콜 샴페인을 부탁했던 것 같은데, 잔 안에서 느껴지는 향은 명백한 알콜이었다.
- 국제 초인 랭킹 13위 주노 발렌 타인 , 발언하세요.
[이제 더는 기밀이 아니게 되었으니 발언하지.]
이제 갓 스무 살이 되었을까 싶은 젊은 금발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겉보기와는 달리 남자의 나이는 30대 중반으로, 마력이 지나치게 많아 노화가 늦추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주노 발렌타인. 미국의 유명한 하이랭커로, 언행이 가볍고 폭력적이지만 확실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평판이 있었다. 무려 SS급의 게이트에서 발견된 쌍권총 아티팩트를 활용하는 사격술로 아주 유명했다.
[세 달 전 이탈리아 영해에서 벌어진 특수임무에서 수중 게이트에 진입하는데 성공했는데, 그때 요르문간드와의 전투가 있었다. 당시 확인한 바로는 요르문간드에 속한 놈들은 딱히 특별한 마법으로 몬스터들과 소통하거나 부리는 게 아냐. 오히려 그놈들, 몬스터 놈들이 요르문간드를 부리는 것처럼 보이더란 말이지.]
[요르문간드가 특정한 몬스터의 지시를 받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까?]
[오히려 우리가 알고 있는 요르문간드는 극히 일부가 아닐까 하는 얘기를 하는 거다. 애초에 몬스터 놈들이 인간들을 포섭해 요르문간드에 끌어들인 게 아닐까.]
의장을 상대로도 거리낌 없는 말투를 취하는 것이 과연 싹수가 없어보였지만 그녀는 딱히 그의 태도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초인들이 발끈하는 것이 보였다.
[전 세계에 방영되고 있는 중요한 자리다, 주노 발렌타인. 의장에 대한 예의를 갖춰라.]
[쯧, 딱딱하기는. 그러니까 너한테는 여자가 안 붙는 거야.]
- 회의와 관계없는 발언은 삼가 해주시기 바랍니다.
랭킹 22위의 마이클 샘슨과 그 사이에 시비가 붙으려던 순간 재차 회장 내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이클 샘슨이 먼저 자리에 앉자 주노 발렌타인이 히죽 웃으며 재차 입을 열었지만, 분명 그가 뭐라 말하고 있음에도 목소리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 회의와 관계없는 발언은 삼가 해주시기 바랍니다.
[칫.]
"저거."
스크린을 보며 신은아가 말했다.
“클레어가 만든 거야.”
“AI?”
“마력 기반 프로그래밍으로 기계를 유사 아티팩트화하는 것. 제법 제한도 많고 마석도 많이 소모되지만, 그 분야에서 클레어를 따라 갈 사람은 없어. 연금술사는 소프트웨어의 전문이니까.”
강신혁은 그 말을 들으며, 신영의 로열 클래스에도 클레어가 관여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하긴 하드웨어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별로 자신이 없다고 누나가 그랬었죠.”
"......."
"왜요?”
"나도 클레어처럼 누나라고 불러줬으면 좋겠어.”
"할부지라고 부르는 주제에.”
"이제 안 부를 거야.”
"그래도 누나처럼 느껴지지가 않으니까 안 돼요.”
"치사해……."
어째설까, 신은아가 짓는 표정에 강신혁의 가슴이 철렁했다. 어딘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느낌이 들었지만 그것을 곰곰이 따지고 들어 가는 것도 망설여져, 결국 그는 그녀의 시선을 외면하고 말았다.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강신혁은 괜히 클레어에게 미안한 느낌이 들어 신은아의 손을 놓으려 했지만 끝내 놓지 못했다. 아마도 그것은 그녀에게 무한한 애정을 품고 있는 자신의 전생, 모루의 탓이리라.
“그래도 손 잡아줬으니까 참을게.”
“그쪽에서 먼저 잡아놓고.”
“다녀올게.”
강신혁의 말은 못 들은 척, 마지막으로 한 번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놓으며 신은아가 말했다.
“랭크 갱신하고 올게.”
대체 어느 틈에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흐른 것일까.
어느덧 회의의 의제가 다음으로 넘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