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 Chapter 27. 파리의 장인 - 4 >
제15회 세계초인회의는 프랑스 파리의 1구에 우뚝 솟은 초인협회 프랑스 본부에서 열렸다.
프랑스 초인전력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초인협회 본부. 건물 안에 들어서는 것만으로 짜릿짜릿한 기세가 전해져왔다.
“뭘 그렇게 둘러봐, 클레어 언니 찾아?”
“아, 누나는 여기에 와서 연락을 준다고 했어요.”
"큭."
옆에서 그에게 핀잔을 주던 이나희가 강신혁의 대꾸에 발끈해 그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그래봤자 본인이 아플 뿐이다. 더욱이 그 옆에서 엘레노어가 서운한 표정으로 이나희를 째려보고 있기까지 했다.
“나희가 그런 짓을 하니까……."
“왜, 뭐, 왜.”
“나희는 바보야. 미오.”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거든? 그 언니가 그런 여우 짓을 한 게 잘못이지 나는……."
만약 이나희가 엘레노어를 붙잡아놓고 있지 않았으면 엘레노어가 클레어를 제치고 강신혁과 오페라를 보러 갔을 것이다. 그러니 전후사정을 알게 된 엘레노어가 이나희에게 투덜거리는 것도 당연한 일. 둘이 서로를 째려보는 옆에서 카렌이 아연해져 중얼거리고 있었다.
“와, 여자의 우정이 이렇게 깨지는 거구나……."
“뭐냐, 내가 모르는 사이 대체 뭔 일이 있었기에 이쪽만 청춘 풀 스로틀인데?”
한편 어제 하루 동안은 누구와도 연락이 되지 않아 혼자 다녀야 했던 백인하는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급격히 변화한 이들의 관계도에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러나 강신혁이 어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말하려 하는 순간 이나희와 엘레노어가 일시에 그와 백인하를 째려봤다.
아무래도 강신혁이 클레어와 데이트를 했던 것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 강신혁은 양손을 들어 올려 항복의 의사를 표했다.
“……뭐 그런 일이 있었어.”
"대충 알았어. 누군 프랑스어 통역을 해줄 사람이 없어서 하루 내내 유사 미아 체험을 했는데 넌 그동안 청춘드라마 찍고 있었다는 거지. 시뇨기 이 배신자!”
“다들 이쪽으로! 13층으로 이동하겠습니다.”
기어이 백인하까지 적으로 돌아선 와중에 시아라 베르트랑이 이들을 인솔해 엘리베이터로 데려갔다.
유독 넓은 협회 본부 1층 로비는 협회에서 일하는 직원들과 프랑스 초인협회 소속 초인들, 그 외 오늘 일정을 위해 참가한 세계 각국의 초인들로 바글거리고 있었다.
“회의는 14층에서 열립니다. 각국을 대표하는 초인들과 엄선된 용병단의 대표, UN게이트대책기구의 대표, 세계초인랭킹 50위 안에 속하는 랭커를 포함해 100명의 초인이 직접 회의장에 입실하게 되며, 우리를 비롯한 외부 참가자들은 11층부터 13층까지의 회장에서 모니터로 회의를 참관, 드물게는 발언권을 얻어 발언할 기회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마어마한 기회를 잡은 겁니다. 초인역사가 한 걸음 나아가는 순간을 함께하게 된 거지. 우리가 신영을 대표한다는 생각으로 당당히 있도록.”
시아라 베르트랑의 말에 이어 교장 신윤학이 흡족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올해 신영의 대표로 뽑힌 이들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물론 신영의 3강 중 한 명으로 꼽혀야 할 마도왕이 탈주하는 사건이 있기는 했지만!
‘그러고 보면 나탄 보댕은 프랑스인이었지. 혹시 지금 여기에 있을 수도 있을까.’
그야말로 설마다. 나탄 보댕의 자퇴는 국내외로 비웃음거리가 되고 있는데, 설령 프랑스에서 나탄 보댕을 거두었다고 해도 필사적으로 그의 존재를 감추려 들리라.
덩달아 나탄 보댕이 자퇴를 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 강신혁의 이름도 초인사회에 제법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었지만 강신혁은 그 부분에 대해선 간과하고 있었다.
“13층은 파티회장이 되어있습니다. 회의가 시작되기까지 다과와 차를 즐기며, 다른 초인들과도 가능하다면 소통을 시도하도록 합시다.”
“터무니없는 말씀을 하시네요, 선생님. 나를 모르는 유명인들한테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걸라고요? 그게 대체 무슨 고문이죠?”
여태껏 타고난 얼굴로 버텼을 뿐 사교성에는 별로 자신이 없는 강신혁은 교사의 말에 식겁했다. 그러나 엘레노어는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 평범한 파티잖아.”
“엘레노어 선배부터가 평범하지 않거든요?”
일행을 태운 엘리베이터가 빠르게 상승했다. 문이 열리고 13층의 정경이 드러나자 누구나가 숨을 몰아쉬었다. 1층에 비해서도 분명히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공간 확장 아티팩트입니다. 30년 전의 하이랭커, 아이언 블러드가 S급 게이트에서 얻어 나온 것이라고 알려져 있죠.”
“신영에도 비슷한 물건이 있지.”
교장이 지지 않는다는 투로 대꾸하고는 씩 웃었다.
“그러면 다들 유익한 뭔가를 얻어올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네.”
“교장선생님께선?”
“회의에 참가해야지.”
과연,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100명의 초인 가운데 신윤학이 꼽힌다는 얘기다. 하긴 신영의 학생들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회의 참가자인 신윤학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세간에 신영과 비교되는 초인양성학교가 제법 있기는 하지만, 학교의 대표가 세계초인회의에 직접 참가하는 건 우리 신영뿐입니다.”
시아라 베르트랑 역시 제법 자랑스러운 투로 말했다. 교장은 학생들에게 시선을 한 번씩 주고는 엘리베이터의 문을 닫았다. 더글러스 페인이 13층에서 14층으로 바뀌는 엘리베이터 전광판을 가만히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10년 지나기 전에 이 위까지 올라간다.”
“초인회의가 3년에 한 번씩이니까 기회는 세 번 남았네요.”
“네놈, 역시 건방져졌어.”
강신혁의 말에 콧잔등을 문지르며 대꾸한 더글러스 페인이 괜히 엘레노어의 안색을 살폈다. 방금 자신이 내뱉은 말을 그녀가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이 쓰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엘레노어는 여전히 이나희와 서로를 견제하느라 바빠 더글러스 페인을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어…… 선배라면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럼요.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어.”
살짝 풀이 죽는 그의 모습에 신인전 결승전에서 강신혁과 붙었던 남학생(그도 이번에 비룡기사단 단원이 되었다.)이 그를 달래주었다. 강신혁도 다급히 말을 보탰다.
엘레노어가 이나희와 냉전 무드를 형성한 근본적인 이유가 강신혁 때문이라는 것을 더글러스 페인이 깨닫지 못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시뇩아……."
“왜."
더글러스 페인이 간신히 진정하곤 페인 가문의 후계자모드에 돌입, 회장 내부의 유명한 초인들에게로 다가가는 것을 전송한 후 돌아서니 백인하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다 미녀밖에 없어……! 혹시 여긴 천국이 아닐까?”
“네가 이쯤에서 내 예상을 배반하는 말을 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초인은 랭크가 높아질수록 몸이 최상의 형태로 가다듬어지고, 얼굴의 모난 부분도 조금씩 균형을 갖추게 된다. 황금비율이라는 말이 있는데, 랭크가 높은 초인은 조금씩 이 황금비율에 가까워지는 이목구비를 갖게 되는 것이다.
물론 원판불변의 법칙은 여기에도 적용되기에 원래 타고난 얼굴에 따라 그 결과물이 판이하게 달라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지간한 성형수술 이상의 보정이 더해지는 것은 분명한 사실. 상대적으로 미남미녀가 많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가자, 시뇩아! 가자!”
“혼자가라고!”
그때였다. 백인하가 강신혁을 잡아끌고 나서려는데 엘레노어가 그의 손 위에 가만히 손을 얹은 것이다.
“오해 받을 짓, 안 하는 게 좋아.”
“알제 누님?”
“백양의 후계자인 네가 이 자리에서 시뇩을 리드하는 모습을 보이는 고, 좋지 않다고 생각해.”
그 말을 듣는 순간 강신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편 백인하는 그 말에 눈썹을 가늘게 떴다.
“아무리 존경하는 알제 누님이라도 그 말은 조금 그냥 넘어가기 힘든데요. 전 딱히 시뇩이를 이용하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만.”
“그렇다면 더욱 큰 문제. 오해를 받기 전에 떨어지는 게 좋아.”
“그럼 누님은 괜찮고요?”
“나는……."
엘레노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크흠, 헛기침을 하곤 답했다.
“비룡기사단 부단장이니까 단장인 내가 인솔해도 이상하지 않아.”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도 과연 그렇게 어필이 될지 모르겠네요. 특히 알제 누님은 사정이 조금 복잡하잖아요.”
아마도 백인하는 엘레노어의 비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리라. 그 말에 엘레노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평소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던 것에 비해 제법 서로를 잘 알고 있는 것이 강신혁은 묘하게 감탄스러웠다. 과연 이것이 타고난 상류층의 의무란 말인가. 자신을 대하던 때와는 달리 보이지 않는 칼과 방패를 들고 서로를 찌르는 듯한 환영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렇지, 둘다 뒷사정이 복잡하니까 어쩔 수 없겠네. 그럼 후배는 나랑 같이 있자. 어제 바람맞힌 것 대신해서 내가 한 몸 희생할게.”
물론 마지막에 나선 것은 이나희였다.
“나는 당장 얼마 전에 후배랑 같이 아티팩트 경연에서 대상을 수상한 이력이 있어. 같이 다녀도 조금도 이상할 게 없지?”
“나희도 뒷사정이 복잡하잖아.”
“얼마 전에 나탄 보댕과 관련되었던 일도 쫙 퍼졌을 텐데 굳이 시뇩이랑 둘이서만 있겠다니 혹시 소문에 쐐기를 박으려는 거 아녜요, 이나희 선배?”
강신혁은 자신을 놓고 말다툼을 벌이는 세 명을 보며 이런 장면을 어디서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 때문에 싸우지 말라고 소리라도 질러야 하는 것일까. 게다가 그중의 한 명이 백인하라는 점도 묘하게 열 받았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나타나 강신혁을 잡아끌었다. 강신혁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세 명이 일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강신혁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는 뇌제 신은아의 모습이 있었다. 언제나처럼 차분한 흑발, 그에 반대되는 황금색의 눈이 좌중을 압도했다. 특무부의 유니폼을 갖춰 입고 있는 점도 압박감을 더했다.
“아."
“아……."
"오우......."
신은아의 스킨십은 격렬하지는 않았으나 확고했다. 강신혁은 자신의 어깨를 단단히 움켜쥐고 있는 신은아에게서 도무지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협회는 후배에게 후원을 하고 있어. 너희는?”
"그......."
“절친…… 아니 죄송합니다.”
“동아리 후배인데……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초인양성학교의 학생이 공적인 자리에 나설 기회가 일단 없겠지만, 만약 그럴 일이 있다면 후원자인 협회의 이름을 대는 것이 타당한 일. 단숨에 명분을 빼앗긴 세 명의 학생은 굴욕감을 느끼며 물러났다.
신은아는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강신혁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럼 실례하겠어.”
“네, 넵."
“뇌제님 영광……."
신은아는 그들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강신혁을 이끌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들과 거리가 조금 멀어지자 간신히 강신혁의 어깨에서 손을 떼며 그에게 속삭였다.
“앞으로는 친구들과의 거리감을 신경 쓰는 게 좋겠어.”
“아, 네.”
당신이 그런 얘기를 하다니, 같은 얘기는 절대 하면 안 되겠지. 안 그래도 요즘 제법 괜찮아졌으니까……. 강신혁은 한숨을 쉬며 그녀의 한 손을 잡았다. 신은아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
“아는 사람들한테 소개시켜주시려고 한 거 아니에요? 가죠.”
“소, 손.”
“어라.”
의식하지도 못하고 자연스럽게 잡았다. 이래서야 정말로 신은아에게 거리감을 조심하라고 혼나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었다.
“미안해요, 동기화율이 높아질수록 점점 선배가 편하게 느껴져서…… 놓을게요.”
“아, 아냐. 후원자와의 관계가 돈독함을 나타내주는 무척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해!”
어지간한 래퍼보다 빠른 속도로 말을 뱉은 신은아가 강신혁의 손을 마주 쥐며 회장 안으로 나아갔다. 그녀의 볼이 제법 붉었다. 이러다 신은아와 관련된 스케줄 기사가 또 신문 1면을 장식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봐줄게.”
“뭘 봐줘요?”
“그런 게 있어.”
실은 어제 클레어와 강신혁이 오페라 극장에서 데이트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 오늘 강신혁과 만나면 섭섭함을 표출하려 했던 그녀였지만, 강신혁이 먼저 손을 잡아주었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분노가 씻은 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쉬운 여자라는 생각이 들어 분했지만, 그래도 기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역시 내가 제일 앞서있는 거야.’
신은아는 착각을 가속시키며 속으로만 키득키득 웃었다.
세계 초인 회의가 시작되기 까지는 1시간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