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 Chapter 27. 파리의 장인 - 2 >
일행은 상젤리제를 만끽했다. 혹시 이나희의 아버지 얘기를 신경 쓰고 있는 것은 강신혁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보이는 샵마다 들어가 깍깍거리며 떠들어댔다.
여자는 무섭다. 쇼핑도 무섭다. 쇼핑하는 여자는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 강신혁은 익히 알고 있던 진리를 여기서 재확인했다.
“후배후배, 나 지갑 하나만 사줭.”
“싫어용.”
재수 없게 달라붙는 이나희에게 똑같이 재수 없게 답해준 강신혁은 가게 유리창 건너편에 보이는 가게 간판들을 살폈다. 한쪽에는 명품 샵이 즐비한 반면 거리 반대편에는 신기하게도 아티팩트 브랜드샵이 입점해있었다.
우스운 것은 이쪽에 자동차 브랜드샵이 있으면, 반대쪽에는 마력구동기의 브랜드샵이 들어서 있다는 것. 마치 구시대의 상징과 신시대의 상징이 경쟁이라도 하고 있는 듯했다.
“몬스터가 나타나고 허공에 게이트가 열리는 세상이 됐는데도 이런 가죽 지갑이며 시속 250킬로미터밖에 못 밟는 자동차 따위에 돈을 펑펑 쏟는 사람들이 남아있다는 게 아이러니하네요.”
“넌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바보네. 아무 쓸모도 없으니까 더 환장을 하면서 사는 거잖아.”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예요. ……아, 그런가.”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았던 시대부터 그러했다. 갑부들은 아무런 쓸모도 없고 겉만 화려한 명품 따위에 돈을 쏟을 만한 여유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며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나희 말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엘레노어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샵 안에서 할 얘긴 아닌 것 같아.”
“한국말로 떠들었으니까 괜찮잖아, 엘리.”
“초인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을 알고 있다면 이런 대형 샵의 점원들이 한국어를 할 줄 안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 텐데?”
설마했지만 사실이었다. 일행은 점원의 눈초리가 심해지는 것을 느끼며 다급히 샵에서 탈출했다. 마침 좋은 타이밍이기도 했다.
“그럼 이제 가볼까.”
"응."
이나희는 각오를 다진 모양이었다. 그녀가 강신혁에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빼빼로 없는데요?”
“그 대신 손이라도 내놔.”
강신혁은 픽 웃으며 그녀의 떨리는 손을 잡아주었다. 반대편에서 엘레노어가 이나희의 남은 손을 잡았다. 이나희가 그것을 매정하게 떨쳐냈다.
“나희!?”
“마음은 고맙지만 지금은 네 차례가 아니라서.”
“두 사람만 통하는 뭔가가 있다는 고야?”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 엘레노어. 친구가 의지해주지 않는다는 섭섭함, 친구가 자신을 제쳐두고 강신혁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그녀를 괴롭혔다. 그 옆에서 카렌이 굳이굳이 그녀의 상처를 캤다.
“우정 따윈 결국 남자 앞에선 필요 없다는 얘기 아닐까요? 아앗, 아파요 나희 선배!”
“후배랑 난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그렇게 손 꽉 쥐고 있으면서 그런 말씀을 하셔도 설득력이…… 아얏! 단장님은 왜!?”
헤매는 카렌이나 엘레노어와는 달리 강신혁은 이나희의 기묘한 행동의 이유를 대충 알 것도 같았다. 그렇다기보단 이전 시아라 베르트랑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말없이 이나희를 따라주기로 했다.
강신혁도 몇 번은 들어본 아티팩트 브랜드샵, 이름을 대면 초인들이 돈을 다발로 들고 달려들 개인장인들의 상점을 지나 이윽고 교차로에 이르렀다.
그 길목에 번듯한 상점 하나가 서있는 것이 강신혁의 눈에 들어왔다. 상젤리제 거리의 다른 건물들과 어울리는 붉은 벽돌 건물에는 Lee&Marion이라는 심플한 간판이 걸려 있었다.
“이거……."
“그래, 여기야."
이나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강신혁의 손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강신혁의 눈이 금빛으로 빛나며, 용이 발톱으로 긁고 지나간 듯한 스크래치가 새겨졌다.
용의 눈은 모든 것을 꿰뚫어본다. 이 번듯한 상점이 실은 전부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환영을 걷어내고 나면 거기에 보이는 것은 불에 그슬린 흔적, 군데군데 무너진 벽. 이곳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깨닫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물론 영력을 다루는 그라면 굳이 눈이 없었어도 바로 사물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지만, 보는 것만으로 진위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역시 편리한 일이었다.
“신혁이 너, 눈이……."
“……들어가도 돼요?”
“응. 여기 내 이름으로 되어 있으니까.”
굉장한 폭탄선언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곳 중 하나인 상젤리제 거리의 상점이 자기 거라는 얘기를 하다니. 하물며 그런 상점이 여태까지 아무런 관리도 되지 않고 단지 위장용 환각마법 하나 걸린 채 방치되어 있다니.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묻고 있을 때가 아니다. 강신혁은 이나희와 함께 상점의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섰다.
그러자 비로소 처참한 실내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밖에서 보았을 때 익히 예상했던 그런 모습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거인이 손바닥으로 훑고 지나간 듯 불규칙하게 으스러지고 쓰러진 진열대, 곳곳에 깨져 흩어진 유리. 지나치리만치 철저하게 현장이 보존되어 있어 마치 바로 방금 사건이 일어난 것만 같았다.
"......."
“……이건.”
뒤따라 들어온 이들도 말을 잇지 못하고 침묵했다. 가게 안에 짙게 감도는 죽음의 여운을 느낀 것이리라. 이나희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여기 돌아온 건 오랜만이야. 와, 난장판이네 진짜.”
“괜찮아요?”
“그렇게 걱정하는 눈으로 보지 마. 짜증나.”
“미안해요.”
“사과하지도 마. 뭘 잘못했다고 네가 사과야, 사과는.”
이나희는 퉁명스레 툭툭 내뱉으며 강신혁의 손을 으스러져라 세게 쥐었다. 그녀의 붉은 눈이 쉴 새 없이 어질러진 매장 안을 훑고 있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일까. 강신혁은 역시 묻지 못했다.
대신 그녀의 손을 마주 꽉 잡아주었다. 이나희는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러던 한 순간, 질끈, 그녀의 눈이 감겼다.
삭막한 매장 안, 무너진 벽 너머로 비치는 햇살이 그녀의 은색 머리를 비추고 있었다. 우습게도 강신혁은 그것이 순간 순백의 미사포로 보였다.
마치 하늘 너머의 누군가에게 기도를 드리는 듯한 엄숙함마저 느껴졌다. 만약 그렇다면 그 대상은 아마도 신이 아닌 특정한 누군가일 터였다.
“후…… 끝.”
그러나 한순간, 그녀는 깊은 숨을 토해내곤 다시 눈을 떴다. 여기에 와서 특별한 일은 무엇 하나 하지 않았는데, 그녀 홀로 짐을 털어낸 듯 홀가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 됐어. 손 놔도 돼, 후배.”
“잡고 싶으시면 당분간 이대로 있어도 되는데요.”
“좋네. 그거 공짜야?”
“어?”
괜히 머쓱한 마음에 가볍게 농담을 했더니 이나희가 능청스레 받아쳤다. 강신혁이 놀라 움찔하자 이나희는 킥킥 웃으며 그의 손을 놓았다.
“농담이야. 조금 더 하면 엘리한테 찔릴 테니까.”
“안 찔로!”
“가자. 건물 무너질라.”
얼굴이 빨개져선 소리를 지르는 엘레노어를 깔끔하게 무시하며 돌아서는 이나희. 강신혁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그녀의 뒤를 따랐다. 다들 뭔가에 홀린 표정을 지으면서도 뒤를 따라 건물을 나왔다.
“후배, 너 졸업하고 나면 나랑 동업할래?”
상점을 나와 마지막으로 간판을 올려다보며 이나희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그에게 제안했다. 강신혁은 제법 진심을 담아 대꾸했다.
“저 오라는 곳 많은 건 아시죠.”
“내 능력이 너에 비해 한참 딸리는 것도 잘 알아.”
“그럼 앞으로 많이 노력하셔야겠네요.”
“좋았어.”
이나희가 멋쩍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건 앞으로 많이 노력하겠다는 뜻이겠지. 강신혁은 그녀의 긍정적인 변화에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웃음을 흘렸다.
사람이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생각보다도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때로는 그저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사람을 바꾸는 게 가능하다. 만약 강신혁이 이나희에게 있어 그런 존재가 되었다면, 그건 제법 기쁜 일이었다.
- 불여우를 능숙하게 거절하는 회원님의 멋진 모습에 7,000HP 보너스!
‘방금 그거 거절이었나? 어라? 관리자님 괜찮아요?’
아무래도 관리자는 현실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는 나머지 현실도피를 시작한 모양이었다.
@@@
그 날 저녁, 호텔로 돌아오니 담임교사인 시아라 베르트랑이 강신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평소 학교에서 입던 옷과는 달리 제법 캐주얼한 블라우스와 진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흔 살은커녕 스무 살이라고 해도 통할 만큼 어려 보였다.
“입바른 말이라도 들으니 기분이 좋네요.”
“진심인데요.”
“그런 말을 해도 내신을 많이 올려주는 건 힘듭니다. 하지만 노력해보겠어요.”
결국 올려주겠다는 거잖아!? 아니 물론 강신혁의 내신은 원래 최상위 수준이었지만!
- 회원님, 나이 서른을 넘은 여성은 어리다는 말에 무척 민감하니 앞으로 그런 말을 쓸 때는 주의하도록 하세요.
클레어는 아직 괜찮을 테니 다행이었다. 강신혁은 겉으로 티를 내지 않으려 무척 조심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저를 기다리고 계셨던 이유는 뭔가요?”
“정확히는 이나희 학생과 강신혁 학생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전 말하지 않았던가요. 집에 초대하겠다고.”
“아, 그러고 보면.”
설마 그게 진심이었단 말인가. 놀라는 강신혁에게 시아라 베르트랑이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이만우 선생님의 핏줄인 이나희 학생이 세계무대에서 경쟁할 계기를 얻게 된 것은 강신혁 학생 덕분이니까요. 꼭 집에서 대접하고 싶습니다. 교장선생님의 허가도 받았어요.”
“이나희 선배는 부르셨어요?”
“네."
그 말을 하자마자 복도에 이나희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미 한 번 씻었는지 복장이 달라져 있었는데, 강신혁을 보자 명백히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저기, 오늘 말고 내일은 안 될까요?”
“내일은 다른 일정이 있어서요. 이나희 학생, 안 될까요?”
“안 되는 건…… 으음.”
강신혁도 이나희의 반응을 이해했다. 그야 오늘 낮에 서로 제법 청춘스러운 대화를 교환했으니 제정신을 차린 지금 새삼스레 얼굴을 마주하는 게 거북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죽음의 인형사로 활동하며 제법 낯짝이 두꺼워진 강신혁은 놀랍게도 이 정도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아…… 그, 할아버지가 선생님의 무구를 만들어주셨었다고요.”
“저뿐만 아니라 당시 많은 프랑스의 초인들이 은혜를 입었죠. 오늘은 두 분을 모시고 얘기가 하고 싶습니다. 꼭 함께 와주셨으면 해요.”
원래도 학교에서 정중하고 겸손하기로 명성이 높은 시아라 베르트랑이지만 지금 그녀의 태도는 마치 하인이 주인에게 대하듯 공손하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프랑스에 오는 순간부터 벼르고 있었던 모양. 이렇게 되면 이나희도 차마 그녀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으으……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택시를 불렀으니 바로 출발하죠.”
"......."
시아라 베르트랑이 앞장섰다. 이나희는 쭈뼛거리며 강신혁의 옆으로 다가왔다. 강신혁의 시선을 피하는 이나희의 모습은 평소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게도 귀여웠다.
- 불여우의 작전입니다. 밤에 둘만 남으면 본색을 드러낼 겁니다.
‘관리자님의 말을 들으면 선배가 밤중에 제 간이라도 빼먹으려고 할 것 같네요.’
관리자의 견제 덕분에 생기려던 분위기도 깔끔하게 날아갔다. 강신혁은 에휴, 한숨을 내쉬며 이나희를 이끌었다.
“가죠, 선배.”
“그, 그래, 후배.”
“뭘 얼고 그래요, 선배답지 않게.”
“그냥 조금 추워서 그런 거야!”
파리의 가을은 그리 춥지 않을 텐데. 강신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보며 손을 내밀었다.
“그럼 손 잡을래요?”
“……잡을래.”
이나희는 순순히 강신혁이 내민 손을 잡았다. 평소와는 다른 선배를 정중히 에스코트하는 강신혁의 모습에,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던 시아라 베르트랑이 피식 웃었다.
시아라 베르트랑이 이만우에게 포섭되어 두 사람을 찰싹 붙여놓으려는 데이트 작전을 시행하려고 한다는 것을 두 사람이 알아차린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난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