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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화. < Chapter 27. 파리의 장인 - 1 >

“이건 차별이라고 생각해.”

“난 구별이라고 생각해.”

“학생들을 상대로 이렇게 노골적인 차별대우를 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우린 ‘초인’양성학교의 학생이잖아? 오히려 초인사회의 엄격함을 알게 하기에 좋은 기회가 아닐까?”

“이렇게 노골적인 형태로 한창 성장 중인 학생들에게 굴욕을 주는 게! 정말 옳은 일이라는 거야? 그렇게 생각해, 시뇩아!?”

“당연히 옳은 일이지, 이코노미는 짜져있어. 그리고 시뇩이라고 부르지 마라.”

강신혁은 비즈니스석과 이코노미석을 가르는 커텐을 붙잡고 발악하는 카렌을 쫓아내며 코웃음을 쳤다.

원인은 명료했다. 원래는 세계초인회의에 참석하는 신영의 학생 전원이 비즈니스에 타게 되어 있었는데 어쩌다보니 예약 미스가 나는 바람에 몇 명이 이코노미로 옮겨가야 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학교 측에서는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낮은 3명…… 즉 신인전에서 우승한 강신혁을 제외한 4강 진출자 세 명을 이코노미석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실로 잔혹하면서도 기준이 뚜렷한 조치라고 할 수 있었다.

“후, 개운하네.”

“우리 시뇨기…… 카렌을 상대로는 의외로 막 대하는구나.”

“난 상대가 내게 대하는 태도를 그대로 돌려줄 뿐이야.”

강신혁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하곤 백인하(투왕전 4강 진출자인 백인하는 물론 여유롭게 비즈니스석을 확보할 수 있었다.)의 옆에 앉으려는데, 옆에서 그의 옷소매를 붙잡는 이가 있었다. 다름 아닌 엘레노어였다.

“시뇩은 여기.”

“아니 설마요.”

“진짜.”

강신혁은 엘레노어의 말에 자신의 티켓을 확인했다. 정말로 엘레노어의 옆자리였다. 이코노미석과는 달리 앞뒤 좌석과의 간격이 먼 탓에 분위기까지 아주 오붓했다.

“아니 왜?”

“같은 비룡기사단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치면 더글러스 선배도…… 아니, 아니에요.”

더글러스 페인의 이름을 입에 담으려는 순간 엘레노어의 표정이 무서워졌기에 강신혁은 얌전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저기 앞좌석에서 엘레노어에게 다가올 구실을 찾아 눈을 빛내고 있는 더글러스 페인을 발견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부단장이 단장을 모셔야죠, 암.”

“응, 잘 알고 있네.”

엘레노어가 흐뭇한 표정으로 자신의 옆을 두드렸다. 반대편 창가 자리에 앉은 이나희가 기막힌 표정으로 돌아보고 있었지만 지금은 깔끔하게 무시하기로 했다.

‘뭐냐, 그냥 대화를 지켜보고 있을 뿐인데 나한테 데미지가 들어오는데......."

‘그건 백인하 네가……."

‘내가 뭐?”

‘아무것도 아냐.”

"큭......!"

말해주지 않는 쪽이 더 큰 데미지를 입힐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강신혁은 잘 알고 있었다. 백인하에게 손을 휘휘 저어준 후 엘레노어의 옆에 앉자, 그녀가 슬그머니 그에게 빼빼로를 내밀었다.

“……선배, 우리 수학여행 가는 버스 안에 있는 게 아닌데요.”

“안모고?”

“안 먹는다곤 안 했어요.”

-불여우…….

흐뭇하게 웃는 엘레노어의 손에서 반쯤 낚아채듯 받아낸 빼빼로의 봉지를 뜯고 하나를 꺼내 오독오독 씹어 먹고 있자니 반대편에서 이나희의 손이 튀어나왔다.

"응?"

"응."

불분명한 목소리에 불분명한 대꾸가 돌아왔다. 아슬아슬하게 강신혁과 손을 맞잡을 수 있는 거리. 강신혁은 그것을 확인해볼 겸 그녀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이나희가 질겁하며 손을 뗐다.

“네 손 말고 빼빼로!”

“글쎄 우리 수학여행 가는 버스 안에 있는 게 아니라니까? 승무원 지나가는 데 방해되잖아요.”

하지만 순순히 빼빼로를 넘기고 마는 강신혁. 그것을 본 것일까, 뒤에 있던 스튜어디스가 그에게 땅콩을 먹겠냐고 물어봤다.

강신혁이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받자 스튜어디스가 수줍게 웃으며 그의 품에 열 봉지의 땅콩을 더 쏟아냈다.

“……이 항공사 혹시 땅콩이랑 웬수졌나?”

“나한텐 먹겠냐고 안 물어봤오......."

살짝 상처 입은 엘레노어에게 땅콩을 몇 봉지 넘겨주었다. 반대편의 이나희는 스튜어디스를 째려보고 있었다.

“저 여자 방금 나한테 코웃음 치고 갔어.”

“피해의식.”

“너 비행기 내리기 전에 분명히 작업 걸린다, 내가 장담한다.”

“또또 어디서 만화는 많이 보셔가지고. 땅콩 좀 받은 것 정도로 호들갑떨지 마요.”

“맞아, 승무원이 승객에게 접촉하는 건 룰에 어긋나는 일이야. 프로의식을 갖고 일하는 사람들을 모욕하면 안 돼, 나희.”

강신혁은 물론이고 드물게도 옆 좌석의 엘레노어 역시 정색하며 말했다. 프로의식이라, 과연 그녀의 완고한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발언이었다. 이나희는 둘에게 모두 부정되자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빼빼로를 물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2시간 정도 지나, 이나희의 말은 불행히도 현실이 되었다.

기내식을 가져온 스튜어디스가 유독 그에게 눈짓을 많이 보낸다 싶더니, 트레이에 몰래 자신의 연락처를 숨겨 은근슬쩍 그에게 넘겨온 것이다. 현실은 때로 만화보다 더 만화 같다는 사실을 강신혁이 실감한 순간이었다.

"......."

"......!"

- 사형!

물론 그는 그녀의 명예를 생각해 종이를 숨기고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으려 했지만, 이미 학생의 틀을 벗어난 능력자인 엘레노어의 눈마저 피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희 말이 맞아쏘. 방금, 연락처를.”

믿었던 이에게 철저하게 배신당하고 상처를 입은 듯 너덜너덜한 말투. 괜히 강신혁이 미안해지려는데 그 말을 들은 이나희가 희색이 되어 말했다.

“벌써? 저 여자 손 빠르네. 미성년자한테 작업 걸었다고 확 신고해버릴까.”

“그렇게 큰 소리 내면서 돌아보지 말라고요 좀.”

왜 하필이면 이 두 선배 사이에 끼게 되어가지고. 강신혁은 절절한 한숨을 내쉬었으나 주위 비즈니스석에 앉은 이들(전원 초인으로 눈과 귀가 밝았다.)이 전부 그를 부모님 원수 노려보듯이 째려보고 있다는 것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한 놈만 다 가지고 가는 더러운 세상……."

“근접공격 특성이 아니라 저주 특성을 각성했어야 했는데 내가.”

“나도 땅콩 잘 먹을 수 있는데……."

“엘레노어……."

아니, 땅콩은 달라고 하면 많이 줄 텐데 아마. 그는 차마 그 말을 한 이에게 대꾸하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그리고 더글러스 페인은 아련하게 내뱉는 혼잣말이 기분 나쁘니까 속으로만 해줬으면 좋겠다.

@@@

지루한 비행 끝에 프랑스 파리의 샤를 드 골 공항에 내린 일행은 우선 한 자리에 집합했다.

라지만 이틀 후에 열리게 될 제 15회 세계초인회의에 참석하는 것 이외에는 딱히 일정이 잡혀있지 않았기에 원하는 대로 관광을 하고 다녀도 좋다는 얘기였다.

호텔만은 이미 잡혀있다. 짐은 전부 그곳으로 보내질 예정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정해진 게 없었다. 심지어 호텔에 굳이 머무르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까지 들었다.

“방치플레이 개쩌네.”

“여기까지 올 정도면 이국의 외딴 거리에 방치되는 정도로 곤란해질 일은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닐까?”

강신혁의 혼잣말에 카렌이 대꾸했다. 과연 엘레노어의 개인 호위로 신영까지 따라온 여자답게 빈틈없이 엘레노어의 곁에 따라붙고 있었다. 그런 것 치고는 비즈니스석을 확보하려는 노오력이 부족했지만.

“원한다면 통역 가이드를 붙여주겠네.”

가까이 다가온 교장 신윤학이 친히 강신혁에게 말을 걸었다.

어쩌면 2학기가 시작되자마자 그가 백인하와 한바탕 했다는 얘기를 들은 것일까, 신인전 시상식 때에 비해 그에게 보다 호감어린 미소를 보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로 솔직한 반응이 오면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아, 저 불어할 줄 알아요. 가이드도 딱히.”

“불어할 줄 알아!?”

강신혁의 대꾸에 어째선지 교장이 아니라 카렌이 경악했다. 엘레노어가 그녀의 머리를 두드려 조용히 시켰다.

“과연, 세계를 무대로 활동할 준비는 이미 되어있다는 얘기인가. 훌륭하네.”

“과찬이십니다.”

겉치레 인사를 나누고 교장과 거리를 두었다. 바로 그때 그의 어깨에 남자의 팔이 걸쳐졌다. 백인하의 것이었다.

“시뇩아, 가자. 낭만의 도시 파리의 미녀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넌 어떻게 여기까지 와도 변하질 않냐.”

“넌 삶의 스탠스를 그렇게 쉽게 바꿀 수 있어? 난 설령 지옥에 떨어져도 예쁜 악마 누나를 찾아내고야 말 거야.”

“일단 네가 확고한 연상 취향이라는 건 잘 알겠다.”

사실 강신혁도 연상 취향이라는 점은 마찬가지였으므로 깊이 추궁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래서 어쩔래, 갈 거야 말 거야.”

“좋아, 가자 가.”

- 회원님!?

“역시! 믿고 있었어 시뇨기!”

물론 강신혁은 일편단심 클레어뿐인터라 파리의 미녀를 꼬실 생각 따윈 전혀 없었지만 가끔은 백인하와 어울려 노는 것도 중요하다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백인하도 말만 이렇게 할 뿐 실제로는 강신혁과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눌…….

“……이거 뭐예요?”

옷소매를 붙잡혀 백인하를 따를 수가 없었다. 돌아보니 엘레노어가 불퉁한 얼굴로 그의 재킷 끄트머리를 붙들고 있었다.

강신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보자 그녀는 수줍은 듯 몇 번이고 눈을 깜박이며 망설이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미, 미녀라면 요기도 있는데.”

“그거 카렌이 가르쳐준 말이죠.”

“이럴 땐 그냥 ‘이런 실례를! 레이디를 에스코트하는 임무를 잊은 제게 벌을 주시지요!’ 하고 단장님 손등에 키스를 하는 거야.”

“80년대에서 왔냐?”

카렌에게 불퉁하게 대꾸하며 옆을 보니 이나희 역시 썩 좋지 못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과연, 백인하와 교제하는 것만 생각하느라 이미 곁에 있던 지인들을 배려하는 것이 부족했던 것이다.

“백인하, 그냥 선배들하고 같이 놀자. 둘이서 얘기할 시간은 굳이 파리가 아니어도 낼 수 있잖아.”

“응? 알제 누님이라면 대환영이긴 하지만…… 역시 안 돼. 난 나를 좋아하는 미녀를 원한다고!”

“그럼 너 혼자 가. 후배는 우리가 있으니까 새로운 미녀는 필요 없거든.”

이나희가 진심으로 경멸하는 표정으로 말하며 백인하를 쫓아내려고 했다. 그러자 백인하는 어쩔 수 없이 타협한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한편으론 강신혁의 한쪽 팔을 꽉 붙들었다. 죽어도 혼자서는 갈 수 없다는 의지표명이었다.

“그럼 시뇩아, 가자! 어디부터 갈까, 역시 퐁네프 다리?”

“넌 왜 그렇게 매번 센스가 공교롭냐.”

결국 다섯 사람이 함께 관광을 하게 되었다. 학교 사람들과 해산하기 전 더글러스 페인이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무시했다.

@@@

파리가 볼 것이 정말 많기는 많았다. 일단 몽마르트 언덕을 찍고 제법 오래 전에 몬스터 무리의 습격을 받아 불탔던 것으로 유명한 노트르담 대성당을 구경한 후, 일단 한 번 강을 건너 에펠 탑까지 보았다.

백인하는 에펠 탑의 겉면을 내달려 누가 먼저 꼭대기까지 올라가나 승부를 하자고 했다가 카렌에게 얻어맞았다.

“다음은 어디 갈래요?”

“나 상젤리제에 들르고 싶어.”

“오…… 상젤리제.”

“방금 그거 노래한 거 아니지? 그지?”

강신혁은 카렌의 추궁을 피하며 관광용 가이드맵을 슬쩍 확인했다. 다시 강을 건너면 바로 상젤리제 거리가 위치했다. 온갖 아름다운 건물들과 아름답지 못한 가격의 명품 샵이 위치한 부티 넘치는 거리.

“저랑은 제일 인연이 없을 것 같은 곳인데요.”

“미녀를 둘이나 옆에 끼고 있는데?”

“나희 선배 방금 절 아무렇지 않게 미녀 목록에서 뺐죠. 진심 너무하지 않아?”

“먄먄.”

“사과 완전 성의 없어!”

이나희와 카렌이 투닥거리는 것을 보며 피식 웃는데, 엘레노어가 강신혁에게 가만히 다가와 그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말했다.

“상젤리제 거리에는 온 나라의 명품 브랜드 샵이 전부 모여이쏘. ……물론 아티팩트 브랜드도.”

“……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든 것을 파악하고만 강신혁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엘레노어가 덩달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나희 때문에 이런 표정까지 지을 정도면, 아무래도 두 사람의 우정은 강신혁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은 모양이다.

“그래요, 그럼 바로 가죠. 상젤리제 거리.”

“아, 응.”

강신혁이 답을 내놓자 이나희가 고개를 들고는 가볍게 웃었다.

“대충 알아챘겠지만 우리 아빠 가게도 거기 있었어.”

“그걸 가볍게 말해버린단 말이지 또.”

“다 들렸거든 바보야.”

재차 흥, 코웃음을 치는 이나희. 강신혁은 엘레노어와 쓴웃음을 주고받고는 그녀에게로 다가가 합류했다. 어쩌다보니 뒤에 남겨진 백인하가 황망해져 중얼거렸다.

"뭐냐, 나만 모르고 있는 듯한 소외감 장난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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