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 Chapter 26. 신영의 중심 - 1 >
“푸흡, 파란만장이었네.”
“누나는 걱정을 하든가 웃기만 하든가 둘 중 하나만 해요.”
“우흐히히힛."
클레어가 괴상한 웃음을 터트렸다. 강신혁이 개학하고 학교에서 일어난 일들을 얘기했더니 나온 반응이었다.
그놈의 서열이 뭐라고 학교 전체가 술렁였던 것, 강신혁과 백인하에게 도발적인 언사를 해오는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폭증했던 것, 교사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주목을 받았던 것…… 그리고 학생회의 관심을 받게 된 것까지.
근 일주일 동안 실제로 일어난 일들이지만 정말 소설이나 만화에서나 볼 법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클레어가 이렇게 좋아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고.
“진짜 장난 아니었다니까요. 대미는 더글러스 페인…… 그러니까 기사왕이 장식했지만.”
“너랑 붙었어?”
“아뇨, 백인하랑 붙어서 다시 깨지고 저까지 인정했다나봐요. 대체 그 인간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난 잘 알겠는데.”
클레어는 손에 든 잔을 흔들며 히죽 웃었다. 그 안에 담긴 호박색의 액체가 부드럽게 출렁거리며 사각얼음의 표면을 두들겼다.
“너랑 직접 붙기 싫었던 거겠지. 깨지는 게 무서워서.”
“백인하한테는 깨질 걸 알면서도 도전했던 모양인데요?”
“걔한테는 깨져도 괜찮아. 하지만 너한테는 깨지면 안 돼.”
“왜?”
“너랑은 엘레노어를 사이에 두고 있는 라이벌이니까.”
강신혁은 하아, 하고 귀찮음이 묻어나는 한숨을 토했다.
“저랑 엘레노어 선배 사이엔 아무것도 없는데…… 그냥 선배랑 직접 얘기를 해보면 알 텐데. 아, 일대일로 사랑고백을 할 깜냥은 또 안 되려나.”
“응…… 신혁아, 넌 엘레노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
“재능과 노력이 겸비된, 인성도 괜찮은 선배요. 인간적으로 호감은 가지만 굉장히 귀찮은 짐을 지고 있는 사람이라서 미래에 깊이 연관되고 싶지는 않네요.”
“흠흠.”
클레어는 강신혁의 판단이 만족스러웠는지 작게 미소 지으며 잔으로 입술을 적셨다. 강신혁도 그녀가 타준 무알콜 칵테일로 목을 축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선배는 카렌 녀석한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자꾸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하면서 절 끌어들이려고 해서 귀찮아요. 아마 카렌만 없었으면 그 선배랑은 더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은데.”
“……흐응.”
"하지만 비룡기사단 부단장직에 대해선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중이에요. 백인하가 자꾸 학생회에 끌어들이려고 하는데 거기보단 비룡기사단이 훨씬 덜 귀찮을 것 같아서.”
“그런데 어째설까, 난 신혁이가 결국 학생회에도 들어가게 될 것 같은데.”
“실은 저도 그런 생각이 들어서 불안해하던 참이긴 해요.”
인상을 팍 쓰며 말하는 강신혁을 보며 클레어가 재차 웃음을 터트렸다. 진심으로 즐거워보였다.
“아아, 아쉽다. 나도 너랑 같이 학교에 다녔으면 재밌었을 텐데.”
“교사로 오는 건 어때요?”
“바텐더랑 겸업이 될까?”
“천하의 연금술사가 교사직을 맡겠다는데 그 정도 허가야 해주겠죠.”
농담 삼아 던진 말이었지만 클레어는 진지하게 그것을 고민했다. 그러다 이내 역시 안 되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역시 난 지금의 포지션이 제일 좋은 것 같아.”
“누나다운 답이네요.”
강신혁은 웃으며 칵테일잔을 비웠다. 클레어 역시 잔을 비우며 빙긋이 웃었다.
손님이 없는 시간, 단 둘이 카운터 테이블에 몸을 비스듬히 걸치고 담소를 나누는 이 시간이 무척이나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까 저 바이크 만들었어요.”
“산 게 아니라 만든 거야?”
“네."
강신혁은 미로토즈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얘기해주며 자신이 푸른 소를 개조해 마력구동 바이크를 만들어낸 것과 그것으로 미로토즈에 봉인되어 있던 모루의 작품을 회수했다는 설명을 했다. 클레어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어렸다.
“원래 대장장이가 그런 거야? 그런 복잡한 구조의 기계까지 만들어내고.”
“설계도만 있으면 못할 건 없죠.”
“누나도 보고 싶어.”
“그럼 다음 데이트는 드라이브 데이트네요.”
“드라이브 데이트라면 차에 태워줘야지.”
“단 둘이 차 안에 있으면 제가 뭔 짓을 할지 모르니까 바이크로 참아줘요.”
“어쭈, 말하네.”
클레어는 강신혁의 농담에 깔깔 웃으며 그의 뺨을 쿡쿡 찔렀다. 카렌에게 당했을 때와는 달리 무척 즐거웠다.
“이번 주 토요일 어때?”
“좋네요.”
“좋아.”
데이트 날짜가 잡히자 클레어는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작게 말아 쥐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강신혁이 그녀에게 말했다.
“이나희 선배한테 들었는데요.”
“데이트하자는 얘기를 하면서 갑자기 다른 여자 이름이 왜 나와?”
“누나가 제 동영상을 찍었다고.”
“으극."
강신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설마 요즘 미튜브에 돌아다니는 신은혁 대역류 영상 누나가 찍은 거예요?”
“아냐. 난 내 감상 용도로만 찍었어. 진짜로.”
“감상 용도?”
클레어가 말없이 볼을 붉혔다. 강신혁은 그녀의 중2병 완치까지 아직 갈 길이 멀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곤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혼자서만 감상해주세요.”
“응, 접수.”
물론 그녀가 강신혁의 영상을 찍어 보관해두고 있는 것은 단지 중2병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구체적으로 물어보는 건 강신혁도 부끄러웠기에 묻지 않았다.
“잘 찍혔어요?”
“응, 엄청 멋지게 나왔어.”
“제가 원래 멋져서 그래요.”
“알고 있어.”
아마 이 반응이 정답일 것이다. 클레어와 강신혁은 그렇게 잠시 간질간질한 분위기 속에 잠겨있었다.
“나 왔어.”
그 분위기를 과감하게 깨트린 것은 다름 아닌 신은아였다. 그녀는 둘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를 감지하곤 눈썹을 찌푸렸으나 이내 흥, 코웃음을 치며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손님 없네?”
“대역류 이후로 길드들이 사람을 빡세게 조이기 시작한 모양이야. 아마 당분간은 이 모양이지 않을까?”
“음, 나 한 잔만 줘. 알코올 들어간 걸로.”
“웬일이야?”
클레어는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그녀에게 칵테일을 타주었다.
멜론 리큐르를 써서 무척이나 달콤하지만 홀짝홀짝 마시다간 취하기 쉬워 대표적인 레이디 킬러로 꼽히는 미도리 사워. 화사한 녹색으로 반짝이는 잔을 받아든 신은아는 조심스레 그것을 마시더니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후배도 이렇게 맛있게 탈 수 있어?”
“미도리 사워 정돈 이제 껌이죠.”
“내가 잘 가르쳐줬거든. 아무것도 모르는 신혁이한테, 처음부터 끝까지 친절하게 전부.”
"......."
클레어가 자랑스럽게 하는 말에 어째선지 신은아의 몸이 움찔했다. 두 여자 사이에 날카로운 시선이 오갔다. 어째 갑자기 기온이 내려간 느낌이 들어 강신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후배는 아직 무알콜밖에 못 마시지?”
“그야 전 미성년이니까. 하지만 못 마신다고 만들 수도 없는 건 아니니까요.”
강신혁은 다 비운 잔을 흔들며 대꾸했다. 클레어가 픽 웃으며 강신혁에게 새로 칵테일을 타주었다.
“후배, 고마워.”
“갑자기 왜요?”
“이번에 상사한테 칭찬 들었거든. 후배한테 미리 침 발라둔 거 잘했다고.”
강신혁은 신은아의 뜬금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 얘기가 왜 이제야 나왔단 말인가. 그런데 그녀에게 물어보려던 찰나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
“설마 신영에서 있었던 일이 협회에서까지 얘기가 된단 말이에요?”
“당연한 얘길.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초인양성기관인데. 당장 나도 졸업하자마자 협회로 들어갔는걸. 신영을 주목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야. 하물며 같은 서울에 있으니까.”
“신혁이 명성이 전국구가 되었겠네.”
“세계구일 거야.”
칵테일이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단숨에 비우며 신은아가 단언했다.
“신영을 주목하고 있는 건 협회뿐만이 아니니까. 애초에 내가 이전에 백인하 학생과 후배를 잠깐 담당했던 것만으로도 미국 초인 협회에서 얘기가 들어왔을 정도인걸. 이거 비슷한 걸로 한 잔 더 줘.”
“오케이.”
"오오......."
신영에 대해 모르고 있던 것들이 그녀의 입을 통해 나오니 그저 새로운 세계를 접한 듯 놀라울 뿐이었다.
이세계에 가거나, 신은혁으로서 활동하거나 하면서 강신혁은 신영이 지극히 좁은 세계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외부에서 신영을 보는 시선은 또 달랐던 것이다.
“백인하 학생은 누구나가 주목하는 인재였어. 하지만 백양 길드의 후계자가 될 것이 너무나 뻔했기에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생각은 못하고 경계만 할 뿐이었지. 1학기 때 백인하 학생이 투왕전 준결승에서 탈락했던 건으로 인해 그를 이겼던 상대인 지금 마도왕…… 이름이 뭐였지?”
“나탄 보댕이요.”
“그래, 그의 평가가 높아졌을 정도니까. 그 후에 후배한테 처참하게 당하면서 다시 평가가 낮아졌지만.”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모르는 사이 백인하가 나탄 보댕에게 약을 주고 강신혁이 병을 주었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싫다는 여자한테 집적대며 귀찮게 군 그가 천벌을 받았을 뿐이지만.
“자, 준 벅. 이건 좀 더 새콤해.”
보다 밝고 다채로운 색의 칵테일을 받아든 신은아가 또 그것을 단숨에 절반 정도 비우며 말을 이었다.
“이번 일을 두고 백인하 학생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면서, 하는 김에 후배까지 과감하게 띄워주면서 ‘자기 편’으로 드러냈다는 얘기가 많이 돌더라고. 말하자면 두 사람의 대련은 알게 모르게 전세계 초인사회에 퍼진 데뷔전이라고 할 수 있어.”
설마 그 단순한 대련요청에 깊은 뜻이 숨어있었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듣다 보니 자연스레 납득이 갔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후 보건실에서 들은 얘기가 있었으니까.
“백양에 들어오라는 얘기를 이번에 듣긴 들었죠.”
“응, 하지만 후배가 협회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걸 상부는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내가 칭찬을 듣게 된 셈.”
강신혁이 비록 협회에 들어오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그가 협회의 후원을 받았다는 것만은 명백한 사실이며 장차 크게 성장할 초인과 좋은 관계를 맺었다는 것만으로도 신은아가 고평가를 받을 이유는 충분했던 것이다.
“은아는 그냥 할부지를 어떻게든 챙겨주고 싶었을 뿐인데, 그치?”
"무......."
클레어가 끼어들어 농담 삼아 던진 말에 은아의 표정이 재차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잔을 비우고 다시 클레어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한 잔 더.”
“전 오늘은 이만 들어가 볼게요. 내일도 수업 있으니까.”
“데려다주지 않아도 돼?”
“이젠 괜찮아요.”
강신혁은 클레어의 말에 피식 웃으며 대꾸하곤 그 자리에서 옷을 갈아입은 후(장비 슬롯 전환 기능을 사용하니 0.1초도 안 되어 끝났다.)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며 문을 열고 나갔다.
그 뒷모습을 배웅하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던 클레어는, 문이 닫히자마자 자신과 똑같이 강신혁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신은아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짧게 말했다.
“그렇게 됐어?”
“응, 그렇게 됐어.”
신은아는 세 번째 잔을 받았다. 쿠바 리브레였다. 그녀는 그것을 한 모금 머금어보며 취향임에 안도해 미소 짓곤, 이게 아니지, 하고 고개를 저으며 클레어에게 물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연하는 연애대상이 아니라더니?”
"으으음......."
얼버무릴까, 솔직하게 대답할까, 혹은 가감을 할까. 세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하던 클레어는 신은아의 눈빛을 보며 어떤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친구는 이제 괜찮을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말을 흉내 내어 진심을 전했다.
“응, 그렇게 됐어.”
“핏."
신은아는 헛소리를 낼 뿐 그녀의 말에 딱히 뭐라고 하지 않았다. 클레어는 그녀의 반응에 미소를 지으며 카운터에서 나와, 영업종료라는 팻말을 걸고는 돌아와 자신 몫의 위스키를 잔에 따랐다.
“짠."
“짜...... 안.”
둘은 술잔을 부딪쳐 건배했다. 하지만 서로를 노려보며 하는 그 건배는 마치 지금부터 치고 박고 싸우기라도 할 것처럼 치열했다. 클레어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여자 우정이라는 게 다 이렇지 뭐.”
“경험 있는 듯한 말투네?”
클레어가 웃으며 하는 말에 신은아가 탐구하는 투로 대꾸하며 그녀를 아래위로 훑었다. 클레어는 유감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날 좋아하는 남자 때문에 여자애들이랑 사이가 나빠져 본 적은 있는데.”
“그럼 지금은?”
“나도 신혁이를 좋아하니까 그때랑은 조금 다르려나?”
그녀의 대답을 들은 신은아의 입술이 비죽 튀어나왔다. 자신이 불리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클레어는 우습게도 이 상황이 무척 기뻐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와, 사랑을 하니까 내 친구가 갑자기 정상이 됐어.”
“지금까지 이상했다는 말로 들려.”
“사실 애기였지 뭐.”
클레어는 위스키를 홀짝이며 씩 웃었다. 신은아는 여전히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보다는 확실히 사랑을 하는 성인여성으로 보였다.
“너, 첫사랑이 신혁이라서 잘된 걸지도 몰라.”
“……나도 그렇게 생각해. 불일치하는 것보다는 훨씬 좋았을지도.”
“푸흡.”
클레어가 재차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렇게 웃겨.”
“아니, 미안. 이게 웃으면 안 되는데 자꾸…… 풉."
“화낼 거야.”
도수가 낮은 칵테일이라곤 하나 연거푸 잔을 비운 지금의 신은아에게 있어 화를 낸다는 말은 전기통구이로 만들어버리겠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클레어는 킥킥 웃으면서도 두 손을 내저었다.
“내 친구지만 너무 귀여워서 그래, 미안. 너 진짜 귀여워. 예전부터 말했지만, 어떤 남자든 빠질 거야. 진짜로.”
“나도 알아. 후배도 귀엽다고 했어.”
“하지만 양보는 못해. 절대로. 확실하게 말해둘게.”
"......."
신은아는 말없이 잔을 비웠다. 살짝 붉어진 볼, 조금 치켜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잔을 내밀었다.
“나도 센 걸로 줘.”
“좋아.”
둘은 잔을 부딪쳐 다시 건배했다.
두 명의 하이랭커가 한 명의 남자를 놓고 싸움을 시작한 기념비적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