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 Chapter 25. 알아볼 수도 없어 - 6 >
기사학과 1학년 두 명이서 펼쳤다고는 믿을 수 없는 충격과 공포의 대련이 끝난 직후, 장내는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마땅한 상대가 없어 그간 실력을 구경할 기회가 별로 없었던 백인하의 진면목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도 그렇지만, 그런 백인하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기며 끝내 마빡에 공격을 클린 히트, 깔끔하게 격추시킨 강신혁의 존재가 경악스러웠기 때문이다.
“저걸 이기네……."
“특성이 진화한 게 맞다니까. 마력이 아니라 다른 뭔가를 쓰는 게 틀림없어.”
“넌 그동안 특성 진화 안 시키고 뭐했냐.”
“네 다음 C랭크 특성.”
백인하의 속도는 그걸 따라잡는다는 것이 불가능으로 느껴질 만큼 빨랐다. 제아무리 강신혁의 스테이터스가 강화되었다고 해도, 체력과 민첩과 힘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거기에 황룡투기와 영력이 더해진다고 해도 따라잡지 못할 만큼 빨랐다.
그런데 어떻게 거기에 반격할 수 있었는가. 특성스킬인 황룡투로 인해 백인하의 행동을 읽어내고 움직이는 게 가능했을 뿐더러, 마지막 순간 윈드 마스터리로 백인하의 움직임을 유도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졌다……."
순간적으로 기절했던 백인하는 극도로 활성화된 마력 덕분에 그리 늦지 않게 제정신을 차렸지만, 바닥에서 일어나지 않고 가만히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안 져본 것처럼 얘기하네. 투왕전 졌으면서.”
강신혁은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저질러버렸다는 생각에 상쾌함을 느끼며, 한때는 결코 넘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친구를 시원스레 이겨버렸다는 사실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묘한 감상을 품으며 백인하를 일으켜 세웠다. 그는 여전히 조금 멍한 표정이었다.
“아파……."
“아프게 때렸으니까.”
팔이 부러진 것도 있고 어쨌든 보건실에는 가야 할 것이다. 강신혁은 이대로 카렌과 함께 보낼까 생각했지만, 왠지 반감이 들어 그를 부축했다.
“선생님, 인하 보건실 데려갈게요.”
“그, 그래.”
공준표는 여전히 얼어붙은 채 어정쩡한 말투로 답했다. 그야 그럴 것이다. 신인왕이 된 시점에서 이미 공준표와 비등한 수준의 실력자임을 인증했는데, 그게 지금은 아예 공준표의 손이 닿지 않는 영역까지 올라가버리고 말았으니까.
백인하처럼 뒤에 뚜렷한 세력이 있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마음 편히 항복하고 우위를 인정할 수 있지만 강신혁은 공식적으로는 혼자다. 그런 그가 단기간에 백인하를 이길 정도로 성장해버렸으니, 모종의 공포감과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만 것.
“아, 나는 안 데려가? 나도 무지 아픈데.”
뒤에서 카렌이 말을 걸어왔다. 강신혁은 코웃음을 치며 뒤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넌 도우진한테 부탁해.”
“에에엑……."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나도 싫거든?”
도우진은 싫다고 말하면서도 순순히 카렌을 부축했다. 하지만 그 조건으로 강신혁에게 방과 후 비룡기사단 훈련소에서 대련해달라는 말을 했다.
“나도 방학 동안 놀고 있지는 않았다는 걸 보여주겠어.”
“아니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데.”
처음부터 성격에 문제가 있었을 뿐 그 외에는 재능도 노력도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도우진은 그의 말을 듣고도 입술을 삐죽거리며 불쾌해했다.
“반년 만에 교내 랭킹 1위를 먹은 놈한테 그런 얘길 들으니까 빡치는데.”
“랭킹 1위는 무슨.”
“아마 금세 소문날걸. 각오해야 될 거다.”
도우진은 그 말을 하곤 뭔가를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어쩌면 백인하도 덩달아서 귀찮아지지 않을까. 강신혁한테 졌으니까 만만해 보인다고 덤비는 놈이 나타나지 않을까?”
“그거 잘 됐네…… 아야야.”
강신혁의 부축을 받던 백인하가 그 말을 듣곤 본능적으로 주먹을 쥐다 기겁했다. 팔 하나가 부러졌다는 걸 깜박 잊고 있었던 탓이다.
“내가 원했던 게 그거거든. 학생회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적극적으로 다른 학생들을 밟아놓을 필요가 있어. 아야야.”
“사고방식 한 번 전투적이네.”
“시뇩이한테 그런 얘길 들으니까 빡치는데.”
“너희 그냥 날 싫어하는 거 아니냐?”
보건실에는 치유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무려 현역의 랭커, 차혜린이 보건교사로서 상주하고 있었는데, 실전적인 대련이 많은 신영이다보니 매일같이 혹사를 당하는 불쌍한 사람이었다.
“2학기 첫 개시는 너희들이니? 어머.”
문을 열고 일행을 맞이한 차혜린이 강신혁이 백인하를 부축하고 있는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워했다.
“재밌는 광경이네. 백인하 학생이 보건실에 오는 걸 다 보고.”
“쌤 저 팔 진심 위험하거든요……?”
“와, 작살났네.”
차혜린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키득거리며 백인하의 부상을 치료했다. 제법 심각한 상처가 많아서 치유마법을 받은 후에도 잠시 쉴 필요가 있다고. 반면 카렌은 그냥 처절한 구타를 당했을 뿐이기에 가벼운 치유를 거는 것만으로 끝이었다.
“자자, 그럼 쉴 애들은 쉬고 나갈 애들은 나갑시다.”
“도우진 나가. 신혁이도.”
“카렌 너도 나가렴.”
“아니 왜요!?”
아직 상처가 아프다며 침대에 달라붙으려는 카렌을 차혜린이 과감하게 쫓아냈다. 강신혁도 도우진과 함께 보건실을 나오려는데, 그전에 백인하가 그를 불러 세웠다.
“시뇩아, 얘기 좀 하자.”
“……그래.”
강신혁이 멈추자 도우진은 잠시 둘을 번갈아 보더니 코웃음을 치며 떠나갔다. 차혜린 역시 고개를 갸웃할 뿐 그를 쫓아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혹시 지금부터 시작하는 거니? 잠깐 보건실을 비워줄까?”
“무슨 오해를 하고 계신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몰카 설치하는 건 그만둬주실래요?”
강신혁은 한숨을 쉬며 백인하가 누운 침대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백인하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차혜린을 쫓아내기라도 할 것처럼 가만히 바라보다가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포기했다.
“그래서 무슨 얘긴데?”
“응, 뭐 별 거 아니긴 한데.”
백인하는 자신의 팔이 제대로 붙은 것을 확인해보려는 듯 붕붕 휘둘러보곤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너 우리 길드 안 들어올래?”
“또 굉장히 뜬금없는 소리를. 아니 선생님 듣고 있는데.”
“오우 열정적인 스카우트. 난 가만히 감상하고 있을 테니까 편하게 얘기하세요, 도련님.”
일단 무슨 길드를 말하는 건지부터 설명해줬으면 했다. 그러나 그렇게 반박하자 백인하는 물론이고 옆에 있던 차혜린마저 눈을 깜박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응? 아니 몰랐어?”
“뭘?”
“진짜 몰랐나보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아니 원래 그런 놈이긴 해요. 그런 놈이긴 한데 진짜 이건……."
백인하는 적잖이 당황한 기색이었으나 강신혁은 자꾸 그런 말을 하며 제대로 설명을 하지 않는 백인하와 차혜린을 한 대씩 때려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 기색을 느낀 건지 백인하가 다급히 설명했다.
“백양. 백양 말이야.”
“백양!?”
백양. 뱅가드의 뒤를 잇는 한국 서열 2위 길드이며, 세계 전체로 따져도 10위권 안에는 넉넉히 들어가는 한국의 초대형 길드.
막말로 한국은 지금 뱅가드와 백양이 먹여 살리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초인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이 높은 것도 이 두 길드가 쌍두마차로서 나라를 견인해주고 있기 때문.
그 말을 듣고 나니 과연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정도의 빽이라면 백인하가 도련님 취급을 받는 것도 당연했다.
“아니 잠깐만. 설마 길드 마스터의 직계라든가 그런 느낌이냐?”
“뭐 할아버지께서 마스터를 맡고 계시긴 하지.”
“진짜냐……."
“오히려 여태까지 그것도 안 알아보고 태연히 나랑 친구로 지낸 네가 더 경악스럽다. 어지간한 애들은 알고서 안 건드리는 건데.”
순수하게 전투 길드로서의 역량에만 치중하는 뱅가드와 달리, 백양은 국내외 여러 사업체와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아마도 자금력은 뱅가드를 뛰어넘지 않을까 하는 얘기도 있어, 백양의 길드 마스터인 백주인은 세계 갑부 5위권 안에 늘 이름을 올리곤 했다.
그런데 그 갑부의 손자라, 말로만 듣던 재벌 3세가 강신혁의 눈앞에 있었다. 그것도 어지간한 재벌은 비벼볼 수도 없는 초대형 재벌가의 직계가.
“내가 서열이 제일 높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유일한 후계자인 건 아니고, 사촌 중에 후계자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이 제법 있긴 해. 뭐 다 좆밥이지만.”
“백양…… 그렇구나. 그러고 보면 그때 게이트 안에 갇혔을 때도 백양에서 부리나케 튀어왔었지.”
강신혁은 이전 뱅가드의 던전 1팀장 임훈과 뱅가드가 자신을 스카우트하는 문제를 두고 얘기했을 때, 그가 백인하를 ‘그 아이’라고 친근하게 불렀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혹시 뱅가드 쪽의 인물과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지만 그게 아니라 백양의 왕자님이었던 것이다.
하긴 뱅가드와 백양은 설립 당시부터 티격태격해왔던 것을 생각하면, 뱅가드의 간부가 백양의 후계자인 백인하를 친근하게 부르는 것도 납득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이제 와서가 아니야. 처음부터 너랑 같이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거든.”
하지만 자신보다 약한 강신혁에게 길드에 들어오라고 손을 내미는 건 이래저래 그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이 되지 않을까 고민해서 제안을 미뤄왔다고 백인하는 말했다.
“차라리 친구가 아니면 간단했겠지만. 네 자존심을 배려하다보니 점점 권유를 할 수가 없게 되어서.”
“그래서 이번에 발린 김에 떳떳하게 권유한다는 거구나.”
“발리진 않았다! 야, 발리진 않았잖아 인간적으로!”
“졌으면 발린 거지.”
“와 나 시뇨기 그렇게 안 봤는데!”
승부의 세계는 냉혹한 법이다. 아무리 백인하가 선전했어도 졌으면 발린 것이다. 결과뿐이다. 이 세상에는 결과만이 남는 것이다!
“나 뱅가드에 제안 받았던 거 아냐? 당연하지만 뱅가드보다는 좋은 조건을 제시하겠지?”
“당연하지 시뇩. 졸업하면 바로 간부부터 시작하자.”
굴욕적인 취급을 당했는데도 상쾌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해오는 것을 보면 역시 백인하가 거물은 거물이었다. 강신혁은 픽 웃으며……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조건 상관없이 일단 거절해둘게.”
“야 진짜 뱅가드보다 훨씬 좋은 조건으로 데려올 건데?”
“길드의 필요성을 아직 못 느끼고 있거든. 천천히 생각해보고 길드에 들어가야겠다 싶으면 그땐 백양으로 갈 테니까 일단 그 정도로 만족해둬.”
"이 새끼 튕기네......."
백인하는 눈을 가늘게 뜨자 옆에 가만히 있던 차혜린이 깔깔대며 웃었다. 강신혁은 그제야 여태껏 차혜린도 옆에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냈다.
“이런 얘기 선생님도 있는데 옆에서 해도 되냐?”
“쌤은 원래 백양 소속이야. 내가 입학하는 바람에 내 호위 겸 감시로 학교에 잠깐 들어왔을 뿐이지.”
“오우.”
본격적으로 소설 같아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런 사람이 더 있냐고 했더니 한 명 더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신영이 비리를 단속하기 위해 교사를 엄중한 기준으로 고르는 것을 생각해보면 백양 소속의 인간이 두 명씩이나 잠복해있다는 것도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까놓고 말해 도련님은 우리가 뭘 안 하더라도 신영의 탑을 찍을 테니까.”
그러고 보면 아까도 백인하를 도련님이라고 불렀던가. 강신혁은 깔깔대며 말하는 차혜린을 보며 납득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차혜린이 비웃듯이 입가를 비틀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설마 같은 1학년, 그것도 친구한테 발릴 줄이야.”
“아 발렸다고 하지 말라고요!”
백인하가 끝내 폭발했다. 강신혁이 키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차혜린에게 짜증을 내던 백인하가 돌연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말하는 거 잊고 있던 거 또 있다.”
“길드 얘긴 아니지?”
“엉. 길드 거절했으니까 이건 들어줘야 된다.”
“학생회도 안 들어가.”
“아 님아 좀.”
하지만 결국 자신은 학생회와 연관되겠지, 어딘가 모르게 그렇게 될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하며 강신혁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이번에야말로 백인하를 놔두고 보건실을 나왔다.
그렇게 해서 2학기 수업 첫 날, 신영의 기존의 세력구도를 뒤엎는 절대적인 강자 두 명이 나타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