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 Chapter 25. 알아볼 수도 없어 - 5 >
장내가 술렁였다. 담당교사 공준표마저 눈을 가늘게 뜨고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카렌은 재밌겠다면서 박수를 쳤고, 도우진은 그에 굴하지 않고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백인하의 팔에 가로막혀 나아갈 수가 없었다.
“도우진 너 지금 싸우면 비참해진다.”
“못 이기는 건 나도 알아. 그래도 달라진 나를 저 자식한테 보여주려는 것뿐이야.”
“아니, 네 각오는 알겠는데.”
백인하는 작은 목소리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시뇩이가 힘을 숨기고 있는 것 같거든.”
“그런 찐따같은……!?”
“너도 찐따한테 얻어터지는 건 싫잖아. 그러니까 내가 할게. 뭘 숨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다 벗겨버리게.”
“야, 너희 다 들린다.”
지금이라면 백인하를 죽여도 무죄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 아닐까? 저 정도로 심한 말을 하는 새끼한테라면 신살검을 겨눠도 괜찮지 않을까? 마침 가중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던 참이었는데…….
“그렇게 됐으니까 신혁아. 붙자."
"......."
농담처럼 말하는 것 같았지만 백인하의 표정은 강신혁이 여태껏 보아온 것 중에서 가장 진지했다. 뭐라 대꾸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자니 백인하가 가벼운 몸짓으로 대련장에 들어오며 말을 이었다.
“원래는 내년에나 붙어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마침 잘 됐어. 학생회도 순조롭게 시동 걸었고. 서로 망설일 거 없이 전력으로 붙자.”
“망설일 것 없이……."
“이제 2학기잖아, 시뇨기.”
백인하가 작게 윙크했다. 역시 때리고 싶다.
“3학년 힘도 약해질 때고, 슬슬 우리가 활개를 쳐도 된다는 말씀이지. 시뇩이 너도 그런 생각으로 이 타이밍을 노리고 비룡기사단에서 입지를 넓힌 거 아냐?”
“응, 아냐. 그냥 어쩌다 와이번이 굴러들어온 거야.”
강신혁은 백인하의 생뚱맞은 말에 대꾸하며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과연, 약했던 그가 그저 강해지는 데 필사적이었던 사이 백인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가.
강신혁은 1학기에 있었던 투왕전에서 백인하가 4강전의 상대였던 마도왕에게 패배했던 것을 떠올렸다. 상성 때문에 졌다고 스스로 주장했던가.
솔직히 그는 그때 백인하의 시합을 직접 보지 못해서 뭐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가 일부러 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계속 품고 있었다.
그 정도로 백인하의 능력은 특출났다. 어떤 이는 백인하가 몇 년 전 학교를 졸업한 뇌제와 비견될 정도의 인재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영력을 각성하고 만물의 근원을 어느 정도 읽어낼 수 있게 된 강신혁도…… 백인하라면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강신혁이 강해졌다지만 그래도 백인하랑은.”
“혹시 모르지, 저번에 마도왕 이겼잖아.”
“에이 그건 아티팩트 하나도 없이 붙었을 때고.”
“지금도 아티팩트 없이 쌩대련인데?”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학생들. 체육관 반대편에서 수업을 하고 있던 다른 반의 학생들까지 흥미로운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강신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딱 잘라 말하자. 강신혁의 무력은 이상하다. 학기 초에는 대련에서만 이상하게 강한 이무기였을 뿐인데, 1학기 동안 ‘몇 단계’에 걸쳐 급속도로 성장한 결과 지금은 무려 비룡기사단의 차기 부단장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물론 본인은 생각이 없었지만)
사실 지금까지만 해도 너무 지나쳤다. 1학기 마지막 즈음에 드러난 무력만 해도 세계최고의 초인양성학교인 신영의 탑 티어가 아닌가.
그러나 거기에 더해 방학 기간 동안 많은 경험을 하고, 결정적으로 특성이 수호황룡이라는 SS급 특성으로 진화하게 되면서 그의 무력은 일선을 완벽하게 넘었다. 능력을 적당히 감추지 않으면 귀찮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뭐.”
조금 귀찮아져도 큰 문제는 없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1학기 때 이미 투왕이랑 기사왕, 마도왕이랑 다 한 번씩은 엮이지 않았던가. 여기서 더 귀찮아질 일이 있으면 뭐 얼마나 있을까.
자중할 필요 따윈 없다. 그것을 새삼 깨달은 강신혁은 어깨를 으쓱이며 목창을 던지고 목단검 두 개를 들었다. 백인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서로 숨기지 말자니까?”
“뭔 개소리야. 네 상대엔 이게 맞아.”
“호오.”
백인하는 흥, 코웃음을 치며 강신혁과 똑같은 무장을 했다. 하지만 아마 저건 막기 용. 백인하가 발차기 기술에 재주를 갖고 있다는 것을 강신혁은 잘 알고 있었다.
“선생님, 신호 주세요.”
“그, 그래.”
강신혁과 공준표의 구도는 지난 한 학기 동안 세 번 변화했다.
학기 초, 강신혁을 흠씬 패라고 도우진과 대련을 시켰지만 마침 그때 영력을 다루기 시작한 강신혁은 어렵지 않게 도우진을 꺾는 것으로 공준표를 입 다물게 만들었고, 뒤이어 그가 신인왕에 오르면서 두 번째로 기가 꺾였다.
그럼에도 현실을 인정하지 못한 공준표가 마침 이나희에게 접근하는 남자를 제거하려고 하던 마도왕과 쿵짝이 맞아 그를 불러들였다가 마도왕이 강신혁에게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얻어터지게 되면서 자신의 선에서 강신혁을 손 볼 모든 방법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마도왕을 상회할지도 모르는 실력자이자 강신혁의 가장 큰 아군이기도 한 백인하가 스스로 강신혁과의 대련을 청하다니?
공준표는 둘 사이에 오간 대화나 마음을 잘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강신혁이 얻어터지는 꼴을 보고 싶었기에 둘을 붙이기로 결심했다.
"그럼…… 시작!”
맥없이 울려 퍼진 시작 신호. 그 순간 강신혁과 백인하는 대련장 정중앙에서 맞붙었다. 미리 약속한 게 아닐까 싶은 완벽한 타이밍. 조금의 어긋남도 없이 격돌하는 모습은 상쾌했지만, 순간 울려 퍼진 파열음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시뇩이…… 단단하네!”
“넌 좀 물렁하네.”
백인하의 오른발이 강신혁의 복부를 정확히 강타하고 있었지만, 그 대가로 강신혁은 목검으로 백인하의 오른팔을 으스러트렸다.
물론 신영에선 후유증 없이 회복할 수 있는 수준이지만 적어도 이 시합 동안은 제 기능을 못할 것이다.
“막는다고 막았는데.”
백인하의 손에 들려 있던 목단검은 두 개 다 떨어져 있었다. 강신혁은 그의 발을 받아내는 대가로 양손의 단검을 모조리 쳐내고 그의 팔을 부러트리기까지 한 것이다.
백인하의 공격이 강신혁의 높은 체력(S+랭크)에 막혀 상대적으로 약한 피해를 입혔음을 감안한다면 첫 격돌은 강신혁이 이득을 봤다고 할 수 있었다.
“차라리 방패를 들고 나왔어야지, 검으로는 나한테 안 돼.”
“그러…… 게!”
말을 마치는 순간 백인하가 그 자리에서 팽이처럼 회전하며 돌려차기를 날려 왔다. 몸을 회전시키는 순간 반대편에서 발이 날아드니, 이건 뭐 행동을 빨리 감기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큭!"
뒤로 물러날 시간도 없었기에 두 개의 단검을 들어 그것을 막아냈다. 두 팔에 욱신거리는 압박감이 전달되며 절로 몸이 뒤로 밀려났다. 빠르고, 무거웠다.
이미 몸으로 한 번 받았기에 그 속도와 위력은 대강 측정하고 있었다. 수호황룡을 발동하면, 결코 못 받아낼 정도는 아니었다.
‘역시 강한데.’
백인하는 체력 스테이터스는 낮은 편이지만 힘은 제법 강하고, 민첩은 특출난 수준이다.
특성 또한 그 민첩을 강화시켜준다. 거기에 마력 스테이터스는 마도왕과 비벼볼 정도라니 말 다한 수준. 새삼스럽지만 왜 이런 놈이 현역이 아니라 학생인 건지 따지고 싶었다.
‘그래도…….'
수호황룡을 얻기 전이었다면 아슬아슬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에겐 수호황룡이…… 그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낼 황룡투기가 있다.
강신혁의 두 눈이 요요하게 발광했다. 그가 쥐고 있는 두 목단검에 황금의 기운이 흘렀다. 그것을 알아본 백인하의 표정이 굳었다.
“너 이거…… 핫!”
그 이상은 아무 말도 필요 없었다. 몸으로 알아보면 될 테니까!
일단 한 번 물러섰던 백인하가 재차 빠르게 돌격하며 그의 가슴팍을 노리고 걷어찼다.
바닥을 박찬 순간 이미 목적지에 도달해있다. 그의 도약은 도약이 아닌 순간이동이나 마찬가지. 강신혁은 그것을 단검 하나로 걷어내며 나머지 단검으로 사타구니를 찔렀다.
"읍."
그러나 명중하기 직전 백인하의 모습이 사라지더니, 이번엔 그의 머리 위에서 강렬한 내려찍기가 들어왔다. 빨리 감기조차 아니고, 그냥 눈앞에 있던 백인하를 잘라내 머리 위로 옮긴 수준의 빠르기였다.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다. 태산 같은 압력을 머금고 있는 그의 일격은 강신혁을 쉬이 움직일 수 없게 옥죄고 있었다.
“칫……!"
아무리 특성으로 자신의 스테이터스를 강화해도 특성을 발동한 백인하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한 만큼, 애초에 ‘피한다’는 행위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강신혁은 이번에도 그것을 받아치며 반격을 넣었다. 거대한 압력이 작은 송곳에 산산이 터져나가며 무산되고, 다른 송곳이 날아들어 백인하의 무릎을 가볍게 긁어냈다. 백인하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그아!?”
“흣!”
두 개의 단검을 든 강신혁은 마치 머리가 두 개 달린 뱀처럼 기이한 움직임으로 백인하를 압박했다.
백인하 역시 전투감각은 뛰어나다. 특성을 최대한으로 살려 신출귀몰하게 몸을 놀리며 강신혁의 빈틈을 노리고 발을 꽂아왔지만 강신혁의 황룡투를 넘을 수는 없었다.
“맞아라 좀!”
“너나 뒈져라!”
강신혁은 뒤에도 눈이 달린 것처럼 기민하게 공격에 반응했다. 눈으로는 아직 백인하의 움직임을 읽어낼 수 없었으나 그의 본능은 다가오는 적을 포착하고 최적의 타이밍에 대응할 수 있게끔 그를 유도해주고 있었다.
“괴물아!”
“너 새꺄 너!”
쾅! 쾅! 쾅! 두 사람이 가볍게 부딪칠 때마다 대련장 전체에 진동이 퍼졌다. 밖에서 대련을 구경하던 학생들은 울상을 짓고 말았다.
“망할 하나도 안 보여.”
“여기서 이러고 멍하니 보고 있는 것보다 내가 비트를 넣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건 학교축제에서 하시고.”
“그냥 뭔가 빛이 번쩍이는 건 알겠는데. ……쟤네 싸우고 있는 거 맞지?”
민첩이 A랭크를 넘는다면 그나마 강신혁과 백인하의 움직임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카렌은 아직 민첩 A랭크를 달성하지는 못했으나…… 그녀의 특성이 신경계 강화인 만큼 어떻게든 집중하면 둘이 격돌하는 순간을 똑똑히 포착할 수 있었다.
‘와 진짜 잘 싸운다……. 백인하 쟤도 힘을 숨기고 있었네, 속도 예전보다 훨씬 더 빨라졌잖아.’
실은 강신혁이 방학 동안 강해진 것처럼 백인하도 한창 강해지는 시기였을 뿐이지만 카렌은 백인하도 강신혁과 같은 케이스였을 것이라고 멋대로 판단했다.
과연, 어째 학기 초부터 둘이 죽이 잘 맞더라니 같은 힘숨찐이었던 것인가. 물론 백인하는 강신혁과는 달리 굳이 힘을 숨기지 않아도 찐따처럼 보인다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그런데 어째…… 신혁이한테서 내 남자의 느낌이 나는데…….'
구체적으로는 자신을 구해줬던 세상에서 최고 멋진 특무부 대원 신은혁의 냄새가! 지금 그가 발하는 저 기운, 그게 이번에 활약했던 죽음의 인형사 신은혁이 뿜어내던 기운과 흡사하다는 느낌이…….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저 애송이가 그런 다크 포스를 뿜어낼 수 있을 리 없어. 내 남자는 최소 20대임에 분명해……."
“네 취향은 잘 알겠는데 다른 사람들 듣는 앞에서 떠들지 마라.”
“아, 시합상대도 못 되고 버려진 도우진이다.”
“너 뒤진다 진짜.”
어느덧 도우진이 카렌 옆에 오도카니 앉아있었다. 조금 많이 슬퍼보였기에 카렌은 그를 필요 이상으로 공격하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인심 썼다. 도우진, 내가 대련해줄게.”
“동정할 거면 대신 힘을 내놔.”
“……그 대사는 좀 맘에 든다.”
“꺼져.”
두 사람이 바보 같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강신혁과 백인하는 슬슬 결판을 내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뇩아, 이건 좀 아플 수도 있어.”
“응, 너도.”
격렬히 부딪혀가며 전투를 벌이던 두 사람은 일단 떨어졌다. 특이한 점은, 백인하의 양팔과 양다리의 옷감이 너덜너덜해진 반면 강신혁은 옷도 목단검도 모두 멀쩡하다는 것이다.
“무기 강화 특성…… 방어구도 완벽하게 포함하네.”
“개사기네 진짜.”
그러나 이윽고 그 말이 쏙 들어갔다. 백인하의 양다리를 푸르디푸른 마나가 뒤덮기 시작한 것이다. 유형화한 마력은 이윽고 칼날의 형태를 만들어냈다. 아마도…… 스킬이다. 그것도 상당히 높은 희귀도와 숙련도의 스킬.
“간다.”
“와라.”
백인하는 강신혁이 대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곧장 돌격했다. 2학기부터 점점 주목도를 높여갈 생각이었던 만큼, 지금 자신이 낼 수 있는 속도를 최대한으로 발휘했다.
여태까지 강신혁과 대련을 하며 이 공격에 그가 죽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기꺼이 전력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진짜 기가 막히지.’
마음속으로는 자화자찬을 하면서도 표적을 담은 두 눈에는 흔들림이 없다.
오른다리를 뻗는 듯하지만 그것은 페이크. 그의 공격을 받아내며 왼발로 강신혁의 머리통을 걷어차 깔끔한 KO를 받아낼 생각이었다.
전력으로 자신의 힘을 발휘할 때 백인하는 스스로가 바람이 된 것 같다고 느끼곤 했다. 그리고 단언컨대 지금은 그중에서도 가장 빠른 속도를 내고 있었다.
실로 황홀한 순간이다. 그렇기에 그 순간을 깨트리는 흐름이 느껴졌을 때 그는 멈칫하고 말았다.
‘바람?’
눈앞에 강신혁이, 그가 들어 올린 단검이 보였다. 그 단검을 휘감고 있는 기운이 놀랍게도 백인하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래, 그의 친구에게도 아직 남겨둔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이것까지 막힐 수는 없지!’
벌써부터 쓰러져줄 수는 없다. 백인하는 몸에서 머뭇거림을 지워내고 과감하게 자신의 전력을 담아 강신혁을 공격했다!
“흣!?”
직후 그의 발끝이 휘어졌다.
멋대로 공격의 궤도가 ‘비틀렸기’ 때문에.
“익......!"
그것을 인지한 순간, 백인하는 경악하며 신체를 바로잡으려 했으나…… 그 전에, 강신혁의 단검이 그의 미간을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