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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화. < Chapter 25. 알아볼 수도 없어 - 4 >

개학식 날은 교실에 모여 얼굴만 비추고 바로 해산이었다.

방학 중에 엘레노어와 있었던 일을 짐작한 카렌이 괜히 그의 어깨를 쿡쿡 찌르며 징그러운 표정을 짓거나, 백인하가 놀러가자고 꼬시기도 했지만 그는 그 모든 이를 뿌리치고 홀로 교문을 나왔다. 신은아와 초인상가에서 만날 약속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진석의 부탁은 그에게도 신은아에게 연락하기에 적절한 변명거리가 되어주었다. 신은아는 그가 처음 보낸 메시지 몇 개에는 답장이 없었지만, 약속시간과 장소까지 멋대로 지정한 후 안 오면 클레어의 바에 가겠다고 했더니 그의 계산대로 나오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약속장소는 그들이 처음 정식으로 만났던 초인상가의 카페, 개인실. 점원은 그대로였지만 그때와 비교하면 강신혁은 참 많이도 달라졌다. 고작 반 년도 안 되어 일어난 변화라고 생각하니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하…… 할부지.”

“안녕."

방 안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신은아가 강신혁과 자신 몫의 음료수 잔이 담긴 트레이를 들고 나타났다.

그녀의 볼은 팅팅 부어있었다. 그녀의 어리광에 익숙해진 강신혁에게도 보기 드문 표정이었으니, 평소의 얼음공주를 알던 사람들이 본다면 까무러치고 말 터였다.

“할부지 너무해.”

"혹시 바쁜 일이 있었으면 미안해요. 하지만 그런 거라면 안 왔으면 됐는데."

"클레어한테 보내는 건 더 싫었어.”

뭐 대충 그런 이유일 거라고 생각했다. 강신혁은 휘핑크림을 많이많이 올린 카페모카를 받아들어 위의 크림을 살짝 핥았다. 신은아는 그의 그런 모습을 보며 은밀하게 볼을 붉혔다.

“그래서, 여태 연락은 왜 씹었어요?”

“우으…… 죄송해요.”

둘밖에 없어서 그런지 오늘은 처음부터 손녀모드다. 하지만 둘 사이의 거리감은 선배모드일 때보다도 멀었다. 아마도 여태 연락을 끊었던 것과 관련이 있으리라.

“그래서, 왜?”

“그으게…… 화낼까봐.”

“내가 왜?”

“멋대로 껴안았으니까.”

글쎄, 스킨십의 강도만 놓고 보면 여태껏 그녀가 강신혁에게 해왔던 일들도 별 차이는 없을 것 같은데…… 강신혁은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신은아의 태도는 여전히 수상했다. 그는 결국 대놓고 묻기로 했다.

“왜 껴안았는데?”

“몰라.”

“내가 무사해서 기뻤던 게 아닐까?”

"멋대로 혼자 강적이랑 싸우고 있어서 화났어.”

갑자기 정색했다.

“아니, 혼자는 아니었는데.”

“클레어는 그냥 구경이나 하고.”

“드론으로 보호해주고 있었는데……."

“그 작은 여자애는 이상하게 할부지한테 친한 척 하고.”

“그야 같은 동아리 선후배니까 어느 정도는 친하죠.”

“나한테는 말도 안 하고 같은 유니폼 챙겨 입고.”

“그건 그냥 변장 같은 거였는데.”

이쯤에 이르러 강신혁은 이야기가 탈선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도 신은아가 입을 다물고 있는 것보다는 나았기에 얌전히 카페모카를 마시며 그녀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하지만 멋있었어.”

“그래?”

"응."

한바탕 쏟아내고 나니 화가 풀린 것일까, 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잔 테두리를 새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뽀득뽀득 문지르고 있었다.

“거기 있던 사람들 다 할부지가 멋지다고 생각했어.”

“갑자기 상황을 정의해버리네.”

“그래서 질투 나서…… 그만.”

결국은 어린아이의 가족에 대한 독점욕이었다는 것일까. 그렇게 저질러버린 후엔 제정신으로 돌아와 여러모로 위험한 행동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잠수해버렸다는 얘기다.

그야 그럴 법도 하다. 대역류가 있은 직후부터 뇌제와 신은혁의 친남매설, 열애설, 음모설이 온갖 커뮤니티를 가득 채우고 있었으니까. 신은아가 그를 껴안고 있는 사진은 이미 지구 반대편 사람들도 한 번쯤은 봤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다.

참고로 지금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열애설과 성전환복제설이었다.

“그러니까…… 죄송해요.”

“그렇네, 확실히 남들 보는 앞에서는 자제해줬으면 해요.”

“미안해요.”

강신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헤일로의 조언이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그는 잔을 놓고 일어섰다. 솔직히 역효과를 낳을 것 같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래도 발을 멈추지 못한 것은 아마, 신은아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 쪽이 더 크기 때문일 터다.

그는 반대편에 앉아있는 신은아에게로 다가가, 뒤에서 그녀를 조심스레 안았다. 신은아가 번개를 맞은 것처럼 펄쩍 뛰었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어쩔 줄 몰라한다는 느낌이 강했지만.

“그래도 나쁜 짓을 한 건 아니니까 괜찮아.”

“아, 아으.”

“친한 사이인데 서로 안을 수도 있지 뭐. 대신 앞으론 둘이 있을 때만 하는 거야. 알았지?”

"응."

“그럼 이제 화해하는 거다.”

"응."

높은 나뭇가지 위에 올라간 고양이처럼 얌전히 굳은 신은아가 고장 난 것처럼 같은 대답을 반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헤일로. 오랜 세월을 산 친구답게 제법 괜찮은 조언이었다고 생각하며 속으로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강신혁에게 관리자가 메시지를 보냈다.

- 역효과가 제대로 나오겠군요. 하필이면 백허그라니.

‘응? 방향이 관계있어요?’

- 두근거림의 방향성이 다릅니다. 회원님은 정말 바보입니다.

아무래도 관리자도 고장이 난 모양이었다. 관리자에게서 바보라는 말을 듣는 건 처음이다. 관리자는 실체도 없는데 안아줄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화를 풀 수 있을까…… 그건 나중에 따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럼 화해도 했겠다 밥이나 먹으러 갈까요. 사실 은아 선배한테 부탁할 게 있어서 밥 먹으면서 얘기를 좀……."

"으응."

그녀와의 서먹한 관계가 회복된 것에 안도하며 팔을 풀고 물러나려는데, 신은아가 살짝 고개를 흔들며 그가 팔을 풀지 못하게 붙들었다.

“조금만 더, 이러고 있을래.”

“……화해하자마자 어리광이야?”

"으응...... 응."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오물거리던 그녀는 결국 입을 다물곤 머리를 강신혁의 가슴팍에 기대며 눈을 감아버렸다.

강신혁은 어딘가 그녀의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감히 그것에 대해 묻지 못했다.

결국 둘이 밥을 먹으러 간 것은 그로부터 두 시간이 지난 후였지만, 그 후로 내내 둘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선지 신은아는 그를 할부지라고 부르지 않았다.

@@@

신영의 2학기는 1학기보다 족히 다섯 배는 더 중요하다. 학교축제, 자매학교 교류회, 랭킹전 결산 등등 놀 거리도 초인으로서의 미래를 결정하는 시험도 모두 집중되어 있기 때문.

왜 그렇게 편중되어 있느냐고 하면 그야 당연히, 예비 초인들이 정식 초인으로 거듭나는 졸업시험이 2학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 전후로 열리는 이벤트들은 외부인들에게 신영의 졸업생들을 어필하기 위한 가장 좋은 기회.

덩달아 1, 2학년들 역시 3학년의 활약을 보고 배우며 자신의 차례를 대비한다. 그곳에는 청춘 대신 젊은 전사들의 열정만이 존재했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고, 물론 그 안에서도 대부분 학생들은 할 건 다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게…… 이게 말이 되냐!"

백인하는 책상을 내려치며 분개했다.

“열심히 게이트에 기어들어가고 자기단련에만 매진해야 할 여름방학 시기에 남녀가 들러붙어선, 개학하자마자 반 안에서 핑크빛 분위기를 자아내는 커플들이 대량으로 발생한다는 게…… 이게 말이 되냐고! 이게 나라냐!”

“진정해 병신아.”

강신혁이 백인하의 머리를 두들겨 진정시키려 했으나 백인하의 분노는 그 정도로는 가라앉지 않았다.

하긴 강신혁도 대놓고 반 안에서 끈적끈적한 바디터치를 하며 애정을 과시하는 커플의 모습을 보면 어딘가 싸늘해지기는 했지만 백인하의 반응은 심했다.

“2학기 실기 성적이 바닥을 칠 거야. 아니, 그렇게 되어야만 해. 학교 안에서 손 잡고 있는 놈들 다 죽어라……!”

“하, 쟨 왜 백인하일까……."

“얼굴 아까워, 다른 애한테 줬으면 좋겠어.”

“신혁이도 물드는 거 아냐? 소중한 미남인데 백인하랑 격리시켜놓는 게 낫지 않을까?”

“미남이면 뭐해, 강신혁은 비룡기사단장이랑……."

오랜만에 만난 백인하의 모습에 여학생들이 ‘그러고 보면 얼굴만은 예전부터 잘생겼었지’하고 새삼 볼을 붉히던 찰나 튀어나온 말에 그에 대한 호감도가 다시 바닥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 혼자라면 괜찮지만 백인하가 강신혁에게 달라붙어있다는 게 문제다. 타인인 척을 하고 싶었지만 백인하가 그를 놔주지 않았다.

“시뇩이 넌 아무 말도 하지 마! 알제 누님이랑 데이트한 거 내가 다 아는데!”

“그러니까 진정하라고.”

방학 중에도 알음알음 소문은 퍼져 있었지만, 개학으로 인해 드디어 강신혁이 비룡기사단에 새로운 와이번을 데려왔다는 사실이 전교에 확실하게 퍼지게 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 엘레노어가 동행했다는 것 역시 알려졌기에 어떤 이들은 강신혁이 새로운 부단장이 될 것이라는 얘기를 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이미 두 사람이 사귀고 있는 게 확실하다는 얘기를 하고 있기도 했다.

“정말 신혁이도 참, 손이 빠르다니깐!”

“우연이네, 바로 얼마 전 그 비슷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완전히 공인 커플이네! 이제 단장님 말고 다른 여자랑 친하게 지내면 안 되니까. 알지?”

한편 카렌은 싱글벙글 웃는 표정이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보일 정도. 강신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소문 퍼트린 거 너지?”

“네!”

“솔직해서 좋구나.”

“아야야야야야.”

강신혁이 아무 망설임 없이 관자놀이 주먹 돌리기 공격을 할 수 있는 여성은 이 학교에선 카렌이 최초였다. 옛날부터 고아원의 말썽 꾸러기 꼬맹이들을 상대로도 이 주먹 돌리기 한 번이면 얌전해지곤 했다.

“그런데 신혁아, 나 조금 진지한 부탁 하나 해도 돼?”

“날 엿먹여놓고 부탁이라니 낯짝이 제법 두꺼운데.”

카렌은 그의 말을 자연스럽게 받아넘기며 그에게 물었다.

“너 협회랑 연결고리 있잖아, 그치.”

“뭐…… 그렇지.”

그 사실은 오히려 강신혁 쪽에서 적극적으로 소문을 내고 다니고 싶을 정도다. 한국 초인협회의 비호가 있으면 누구도 섣불리 그를 건드리지 못할 테니까. 사실 이 시점에서 강신혁은 제법 거물이 되어 있었지만 그건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저번에도 말했잖아, 왜 저번에 날 구해준 데다 이번에 대역류 때 엄청 활약한 특무부 대원 신은혁……."

“몰라. 저번에도 모른다고 했잖아.”

“……대답이 조금 너무 빠르지 않았어?”

“아무튼 몰라.”

“한 번 만나서 얘기라도 해보고 싶단 말이야, 진짜 부탁해! 어떻게든!”

카렌이 볼을 붉히며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솔직히 징그럽다고 생각한 강신혁은 그녀로부터 조금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그녀는 바퀴벌레처럼 꿈틀거리며 순식간에 간격을 좁혀왔다.

“이번에 영상 풀린 거 보고 다시 반했단 말야…… 완전 멋져가지고! 이런 말은 부끄러운데 내 타입 그 자체야. 그래서 어떻게든 개인적인 연락을 해보고 싶어서…… 신혁아? 왜 그런 수르스트뢰밍 통조림을 눈앞에 둔 스컹크 같은 표정을 짓는 거야?”

“아무 것도 아냐. 하지만 몰라.”

“진짜 너무해……! 너 뇌제랑 친하잖아. 어떻게 연락처를, 아 그렇구나!”

카렌이 쿡쿡 웃으며 그의 뺨을 찔렀다.

“뇌제가 너 버리고 신은혁으로 갈아타서 그런 거지? 조금도 관심 없는 척하고 있었으면서…… 그러게 내가 처음부터 단장님이랑 잘해보라고 했잖아. 응? 응응?”

카렌은 자꾸 그의 뺨을 쿡쿡 찔러오고 있었다. 마치 어떻게 하면 사람을 열 받게 할 수 있는지 연구라도 하고 온 것 같았다.

강신혁은 조용히 웃었다. 마침 오늘 3교시는 무기술 단련2. 아마 2학기 첫 시간인 만큼 반드시 대련이 잡혀있을 터였다.

“오늘 대련에서 나한테 이기면 가르쳐줄게.”

“역시 알고 있었구나? 그럴 줄 알았다니까! 일단 만나기만 하면 아무리 뇌제가 라이벌이라도 절대 안 져, 내가 훨씬 젊으니까!”

“너 그 얘기 혹시라도 은아 선배 앞에서 하진 마라.”

그렇게 3교시 대련 시간이 되었다. 강신혁은 무척이나 못마땅해 하는 담당교사 공준표의 시선을 무시하며 대련 상대로 카렌을 지목, 그녀의 몸에 직접 동방예의지국의 법도를 새겨주었다.

“꽤액!”

“그래도 돼지 멱따는 소리는 좀 그렇지 않냐.”

“케헥…… 너무해, 너무 아파! 공격은 보이지도 않고!”

“신경 강화 수련을 열심히 하지 않았구나.”

“열심히 했단 말이야……! 아, 아파.”

그래도 나름 힘을 조절한다고 한 것이지만 대련을 지켜보던 학생들은 그 광경에 압도되고 있었다. 카렌 역시 1학년에서는 최상위권에 들어가는 강자였음에도 강신혁에게 일방적으로 얻어터지는 것을 보았으니까.

아니, 정확히는 그가 공격을 하는 것은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도 카렌이 나가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뭐야…… 쟤 더 세지지 않았어?”

“그야 우리도 방학 중에 단련했는데 강신혁이라고 놀고 있진 않았겠지.”

“원래부터 훈련광이었잖아.”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쟤 1학년 맞아?”

그들도 같은 신영의 1학년이지만, 강신혁의 무위는 질투를 하는 것도 바보 같이 느껴질 만큼 강했다.

방학이 되기 조금 전부터 느끼고 있던 것이지만…… 이제 그는 완전히 다른 영역으로 넘어가버리고 만 것이다.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쫓아가야 할 대상이 되었다.

“백인하보다 센 거 아냐?”

“아니 진짜 그런 것 같은데.”

“소문 들었지, 와이번도 길들여왔다는데.”

“아니 그건 직접 전투력하곤 관계없잖아.”

“쟤 사람 맞아?”

너덜너덜해진 카렌을 대충 일으켜 보건실로 보내주려는 그때였다. 혼자서 열심히 날을 갈고 있던 도우진이 앞으로 나섰다. 일방적으로 펼쳐진 대련을 보았음에도 전혀 기세가 죽지 않은 모습이었다.

“강신혁, 한 판 붙자.”

“좋지. 그러면 카렌은 기다리고 있다가 도우진이랑 같이 사이좋게 보건실로 가면 되겠다.”

“이 새끼……!”

“잠깐만.”

그런데 강신혁의 가벼운 도발에 도우진이 이를 갈며 대련장에 올라서려던 순간, 그를 막아서는 이가 있었다.

“시뇩아, 나랑 붙자.”

백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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