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그인하자마자 VIP-131화 (131/345)

131화. < Chapter 24. 되돌릴 수 없어요. - 4 >

“그래서 지금까지 연락이 안 되고 있어요. 어쩌면 대역류의 뒤처리가 바쁜 것뿐일지도 모르겠지만요.”

그 날 저녁, 미로토즈를 찾은 강신혁은 망치와 정을 들고 헤일로가 내어놓은 거대한 나무뿌리를 정성껏 가공하며 그의 머리맡에 얹힌 나뭇잎을 통해 헤일로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직 작업은 10분의 1도 진전되지 못했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엘프들은 매번 감탄을 거듭하며 초롱초롱하게 눈망울을 빛내곤 했다.

[부끄러운 것이겠지.]

헤일로는 강신혁에게 이번 일에 대한 얘기를 듣자마자 껄껄 웃고는 그렇게 대꾸했다.

[그 작은 아이가 영감에게 마음을 전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겠는가. 헤아려주시게.]

“헤일로야말로 은아의 할아버지 같네요.”

[우리 다 비슷한 것이었지. 처음 그 아이가 히어로 유니버스에 접속했을 때는 영감이나 나나 쩔쩔매지 않았던가.]

“그건…… 뭐, 그랬죠."

동화율이 높아져갈수록 전생에 히어로 유니버스에 접속했던 기억도 점점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중에서도 ‘은아’가 다섯 살의 나이로 처음 히어로 유니버스에 들어왔을 때의 기억이 유독 선명한 편이었다.

아마도 지금 그가 신은아와 친밀하게 지내고 있는 만큼 그녀와 관련도가 높은 기억이 우선적으로 떠오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차라리 야누스처럼 친근한 오빠처럼 대해줄 수 있었으면 지금처럼 관계가 일그러지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글쎄, 야누스 그놈은 너무 가벼워. 당시의 은아에게는 모루 영감이 필요했어. 내가 장담하지.]

모루, 헤일로, 야누스. 어렸던 은아를 가장 많이 신경 쓰고 챙겼던 것은 역시 그 세 사람이었다. 당장 헤일로와 야누스가 지금도 주기적으로 신은아와 개인적인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게다가 일그러졌다니 무슨 말인가. 내가 보기에 두 사람의 관계는 지극히 알기 쉬운 직선적인 것인데.]

“헤일로도 아직 멀었네요. 이게 직선적인 거면 한국 드라마는 고속도로겠어.”

[후후, 내가 보기엔 영감은 아주 사소한 착각을 하고 있어. 이렇게 둘을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구만.]

“미안해요, 이미 훌륭한 한국 드라마 시청자였네.”

그는 퉁명스레 대꾸하며 나무뿌리를 내리쳤다. 그의 마음을 읽어낸 헤일로 쓰게 웃는 목소리로 말해왔다.

[고민할 것 없네, 영감. 돌아가거든 은아에게 만나자고 연락해. 만나서 녀석이 그랬던 것처럼 꼭 끌어안아주면 되네.]

“의존증이 더 심해지지 않을까요.”

[맹세컨대 괜찮을 거야. 그 아이에겐 그 정도 충격요법이 가장 적절해.]

“충격요법……?”

끌어안아주는 게 왜 충격요법이란 말인가. 무조건적인 할아버지의 사랑을 바라는 신은아에겐 바라마지 않던 스킨십일 터였다.

[모루 영감, 마음에 둔 여자가 있다고 했었지?]

“영감이라는 단어랑 같이 들으니까 좀 그렇긴 하지만, 네.”

[은아를 위해서라도 그 여자와 잘 되면 좋겠군.]

"??"

이제는 정말이지 헤일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클레어와의 사이를 응원해준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기에 순순히 감사를 표했다.

“저도 꼭 그랬으면 좋겠네요 ”

[그래, 그렇게 되면 나머진 알아서 진행될 거야. 모루 영감도 사내답게 처신하도록 해. 자네의 품이 그리 좁지 않으리라 나는 믿고 있어.]

“오늘 헤일로는 조금 이상하네요.”

[그럴 수밖에. 혼자서만 활기찬 삶을 살고 있는 모루 영감에게 조금 질투하고 있거든.]

“이런 활기는 사양하고 싶은데……."

그는 한숨을 쉬며 다시 망치를 들었다. 그에게 헤일로가 재차 강조했다.

[만나서 안아주는 거야. 잊지 마시게나.]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 내가 이 말을 했다는 건 가능하면 츠쿠요에게는 말하지 말게나.]

“그건 저도 하고 싶지 않아요.”

헤일로와 의견의 일치를 본 후 작업을 재개했다. 산란하던 마음도 나무뿌리를 한없이 다듬는 작업 속에서 천천히 차분해져갔다.

이윽고 모든 잡념이 사라진 그의 머릿속에 유일하게 남은 상념은 그저께 전투에서 보았던 나가 제사장의 마법진. 자신의 신체를 제련하던 그 마법진을 떠올리고 있자니 괜히 망치질에 힘이 들어갔다.

[허, 전생의 영감의 기술은 그렇지 않았는데.]

그러다보니 헤일로에게 한 소리를 듣고 말았다.

“알고 있어요. 그 경지를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는 거.”

[경지의 문제를 논하는 게 아냐. 갈래가 달라졌어. 전생의 모루 영감은 히어로 유니버스에 접속하기 전에 이미 기술적으로는 완성되어 있었거든.]

“아아…… 그러고 보면, 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전생의 모루는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기술에 일직선적인 경향이 있었다. 히어로 유니버스에 접속하고 다른 세상의 문물과 함께 새로운 기술을 접하기는 했지만, 워낙 확고한 기술을 갖고 있었던 탓에 거기에 그리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강신혁은 다르다. 제아무리 모루의 기억을 각성했다지만 그가 처음 각성했을 당시 지니고 있던 것은 어디까지나 야금술의 기초 정도. 그 위에 천천히 흘러나오는 모루의 기억을 비롯해 그가 새로이 접한 기술들을 가공해 색다른 방식으로 쌓아올리고 있었다.

당장 전생의 모루는 인챈터와 협업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대장장이 기술을 완성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올 크래프트 따윈 도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안 좋을까요.”

[영감은 어떻게 생각하지?]

“어떻게 생각하고 자시고 저한텐 이게 야금술의 기준이니까.”

[과연, 그렇다면 그것으로 좋은 게 아닐까. 쌓아올리는 방식은 달라도 영감이라면 언젠가 다시 가장 높은 곳에 이를 수 있을 테니까.]

그것도 어쩌면 전생에서보다 훨씬 더 빨리. 그 말을 하려던 헤일로는, 그러나 이내 스스로 그 말을 집어삼키고 말았다.

인간보다 훨씬 긴 인생을 사는 이종족의 장인조차 도달하지 못하는 영역. 전생의 모루조차 지나치게 빠른 것이었는데, 그보다 더 빠르게라니.

‘아니…… 영감은 단지 환생했을 뿐이니까, 더 빠르게 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가.’

그저 전생에는 겪어보지 못한 경험을 더해 보완하고 있을 뿐. 그렇게 다시 정상에 이르렀을 때, 그의 야금술은 분명 전생의 그것보다도 대단한 기술이 되어있을 터였다.

[그 과정을 이렇게 보고 있을 수 있어 정말로 행복하군.]

"응?"

작업에 집중하고 있던 탓이었으리라, 강신혁은 헤일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헤일로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허허 웃었다.

[이 기세면 1년 안에 완성되겠다는 말을 했을 뿐이야.]

“……기운 빠지니까 그런 말은 하지 맙시다, 우리.”

@@@

족쇄 제작을 몇 시간 정도 하고 나서는 개인 작업으로 옮겨갔다. 방학 내내 말벌의 독침과 사마귀의 앞발만 가공했던 탓에 이제 슬슬 새로운 걸 만지고 싶던 차에 들어온 새로운 몬스터들의 사체는 정말 반가운 선물이었다.

“우선 가시늑대부터 살필까.”

전장에 도착해 가장 먼저 상대했던, 가시를 쏘아내거나 몸을 가시로 변화시키거나 땅바닥에서 가시가 솟구치게 했던 바로 그 괴물들. 관리자의 설명에 따르면 종족명부터가 가시늑대라는 모양이었다.

“부산물도 크네.”

가장 먼저 꺼낸 것은 당연히도 엘레노어가 사냥했던 엘리트 개체의 전리품. 죽는 순간 눈에 안 띄게 자동으로 루팅하여 수납한 것인데, 통째로 수확한 놈의 꼬리 같은 경우엔 세워놓으면 강신혁보다도 덩치가 클 정도였다.

엘레노어는 자신이 창을 빌리는 대가로 전리품들을 내어놓는 게 자신에게 남는 장사라고 했지만 강신혁에겐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런 고등급 몬스터의 사체를 또 언제 어디서 구하겠는가. 높은 수준의 사체를 가공하면 스킬 수준도 빨리 오를 테고, 높은 등급의 무구를 만들어낼 가능성도 높아진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할까요. 꼬리를 가공하는 게 제일 좋겠죠.”

- 늑대의 종족특성이 가장 짙게 남아있는 것이 그 꼬리이니까요.

자동 루팅이 되면서 그 부분까지 신경을 써준 모양이다. 히어로 유니버스 만만세였다.

“하지만 이건 올 크래프트로 제작하는 수밖에 없겠는걸.”

- 그렇습니다.

그런 이유로, 기껏 꺼냈던 꼬리는 도로 인벤토리 안으로 들어갔다. 올 크래프트란 단어부터가 본디 그리 쉽게 꺼낼 만한 것이 아니다.

이 꼬리를 가장 안정성 있게 아티팩트화하는 방법은 바로 이나희와 힘을 합쳐 마나 크래프트를 시행하는 것이리라. 안 그래도 방학이 끝나기 전에 한 번 더 작업을 하기로 약속했던 만큼 이건 그때 가공해볼 생각이었다.

‘대신 뼈와 피를 활용해 투창을 만들어볼까.’

가시늑대가 동시에 여럿의 가시를 쏘아내 공격했던 것을 떠올리며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잘 어울릴 터였다.

가시늑대는 금속질의 가시를 쏘아내기도 했던 만큼 뼈를 금속처럼 불로 녹여 가공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렇게 녹여 모양을 잡고 피에 담가 식혔다

피로 담금질을 하는 것은 전생의 모루도 말년에 시도했던 방법이었는데, 해당하는 몬스터의 재료를 가공할 때면 이런 식으로 해서 무구로서 안정화시키고 능력을 증폭시키는 것이 가능해졌다.

‘영력을 불어넣으면 놈이 생전에 어떻게 싸웠는지가 생생히 떠올라.’

가시의 날카로움과 단단함을 떠올리며 계속해서 망치를 내려쳤다. 놈과는 직접 싸우기도 했던 만큼 영력으로 분석하는 작업도 상당히 수월했다.

그의 가슴팍에서부터 손으로 뻗어나가 망치를 통해 뼈에 스며들어간 영력이 그 근원을 샅샅이 훑고 강화시킨 후에 다시 강신혁에게로 돌아왔다. 망치를 사이에 두고 영력의 순환이 이루어지며 서로를 강화하는 것이다.

이것만은 누구도 감히 따라할 수 없는 강신혁, 아니 모루의 고유기술이었다.

[역시 영감은 영감이야.]

헤일로가 또 끼어들었지만 강신혁은 이미 완벽하게 작업에 몰입해있는 상황. 그의 눈에서 넘쳐나는 황금빛의 물결이 망치와 뼈를 은은히 뒤덮는 광경은 무척이나 신비로웠다.

[어떻게 생각하나, 관리자. 아까 모루와 내가 나누었던 이야기 말이야.]

- 헤일로 님께서 우리 회원님을 여난에 빠트리려 제시한 그 악독한 술수에 대해 말씀하시는 건가요?

[관리자…….]

관리자의 집착에 질린 듯한 목소리를 내는 헤일로. 관리자는 자신의 말을 취소할 생각은 없는 듯했지만, 헤일로가 말하려던 것이 무엇인지는 파악하고 있었다.

- 회원님의 야금술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회원님의 기술은 무엇 하나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지금 회원님께선 새로운 세상에 걸맞은 기술을 추가로 익혀나가고 계시는 중입니다. 전생의 회원님의 경지를 헤일로님께선 정상이라고 칭하셨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번 생에 회원님께서 이를 경지는 분명 그보다 더 높습니다.

[역시 스스로 검에 피를 묻히게 된 것이 큰 영향을 주었는가.]

- 그것을 포함해 많은 만남과 경험이 영향을 주었지요. 환생이란 필연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강신혁 본인에게는 한 번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관리자의 말에 헤일로는 드물게도 코웃음을 쳤다.

[관리자가 잘도 그런 말을 하는군.]

- 뭔가 말씀하셨습니까?

[츠쿠요와의 잡담거리가 하나 생겨났다고 말했네.]

- ……정말 용감도 하시군요.

그때 강신혁이 동작을 멈추었다. 창날에 묻은 숫돌가루를 깨끗하게 닦아내고 그것을 들어 올려 살폈다. 처음 무기를 만들기 시작했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무기가 멸망한 세상의 햇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 약간의 전투 경험에 풍부한 영력이 더해져 생전의 몬스터가 지닌 능력을 고스란히 살려낸 명작 [늑대가시투창(S-)]을 탄생시켰습니다! 야금술의 숙련도가 크게 오릅니다!

- 동기화가 가속됩니다. 현재 동화율 32.5%

헤일로와 관리자는 완성된 물건을 보고 ‘이 정도면 이미 전생의 수준을 반 정도는 따라잡지 않았는가’하고 감탄했지만, 정작 그것을 만들어낸 강신혁은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S-랭크의 투창이라면 실로 어마어마한 성과였지만 그래도 과거 한 번 만들어냈던 랭크가 아닌가. 가능하면 이번에야말로 S랭크의 아티팩트를 탄생시켜보고 싶던 터였다.

“그러면 아예 다른 걸 만들어볼까.”

사실 이번 작업의 메인 디쉬는 따로 있지 않던가. 강신혁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굳이 감추지 않으며 자신이 이번 대역류에서 주목을 받게 만든 원흉, 나가 제사장의 사체와 놈이 다루던 대낫을 꺼냈다.

[허.]

그런데 그 대낫을 확인한 헤일로가 대번에 놀랍다는 목소리를 냈다.

[내가 미리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그것을 챙겨왔는가?]

“……네?”

명한 표정을 짓는 강신혁에게 헤일로가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에게 만들어달라 부탁했던 낫이 아닌가! 이전에 부탁하려던 것도 이것이었는데, 내가 말을 안 해도 어떻게 자네가 먼저 찾아왔는지 모르겠구만.]

“낫을…… 왜?”

[무슨 소리를 하는가, 영감. 낫에 용도가 하나밖에 더 있겠는가.]

헤일로가 어리둥절해하며 말했다.

[농사해야지.]

낫이라고 하면 사신 밖에는 떠올리지 못했던 중2병 환자는 그 말에 큰 상처를 입고 침몰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