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 Chapter 24. 되돌릴 수 없어요. - 1 >
신풍의 보주와 극천신주를 연구하면서 강신혁이 가장 먼저 했던 생각은 ‘이것들을 신살검에 끼운다면 어떻게 될까’였다.
그 생각은 훌륭한 결과를 낳았다. 당장 이전 스파인 로세와의 전투에서 극천신주를 끼운 신살검이 극강의 위력을 보여준 것만 해도 분명하지 않은가.
다만 신풍의 보주는 이런 식으로 운용하기가 조금 힘들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극천신주와 달리 신풍의 보주는 아직 상태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 지금도 천천히 자가복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언 발에 오줌을 누는 수준이었다.
극천신주를 끼우면 신살검은 SS랭크까지 강화되지만, 신풍의 보주를 끼우면 고작해야 S+랭크가 한계였다.
‘신풍의 보주는 약해. 신살검에 끼우는 건 시기상조야. 신풍의 보주가 뿜어내는 영력의 바람, 이걸 극한으로 강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다면 신살검에 끼우지 않고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복구 방법도 마땅히 생각나지 않는데 계속 연구나 해야 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았다. 강신혁은 간단하면서도 지극히 효과적인 답을 찾아냈다.
바로 구슬을 두 개 동시에 사용하는 것이다.
“일단 방해되는 것들을 치워두고.”
그는 한 손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으며 다른 한 손…… 베놈 프린세스 소울을 착용중인 손을 휘둘러 다섯 가닥의 실로 전방을 긁어냈다.
드래곤의 발톱처럼 흉흉하게 날을 세운 다섯 줄기의 분노가 그의 빈틈을 노리고 있던 몬스터들을 모조리 토막 냈다. 그러나 그 와중에 특이한 행동을 하는 놈들이 있었으니, 바로 허공에 나타난 S급 게이트를 향해 몸을 날리는 몬스터들이었다.
사람 덩치만한 크기의 뱀들이 허공을 유영하는 속도가 생각보다 너무 빠르고 불규칙적이어서 조금만 시선을 떼면 놓치기 쉬웠다.
“어딜…… 쳇.”
어쩌면 이 위치에 S급 게이트가 열린 것도 우연은 아니었던 것일까? 처음부터 그럴 의도였던 것처럼 엘리트 개체가 게이트로 뛰어드는 가운데 남은 몬스터들이 목숨을 내던져가며 강신혁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그 덕에 비교적 쉽게 몬스터들을 죽일 수 있었지만, 게이트 안으로 도망쳐 들어간 몬스터를 붙잡지는 못했다.
강신혁의 옆에 둥둥 떠 있는 드론을 그가 직접 조종할 수 있었다면 얘기는 달랐을지도 모르지만, 드론은 어디까지나 강신혁을 지키기 위해 프로그래밍 되어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도망치려는 건 아닐 텐데. 방출을 준비하고 있는 게이트 안에 들어가면 몬스터라도 무사하지는 못할 터……..'
그는 게이트를 경계하며 최대한 빠르게 움직였다. 인벤토리에서 무사히 두 개의 구슬을 꺼내, 그것을 품에 넣으며 동시에 활성화시켰다.
신풍의 보주가 먼저 영력을 품은 강한 바람을 일으켰고, 그것이 외부로 터져 나올 틈도 없이 극천신주가 그것을 빨아들였다. 그것이 반복되며 극천신주에 바람의 기운이 쌓여갈 때쯤 비로소 S급 게이트가 열렸다.
- S급 이레귤러 게이트 [고대 전사의 쉼터]가 외부 침입으로 인해 변질됩니다. 주의하세요!
변질? 설마 방금 게이트 안으로 뛰어 들어간 뱀들이 변화를 일으켰단 얘긴가?
강신혁은 죽음의 인형사 코스프레를 그만두고 신살검을 뽑아야 하나 한순간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지금 자신의 능력과 황룡투를 믿고 원래 계획한 대로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드디어 이곳에 도착했군.]
[우리의 차례가 왔어.]
바닥을 기어가듯 기분 나쁜 목소리가 강신혁의 망막을 두드렸다. 그는 게이트를 비집고 나오는 괴물의 모습을 보며 저절로 납득했다. 설마 저런 게 가능했다니.
근육질의 인간의 상체, 굵은 뱀의 하체. 인도 신화에 나오는 나가를 닮은 반인반수의 괴물이 그곳에 있었다.
- 최소 S랭크로 측정되는 나가 전사입니다. 주의하시길.
지구식으로 번역하면 역시 나가가 되는 것인가. 강신혁은 묘한 부분에서 감탄하며 양손을 늘어트렸다.
신풍의 보주는 계속해서 극천신주에 기운을 빨리고 있었다. 강신혁은 이제 슬슬 기운을 발휘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전신에 황금빛이 감돌았다. 마스크 너머로 보이는 두 눈에 흉포한 스크래치가 내달렸다.
[너 제법 강해 보이는구나. 하지만…….]
[네 옷 안에 품고 있는 것이 더욱 특별해보여.]
“보는 눈이 없네, 너희.”
뱀이 고대 전사의 게이트로 들어가 나가가 되어 튀어나온 것은 확실히 놀라운 일이지만 그뿐이다.
S급 게이트가 열리는 시점에서 S랭크 몬스터와 싸울 각오는 되어 있었다. 적에게 일어난 변화는 신살검에 신풍의 보주를 끼워 넣은 것만도 못한 변화였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찾아온 변화는…… 그것보다 훨씬 극적이고,
날카롭다.
“용이 여의주를 물었는데!”
강신혁이 일제히 양손을 뻗었다. 나가 전사들은 실이 발출되는 것을 감지하곤 일제히 무기를 들었다.
어떤 놈은 실을 베어버리려 검을 휘둘렀고, 어떤 놈은 강신혁을 향해 도끼를 던졌다. 어떤 놈은 실을 피해 돌진해왔으며 어떤 놈은 방패를 들어 그것을 막았다.
[크아악!?]
[케엑!]
그러나 결과는 공평했다. 모조리 실에 잘려나간 것이다. 검도, 도끼도, 실을 피해 움직이던 나가도, 방패도 그것을 든 나가의 팔목도, 황금의 바람에 감싸인 실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원래부터 수호황룡의 효과로 강화되어 있던 실 위를 극천신주가 뿜어낸 ‘바람’이 내달리며 절삭력을 더욱 끌어올리고, 그 효과를 다시 수호황룡이 증폭시키고 있었다.
- 스스로를 용이라 칭하는 회원님께 5,000HP 보너스!
“저도 부끄러우니까 하지 마요, 좀.”
- 3,000HP 보너스!
요즘 관리자의 보너스는 일부러 강신혁을 놀리려고 하는 게 아닐까 싶을 때가 있었다. 그는 입술을 삐죽이곤 양손으로 허공을 잡아 뜯듯이 교차시키며 당겼다.
전방의 모든 것을 부수며 나아갔던 열 가닥의 실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재차 궤도 안의 모든 것을 베어냈다. 베놈 프린세스 소울은 물론이고 A-랭크에 불과한 번개거미줄이 이렇게나 쉽게 나가의 몸통을 가를 줄은 강신혁도 예상하지 못했다. 수호황룡과 신풍의 보주, 극천신주의 조화가 그의 생각보다도 훌륭했다는 얘기이리라. 거기에 굳이 하나를 더하자면 그 모든 힘을 한데 묶어내는 윈드 마스터리 정도.
[강철보다 단단한 내 피부와 뼈를!]
[놈이 품고 있던 보물이 놈의 힘을 증폭시켜주고 있어!]
[그걸 이용하면 그분의 낫도 강해질 것이다!]
나가들은 강신혁의 힘을 마주하고도 여전히 신풍의 보주 타령을 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했고 녀석들이 노리는 게 분명하면 이쪽에서도 움직이기 쉬워지는 만큼 강신혁은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어디 뺏어가 보든가!”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게이트에서 S랭크의 나가 전사와 궁수가 줄줄이 튀어나와 강신혁을 공격했다.
강신혁은 전사들의 접근을 피하며 장갑을 휘둘러 한 마리 한 마리 놈들을 베어냈고, 날아온 화살들은 그의 곁을 맴돌던 드론이 요격해주었다. 만약 드론이 없었더라면 화살을 피하기 위해 더 신경을 써야 했을 것이다.
[도망치는 발만 빠르구나!]
[어쩌면 빠른 것도 저 보물 덕분인지도 몰라!]
정답이었다. 극천신주가 신풍의 보주의 기운을 빨아들여 영력을 품은 바람을 증폭시켜 뿜어내고, 강신혁은 그것을 윈드 마스터리를 통해 가공해 무기의 절삭력은 물론이고 자신의 이동속도를 증폭시키는 데에 쓰고 있었던 것이다.
[죽이고 빼앗자!]
[지금 당장!]
광분해서는 검과 도끼, 낫과 창을 휘두르며 마구잡이로 덤벼오는 나가들. 놈들이 흥분할수록 강신혁은 놈들을 상대하기 쉬워졌다.
빈틈은 커졌고, 실이 지나가기에 그 틈은 무척 넓었다. 일직선으로 내뻗은 황금의 선이 나가 몇 마리인가의 목을 단숨에 꿰뚫었다! 직후 그것이 지그재그로 요동치며 나가들의 접근을 막아냈다.
당황하는 놈들의 머리 위로 도약하는 강신혁의 뒤꽁무늬를 따라 길게 늘어지는 거미줄들은 마치 천사의 날개처럼 반짝였다.
“느려!”
- 회원님, 거기서 입술만 비틀어서 비웃음을 한 번!
“안 해요!”
- 4,000HP 보너스!
그는 번개거미줄로 나가들을 경직시키고 베어내는 한편으로, 자유자재로 실을 늘리고 중간에 끊을 수 있는 베놈 프린세스 소울을 사용해 독거미줄을 사용한 덫을 쳤다.
나가의 화살과 창검이 그를 노리고 내찔러졌으나 빨라질 대로 빨라진 그의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를 놓친 놈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했다.
[칵!]
[케헤!]
그에게 창을 찔러 넣으려다 실패한 놈은 번개거미줄로 목을 졸려 죽였고, 독성 대신 절삭력을 극도로 강화해 내지른 독거미줄은 화살과 함께 그것을 쏘아낸 나가 궁병을 반으로 갈랐다.
한 마리를 잡을 때마다 들어오는 HP는 대략 6만 HP 가까이. 여태껏 쌓인 HP도 5천만에 가까워 슬슬 다음 쇼핑을 생각해도 될 정도 였다.
[켁! 독이다!]
[끈끈하게 붙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카학!?]
거미줄은 어느 순간엔 짜릿했다가, 어느 순간엔 독을 품었다가, 어느 순간엔 끈적거렸다가, 어느 순간엔 극도로 날카로워졌다.
강신혁은 강철의 의지로 그것을 통제하며 노련한 사냥꾼처럼 나가들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붙였다. 일대다수의 상황, 불리한 것은 강신혁이어야 할 터인데 그는 영리하게 움직이며 거의 피해를 입지 않고 어렵지 않게 나가들의 숫자를 줄여나갔다.
만약 검으로 싸웠더라면 차라리 놈들을 정면에서 깨부쉈을망정 다수를 상대로 이렇게 환경을 통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 바텐더 님의 귓속말 : 신혁아, 점점 늘어나는데 괜찮겠어!?
- 네, 순조로워요.
- 바텐더 님의 귓속말 : 일단 엘레노어가 가고 있어. 어라, 그리고…….
- 네? 저 혼자서 마무리할 수…….
“시…… 으뇩!”
클레어의 말에 강신혁이 뭐라 대꾸하려던 그때 무섭게 엘레노어가 돌진해오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뱅가드의 길드 유니폼을 입은 전투원들도, 지금 강신혁이 입고 있는 협회 복장과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이들도 이곳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아무리 대역류라고 해도 S급 게이트 정도 되면 이들이 모두 힘을 합해 상대해야 하는 재앙 수준이라는 얘기다.
“정말로 S급 게이트를 혼자서 막아내고 있어!”
“신은혁 대원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지금부터 합류하겠습니다!”
대형길드의 멤버들과 협회의 전투원들이 더해지면 S급 게이트라고 해도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으리라. 사실 혼자서 게이트를 지울 생각이었던 강신혁의 입장에선 뜻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대론 거미줄이 오히려 그들을 방해하겠는데.’
강신혁은 게이트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듯이 움직이며 나가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자연히 그의 움직임에 따라 교묘한 거미줄의 함정이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그들이 현장에 합류한다면 나가들 못지않은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어쩔 수 없지.”
극천신주에 에너지가 차오른 용량을 확인하고, 아쉬운 대로 이대로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수호황룡이 있는 만큼 이것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그는 손을 뻗어 게이트 주위로 몰려오던 이들에게 잠시 멈추라는 신호를 보낸 후, 가슴팍의 극천신주에 한 손을 얹었다.
[카아아아악!]
그가 움직임을 멈춘 것을 포착한 나가 궁병 한 명이 전력을 다해 화살을 쏘아냈다. 드론이 잽싸게 사격했음에도 기세를 잃지 않고 날아오는 것을 보면 분명한 스킬.
멀리서 그걸 발견한 엘레노어가 기겁하며 자신의 창을 던져 막으려 했으나…… 그 전에 그것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마치 장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순간에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바닥이……."
“빛나고 있어.”
마법진이라고 하면 표현이 우스울까. 게이트를 중심으로 거대한 원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설명할 것도 없지만, 그것은 강신혁이 바쁘게 전투를 펼치는 와중에 몇 겹에 걸쳐 설치한 독거미줄의 함정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전투 중에 정신없이 쏘아낸 독거미줄들도 원 안에서 알아볼 수 없는 복잡한 형태를 그리며 빛을 발하고 있었다. 물론 특별한 의미는 없었다. 그냥 되는 대로 독거미줄을 쏘아내 용량을 채웠을 뿐이니까.
“됐다.”
실험은 이미 충분히 했었으니 될 줄은 알고 있었지만, 역시나 이 정도로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힘을 행사하는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강신혁은 씩 웃고는 힘을 폭발시켰다.
그의 영력에서 변화한 독거미줄이 한순간에 다시 영력으로 변하고,
그것을 강신혁의 특성의 힘으로 ‘광범위한 영역에 힘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극천신주가 다시 에너지로 바꾸었다.
정확히는 신풍의 보주가 뿜어내는 힘과 같은, 신성한 영력을 품은 바람으로.
[놈이 함정을 쳤다!]
[마법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종류의 마법진인가!?]
[게이트를…… 지켜! 아직 그분께서 나오지 못하셨다!]
나가들은 일대에 불어 닥치는 심상치 않은 바람에 당황하면서도 게이트를 지키기 위해 움직였다. 물론 그렇겠지. 강신혁이 의도한 바 였다
그는 놈들의 움직임을 따라 영력의 범위를 압축시키며…… 윈드 마스터리의 능력을 극한에 이르도록 끌어내, 그 바람에 방향성을 부여했다.
빠르고 무한하게.
강하고 날카롭게.
모든 것을 갈아버릴 수 있도록!
[쿠아아아악!]
[게이트, 게이트가아아아아!]
하늘 끝까지 닿는 거대한 황금의 소용돌이가 태어났다.
그것은 모든 나가와 게이트를 집어삼켜, 어찌할 틈도 없이 폭주했다.
강신혁에게 ‘황금의 삭풍’이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이 추가로 생겨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