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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 Chapter 23. 역류하는 증오 - 7 >

8월 17일 오후 11시, 서울 금천구에서 대한민국 제4차 대역류가 발발했다. 최근 이레귤러 게이트의 발생이 늘어나고 있었기에 전조는 충분히 있었던 셈.

초인협회는 대역류, 혹은 그에 준하는 사태의 발발을 상정하고 순수 무력으로 따져 No.1부터 No.10까지의 멤버가 최소 세 명씩 돌아가며 협회 본부를 지키도록 했다.

그러나 특무부는 그것과는 별개로 1조부터 10조까지 전원이 본부에 상주하고 있었다. 그 덕에 사태 발생 직후 신속히 현장에 출동하는 것이 가능했다. 신은아가 이끄는 특무부 1조는 10조와 함께 수송 헬기에 타고 있었다.

“1조장, 오늘 왜 이렇게 저기압이야? 설마 대역류가 무서워서 그러나?”

현장으로 출동하는 길, 헬기 안에서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신은아의 모습을 본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그의 이름은 김익현, 가장 최근에 특무부 10조장으로 합류한 30대 중반의 남성이었다. 특무부에 들어온 지는 불과 3년밖에 되지 않았으나 눈부신 활약을 거듭한 끝에 빠르게 조장의 위치까지 오른 만큼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는 남자였다.

특히 그는 범용성도 높고 강력한 S급의 염동력 특성을 지니고 있는 데다 스테이터스의 성장도 느리지만 계속되고 있어 마흔이 되기 전에 하이랭커가 될 것이라 유력하게 점쳐지고 있었는데, 본인은 국제 초인 랭킹의 업데이트 방식이 이상할 뿐 자신은 이미 하이랭커급의 실력을 지니고 있다고 평소 떠들고 다니곤 했다.

“10조장, 반말을 허락한 기억은 없습니다만.”

신은아는 김익현을 돌아보지도 않고 싸늘한 말투로 대꾸했다. 헬기에 같이 탑승하고 있던 특무부 1조원들이 그 모습을 보며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들에겐 평소부터 겪어 익숙한 일이었다.

“사람이 그렇게 딱딱해서 쓰겠어? 같은 특무부 조장끼리 이런 때일수록 끈끈히 뭉쳐야……."

김익현이 말을 이어나가려던 그때 신은아에게서 짧게 스파크가 튀었다.

“10조장, 더 이상의 무례는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아…… 그래, 알겠어. 나 참 얘기가…… 흐억!”

“반말이 고쳐지지 않는군요. 강제로라도 고쳐드려야 할까요?”

신은아가 비로소 김익현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몸 주위를 얇게 뒤덮듯이 노오란 번개의 막이 형성되는 것을 본 김익현은, 더는 그녀에게 비빌 생각을 하지 못하고 움츠러들었다.

하이랭커에 가깝다는 말을 듣는 인재답게 상대가 지금 보여준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힘을 드러내기 전에 알아보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그는 그 정도까지 능력이 특출나지는 않았다.

“미, 미안합니다, 1조장.”

"......."

신은아는 대꾸하는 것조차 지긋지긋해 그를 무시하며 다시 돌아섰다.

사실 이런 일은 그녀가 초인협회에 들어온 때부터…… 아니, 초인양성학교에 입학한 순간부터 끊임없이 있어왔다.

그녀의 외관은 몸에 지닌 강대한 능력에 비해 너무나 연약하고 가녀렸다. 하필이면 비할 이가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기까지 했다. 실제 실력에 비해 명성이 과하다 여겨, 그녀를 얕잡아보고 한 번씩 건드려보는 남자들은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정말로 그녀와 비견될 만큼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면 응당 그녀가 몸에 지닌 힘을 알아볼 터이기에, 그녀에게 이런 수작을 거는 것들과는 아예 상종할 필요도 없었다.

“조장님 얼음공주 모드 되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데. 요즘 내내 기분 좋으셨잖아.”

“정말로 대역류 때문에 긴장돼서 그러시나?”

평소 신은아와 행동을 함께 하던 특무부 1조원들이 그 모습을 보곤 소곤거렸다.

“그럴 리가 없지. 너희 모르냐? 10년 전 3차 대역류 때 이미 조장님은 최전선에서 싸우고 계셨는데?”

“뭔 소리야, 그땐 열다섯 살이셨을 텐데.”

“진짜 아무것도 모르네. 기사 찾아보면 나와. 초인양성학교도 입학하기 전에 그만한 능력을 다루는 바람에 대서특필됐었는데.”

신은아의 업적을 마치 자기 것인 양 으스대며 말하는 조원. 다른 조원이 폰을 들어 검색해보더니 감탄했다.

다른 조원들까지 그것에 대해 떠들기 시작하자 김익현은 자신이 신은아에게 했던 말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이었는지 깨닫곤 자기 조원들이 있는 쪽으로 가 얌전히 쭈그러졌다.

“그러면 기분은 왜 저렇게 안 좋으신 거지? 아직 이번 사태 피해 집계 안 됐지?”

“다행히 뱅가드가 먼저 나서준 덕분에 선방하고 있대. 이대로 도착해서 잘 막으면 큰 문제 없을 텐데.”

“야야, 너흰 뇌제님이 대역류 정도로 근심하실 것 같냐? 딱 보면 남자잖아, 남자.”

“아! 그러고 보니 요즘 기분이 좋으셨던 것도……."

대역류를 앞두고 있어선지 조원들은 긴장을 풀려는 마음에 괜히 실없는 농담을 던져대고 있었다. 평소였으면 신은아에게 남자가 있을 거라는 얘기는 감히 하지도 못했을 터였다.

“읏!”

“어……."

“진짜......?”

하지만 신은아는 그들이 아무렇지 않게 한 말에 몸을 움찔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 순간 헬기 안에 묘한 긴장감이 내달렸다. 이내 사람들의 시선은 바로 방금 그녀에게 수작을 걸려고 했던 남자, 김익현에게로 쏠렸다.

“……10조장님 헛물 키셨네.”

“그럼 대체 그 남자는 누구지?”

“야, 혹시 저번에 조장님이 우리 몰래 데리고 다니셨던 그 남자 아냐? 조장님이랑 이름 비슷한……."

“아아 그 개조 프로젝트,”

“바보야, 다물어!”

이번에야말로 헬기가 완전한 침묵에 빠졌다. 신은아의 전신에서 유형화된 번개 줄기가 솟구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과연 누가 대표해 희생될 것인가 사람들 사이에서 치열한 눈치싸움이 오가던 그때 신은아가 헬기 밖으로 몸을 날렸다. 전방에서 날아들던 집채만 한 바윗덩어리가 그녀가 뿜어낸 번개줄기에 맞아 그대로 소멸해버렸다.

“거인형 몬스터의 투척 공격을 확인. 헬기는 대기하지 않고 바로 귀환할 수 있도록. 전원 전투 개시.”

“저, 전투 개시!”

헬기 밖으로 벗어나 있었음에도 그녀의 크지 않은 목소리가 전원의 귓가에 울렸다. 특무부 조원들은 그녀의 번개를 자신들이 맞지 않아도 되는 것이 다행이라고 여기며 차례차례 헬기 밖으로 뛰어내렸다.

신은아는 그들이 안전하게 하강할 수 있도록 보호하는 한 편으로 지상에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거인을 향해 재차 번개를 떨어트리며 생각했다.

‘클레어가 나 몰래 할부지를 만나고 있었어……!’

그렇다. 클레어와 강신혁의 얕은 수작은 이미 그녀에게 간파된 지 오래였던 것이다.

애초에 종합체육시설에서 놀다가 강신혁과 만났다는 것부터가 말도 안 됐다. 신은아는 클레어의 취미가 전부 인도어 계열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연금술사의 특성을 각성할 리가 있겠는가?

클레어가 항상 자신을 끌고 클럽이니 시내니 사람이 모이는 곳에 가려는 것은 자신보다는 신은아를 생각해서였다. 맨날 할부지 타령만 하고 일밖에 안 하는 친구를 어떻게든 갱생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런 클레어가 초인상가의 체육시설 따위에 갔다는 것은 처음부터 강신혁과 함께 갔다는 얘기. 그곳에서 신영의 여학생들과 만난 거겠지.

‘그냥 바에 관한 일로 만났다가 심심풀이로 간 게 아닐까? 그래, 그럴 거야. 클레어는 할부지가 연하라서 연애대상으로 안 보인다고 했잖아.’

그녀가 날린 번개가 이제 막 관공서 건물을 무너트리려던 몬스터의 몸통에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그냥 죽기만 했더라면 거대한 몬스터의 사체가 그대로 쓰러지며 건물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겠지만, 그녀의 번개는 모든 것을 깔끔하게 태워버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할부지는 엄청나게 멋지고 포용력에 여유를 겸비하고 상냥하고 똑똑하기까지 한데, 정말 클레어가 흑심을 품을 가능성이 없는 걸까.’

수십 가닥으로 나뉜 번개가 철저하게 통제된 채 시내를 구석구석 누볐다. A급이건 S급이건 그 번개를 맞고 멀쩡한 존재는 없었다.

‘만약 클레어가 할부지를 좋아한다고 하면 할부지는 클레어를 거절할까? 할부지 입장에선 까마득하게 어린 여자애일 텐데, 하지만 저번에 보면 아예 관심이 없는 것 같지도 않았어. 아무리 할부지라고 해도 젊은 몸과 마음으로 살아온 기억마저 사라지진 않으니까 그것도 당연한 거겠지? 어라, 그런 생각을 했더니 이상하게 가슴이 뛰는데…….'

투입된 지 고작 5분도 안 되어 게이트 하나를 깔끔하게 소탕한 그녀는 몇몇 조원들에게 지시해 구조작업을 실시하도록 하고 남은 조원들을 이끌고 가장 위험도가 높은 지역으로 골라 이동했다.

‘클레어가 할부지랑 연인이 된다고 하면 둘이 결혼하겠지? 결혼하면 클레어를 할머니라고 불러야 할까?’

신은아의 얼어붙은 표정을 본 조원들은 감히 그녀에게 말을 걸지 못하고 얌전히 그녀를 따랐다. 통솔력이 가히 절정에 이르렀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속으로 이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는 누구도 알 수 없으리라.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쁠 건 없어. 클레어는 원래도 나를 많이 생각해주는 좋은 친구니까, 할부지랑 만나기도 수월해질 거야. 클레어라면 나와 할부지의 관계도 잘 알고 있고…… 그래, 할부지랑 결혼하는 조건으로 귀화시키면 셋이서 같이 살 수도 있겠네.’

신혼집에 끼어들 생각을 하는 것부터가 그녀의 염치없음을 잘 드러내고 있었으나 신은아는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이 닿지 못했다. 워낙 상대해야 할 몬스터가 많아 그녀의 사고도 두서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왜지, 왜 둘이 사권다고 생각하면 이렇게 기분이 언짢은 걸까……. 클레어 정도라면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좋은 앤데. 이성관계도 깨끗하고, 능력은 두 말할 나위 없고, 성격도 좋은데…….'

“조장님, 다음 포인트로 이동하시죠!”

“아니 잠깐, S+급!?”

“혼자 갑니다. 나머지 인원은 부조장 통솔 하에 움직이도록.”

“조장님!?”

신은아는 번개의 마력에 몸을 맡겨 질주했다. 게이트가 오픈되는 징조를 보고받고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오픈되기 전에 도착했으니 그녀의 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 감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 그렇구나. 클레어랑 사귀게 되면 할부지가 나한테 신경써줄 시간이 줄어들 테니까 섭섭해서 그런 거야. 하지만 그런 이유로 할부지의 연애를 막는 게 좋은 일일까, 할부지는 사실 내 친할아버지도 아니고 아무리 전생의 기억을 얻어 성숙해졌다고는 해도 한창 연애에 관심 있을 때인데…….'

끊임없이 공회전하는 생각. 그녀의 복잡한 심경을 대변하듯 끔찍한 파괴력을 지닌 번개 줄기가 수십, 수백 갈래로 나뉘어 게이트를 강타했다.

단숨에 붕괴된 게이트 너머로부터 상처 입은 채 모습을 드러낸 S+급 게이트의 주인, SS랭크의 네임드 보스 몬스터 데빌 오우거 아녹스를 보고도 그녀는 그저 번개를 내리꽂을 뿐이었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힘이, 내 모든 힘이이이이……!]

‘……그래, 할부지는 내 친할아버지가 아니었지.’

항상 할부지라고 부르며 달라붙었던 탓에 스스로도 그 사실을 까먹고 있었다는 것이 어처구니없었지만, 그랬다. 둘은 딱히 피가 이어져있는 것도 아니다.

어째서 그 사실을 상기하니 새삼스럽게 가슴이 뛰는 것일까, 신은아는 그 이유를 짐작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그 와중에 아직 죽지도 않고 덤벼드는 데빌 오우거를 발견하곤 짜증이 나 손을 휘저었다. 본능적으로 힘을 가득 담아 내지른 벼락줄기가 데빌 오우거의 심장과 머리통을 동시에 관통했다.

‘역시 답답해. 할부지가 클레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 아니, 역시 무서워서 못 물어보겠어. ……뭐가 무서운 거지? 모르겠지만, 할부지가 보고 싶어.’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 데빌 오우거를 해치운 보상이 HP로 환산되어 들어왔다. 히어로 유니버스의 시스템 메시지를 보며 방금 자신이 잡아 죽인 적이 생각보다 굉장한 놈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번쩍 드는 신은아.

“아, 이런……."

깊은 생각에 빠져있다 보니 자신의 실력을 어느 정도 감춰야 한다는 것도 잊고 강한 능력을 구사하고 만 것이다. SS랭크의 네임드 보스가 상대라면 적어도 10분은 시간을 끌었어야 했는데!

그런데 이상했다. 아무리 그녀가 단독행동을 하고 있다고는 해도 S+급 게이트가 나타났는데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방금 그녀의 활약을 육안으로 잡아낸 이가 아예 없을 정도였다.

- 1조장님, 설마 벌써 S+급 게이트 정리가 끝나셨습니까!?

그러나 실시간으로 일대를 스캔해 대역류의 대처 현황을 파악하고 있는 본부에선 역시나 난리가 났다. 본부의 대원으로부터 들려온 텔레파시에 어떻게 대답할까 고민하던 신은아는, 어차피 자신이 곧 랭킹을 갱신하려 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SS랭크의 보스 몬스터가 나타났는데…… 아무래도 내 능력이 조금 상승한 것 같아. 국제 초인 랭킹을 갱신할 수 있겠지?”

- S+급 게이트를 3분도 안 되어 정리하셨는데 당연히 갱신이 되죠! 100위권 이내에 무조건 진입하실 수 있을 겁니다!

“다행이네…… 그런데 왜 이렇게 주위에 사람이 없지? 혹시 다른 게이트가 나타났어?”

- 아, 그랬지! S급 게이트가 나타나는 바람에 대부분 그쪽으로 몰려갔습니다. S+급 게이트는 1조장님께서 맡아주시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괜찮았네요!

대한민국에 20대의 100위 이내 하이랭커가 탄생하리라는 사실에 잔뜩 흥분하여 말을 쏟아내는 대원.

그러나 스왈로잉 펑거스를 흡수하고 각성한 이래 1위부터 7위까지의 탑 랭커들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된 신은아는 그 말을 듣고도 그저 담담히 대꾸할 뿐이었다.

"S급 게이트는 어느 쪽이지? 바로 갈게.”

- 아,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래도 1조장님이 미리 비밀대원을 보내놓으신 덕에 현재 잘 막아내고 있는 중입니다!

“……내가? 비밀대원?”

- 네! 신은혁 대원이요! 그 친구 정말 대단해요, 진짜로 1조장님의 친동생이 아닙니까!?

텔레파시로 들려온 목소리에 신은아가 멍한 표정을 지은 바로 그때, 저 멀리에서 거대한 소용돌이가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 찬란한 황금빛으로 물든 거대한 소용돌이.

그 안에서 강신혁의 기운을 느낀 신은아는 눈을 부릅뜨며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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