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 Chapter 23. 역류하는 증오 - 6 >
- 클리어.
- 바텐더 님의 귓속말 : 근처는 제법 안정됐어. 11시 방향으로 3킬로미터 정도 이동하자.
- 네.
대역류가 발발하고 한 시간이 지났다. 강신혁은 엘레노어와 함께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끊임없이 열리는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대부분 몬스터의 등급이 B랭크에서 A랭크 사이에 고정되어 있는 만큼 이미 S랭크를 초월한 강신혁이나 근접전투능력만으로는 그를 뛰어넘는 수준인 엘레노어가 곤란을 겪을 일은 없었으나, 문제는 숫자였다.
“선배, 괜찮아요?”
“헥, 히엑……."
전투 시 육체가 받는 피로는 상상을 초월한다. 사방에 적이 가득한 상황에서 받는 부담감까지 더해지면, 대역류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선 고작 5분 전투를 치른 것만으로 기력을 잃고 쓰러져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무려 한 시간. 하물며 엘레노어는 이런 대난전은 처음 겪는 것이었으니, 지금처럼 힘들어하는 것도 당연했다.
“시뇩은, 왜, 멀쩡……."
“그거 하지 말라니까.”
이미 다른 사람들을 물리고 둘이서만 움직이고 있었지만(둘이서 족히 소형 길드 하나 이상의 활약을 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혹시나하는 마음에 주위를 돌아본 강신혁이 그녀에게 마치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는 투로 얘기했다.
“사실 제 체력 S+랭크예요.”
체력은 스태미나와 방어력 등등 육체의 내구도와 관련된 모든 부분에 영향을 끼치는 스테이터스. 그것이 S+랭크라는 얘기는 인간으로서 강철만으로 세워진 성벽과 비슷한 수준에 도달했다는 얘기였다.
“그거 이미 상위권 랭커 수준……! 하지만 그래도 이상해! 너무 멀쩡해!”
엘레노어가 실로 드물게도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가 지금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였다.
사실 그녀의 지적이 맞았다. 제아무리 체력이 S+랭크라고 해도, 1시간 내내 전투를 치르고도 지금의 강신혁처럼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답은 바로 황룡투기였다. 활성화되어 그의 체내를 끊임없이 순환하는 황금의 투기가 그의 근육이 피로할 틈이 없게 계속해서 원기를 불어넣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 정도는 황룡투기 이전 재생력이 있던 시절부터 비슷했으니 이제와 놀라울 일도 없었다.
물론 그 사실을 엘레노어에게 말해줄 수는 없었기에, 강신혁은 그저 빙긋이 한 번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엘레노어는 푸후, 한숨조차 힘겹게 내뱉으며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정말로 한계인 것처럼 보였다.
“선배, 좀 쉬고 계실래요?”
“……5분만 쉬면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그렇게 하세요. 여긴 당분간 괜찮을 것 같으니까…… 일단 말은 해둘게요.”
강신혁이 클레어에게 그렇게 보고를 하고 움직일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위에서 드론 하나가 그들 쪽으로 내려왔다. 겉보기엔 작고 귀여웠지만 앞부분에 총구가 달려있는 것을 강신혁은 놓치지 않았다.
몬스터들이 날뛰는 전장에서 드론을 날릴 수 있는 능력자는 세상천지 어딜 뒤져봐도 연금술사 한 명 뿐. 드론에는 물약 한 병이 매달려 있었다.
- 바텐더 님의 귓속말 : 그걸 먹으면 어느 정도 괜찮아질 거야. 네 것도 일단 챙겨뒀는데…….
- 가지고는 있을게요. 하지만 이대로라면 필요 없을 것 같아요.
- 바텐더 님의 귓속말 : 황룡투기라고 했던가? 정말 터무니없네. 순수하게 체력만 올려주는 능력도 아니잖아, 그치?
- 특성진화하기 전까지 마력도 없었는데, 이 정도 능력은 되어야죠.
강신혁은 하이랭커가 감탄하는 모습에 우쭐해져 대꾸하곤 드론에게서 포션을 회수했다. 클레어가 추가로 귓속말을 보내왔다.
- 바텐더 님의 귓속말 : 얘가 체력 회복할 때까지는 드론으로 보호할 테니까 너는 먼저 출발해줘. A+급 게이트가 또 열렸대.
- 진짜 미쳐버렸네요.
A+급 게이트는 평균적인 몬스터의 수준이 A랭크에서 A+랭크에 이르며, 보스는 까딱하면 S랭크짜리가 튀어나올 가능성조차 있는…… 그래, 아까 강신혁과 엘레노어가 처음 하강하며 해치운 늑대 무리와 동급 혹은 그 이상의 위험도를 지닌 게이트였다.
본래 A+급 게이트가 열리면 초인협회는 몇몇 상위길드에게 연락해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는 팀을 골라 보내도록 조율하는데, 오늘은 대역류가 시작되고 고작 한 시간 만에 벌써 10개 이상의 A+급 게이트가 열리고 있었다.
- 이걸 처리할 인력이 되나?
- 지금 신영을 비롯한 몇몇 초인양성학교에 졸업반 예비 초인의 참전을 부탁할지를 고려중이라고 하네. 협회가.
- 그 외에는요?
- 뱅가드를 비롯한 몇몇 길드는 일본에 있던 팀을 급히 불러들이고 있고…… 하지만 그때까지 이곳에 있는 인원들로 버텨야 한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아.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안 왔으면 아슬아슬했을지도 몰라.
클레어는 강신혁의 오퍼레이터 노릇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상공에서 날아다니는 몬스터들의 거의 절반 가까이를 혼자서 막아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늘을 돌아다니며 지원을 필요로 하는 초인을 발견하면 곧장 도와주고 포션도 원조해주고 있었다.
말하자면 프론트라인바 출장 장사인 셈이다. 설마 첫 개시를 대역류 현장에서 하게 될 줄은 그녀도 몰랐을 것이다. 홍보효과는 극적이겠지만.
“선배, 마셔요.”
“응…… 못 쥐겟소.”
일단 주저앉자 아예 몸에 힘이 빠져버렸는지, 엘레노어는 강신혁이 내민 포션병을 제대로 받아들지도 못했다. 강신혁은 어쩔 수 없이 포션 병을 열어, 그녀의 턱을 받치고 포션을 먹여주었다.
“우응........"
“이상한 소리 내지 마요.”
엘레노어가 감기에 걸린 어린아이같이 응석을 부리자 강신혁까지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1시간 동안 정신없이 몬스터들에게 돌진 공격을 감행한 엘레노어의 방어구에는 몬스터의 피와 살점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지만, 그것으로도 미처 지우지 못하는 체향이 물씬 느껴졌다.
그는 가슴의 두근거림을 애써 진정시키며 인벤토리에서 깨끗한 천을 꺼내어 엘레노어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 엘레노어는 개운한 표정을 짓다가도 순간 입술을 삐죽였다.
"우우."
“왜요.”
“내가 한심해소……."
“그냥 제 체력이 좀 더 많을 뿐인데요 뭐. 그럼 쉬고 오세요. 먼저 갈게요.”
“아."
그녀의 땀을 닦아준 후 망설임 없이 돌아서는 강신혁의 등을 향해 일순 손을 뻗었던 엘레노어는, 그러나 그가 그것을 눈치 채기 전에 잽싸게 거두었다.
“……빨리 회복하고 따라가야지.”
- 위이잉
드론이 그런 그녀의 모습을 주시하고 있었다. 단순히 지키고 있는 것이겠지만, 엘레노어는 괜히 드론이 얄미워져 재차 입술을 삐죽였다.
@@@
베놈 프린세스 소울을 착용하고 있어 무려 S+랭크에 달하는 민첩을 갖고 있는 만큼 강신혁이 내달리는 속도는 무척이나 빨랐다.
더구나 거기에 숙련도 A-랭크의 윈드 마스터리로 만들어낸 바람을 더하면, 특성을 발휘하고 있는 백인하만은 못해도 그 그림자를 밟을 수준은 되었다.
그는 순식간에 공간을 가로지르고 목표지점으로 향했다. 뒤로 열 가닥의 실 가닥을 늘어트리며 달리는 그를 발견하고 뒤로 따라붙어 기습하려던 몬스터들이 멋대로 움직이는 실 가닥에 걸려 산산이 토막 났다.
- 이곳에 왔다. 우리의 꿈이.
- 그는 말했지, 우리가 태어났다!
- 죽여라! 우리가 주인이 된다!
이거 위험한 놈들인데. 비록 한 시간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지만 강신혁은 대충 대역류에서 나타나는 몬스터의 위험 수준을 그 나름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분명한 의도를 갖고 나름의 언어로 뜻을 전달해오는 놈들이 같은 랭크의 다른 몬스터에 비해 위험하다.
이런 놈들은 일단 지성이 높았고, 나름의 전술을 구사했으며, 뭣보다도 이상하게 강한 스킬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선배를 기다렸다가 같이 왔어야 했나.”
그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양손을 가슴 앞에서 교차시켰다. 내쏘아진 열 가닥의 실이 팽팽히 당겨지며 그의 눈앞에 닥쳐드는 무형의 공격을 무산시켰다.
“몰래 공격은 금지.”
- 기운을 읽는다!
- 생긴 것보다 강하잖아!
- 그르르륵…….
재차 양손을 뻗었다. 한 방향으로 뻗어나가던 실이 중간에서 뭉쳐 날카로운 송곳으로 화했다. 황룡투기가 실의 송곳을 감싸 정말로 황금의 랜스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이윽고 강신혁이 만들어낸 바람까지 더해져 회전을 시작한 그것은 게이트를 부술 기세로 돌진해, 그것을 지키려 돌진해온 몬스터 무리를 분쇄해버렸다.
“하지만 아무리 지능이 높아도 결국 지켜야 할 대상을 앞에 두고는 힘을 쓸 수가 없지.”
- 크르르르르르!
말하는 것만 들으면 강신혁이 악역인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실제로 이것은 유효한 공략이었다.
본래 방출형 게이트, 그것도 이레귤러 게이트를 공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놈들이 튀어나온 게이트를 직접 공략하는 것이니까. 게이트가 소멸되면 이세계와 지구를 연결하는 끈을 잃어버린 놈들은 약해지고, 그 안에서 나오려던 놈들은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된다.
물론 게이트가 무너지며 안에 있던 놈들이 한꺼번에 튀어나오며 더한 재앙을 불러일으킬 가능성도 있으니 잘 계산을 하고 행동에 옮겨야겠지만, 솔직히 지금 상황에서는 게이트 안의 내용물이 쏟아져 나오나 순서를 지켜서 나오나 그게 그거였다.
‘하지만 사실 진짜 무너트릴 생각은 없단 말이지.’
방출형 게이트에서 나온 몬스터들은 게이트가 조기에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 그것을 지키려 든다. 그러면 이쪽에서는 그것을 이용할 따름.
게이트를 공격하는 척하여 놈들의 행동을 유도하고, 그렇게 드러난 빈틈을 찌른다. 이것이 정석이었다. 놈들은 알면서도 거기에 당하는 수밖에 없다.
- 놈을 거름으로 삼자.
- 놈의 그림자가 보여. 우리 것이 될 거야.
- 덤벼! 깔아뭉개라고!
강신혁의 의도를 깨닫곤 광분하여 덤벼드는 몬스터 무리. 그는 코웃음을 치며 몸을 날렸다.
실을 다룰 때의 전법은 기본적으로 히트앤런. 빠르게 이동하며 실로 함정을 쳐 도발에 걸린 몬스터를 분쇄하는 것이다.
물론 방금 했던 것처럼 실을 뭉쳐 거대한 무기의 형태로 만들어내 공격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이건 무기의 공격력을 강화해주는 황룡투기 덕분에 가능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오래 싸우려면 기운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그래, 장기전으로 봐야지. 3차 대역류만 해도 족히 다섯 시간 이상 지속되었으니까……."
- 키이잇!
- 죽어!
허공으로 몸을 날리는 그를 따라, 마치 불속에 몸을 던지는 부나방처럼 덤벼오는 몬스터들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며 강신혁은 아득히 먼 옛날의 일을 회상했다.
지금은 그때에 비해 게이트 탐지능력이나 몬스터 활동의 제어가 그리 완벽하지 않았다. 많은 초인들이 싸우고 있었지만 그 틈바구니에서 희생당하는 이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강신혁은 부모와 함께 그 치열한 현장에 내동댕이쳐져, 두 시간 동안 도망 다닌 끝에 부모를 잃고 혼자만 초인협회의 대원에게 구출되었다.
- 스으으으
열 가닥의 실이 바닥을 스치듯이 쓸며 몬스터들의 발목을 베어냈다. 허공으로 튀어 오르는 놈들의 피와 살점을 보며 까득, 절로 이가 갈렸다.
모루의 기억을 얻고 나서부터 상당한 경험을 해왔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의 기억 한구석에는 그 날의 기억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언제나 그것을 의식하지 않으려 많은 노력을 하고 있지만, 지금은 애써 억누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설마 이렇게나 빨리 이 현장에 서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지만…… 그래, 신은아와 클레어에게는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
- 끌어들여!
- 이쪽으로 와, 꼬맹이. 이곳에서 싸우자.
- 아니야, 놈을 덮쳐 죽여!
강신혁은 자신을 놔두고 제멋대로 떠들어대고 있는 몬스터 무리를 향해 재차 몸을 날렸다. 그때였다. 허공에 돌연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 바텐더 님의 귓속말 : 신혁아, 물러서.
그가 있는 쪽의 상황을 관찰하고 있던 클레어가 아지랑이를 관측한 즉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 바텐더 님의 귓속말 : S랭크 같아. 협회랑 뱅가드한테 와 달라고 해야 할 것 같아.
- 누나, 이쪽으로 드론 하나만 보내주실 수 있어요?
그러나 강신혁은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다. 솔직히 아직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S랭크 게이트는 그야 두렵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도망칠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았다. 아마도 오늘은 모루가 아닌 강신혁의 턴인 모양이다.
- 바텐더 님의 귓속말 : ……위험할 거야. 하지만 그래, 누나가 도와주면 죽진 않을 거야.
- 고마워요, 누나.
- 바텐더 님의 귓속말 : 하지만 이게 파괴당하면 바로 물러나야 한다?
- 유념할게요.
강신혁은 그녀의 메시지에 굳게 고개를 끄덕이며, 일단 베놈 프린세스 소울을 휘둘러 일대의 몬스터를 독으로 녹여버렸다. 그 후 품에서 금색으로 반짝이는 구슬을 꺼냈다.
바로 신풍의 보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