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 Chapter 23. 역류하는 증오 - 3 >
둘이 그대로 건물을 박차고 나가려는 그때였다. 그들 옆에서 마찬가지로 벌떡 일어서는 이들이 있었다.
“우리도 가!”
“엑, 우리? 나도 가야 돼?”
가면을 쓴 강신혁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엘레노어와, 그런 그녀의 옆에서 울상을 짓고 있는 이나희.
그야 그녀는 전형적인 마법사 캐릭터인데다 실제 전투보다는 인챈트 능력에 특화되어 있다 보니 전선에 나서는 것을 꺼릴 수밖에 없었다.
“어라, 얘네……."
“둘 다 알고 있어요.”
이나희는 애초에 신은혁의 무장을 같이 만든 장본인이고, 엘레노어는 타고난 무도가로서의 눈썰미로 진즉부터 그의 정체를 눈치 채고 있었으니 이제 와서 숨기려 애쓸 필요도 없다. 강신혁이 둘이 보는 앞에서 망설임 없이 가면을 뒤집어쓴 것도 그래서였다.
“그래도 설마 따라오려 할 줄은 몰랐는데.”
“나, 제법 강해.”
강신혁의 말에 엘레노어가 발끈하며 앞으로 나섰다.
그야 그 사실은 강신혁도 익히 알고 있었다. 순수 근접전투력은 그녀가 강신혁을 확실하게 앞서지 않을까. 찌르기 하나에만 특화된 그녀의 특성은 무시무시한 잠재력을 품고 있었다.
“전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었거든요. 엘레노어 선배, 다른 사람들 눈에 띄어도 되겠어요?”
"윽."
엘레노어는 이미 유명한 존재다. 하지만 학교 내부에서의 활약으로 주목을 받는 것과 외부에서의 활약으로 초인 사회에서 주목을 받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강신혁은 그것에 관해 묻고 있는 것이다.
“그, 그건……."
“후훗.”
그러나 엘레노어가 주춤한 그때, 강신혁의 옆에 선 클레어가 수상쩍은 웃음을 흘렸다. 그의 뇌리를 무척이나 불안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죠, 누나? 아니라고 말해요. 어서!”
“사실 난 너희의 정체를 감춰줄 수 있는 아티팩트를 갖고 있어!”
“누나아아아!”
강신혁의 절규를 모르는 척하며 품에서 두 개의 가면을 꺼내드는 클레어. 분명 개당 1천만 HP가 넘는다고 했던 것 같은데, 칵테일 재료를 살 돈은 없으면서 중2병을 위한 아이템을 쌓아둘 돈은 있었단 말인가!
"그골 쓰며는......!"
한편 강신혁의 반응으로 인해 그 가면이 강신혁이 쓰고 있는 것과 동일한 아티팩트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엘레노어의 눈이 반짝였다. 클레어는 그녀의 반응에 흡족해져 고개를 끄덕여주며 말했다.
“빌려줄게. 아, 머리랑 눈색은 통일하자. 그쪽이 더 분위기 나잖아.”
왜 아니겠는가. 참고로 현재 ‘신은혁’의 머리는 강신혁과 같은 흑발이나 보다 짙은 먹빛이었고, 눈은 붉은색이었다.
특성이 수호황룡으로 진화한 지금은 특성을 발휘하게 되면 붉은 눈동자 위로 옅게 금색의 스크래치가 내달리는, 굉장히 독특한 모양이 완성된다. 아직 클레어는 이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반응은 어떨지 익히 예상할 수 있었다.
“흑발에 적안.”
“재밌네, 넌 원래 흑발이고 난 원래 적안이잖아. ……잠깐만, 이거 나도 강제로 참가하는 흐름이야?”
“너 인챈터였지? 마침 잘 됐어. 내 능력이랑 궁합이 잘 맞겠는데.”
“네에, 정말요? 같이 갈게요!”
질색하던 이나희를 클레어의 한 마디가 돌변시켰다. 모든 생산계열 능력자에게 있어 클레어 보일은 이만우와는 다른 의미로 하나의 정점인 것이다!
그런 그녀와 어떤 식으로든 같이 작업을 하게 된 셈이니 이나희라도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단숨에 태도를 바꾸자 강신혁은 기막혀하며 고개를 저었다.
“자자, 그럼 다들 서둘러 이거 써. 아, 그리고 이거 재킷. 검은색이니까 신혁이랑 대충 어울릴 거야.”
클레어는 이미 주위에 사람들이 남지 않은 것을 확인하곤 둘에게 가면을 씌웠다. 강신혁의 것과 마찬가지로 콧등부터 이마에 이르기 까지 얼굴의 반을 가리는 민무늬 가면.
둘이 그것을 쓰자, 엘레노어와 이나희는 강신혁과 마찬가지로 먹빛의 머리칼과 적색의 눈을 갖게 되었다. 둘 다 머리카락이 길어졌으며, 얼굴형태도 확실하게 달라졌다.
다만 엘레노어는 키가 작고 이나희는 가슴이 유독 큰 탓에 나란히 서 있으면 뚜렷한 특징을 지닌 삼남매로 보일 지경이었다. 함께 건네받은 재킷을 나란히 걸치자 만화에나 나올 법한 악역 간부 집단으로 보이기도 했다.
“성은 신 씨로 통일할까?”
“벌써 가명을 댈 생각부터 하고 있어요? 엘레노어 선배, 미안하지만 선배는 키가 조금 눈에 띄어요. 조금 높은 부츠를 신어줬으면 하는데, 그래도 제대로 싸울 수 있겠어요?”
“큭, 물론이지……!”
엘레노어는 무척 미안해하면서 묻는 강신혁에게 굴욕을 인내하며 대꾸했다. 강신혁은 남는 가죽(B랭크)으로 만들어뒀던 키높이 부츠(15센티미터 굽, B-랭크)를 그녀에게 신겨주었다.
겉으로 보기엔 전혀 키높이 신발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었지만 사이즈 조절 기능과 운동능력 증폭이라는 두 개의 옵션이 달린 엄연한 아티팩트.
그 덕에 엘레노어는 그것을 신고도 쉽게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더 강해졌을 정도다.
“이거, 시뇩이 신으면 더 강해지잖아. 이걸 나한테 주면 어떻게 해.”
“실은 저도 그럴 의도로 만든 거였는데, 민첩이 일정 랭크 이상 높으면 그 옵션이 별 의미가 없더라고요. 그리고 시뇩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방금 강신혁은 자신이 엘레노어보다 민첩의 랭크가 높다고 말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엘레노어는 게이트 내부에서는 그렇게까지 차이나지 않았던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땐 민첩을 증가시켜주는 베놈 프린세스 소울도 착용하고 있지 않았을 뿐더러 그 이후로 강신혁의 특성이 진화하며 스테이터스가 대폭 성장한 만큼 지금은 그녀보다 족히 두세 단계 이상 앞선 상태였다.
“와, 가죽이나 천으로 된 물건도 쉽게 아티팩트로 만들어내는구나.”
“실험작 중에 제일 잘 나온 게 저 정도예요.”
요즘 강신혁은 여유시간이 조금이라도 생긴다 싶으면 뭔가를 만들어내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다. 미로토즈에서 유독 그런 버릇이 붙었다. 엘레노어에게 준 부츠도 엘프들의 생필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우연히 탄생시킨 작품이었다.
“그리고 창은 이걸 써요. 이건 최근 만든 것들 중에선 제일 잘 나왔어요.”
“고마…… 워!?”
키높이 부츠를 신은 덕에 간신히 170센티미터 언저리에 이른 엘레노어의 키와 비슷한 크기의, 돌격용 랜스치고는 상당히 짧은 원뿔형의 창. 그것을 손에 쥔 엘레노어의 두 눈이 번개를 맞은 것처럼 크게 뜨였다.
“무슨, 이고……."
“주는 게 아니라 빌려주는 거니까 깨끗하게 잘 써요.”
“뭐야, 얼마나 대단한데 그래…… 억.”
강신혁이 자신에겐 알리지 않고 혼자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괜히 소외감을 느끼며 엘레노어에게 달라붙어 아이템 정보를 확인한 이나희가 경악하여 입을 뻐끔거렸다.
“너, 너 이거 ‘최근’뿐만이 아니라……!”
“그럼 출발하죠.”
“이익......."
사이렌이 울리고부터 일행이 완벽하게 변장하기까지 대략 3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밖은 아비규환일 터였다. 이나희는 강신혁에게 뭔가를 말하려 다 포기하곤 얌전히 그를 따랐다.
“그 전에 다들 이거 마셔. 유용한 효과를 가진 것들만 꼽아 미리 만들어 보관해둔 칵테일이야.”
“여기에 제 인챈트를 더하면 되는 걸까요?”
“바로 그거야.”
클레어가 꺼내든 포션병(정확히는 그 안에 담긴 칵테일)에 이나희의 인챈트가 이루어졌다.
그녀의 인챈트는 대상이 무엇이든 전부 적용될 수 있지만 대상의 원래 능력이 강할수록 그 효과가 증폭되었으며, 특히 클레어가 만든 포션과는 궁합이 더욱 좋았다. 강신혁은 아마 클레어의 포션에 그녀의 영력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 연금술사 특제 칵테일 포션 ‘신데렐라’를 마셨습니다. 앞으로 두 시간 동안 이동속도가 60% 증가하며, 공격속도가 25% 증가합니다. 인챈트로 인해 추가로 공격속도가 10% 증가하며, 일정확률로 자동회피가 이루어집니다.
- 연금술사 특제 칵테일 포션 ‘선라이즈’를 마셨습니다. 앞으로 두 시간 동안 모든 기술의 능력이 20% 증폭됩니다. 인챈트로 인해 추가로 모든 기술의 소모량이 20% 줄어듭니다.
비록 스테이터스를 직접 올려주는 포션은 아니었지만(그것들은 기본적으로 재료비가 너무 비쌌다.), 어떤 면에서는 스테이터스를 올려주는 것보다 더한 효과를 지닌 칵테일 포션들. 더구나 이나희의 인챈트로 인한 효과도 발군이었다.
“인챈트는 저희한테도 걸 수 있나요?”
“아니, 같은 대상에는 한 번밖에 안 돼. 포션을 마셔버렸으니까 그 효과가 끊어지기 전에는 걸 수 없어.”
여기서 이나희가 말하는 같은 대상이란, 그 인챈트의 효과를 적용받는 대상을 포괄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들고 있는 무기에 별개로 인챈트를 하는 것도 불가능.
포션이 없었더라면 그녀는 일행의 신체, 혹은 방어구, 혹은 무기 중 하나를 골라 인챈트를 해주었을 것이다. 이번엔 포션에 직접 인챈트를 거는 쪽이 가장 효율이 좋았기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녀의 특성은 자기 자신에게는 비교적 제한 없이 인챈트를 행사할 수 있었지만 타인에게 인챈트를 해줄 때에는 제한이 엄격했다. 정확히는 아직 한계가 거기까지였다.
“특성수련 좀 하셔야겠네요.”
“원래 내 특성은 즉석 인챈트보다는 생산에 쓰는 쪽이 훨씬 강력하거든!?”
강신혁은 그 말을 듣곤 씩 웃었다. 그 순간, 마스크 너머로 보이는 그의 눈에 금빛의 스크래치가 내달렸다.
그와 동시에 일행의 전신에 황금의 광채가 깃들었다. 변화는 순간적이고, 폭발적이었다.
- 특성 수호황룡이 발동하여 자신과 아군, 모든 무구의 성능을 30% 끌어올립니다.
영력을 따로 소모하지 않고 순수한 특성의 힘을 발휘한 것만으로 이 정도. 클레어와 이나희는 갑작스러운 변화에 어안이 벙벙해져 있었지만 이미 그 힘의 편린을 경험한 적이 있던 엘레노어의 반응은 그와 달랐다.
"이고, 이제 완전히......!"
“네, 완전히 진화한 특성의 힘이에요. 뭐 머지않아 알려지겠지만 지금은 비밀입니다. 신은혁으로 활동하고 있으니까.”
“아, 알겟소.”
특성이 금안의 환룡에 머무르고 있을 때엔, 설령 강화효과가 발동했어도 그것이 시스템으로 확인할 수는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수호황룡으로 완벽하게 거듭난 지금은 가이아 시스템에 편입되어, 가히 광범위 버퍼라고 불러도 부족하지 않은 능력을 자랑하게 되었다.
“이거 개사기잖아. 너 인챈터 아니었잖아……!”
“지금도 아니에요. 단지 꾸준한 단련의 결과 특성의 영향범위가 확대되었을 뿐이죠. 그래서 선배, 아까 특성이 뭐가 어떻다고요?”
“크으으으..!"
우쭐대는 강신혁, 이를 악물고 분해하는 이나희. 클레어가 픽 웃으며 일행을 이끌었다.
“설마 신혁이 능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그 변화한 눈에 대해선 나중에 누나랑 다시 차분히 얘기하는 걸로 하고, 지금은 우선 현장으로 가자.”
클레어가 폰을 들어 신은아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얘기를 마쳤다. 통화는 생각보다 짧게 끝났다. 하지만 통화를 마친 클레어의 이마에는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왜 그래요, 누나. 피해가 심각하대요!?”
“아니, 아직까진 잘 막고 있으니까 서둘러 가면 괜찮을 거야. 그런데 은아랑 통화하다 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서.”
“뭐가?”
“이대로 현장에 같이 가면 너랑 나랑 같이 있었던 게 들키잖아?”
"!?"
강신혁은 그 말을 듣고 화들짝 놀랐지만 이내 좋은 변명을 떠올려냈다.
“저랑 선배들이랑 초인상가에서 놀고 있다가 사태가 터져서 누나랑 합류했다는 건 어때요?”
“좋아, 그걸로 가자!”
강신혁의 비열한 변명을 클레어가 넙죽 수용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이나희가 기겁하여 외쳤다.
“잠깐만요, 저희는 뇌제한테 공격당하기 싫은데요!?”
“에이 괜찮아, 은아가 나는 몰라도 너희를 죽이지는 않을 거야.”
“죽어? 잘못하면 죽어요!? 잠깐만, 저 역시……."
“그럼 가자! 지금 이레귤러 게이트가 100개 이상 연달아 열리고 있다니까 오늘 밤은 자는 건 포기해!”
“죽기 싫어어어어어!”
기겁하는 이나희의 바로 옆에서, 엘레노어는 자신의 몸과 랜스를 감싸는 광채를 느끼며 랜스를 품에 끌어안고 멍하니 불분명한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묘하게도 볼이 붉었다.
“으우, 주고도 좋을지도 몰라……."
“엘리!? 지금은 푼수 티를 내고 있을 때가 아닌데, 엘리!”
“투덜댈 시간 없어, 진짜 갈 거야!”
클레어가 언젠가 강신혁과 함께 탔던 공중 바이크를 꺼냈다. 두 사람까지는 넉넉히 탈 수 있는 바이크였지만 확실히 네 사람은 무리일 것이다.
강신혁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눈으로 묻자 클레어는 씩 웃으며 바이크에 달린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바이크의 양옆으로 길다랗고 단단한 손잡이가 뻗어 나왔다.
“……제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죠?”
“네가 생각하는 그게 맞아. 역시 우린 마음이 통한다니까? 언젠가 공중에서 강습하는 부대를 통솔해보고 싶었거든!”
클레어는 언제나처럼 한없이 중2병에 가까운 욕망을 바이크의 앞좌석에 앉고는 그녀와 같은 후방담당인 이나희를 자신의 뒤에 앉혔다.
강신혁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왼편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잡고 매달렸다. 엘레노어는 아직까지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엘레노어 선배, 반대쪽 손잡이 잡아요.”
“응? 하지만…… 응?”
“잡았어? 그럼 난다!”
“무슨…… 꺄아아아아악!?”
엘레노어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강신혁이 시키는 대로 손잡이를 붙잡은 그 순간, 바이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바이크 양옆의 손잡이를 붙잡고 있던 강신혁과 엘레노어는 밑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그것을 단단히 붙들고 허공에 매달려야만 했다. 발밑으로 스쳐지나가는 바람이 실로 짜릿했다.
“출발! 아, 우리 전대 이름 같은 거 미리 설정해둘까?”
“전대라고 하지 마요, 전대라고.”
“으음, 가면을 쓴 데다 바이크로 달리고 있으니까 가면라……."
“엘레노어 선배!”
사람 넷을 실은 바이크는 그 무게를 조금도 느끼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로 허공을 가르고 나아갔다. 과연 이것을 발견한 이들이 나중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강신혁이 두려워하고 있자니.
- 비밀조직의 사천왕처럼 보이는 회원님께 6,000HP 보너스!
‘이런 때 보너스 수치 갱신하지 마요!’
……아무래도 관리자는 이 모습이 마음에 제법 드는 모양이었다.
한숨을 내쉬는 강신혁과 일행을 실은 바이크가 빠르게 전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