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 Chapter 23. 역류하는 증오 - 2 >
클레어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런 그녀와 강신혁이 맨얼굴로 거리를 걷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장에 신영이 뒤집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신은아가 출동하여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의 목숨을 확실하게 끝장내버릴 것이다.
따라서 둘은 적절한 변장을 하고 만났다. 히어로 유니버스에는 외관을 미묘하게 변화시키며 사람들의 주목을 자연스레 피하게 만들어주는 ‘나뭇잎의 그림자’라는 아이템이 있었는데, 가격은 조금 비싸지만 이것을 쓰면 일단 그들의 정체가 들킬 일은 없어진다고 볼 수 있었다.
물론 격한 활동을 하게 되면 아이템의 효과가 사라지게 되지만 평범한 데이트를 즐기는 정도로는 별 문제가 없을 터였다.
하지만 약속장소에서 클레어와 만난 순간, 정말로 아무도 그들에게 주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때 강신혁은 비로소 깨닫는 것이 있었다.
“이런 게 있었으면 가면 쓸 필요 없었잖아요!?”
“에이, 너는 신은혁으로 활동하고 있잖아.”
“처음엔 바텐더 일 때문에 쓰게 된 거였잖아요!?”
클레어의 능청스러운 말에 부들부들 떨며 대꾸하는 강신혁. 그러나 클레어는 쯧쯧, 손가락을 흔들었다. 사이드 테일로 묶은 붉은 머리가 그녀의 귓가에서 귀엽게 찰랑거렸다.
“그 바에 오는 손님들이 누구라고 생각해? 날고 기는 초인들이야. 나뭇잎의 그림자는 잠깐 지나쳐가는 사람들을 속이기에는 최적이지만, 같은 장소에서 몇 시간이고 머무르는 능력자들을 상대로는 잘 먹히지 않아.”
“상성의 문제라 이거죠…… 그래서 속내는?”
“가면을 쓰는 쪽이 훨씬 멋지잖아! ……핫!”
무심코 본능대로 대꾸한 클레어를 가만히 바라보는 강신혁. 클레어가 땀을 흘리며 시선을 살짝 피하자, 강신혁은 픽 웃으며 그녀에게 팔을 내밀었다.
“사실 저도 가면 멋지다고 생각해요.”
“역시 그렇지!”
클레어가 그의 말을 덥석 물었다. 그녀가 한껏 기분을 내며 강신혁의 팔에 달라붙는 순간, 여태껏 그와 팔짱을 꼈던 그 누구보다도 대단한 압박감이 전해져왔다. 강신혁은 그 순간의 감상을 그녀에게 솔직하게 전하기로 했다.
“결혼해줘요, 누나.”
“너 되게 속보인다?”
둘은 농담을 교환하며 우선 저녁식사를 하러 향했다. 이전 아티팩트 경연대회가 있었던 5성 호텔 루브론의 20층에 있는 레스토랑이었는데, 대상을 타고 얻은 부상 중 하나로 레스토랑 티켓이 있었다.
“와, 신혁이 능력 있네.”
“누나랑 오고 싶어서 아껴뒀어요.”
"......."
지극히 자연스러운 멘트였다. 클레어는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했지만 강신혁이 딱히 그녀의 반응을 바라지 않고 한 말이라는 사실을 깨닫곤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래, 그럼 감사히 받을까. 그래도 다음엔 내가 살게.”
“고마워요.”
두 사람의 분위기는 제법 괜찮았다. 강신혁이 쓸데없이 긴장하거나 무리하지 않은 덕분이었다. 클레어는 웨이터가 따라준 와인을 입가에 대며 그런 강신혁을 가만히 바라보다, 문득 말했다.
“모루의 영향이려나?”
“지금 저요?”
"응."
강신혁은 들었던 스푼을 놓고 솔직히 답했다.
“사실 잘 모르겠어요. 영향은 받았겠죠. 그러지 않았으면 누나를 앞에 두고 이렇게 차분하지는 못했을 것 같네요."
“또 빤한 소리를.”
“그래도 듣고 나쁜 기분은 안 들죠?”
“응, 그거 제법 괜찮은 재주니까 소중히 해.”
“전부 진심이라서 그래요.”
“또또.”
투덜거리는 클레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진심이 통했다면 다행이다. 강신혁은 그녀와 마주보고 웃다가…… 순간 미소가 굳었다.
“왜?”
“지져스.”
그들과는 제법 떨어진 테이블에, 강신혁이 알고 있는 여자 두 명이 앉아있었다. 한 명은 바로 얼마 전 함께 게이트에 들어갔던 엘레노어 R. 알제였고, 다른 한 명은 이나희였다.
이나희의 얼굴을 본 순간 감이 왔다.
“그랬지, 저 선배도 여기 티켓이 있었지……."
경연대회 대상은 그 혼자서 탄 게 아니었으니까. 설마 같은 날 오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그녀 혼자였다면, 혹은 그녀가 남자친구를 데리고 왔더라면 아슬아슬하게 세이프였을 터다.
하지만 설마 엘레노어를 데려오다니! 데려올 남자도 없냐고 비웃어주기엔 두 사람의 미모가 너무나 화려하다. 저 두 사람의 파트너라면 누구나 입후보하고 싶어 하겠지.
“어라, 쟤 분명히.”
강신혁의 시선이 향한 곳에 있는 이들을 클레어도 눈치 챘다. 다행히도 저쪽은 아직 그들을 눈치 채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한쪽은 네 동아리 선배네?”
“다른 한쪽도 마찬가지예요. 비룡기사단 단장이거든요.”
“와, 신혁이 좋겠네. 주위에 미녀 투성이잖아.”
“그중에 누나가 제일 예뻐요.”
어떻게 한다. 들키지 않을까? 과연 나뭇잎의 그림자는 성공적으로 둘을 감춰줄 것인가?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들킨다고 큰 문제가 될 것도 없었다. 애초에 이나희는 강신혁이 클레어를 좋아한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지 않던가.
“뭐 됐나.”
“그래그래, 데이트 중이니까 나만 봐야지?”
“네."
“하지만 그렇게 뚫어져라 보는 건 안 돼.”
“쳇."
두 사람은 외부인의 존재를 잊고 식사를 즐겼다. 취향은 애초에 거의 일치하는 수준이었기에 화제가 곤란할 일도 없었다. 디저트로 나온 케이크를 먹고 차를 마시며 클레어가 은근슬쩍 물어왔다.
“다음은 어디로 가?”
“몸 움직이는 쪽이 좋아요, 안 움직이는 쪽이 좋아요?”
“움직이는 쪽.”
“그럼 볼링하러 가죠.”
볼링이라고 해도 평범한 볼링은 아니다. 초인상가에 있는 특수 스포츠 센터에서 즐기는 볼링을 말하는 것이다. 공의 무게와 크기가 다르고, 핀도 다르고, 바닥 재질도 달랐다.
초인상가에는 이렇듯 일반인과 다른 수준의 힘과 체력을 지닌 초인들도 즐길 수 있도록 설계해놓은 시설이 많았다. 애초에 몸을 움직이는 데이트인 시점에서 초인상가로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와, 볼링 말고도 할 거 많네.”
“어라, 누나 이쪽은 안 와봤어요?”
참고로 강신혁은 백인하와 함께 제법 왔었다. 백인하는 멋진 모습으로 초인 누님들을 꼬시겠다며 자신 만만하게 떠들어댔지만 결국 둘 다 시합에 집중하느라 그럴 틈이 없었다.
“응, 원래 필요한 운동 말고는 별로 안 했거든. 하지만 가끔은 좋겠지?”
클레어는 머리를 한 번 풀었다가 다시 포니테일로 묶었다. 강신혁이 말없이 엄지를 세우자 그녀는 깔깔 웃으며 그의 팔을 때렸다. 솔직히 - 굉장히 좋은 분위기였다.
그들의 옆 레인으로 엘레노어와 이나희가 오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것이다.
“우연이네, 후배.”
“아, 안녕, 신혁.”
이나희는 히죽히죽 웃고 있었고, 엘레노어는 강신혁과 클레어를 번갈아 바라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어쨌든 나뭇잎의 그림자가 지인을 상대로는 잘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만은 소득이라고 할 수 있겠지.
"......."
“왜 그렇게 봐? 내가 봐도 오늘 내가 좀 예쁘긴 한데.”
"게이트 클리어 이후로 처음이네. 잘 지냈오……?”
강신혁은 말없이 둘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둘이 끝까지 우연이라고 우기자 결국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우연은 무슨, 레스토랑에도 있었으면서.”
“뭐야, 그때부터 봤으면서 모르는 척 한 거야? 섭섭하게 하네.”
“데이트중인 거 뻔히 알면서 방해하러 오는 건 대체 어느 나라 법도예요?”
“정말? 그냥 언니가 너랑 놀아주는 거 아니고?”
그야 대체로 틀리지 않은 분석이긴 하지만, 언제부터 클레어가 당신의 언니가 되었는가.
살짝 열 받은 강신혁이 따지려는데 그때까지 가만히 상황을 보고 있던 클레어가 그의 뒤로 다가와 그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오.......”
“아......."
강신혁은 물론이고 그것을 본 엘레노어와 이나희마저 동시에 상태이상 경직에 걸렸다. 클레어가 턱을 강신혁의 어깨에 얹으며 애교스럽게 말했다.
“우리 데이트하는 거 맞는데? 아, 이거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이야.”
“오, 오오……."
“그건, 실례했네요……."
“으응, 아냐. 만난 것도 인연인데 볼링, 같이 할까?”
“어, 아뇨. 저흰 그냥 옆에서 할게요.”
“만나 뵙게 되오소 영광이었습니다, 연금술사 님.”
클레어에게 압도된 두 여자가 얌전히 뒤로 물러섰다. 강신혁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패배였다. 역시 그녀에겐 이길 수가 없다.
“그, 누나?”
“으응? 내가 괜히 나섰나?”
“아뇨, 그건 아닌데. 그건 절대 아닌데.”
“역시 그렇지? 가만히 있으면 이대로 쟤들한테 뺏길 것 같았거든.”
그래서 조금 오버해봤어, 클레어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강신혁은 거의 빈사상태였다.
“그럼 놀자.”
“네."
강신혁과 클레어는 음료수를 받아놓고 볼링을 즐겼다. 클레어에게 패배한 두 여자도 일단 물러났지만 이미 결제를 한 게 아까웠던지, 아니면 관찰이라도 하고 싶었는지 옆 레인에서 공을 던지고 있었다.
[이나희 : 후배 아깐 미안.]
클레어가 공을 던지는 것을 보고 있던 때 이나희에게서 메시지가 날아왔다. 옆의 소파에 앉아있던 이나희가 그를 돌아보고 있었다.
[이나희 : 그냥 가볍게 놀리려고 농담했던 거야. 둘이 잘 어울려.]
[나 : 왜 갑자기 친절하게 굴어요?]
강신혁이 답장을 보내자 바로 답이 돌아왔다.
[이나희 : 아니 진짜 데이트 방해한 거면 미안하잖아.]
[나 : 근데 선배가 대충 맞아요. 사귀는 거 아니거든요. 간신히 일일 데이트 권리를 따낸 느낌.]
이나희가 그 메시지를 보고 쓴웃음을 짓는 것이 보였다.
[이나희 : 아직 멀었네.]
[나 : 그렇다고 또 바로 놀리네.]
[이나희 : 그게 아니라]
[이나희 : 아니 됐어. 학기 시작하기 전에 작업이라도 하나 할까?]
[나 : ㅇㅋ 내일 생각해보고 연락할게요.]
메시지를 마치고 고개를 드니 어느덧 클레어가 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한편 옆에서도 차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엘레노어에게 이나희가 뭐라 속삭이는 것이 보였다.
“뭔 일 있었어?”
“선배가 데이트 방해해서 미안하다네요.”
“착한 애네. 화 안 났다고 전해줘. 오히려 난 그 덕에 이득 본 느낌인데.”
클레어가 그 말과 함께 킥킥 웃으며 음료수에 꽂힌 빨대를 물었다. 이득을 봤다니, 뭐가? 강신혁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빨대를 물고 있는 그녀의 도톰한 입술이 유독 탐스럽게 보였다. 거기에 절로 시선이 가는 것을 애써 이겨내며 자리에서 일어선 순간, 그의 스틱이 세게 진동했다.
이나희와의 대화는 끝난 것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생각한 다음 순간 건물 전체에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이나희의 폰도 격렬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이레귤러 게이트 다수 발생]
“아."
스틱을 확인한 강신혁은 클레어와 시선을 마주했다. 클레어가 쿡쿡 웃었다.
“어쩐지 이럴 것 같더라니.”
“그런 예상은 안 맞아도 되는데 말이죠.”
“그러고 보면 우리 처음 만난 날도 이랬던가?”
“그랬죠. 아직 데이트는 시작도 안 했는데 억울해죽겠네요.”
강신혁이 농담투로 던지는 말에 클레어는 뭔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데이트는 다음에 이어서 하면 되지.”
“정말?”
“응, 대신.”
클레어의 폰에 정신없이 연락이 쏟아지고 있었다. 현재 한국에 머무르고 있는 이상 비상사태에는 그녀에게도 최우선적으로 협회의 연락이 오게 되어 있었다.
“오늘은 혼자 가기 싫어. 나랑 같이 싸우자.”
강신혁은 그 말에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렇다. 그땐 강신혁이 아직 약해 그녀를 혼자 보낼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아닌 것이다.
이젠 숨어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렇구나.”
“어때?”
클레어가 웃으며 묻는 말에 강신혁은 행동으로 대꾸했다.
신은혁의 가면을 뒤집어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