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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화. < Chapter 23. 역류하는 증오 - 1 >

“시뇩아!”

“아, 기운 빠져.”

“보자마자 심하네 진짜!”

헤일로의 단말과 엘프들이 있는 세상, 미로토즈에서 1주일간의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다음날 아침, 백인하가 그의 방을 찾아왔다. 그게 무슨 뜻인가 하면 이젠 백인하도 로열 클래스의 주민이라는 뜻이었다. 학생회 부회장으로 당선되었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진짜 아무렇지도 않게 학생회에 들어갔구나. 너 그렇게 욕하고 있었으면서.”

“학생회 같은 데에 신경 안 써도 되는 거라면 욕을 할 필요도 없었을걸.”

“그것도 그렇네.”

강신혁은 수긍하며 백인하를 방 안으로 들였다. 자신의 방과 별로 다르지 않을 텐데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방을 쓱 훑어보던 백인하는 이윽고 방구석에서 작은 쇳덩이를 뜯어먹고 있는 고슴도치를 발견했다.

“저게 네가 테이밍했다는 고슴도치야? 안 그래도 사방에 소문 돌던데. 네가 실은 테이밍 계열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즉 이중특성이라는 거지.”

“이중특성은 무슨…… 그거 도시전설이잖아.”

이중특성, 즉 특성이 두 개라는 뜻이다. 본래 능력자는 특성을 하나밖에 가질 수 없지만, 떠들어대기 좋아하는 인간들은 어쩌면 두 개의 특성을 갖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며 근거도 없이 주장하곤 했다.

능력자들 사이에서도 심심하면 튀어나오는 얘기였고, 간혹 정말로 이중특성으로 의심되는 이도 나타나곤 했으나 대개는 특성이 광범위하거나 특별한 스킬을 갖고 있었을 뿐인 것으로 판명이 나곤 했다. 물론 강신혁은 실제로 특성을 두 개 갖고 있는 사람을 알고 있지만 …… 그녀는 여러모로 예외이니 제외해야겠지.

“그냥 아티팩트가 있었을 뿐이야, 아티팩트가.”

“그러냐? 최소한 스킬은 있었을 거라고 다들 떠들어대던데. 네가 플레임 와이번을 길들여서 알제 누님하고 하늘의 데이트를 즐겼다는 얘기가 지금 신영의 핫 토픽.”

“그 망할 놈들은 방학인데 어디 안 나가고 학교에만 있대냐?”

플레임 와이번은 숨기기에는 너무 거대하다. 더구나 방학중에도 비룡기사단은 활동을 빼먹지 않는 만큼, 아마 지금쯤은 전교생이 플레임 와이번의 존재를 깨닫고 있을 것이다.

참고로 녀석의 주인은 여전히 강신혁이었다. 부단장인 더글러스 페인에게 넘겨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지금 3학년인 그에게 플레임 와이번을 줘봤자 얼마 안 가 다시 주인을 바꿔야 하는 만큼 귀찮아서 방치하고 있었다.

……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가 힘들여 테이밍한 플레임 와이번을 왜 더글러스한테 넘겨줘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컸다.

“그래서 솔직히 말해라. 알제 누님하고 어디까지 갔냐.”

“게이트.”

“아 제발.”

“아무 짓도 안 했다, 아무 짓도.”

강신혁이 솔직하게 대꾸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인하는 여전히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 여태까지 학교에 없었잖아. 내내 알제 누님하고 있었어?”

“아니, 그건 아냐. 다른 여자랑 있었어.”

“카사노바!”

당연하지만 백인하의 반응을 보고 놀려먹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엘레노어와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에는 물론 신은아와 함께 있었지만 그것은 지옥의 특훈이었을 뿐이고, 엘레노어와의 게이트 탐험 후로는 헤일로의 의뢰를 받아 미로토즈에 다녀왔으니까.

물론 미로토즈에는 강신혁을 호시탐탐 노리는 아리따운 여자 엘프들이 많았으니 백인하에게 한 말도 마냥 거짓말은 아니었다.

“배신자.”

“농담이야. 그냥 환경을 여러모로 바꿔가면서 수련하고 돌아왔을 뿐이야.”

“그건 알고 있었어.”

백인하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너 더 세졌잖아. 대체 어디서 어떻게 구르면 그렇게 세지냐? 나도 민첩이 S랭크가 된 이후부터는 오지게 안 오르던데.”

“음…… 비밀.”

“역시 배신자야.”

백인하는 그 말과 함께 양팔을 벌리고 덤벼들었으나 강신혁은 그에게 쉽게 잡혀주지 않았다. 백인하는 특성을 쓸까 말까 고민하다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 화들짝 놀라 멈추었다.

“진짜 빨라졌네! 이 정도면 S랭큰데? 시뇩이 너 민첩 S랭크지!”

“남들한테는 비밀이다.”

“말해도 안 믿거든!?”

백인하는 큰 충격을 받은 듯 그 자리에 굳어 있었으나, 이내 벌떡 일어섰다. 남자의 자존심을 자극 당했으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나 수련하러 간다.”

“그래, 힘내라.”

“아, 그리고 시뇩아.”

그대로 나가려는 듯 싶던 백인하가 방향을 선회해 돌아오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알아서 잘 하리라 생각은 하는데 그래도 불안해서. 요즘 게이트 발생 빈도가 이상하다는 얘기가 있거든.”

“게이트 발생 빈도…… 왜, 많이 생기고 있대?”

게이트 발생에 대해선 그 누구도 컨트롤할 수 없다. 어디에 얼마나 어떤 게이트가 생겨나는지, 인간은 몇몇 능력자들의 힘을 빌어 근소하게 유추해낼 뿐 감히 방지할 수도 조정할 수도 없다.

게이트의 발생은 불규칙하다. 하지만 그 발생률이 유독 눈에 띌 정도로 늘어나는 때가 있었다. 대개 그것은 어떤 재앙의 전조로서 취급되었다.

"많이 생기는 것도 많이 생기는 건데, 한 군데에 밀집해서 생기는 경우가 많은가봐. 그래서 아저…… 대형 길드들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고. 초인협회도 바쁘지 않을까.”

“아…… 그래, 그렇지.”

안 그래도 요즘 신은아가 귓속말로 죽는 소리를 많이 낸다 싶더라니.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이상하게도 ‘신은혁’을 호출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즉 그의 손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문제라는 뜻인데…….

“4차 대역류가 일어나는 게 아니냐는 얘기도 있거든.”

"......."

대역류. 강신혁의 친부모를 앗아갔던 재앙의 이름이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다.

강신혁이 입을 딱 다물고 있으려니 그의 마음을 짐작하기라도 한 것일까, 백인하가 제법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당분간은 조심해야 한다는 얘기야. 그럼 난 간다.”

“……그래.”

백인하가 방에서 나갔다. 홀로 남은 강신혁은 대역류라는 단어가 남긴 불길한 울림을 짓씹다가는 이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리 그가 강해졌어도 아직 대역류를 홀로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망념 따위는 잊어버리고 차근차근 한 걸음씩 수련 할 때였다.

@@@

“대역류가 확실하다니까.”

“하, 꼭 저렇게 재수 없는 소리를 한다니까.”

“여기 모스코물!”

“지금 갑니다.”

그 날 밤, 강신혁은 일주일 만에 출근한 프론트라인 바에서 오늘따라 유독 몰려드는 손님들 틈바구니에서 정신없이 서빙을 하고 칵테일을 탔다. 분명 좌석을 제한했는데도 가게가 꽉 찬 느낌이었다.

“조만간 뭔가 일어나기는 하려나보네.”

담배처럼 생긴 초콜릿을 입에 문 채 클레어가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저게 초콜릿이라는 걸 다른 손님들이 알게 된다면 만만치 않게 쪽팔릴 텐데, 그 사실을 미리 알려주어야 할까 말까 강신혁은 고민했다.

“다들 시끄럽네요.”

“응. 그도 그럴 게 오늘 무려 다섯 개의 게이트가 인접 지역에 발생했다니까. 이거 3번 테이블.”

“세 개만 겹쳐도 난리가 나는데 다섯 개……."

“뭐어 당장은 아닐 거야. 하지만 그렇지, 조금은 각오해두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어.”

과연, 그래서 손님들이 이렇게 시끄러웠던 걸까. 강신혁은 이 바가 초인들이 몰려드는 장소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실감하며 서빙을 마쳤다.

그 와중에 옆자리에 앉아있던 여자 손님이 슬쩍 그의 손을 잡고 끌어당겨 맞은편에 앉히려는 것을 부드럽게 피해 돌아오니 클레어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쟤 랭컨데.”

“어, 그랬어요!?”

“봐봐, 저거 놀란 거 보여?”

정말이었다. 물론 장난을 치려던 것뿐이겠지만 바텐더가 자신의 손짓을 자연스럽게 피해냈다는 것을 깨닫고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여자 손님의 얼굴이 보였다. 그러고 보면 방송에서 자주 봤던 것 같기도 했다.

“요즘 여기 유명한 사람들 자주 오지 않아요?”

“우응, 네 앞에 가장 유명한 사람이 있는데?”

“그것도 그렇네요.”

애교를 담은 클레어의 목소리에 강신혁은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클레어도 마주 웃으며 말했다.

“다들 버프는 받고 싶은가보지. 나한테 길드 권유를 하러 오는 사람도 꽤 있고.”

“누나 그런 사람은 바로 쫓아내잖아요.”

“응, 그러니까 은근슬쩍 어필하는 거지. 그리고 내 생각엔, 이제 곧 너한테도 그런 시도가 제법 들어올 것 같아. 저기 봐봐, 시동 거는 거.”

“아……."

시동을 건다는 표현은 조금 뭐했지만 확실히 방금 강신혁의 몸놀림을 보고 가게 곳곳에서 눈을 빛내는 이가 제법 있었다. 하지만 또 다른 몇몇이 그런 이들을 말리며 뭐라고 속삭여 진정시키고 있었다. 클레어가 그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저, 신은혁으로 소문나 있잖아요."

“아, 그랬지. 협회 소속이라고 생각하겠네. 은아도 매일 오고 있고……."

바로 그 신은아는 오늘은 딱 한 잔만 하고 돌아갔다. 나가기 전까지 강신혁의 팔을 붙들고 매달리던 것을 보면 정말로 가기 싫었지만 어떻게든 그녀가 맡아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잠깐만, 그러면 나까지 협회랑 엮여있다고 생각하는 거 아냐?”

“누나는 새삼스럽지도 않잖아요. 뇌제 절친인 거 세상사람 다 아는데.”

“우와아, 네 말 듣고 방금 검색해봤는데 너랑 나랑 은아랑 엮은 기사가 있어.”

‘장안의 화제 [프론트라인 바]의 매력적인 남자 바텐더, 그 정체는 신은혁!? 뇌제에 이어 연금술사의 사랑을 받는 남자 신은혁! 삼각 관계 의혹!?’이라는 타이틀을 보고 강신혁은 그대로 뿜어버리고 말았다.

“미안해요, 누나.”

“아니, 오히려 좋은데?”

기사를 읽어보던 클레어가 생뚱맞은 말을 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괜히 이상한 놈이랑 스캔들 나는 것보단 우리 귀여운 신혁이 쪽이 훨씬 좋잖아.”

“거기선 거짓말로라도 좀 멋지다고 해봐요.”

“멋진 모습을 보여줘야 멋지다고 해주지~.”

잔을 닦으며 킥킥 웃는 클레어의 모습에 강신혁은 조금이지만 심통이 났다. 일단 주문이 들어온 칵테일을 만들고 손님한테 내어준 후, 그는 조금 생각하다 클레어에게 말했다.

“우리 데이트 약속이 있었죠.”

“어머, 그러고 보니까 그랬네.”

특훈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면 방학 중에 데이트를 한 번 해주겠다는 약속을 한 적이 있었다.

클레어는 그 말을 듣자 노골적으로 ‘까먹고 있었는데’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과연 강신혁도 그게 거짓말이라는 것 정도는 파악했다. 기억하고 있었지만 강신혁이 언제 말을 꺼내오나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여우다.

“데이트해요, 누나가 원하는 대로 멋진 모습을 보여드릴 테니까.”

“흐응, 그래. 방금 그 말투도 조금 괜찮았어. 아직 멀었지만.”

“전 이제부터거든요.”

“이제부터라.”

확실히 그렇다. 강신혁은 여러모로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그가 이번 방학 중에도 빠르게 성장했다는 것을 클레어 역시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곧 랭커에 진입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열일곱 살의 나이로!

그렇게 되면 그녀와 강신혁이 같은 전장에 서는 일도 있을 것이다. 추구하는 스타일(중2병이라고는 굳이 말하지 않는다.)이 비슷한 만큼 둘의 모습도 제법 잘 어울리지 않을까…….

그것을 상상해보던 클레어는 픽 웃어버렸다. 아마 그곳에는 신은아도 있을 테니까. 강신혁과의 투샷을 잡고 싶으면 일단 쓰러트려야 할 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한 첫 걸음이 이번 데이트려나?”

“응? 누나 무슨 말 했어요?”

“아니, 아무것도 아냐. 나 내일 괜찮으니까, 내일 데이트하자고.”

클레어는 그렇게 말하며 배시시 웃었다. 조금 사춘기 소녀 같은걸, 속으로만 중얼거리며 중2병 처녀는 말했다.

“멋진 에스코트 기대하고 있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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