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 Chapter 22. 헤일로 퀘스트 - 5 >
- 힘을 잘 쓰는 회원님께 3,500HP 보너스!
“방금 그 보너스 굉장히 꺼림칙한 느낌이 드는데요. 관리자님. 관리자님?”
- 3,000HP 보너스!
“이 사람 또 시작했네.”
- 2,000HP 보너스!
다섯 개의 허수아비 [수호자]에 이어 쟁기를 만들고 심지어는 스스로 그 쟁기를 이끌고 황룡투기를 발산하며 직접 밭을 갈기까지 하니 날이 꼬박 저물었다.
밭이 단숨에 넓어진 것에 환호하며 그를 행가래치려 하는 엘프들에게서(덤으로 그의 몸을 은근슬쩍 만지려하는 엘프들도 있었다.) 도망친 강신혁은 그의 몸을 씻어주겠다며 다가오는 엘프들을 피해 홀로 욕탕에 잠겼다.
세상은 멸망했지만 깨끗한 물은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아티팩트 만만세였다.
몸을 구석구석 닦아내고, 욕실에 난입하려는 엘프들을 격퇴하고, 뜨거운 물을 조금 즐긴 후, 창문 너머로 그를 훔쳐보고 있던 엘프의 눈을 찌르고 있을 즈음에 헤일로의 잎사귀가 그의 머리 위로 두둥실 내려앉으며 메시지를 전달해왔다.
[재료의 준비가 되었으니 나와서 확인하도록 해, 모루 영감.]
“드디어?”
멸망이니 엘프니 밭이니 하며 하루 내내 정신이 없었는데 이제야 겨우 퀘스트의 본 목적에 도달할 수 있었다. 탕에서 일어나 대충 몸을 닦고 나오자 엘프 한 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안내해주었다.
“이쪽에 마련해놓았습니다.”
“시설 바깥에? 뭐 대충 예상은 가지만요.”
그 거대한 거인의 발을 묶을 수 있는 족쇄의 재료쯤 되면 운반하는 것도 어려울 만큼 크기가 크겠지. 그뿐인가, 재질도 평범한 강철 따위를 사용하려 했다간 새끼 발가락 하나도 묶어두지 못할 터였다.
거기에 헤일로는 스스로 재료를 준비하겠다는 뉘앙스의 말을 했었다. 이상의 조건에서 도출되는 결론. 재료의 정체는 바로…….
[12개의 뿌리 중 가장 크고 두꺼운 놈을 잘랐어.]
바로 헤일로의 단말 그 자체이다.
“내가 이걸 가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강신혁은 공터를 가득 메우고 있는 두꺼운 나무뿌리를 바라보며 아득한 한숨을 토해냈다. 양팔을 벌리고 10분 동안 뛰어다니면 간신히 둘레 길이를 측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걸 자신이 가공한다고? 농담도 정도가 있었다.
그러나 헤일로는 단호한 어투로 답했다.
[영감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해. 질 낮은 나뭇가지들을 가지고 작품을 빚어내는 것을 보며 충분한 가능성을 느꼈어.]
“그건……."
헤일로가 도움을 주어서 가능했던 일이 아닌가, 라고 반박하면 또 관리자가 결코 그렇지 않다며 끼어들 것이다. 스스로도 번뜩이는 착상과 그에 따른 결과물에 불만은 없었기에 얌전히 수긍해두기로 했다.
[제아무리 야금술의 랭크가 낮아졌다 해도 모루 영감은 모루 영감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지. 츠쿠요가 괜히 얌전해진 게 아니더군.]
“츠쿠요 얘기는 갑자기 또 왜 나와요?”
안 그래도 최근 그녀를 생각하면 괜히 싱숭생숭한 기분이 드는 강신혁이 머뭇거리며 말하자 헤일로가 껄껄 웃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히어로 유니버스의 누구보다도 영감에게 집착했던 이가 아닌가. 그런 만큼 영감을 잘 알고 있기도 했지. 그런 그녀가 영감을 인정했다는 것은 지금 모루 영감의 솜씨, 영감의 가능성에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는 얘기야. 항상 영감이 내놓은 상품을 싹쓸이해가는 것은 마음에 안 들지만…… 그렇지. 말 나온 김에,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내 지명의뢰를 몇 개 받아주지 않겠나?]
“당신이랑 얘기를 하고 있으면 어째 매번 해야 할 일이 늘어나네요!?”
그래도 보상은 두둑할 것 같았기에 일단 받아두기로 했다. 헤일로는 흡족해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족쇄지. 어떤가, 모루. 해주겠는가?]
"흠."
사실 이런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작업은 아직 자신에게는 이르다고 딱 잘라 말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나무뿌리를 보면서 착상이 떠오르고 말았다. 그것도 허수아비를 만들 때보다 더욱 확고한 착상이.
지금 자신의 실력으로 가능할 것 같지 않지만, 하루 이틀 걸릴 작업도 아닌 만큼 천천히 만들다 보면 그러는 중에 제작 능력이 상승해 얼추 괜찮은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좋아요. 해보죠.”
[고맙네!]
“그런데 이거 퀘스트 중에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거죠?”
- 서로 합의만 된다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비록 멸망이 결정되어 있다고는 하나 그때까지 남은 시간은 많네, 모루.]
그러면 되었다. 강신혁은 관리자와 헤일로에게서 확답을 얻은 후 곧장 나무뿌리에 달려들었다. 일단 자신이 구상한 모양대로 깎아낼까 생각했으나 신살검으로 몇 번 건드려본 후 마음을 바꾸었다.
“이거 금속인데.”
[영감이 다루기에는 그쪽이 더 나을 것 같아 성질을 조금 바꾸었네.]
“아무렇지도 않게 믿기지 않는 얘기를 하네요!? 하지만 잘했어요!”
금속이라면 녹이고 망치로 두드려 글라인더로 깎아내는 것이 낫겠지. 다만 이것을 통째로 담가 녹일 수 있는 화덕이 이 세상에 존재할 리 없고, 부분적으로 녹여 모양을 다듬는 수밖에 없었다. 강신혁 천 명이 빙 둘러싸도 부족한 규모의 재료를!
“에라 모르겠다, 나 죽기 전에는 끝나겠지.”
- 회원님께 2,500HP 보너스!
그렇게 해서 강신혁은 한 손에는 불을 붙인 융금목 장작을, 한 손에는 망치를 들고 나무뿌리를 든 채 본격적인 족쇄 제작에 착수했다.
모루의 야금술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영력. 나무뿌리 일부를 녹이고 망치로 두들기면서 동시에 영력을 주입한다. 한계치의 영력을 쏟아 붓고 나면 그것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며 영력이 필요하지 않은 다른 작업을 했다.
“생필품을 만드는 정도라면 굳이 영력을 더할 필요도 없겠죠.”
“역시 모루님이셔! 여기에 놓을 식탁입니다만……."
“요리도구도 조금 더 다양해졌으면 좋겠어요. 부탁드립니다!”
“모루님, 상품의 대가는 부디 오늘밤에……."
“여기 손님 한 분 나가십니다!”
헤일로가 이전 강신혁에게 말했다시피 멸망한 세상의 지하 피난처에서 살아가는 엘프들에게는 부족한 것이 많았다.
헤일로라고 해도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일일이 자신의 HP로 구입해줄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여태까지는 그 불편을 감수하며 살아오는 수밖에 없었는데, 이번에 그 중간에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거의 대부분 만들어줄 수 있는 강신혁이 투입된 것이다.
“모루님, 그…… 소, 속옷도 가능할까요?”
“천이구나. 슬슬 재봉에도 도전해야 할 때가 왔다고는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냥 제가 지구에서 사다주는 게 낫지 않을까요?”
“모루님께서 만들어주신 속옷이 입고 싶습니다!”
“엘프들은 다 당신 같은 변태뿐인가요?”
지구와 미로토즈를 언제든 왕복할 수 있는 강신혁이라면 사실 엘프들에게 필요한 생필품 정도는 지구의 샵에서 사오는 게 더 빨랐다.
하지만 미로토즈 생활 나흘 차, 이러다간 끝이 없겠다 싶어 잠시 지구에 들러 물건을 사온 결과……. 그 어느 것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말았다.
처음부터 지구 물건의 반입을 반대했던 관리자는 그제야 순순히 이 세상의 비밀 중 하나를 밝혀주었다.
- 이 세상은 수준이 지나치게 높습니다, 회원님. 지구의 양산품은 이곳에서 버티지 못합니다. 거인의 발걸음 때문만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대기가 약자를 억압하고 있습니다. 회원님께서 차원 퀘스트를 수락하시는 것을 보류했던 것도 이 탓이었습니다.
“하……."
강신혁이 몸에 걸치는 것, 강신혁이 입에 대는 것은 멀쩡했기에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실은 히어로 유니버스의 회원인 강신혁이 시스템 차원의 보호를 받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아마 지구보다 수준이 낮은 세상…… 그래, 키엘론 정도라면 지구의 물건을 들여놓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미로토즈는 달랐다.
생존자의 평균 랭크가 S랭크인 세상,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수준 이하의 존재나 물건은 이곳에서 버티기도 힘들다는 뜻이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버텨온 거지.”
지금도 주기적으로 거인의 발걸음이 세상을 진동시켜, 살아남은 자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드는 이 세상. 강신혁은 생존자들이 짊어지고 있을 무게를 간접적으로 느끼며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고작 100명도 채 되지 않는 숫자, 무리라고 부르는 것도 민망할 정도의 인류만이 남아 다가올 멸망을 조용히 기다리는 이 세상에서.......
그들은 대체 어떤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가.
“모루님께서 만드신 속옷 1호다!”
“나, 나도! 나도 모루님 속옷 가질 거야!”
“경매, 공평하게 경매로 결정하자!”
……아니, 어쩌면 정말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강신혁은 기어이 속옷의 경매를 시작하는 엘프들을 차게 식은 표정으로 바라보며 작업을 재개했다. 그렇다. 지금 그는 재봉을 하고 있었다.
재료는 엘프들이 제공한 뭔지 모를 소재로 만들어진 천. 멸망해가는 세상에 남아도는 것은 사람 손을 타지 않는 원재료들뿐이었다.
사실 처음 허수아비를 만들었을 때도 굳이 그가 인벤토리를 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솔직히 잘 할 수 있을지 반신반의했는데 하다 보니 어떻게든 되네요.”
- 제작계열 스킬은 한 사람이 두 가지 이상을 익히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런 만큼, 한 가지 스킬을 일정 이상 숙련하면 그 숙련도의 일부를 다른 제작 공정에서 활용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의 극한에 이른 것이 바로 올 크래프트입니다. 회원님께선 과거 이미 한 번 그 경지에 이르신 적이 있기에, 아직 야금술이 완성되지 않은 지금도 그 일부를 체현하실 수 있는 것이죠.
관리자의 말은 논리적으로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이미 몇 번이고 그것을 몸으로 겪은 만큼 굳이 거기에 반박을 하지는 않기로 했다.
재봉도 하다 보니 제법 재미가 있었다. 다만 여성 엘프들이 직접 사이즈를 재달라고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이제 그만해줬으면 했다.
- 다양한 작업을 통해 야금술의 무한한 가능성 중 일부를 깨달았습니다. 야금술이 A랭크로 성장합니다! 힘이 S+랭크로 성장합니다! 영력이 S+랭크로 성장합니다!
- 동기화가 가속됩니다. 현재 동화율 28.2%
그런 식으로 여러 가지 작업을 하다 보니 어느덧 야금술이 A랭크로 성장했다. 그 당시에는 야금술로 작업을 하고 있었지만, 어쩌면 야금술이 아닌 다른 작업이 스킬의 성장에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A랭크라서 그런가, 스테이터스도 동시에 두가지나 올랐잖아. 그 덕에 민첩이랑 황룡투기만 빼고 스테이터스가 전부 +랭크가 됐네. 이젠 변명의 여지도 없어……."
워낙 주위에 괴물들뿐이라 잊어먹기 쉽지만, S+랭크란 많고 많은 초인 중 고작 한 줌에 이르는 숫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정진정명 엘리트 초인의 영역이다. 불과 반 년 전 자신의 한계에 갇혀 허덕이고 있던 소년이 어느덧 그 경지를 앞두게 된 것이다.
- 회원님은 앞으로 더욱 빠르게 성장하실 겁니다.
“요즘은 관리자님의 말을 듣다 보면 정말 그렇게 될 것 같네요.”
워낙 빨리 달려오다 보니 벌써 이렇게나 자신이 달라졌나 싶어 스스로가 의심될 정도였다. 아마 히어로 유니버스에 접속하기 전에 이 정도로 강해졌더라면 여기에 만족해 주저앉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강신혁은 킥 웃으며 망치를 내려쳤다. 이제 고작 100분의 1도 완성되지 않은 거대한 나무뿌리의 일부분이 밝은 빛을 발하며 아주 조금, 그가 원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오늘도 밤을 새보실까.”
- 내일쯤에는 한 번 지구로 돌아가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네, 적당한 타이밍이네요.”
강신혁은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헤일로에게서 뻗어 나온 나뭇가지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덩달아 직후 대지에 울려 퍼지는 거인의 발걸음 소리까지.
하여간 사색조차 마음껏 잠기지 못하게 하는 세상이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곤 재차 작업에 돌입했다.
여름방학의 넷째 주가 저물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