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 Chapter 22. 헤일로 퀘스트 -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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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이 바닥난 세상에선 더는 생명이 태어나지 않는다. 혼이 깃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류도 동물도 식물도 모두 마찬가지. 그렇기에 농작물을 재배하는 것도, 본래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원래는 그래야 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가 저희가 관리하고 있는 밭입니다.”
“헤일로님의 영력이라면 본래 이 백 배도 괜찮았지만, 거인의 발걸음이 주는 충격을 이겨낼 수 없게 되어서……."
이른 아침, 일어나서 단련을 하고 있던 강신혁을 여성 엘프가 깨우러 왔다.
얇은 민소매 셔츠 차림으로 근력단련을 하고 있는 그를 보고 노골적으로 눈을 빛내며 입맛을 다시는 엘프와 충분한 안전거리를 확보하며 따라온 곳에 바로 이 텃밭이 있었다.
“헤일로의 영력으로 작물의 재배를 가능케 한다고……."
[그것도 내 뿌리 근처에 있는 영역만 가능한 수준이지만 말이야.]
- 세상의 근원은 아주아주 거대한 영력의 집합체이니까요. 어째서 영력이 마력의 상위 에너지인지 이해가 가시겠죠.
헤일로의 말마따나 텃밭은 헤일로…… 그의 단말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지하 시설을 비롯해 생존한 엘프들과 관련된 것들이 모두 헤일로의 근처에 밀집해있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영력으로 엘프의 대를 잇게 하는 건…… 역시 무린가요.”
[무리다. 혼의 무게가 달라. 그렇지, 만약 거대한 영력을 지닌 이가 도와준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겠다만. 어떤가, 영감.]
강신혁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갑자기 설정이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야겜같아졌는데!?
“죄송합니다.”
[농담이야, 영감. 아직 그 영력으로는 무리일 테니. 더구나 그런 주선을 했다간 관리자가 나를 죽이려 들겠지.]
- .......
덤으로 그 말을 옆에서 들은 엘프들이 마치 먹잇감을 바라보는 야수와 같은 눈으로 강신혁의 전신을 샅샅이 훑고 있었기에, 강신혁은 안전거리를 두 배로 늘려 후퇴했다. 남성 엘프들까지 비슷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더더욱 무서웠다.
“그래서? 이 밭에 내가 손댈 구석이 있을까요?”
노골적으로 화제를 전환하는 강신혁. 현안의 무게가 무게인 만큼 헤일로도 순순히 그에게 따라주었다.
[매우 많아. 아까 아이들이 말했지 않나, 거인의 발걸음이 주는 충격 탓에 아주 좁은 영역에서밖에 작물을 재배할 수 없다고.]
“그랬었죠.”
[안타깝게도 이 작은 밭에서 수확한 물건만으로는 살아남은 아이들의 배를 불리는 게 어려워. 부족한 만큼은 단말의 뿌리와 잎을 먹여 연명시키고 있지만 그 결과 단말의 영력 총량이 줄어들게 되면, 결국 아이들의 안전지대가 줄어들 뿐이야.]
“제살 깎아먹기라는 얘기구나.”
[역시 영감은 얘기가 빨라. 그래서 거인의 발걸음에도 큰 영향을 받지 않는 영역을 확보할 필요가 있는 거야.]
그래서 그걸 어떻게? 라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밭을 보는 순간 강신혁에게도 감이 왔기 때문이다.
대장장이로서의 천성일까? 무엇을 만들어야 밭이 안전해질 수 있을지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신비로운 감각을 잠시 즐기다가, 강신혁은 입을 떼어 말했다.
“감은 잡았어요. 다만 지금 제 수준이 전생이랑 같은 정도라고 생각하면 곤란한데…… 그래도 좋다면 만들어볼게요.”
어째선지 엘프들이 그의 말에 놀라워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헤일로의 요구는 아무리 객관적으로 봐도 터무니없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그걸 별 고민도 없이 흔쾌히 받아들이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다만 헤일로만은 그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응답했다.
[아주 멋진 눈이군. 그래, 영감의 그 표정을 실제로 한 번 보고 싶었어. 은아 녀석이 얼마나 자랑하던지.]
“은아?”
그러고 보면 신은아도 히어로 유니버스의 회원들과는 제법 교류를 하곤 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야누스나 헤일로에게는 반쯤 삼촌 같은 느낌으로 대하곤 했었던 것을, 전생의 모루의 기억을 통해 그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거 외에 또 필요한 건 있나요?”
[당장은 그게 제일 급하니, 우선은 그걸 먼저 부탁하지. 그리고 족쇄도 있지 않나.]
“그래, 그랬죠. 그럼 여기 먼저 시작할게요.”
듣자하니 족쇄의 재료를 준비하는 데에는 아직 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는 모양이었기에, 강신혁은 우선 밭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을 먼저 만들기로 했다.
인벤토리를 뒤져 재료를 꺼냈다. 신은아와 함께 돌았던 게이트에서 잡은 우드 골렘에게서 얻은 전리품…… 바로 [우드 골렘의 목심] 이라는 이름의 단단하고 굵은 나뭇가지였다. 장작으로도 쓰고 잘 가공하면 무기로도 만들 수 있는 B+등급의 재료템이었다.
[좋은 선택이구만, 영감. 식물이라면 내 힘을 더하기에도 좋으니까.]
“가능하면 헤일로의 힘을 빌리지 않고 완성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요.”
강신혁은 쓴웃음을 지으며 신살검을 들었다. 지금부터 만들려는 것은 바로 허수아비였다. 거인으로 인해 발생하는 진동을 허수아비로 막아낸다니 솔직히 영문 모를 소리로밖엔 들리지 않지만, 어째선지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러면 우선 뼈대부터…… 시작해볼까.”
조각도처럼 다루기에는 신살검은 그리 좋은 도구가 아니다. 하지만 신살검의 옵션인 살의제어는 원하는 것만을 베어낼 수 있게 하는 옵션. 그가 원하는 대로 뭔가를 깎아내기에 최적이었다. 더욱이 영력을 담아내기 쉽다는 장점도 있다.
그가 곧장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작업을 시작하자 그것을 지켜보던 엘프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여기서 바로 시작할 줄은 몰랐는데.”
“올 크래프트? 저건 혹시 전설로 전해지는 올 크래프트인가?”
“작업하는 모습도 멋지셔.”
“헤일로님과 같은 진중함이 느껴져.”
“그런데 모루님께서 얼마나 오래 머무르신다고 하셨지? 족쇄도 만드셔야 하는데, 다른 아티팩트까지 만들려면 1년, 2년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텐데……."
“그 정도면 우리들한테도 잘하면……."
헤일로보다는 다소 낫지만 인간의 기준으로는 여전히 턱없는 시간 단위로 생각하고 있는 엘프들. 강신혁은 이미 작업에 집중하고 있어 그들의 불온한 속셈이 담긴 얘기를 들을 수 없었지만 헤일로만은 그 얘기를 들으며 웃어버리고 말았다.
[나도 그런 생각을 했던 시기가 있었지. 하지만 모루는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고작 20년 동안 모든 차원에 그 명성을 널리 떨친 장인. 그가 만들어낸 물건의 완성도만큼이나 놀라운 것이 그의 작업속도라는 사실을…… 아이들은 모를 수밖에 없겠지. 1년이면 그의 힘으로 이 세상을 충분히 바꾸어놓고도 남을 거야.]
그의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에 관리자가 끼어들어 초를 쳤다.
- 헤일로님도 농담이 지나치시군요. 차원 퀘스트의 대가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게 될 겁니다. 더욱이, 1년까지도 걸리지 않을 겁니다.
[얼마든지. 보상은 충분히 생각하고 있다네, 관리자. 아아, 그렇지. 그가 이 세상에서 거두어가야 할 것도 있었지. 그걸 거두는 걸 도우면 조금이나마 흥정할 수 있지 않겠나?]
-.......
그로부터 몇 시간이 흘렀다. 강신혁은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제법 그럴싸한 허수아비를 만들어냈다.
다만 기껏 몸통을 만들고 허수아비의 험상궂은 얼굴까지 만들어놓고는 그것을 씌우지는 않았다. 애초에 엘프들은 허수아비가 무엇인지도 몰랐기에 멀뚱멀뚱 그것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다들 다른 일하고 있어도 되는데요.”
“할 일이 없습니다. 모루님을 감상…… 지켜보는 것이 더욱 즐거우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방금 그 말은 굳이 고쳐 말할 필요가 있었던 것인가. 강신혁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작업에 돌입했다. 허수아비의 얼굴을 씌우는 것이 아니라, 두 번째 허수아비의 제작에 돌입한 것이다.
이미 하나 완성시켰기 때문인지 이후로는 작업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있었는데, 아마도 야금술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금속이라고는 몸을 고정하는 금속 못밖에 들어가지 않는데도 전체적인 작업속도가 향상되는 것으로 보아 이미 야금술을 야금술이라고 불러선 안 될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좋아, 완성.”
결국 처음 만든 것까지 포함해 고작 아홉 시간 만에 강신혁은 다섯 개나 되는 허수아비를 만들어냈다.
쇠를 거의 다루지 않은 작업이었지만 이번엔 작업 내내 기묘한 안정감이 있었다. 아마도 목적한 아티팩트의 착상이 완벽했기 때문이겠지.
강신혁은 비로소 올 크래프트가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뚜렷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물건을 만들어낸다는 것, 그것은 모든 기술에 공통되는 사항이다.
이미 야금술로 아티팩트를 만드는 요령을 꿰뚫고 있기 때문에…… 즉 목적지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익숙한 길(야금술)이 아닌 다소 험한 길(목공)로도 어떻게든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아직 어설프다. 이것을 올 크래프트라고 부르는 것은 당장 강신혁 본인부터가 용납할 수 없다. 그래도 여태껏 만들었던 실패작들과 달리 상품으로 내놓을 정도는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어째서 다섯 개입니까, 회원님?
“기분 상 오망성 형태로 만드는 게 느낌이 좋아서…… 윽.”
착상이 중2병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강신혁은 비로소 자각했다. 클레어에게서 옮았다! 그 사실을 깨닫고 멈칫하는 강신혁에게 관리자가 추가타를 꽂았다.
- 회원님께 2,500HP 보너스!
"......."
강신혁은 말없이 작업을 마무리했다. 허수아비들에게 일제히 얼굴을 씌워준 것이다. 그 순간 허수아비들이 일제히 빛을 발하며 공명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강신혁이 의도한 대로였다.
다만 역시 재료의 질이 B+등급에 불과한 데다 익숙지 않은 작업이었던 것까지 더해져 강신혁의 처음 의도에 비해서는 결과물의 완성도가 조금 낮은 것처럼 느껴졌다. 보다 정확히는 저 테로타라는 거인의 힘이 너무 빌어먹게 강한 것이지만.
[영감, 내가 힘을 더해도 좋을까?]
“부탁해요.”
그때 적절하게 끼어드는 헤일로의 목소리에, 강신혁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만족하기 위해 만드는 물건이라면 몰라도 이건 이곳에서 살아갈 엘프들을 위해 만든 물건이다. 지금은 능력의 부족을 인정하고 순순히 손을 빌릴 때였다.
[좋아, 그러면.]
그들의 머리 위 까마득한 곳에서 헤일로가 가지를 살살 흔들었다. 정확히 다섯 개의 나뭇잎이 떨어져내려, 한창 빛을 발하던 허수아비의 머리 위에 각각 내려앉았다. 눈부신 빛이 폭발해 일행의 눈앞을 깔끔하게 가렸다.
- 고대의 존재의 힘을 빌려 [수호자(S+)]를 탄생시켰습니다. 야금술의 숙련도가 크게 상승합니다!
[수호자]
[S+랭크]
[특수능력 - 보호, 활성화]
*보호 - 지정된 영역을 모든 물리, 마법, 영적인 간섭으로부터 보호한다. 다섯 개의 수호자를 정해진 대로 배치하지 않으면 발동하지 않는다.
*활성화 - 지정된 영역의 생명활동을 증폭시켜준다. 다섯 개의 수호자를 정해진 대로 배치하지 않으면 발동하지 않는다.
“오.”
B+랭크의 아이템을 재료로 삼아 S+랭크의 물건을 만들어 내다니. 솔직히 A랭크, A-랭크까지도 각오하고 있던 강신혁은 그것을 보며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헤일로의 단말에 불과한 나무의, 그것도 지극히 일부에 불과한 나뭇잎을 다섯 장 더했을 뿐인데 이런 결과를 낳다니.
- 오해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만 회원님, 회원님의 야금술과 특성이 더해졌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회원님의 능력이 아니었다면 제 아무리 헤일로님의 능력이 더해져도 소재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게 가능했더라면 회원님께서 이곳에 오실 필요도 없었겠지요.
관리자가 다급히 나서 그를 위로했다. 아마 관리자의 말도 어느 정도 맞겠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 유감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이 허수아비는 이번 퀘스트의 본 목표도 아니지 않은가.
“이걸로 몸은 푼 거 같아요. 이제 족쇄를 만들어보죠.”
[그건 아직이네, 모루.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아.]
마음을 정리하고 일어서는 강신혁에게 헤일로가 초를 쳤다.
[그러니 그동안 조금만 더 도와주게.]
“진짜 소처럼 부려먹네요.”
[음, 실로 정확한 말이군.]
조금의 비아냥거림이 담긴 그의 말을 넙죽 받아들이는 헤일로. 강신혁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다섯 개의 허수아비가 배치되면서 즉각적으로 열 배 이상으로 확장된 밭. 그 넓은 밭을 엘프들과 함께 갈아엎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쟁기도 필요하겠어.]
“아예 낫까지 만들어달라고 해요.”
[그건 조금 나중에 부탁하지, 모루. 아마 그렇게 하는 쪽이 더 ‘좋은 낫’을 만들어낼 수 있을 거야.]
"?"
강신혁은 의도를 품고 있는 듯한 헤일로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순순히 쟁기를 만들었다.
쟁기는 B+랭크의 아티팩트로 완성되었지만, 놀랍게도 이 세상의 땅을 갈아엎기에는 그걸로도 힘이 부족했기에 결국 강신혁은 황룡투기를 운용해야 했다.
“굉장합니다, 모루님! 우리의 마력으로도 이만한 힘은 내기 어려운데……!”
“황금색의 기운이 모루님의 전신을 뒤덮고 있어!”
“세상 누가! 밭을 가는데! 마력을 쓰냐! 으오오오!”
그러고 보면 헤일로가 그에게 황룡투기를 쓸 일이 생길 거라고 했던가? 아마도 그는 처음부터 이 상황을 의도했을 것이라 깨달으며, 강신혁은 그에게서 차원 퀘스트 보상을 단단히 받아 내리라 다짐했다.
결국 그가 족쇄의 재료와 마주하게 된 것은 날이 저물고 나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