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 Chapter 22. 헤일로 퀘스트 - 3 >
인간 외의 이종족이 있다는 것은 히어로 유니버스를 통해 강신혁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지구인들 또한 ‘멸망의 파편’으로 대표되는 이세계의 흔적을 얻는 과정에서 그 가능성을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 세상의 인간들이 꿈꾸는 판타지의 대표 요소인 ‘엘프’를 직접 만난 이는, 적어도 여태까지 공개되기로는, 한 명도 없었다.
“우선 인증샷…… 인증샷 찍죠!”
“네!? 왜 그렇게 당황하십니까!?”
여태까지 다른 차원에서 겪은 일들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지만 지금 그의 기쁨과 비교할 바는 못 되었다. 특히나 실제로 엘프들이 인간과는 다른 수준의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더더욱!
"오오오......."
엘프들은 순순히 그와 함께 사진을 찍어주었다. 미남미녀 엘프들과 함께 인증샷을 찍은 강신혁이 그것을 보며 바보 같은 감탄사를 흘리고 있자니 관리자의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 히어로 유니버스에서 활동하다 보면 엘프보다 더욱 아름다운 종족과도 만날 수 있게 되실 겁니다. ……실은 이미 한 명 만나셨지만요.
"혹시 츠쿠요?”
여태껏 만났던 이들 중 이계인이면서 특출나게 아름다웠던 이를 한 명 고르라면 단연 츠쿠요였다. 그녀에게서 감돌던 요요한 분위기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관리자는 그의 즉각적인 반응에 분해하면서도 곧장 긍정했다.
- 그렇습니다. 그 불여우의 종족 특성이지요. 외견만은 특출나게 되는 겁니다, 외견만은……!
“그렇게 싫어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요즘 들어 주위에 만재한 다른 이상한 사람들보다는 츠쿠요 쪽이 훨씬 정상인처럼 느껴지는 강신혁이었다. 아마 관리자를 포함해도 그렇다. 물론 이 사실을 입 밖에 낼 생각은 없었다.
“그러면 모루님, 이쪽으로.”
“아, 네. 부탁해요.”
관리자와의 대화가 일단락된 시점에 엘프들이 그를 숙소로 안내해주었다.
미남미녀뿐인지라 그들에게 상전으로 취급되는 상황에 어깨가 절로 으쓱일 법도 했으나…… 뭐라고 해야 할까,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축 쳐져있어 솔직히 우쭐대고 있을 틈이 없었다. 아까 인증샷을 찍는 데 어울리게 한 것이 미안해질 정도였다.
‘멸망한 세상이라 어쩔 수 없는 거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 갑자기 쿠우우우우웅! 하고 거대한 진동이 공간을 가득 울렸다.
강신혁은 몸을 진탕시키는 힘에 저항해 몸의 기운을 끌어올리고서야 간신히 중심을 잡고 설 수 있었다. 만약 그의 체력이 낮았더라면 방금 그 충격만으로 쓰러졌을 것이다.
“방금, 그거……?”
시설이 공격이라도 받은 것인가? 하고 당황하여 전투 준비를 하려는데 그 옆에서 엘프들이 태연히 한두 마디씩 내뱉었다.
“거인이 또 한 발을 내딛었다는 뜻입니다.”
“다음 걸음은…… 내일모레 정도가 되겠군요.”
“후, 또 시설이 조금 내려앉았어. 죄송하지만 전 시설을 수리하러 가보겠습니다.”
엘프들은 이미 이런 종류의 충격에도 익숙한지, 강신혁과는 달리 그 자리에 태연히 버티고 서 있었다. 과연, 여리여리한 인상과 달리 여기 있는 전원이 강신혁보다 강자라는 얘기가 된다. 강신혁은 감탄했다. 생긴 것도 그렇고 능력도 그렇고 여러모로 그로마스와 비교된다.
-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단지 이 세상에서 버티고 살 수 있도록 관련된 스킬이 발달했을 뿐이지요. 미로토즈의 생존 엘프들은 평균적으로 S랭크의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저도 평균 S랭크인데요.’
- 회원님의 S랭크는 다른 이들의 S랭크와 많이 다릅니다. 마력이 아니라 영력을 갖고 계신 것부터 규격외인데, 이젠 거기에 황룡투기까지 더해졌으니까요. 상황만 잘 갖춰진다면 SS랭크에 준하는 힘을 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평범한 S랭크가 싱글코어라면 회원님은 듀얼코어, 평범한 S랭크가 그냥 커피라면 회원님은 T.O.P인 셈입니다.
‘방금 굳이 뒷부분 추가할 필요 있었어요?’
하지만 관리자의 말은 정확했다. 사흘간 혼자 방에 처박혀 급성장한 신체를 조정하며 황룡투기에 대해 파악한 결과 이게 단순한 재생력의 강화버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황룡투기만 놓고 봐도 대단한데 여기에 영력이 더해지면…….
“도착했습니다.”
“아, 네.”
그를 안내하던 엘프가 멈추어서며 건넨 말에 강신혁의 상념이 끊어졌다. 문을 열고 들어선 곳은 제법 넓은 침실이었는데, 침대가 바닥에 딱 달라붙어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거인의 발걸음 주기는 규칙적인 편입니다만, 가끔 놈이 재채기를 하거나, 바닥을 내려칠 때가 있습니다. 쓸데없는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주무실 땐 침대에 설치된 벨트로 몸을 고정해주세요.”
“아, 고마워요.”
바닥을 내려치는 건 그렇다 치고 재채기만으로 지하공간까지 떨린다니 그건 이미 생물의 개념을 벗어난 자연재해 그 자체가 아닌가?
강신혁은 자신에게는 정중함을 유지하고 있지만 얼굴에는 미처 숨기지 못하는 피로감이 가득한 미남 엘프를 보며 참으로 공교로운 기분이 되었다.
“이 세상에 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러면, 내일 아침에 찾아뵙겠습니다.”
지금 시간은 밤인가 보다. 엘프는 고개를 숙이곤 뒷걸음질로 물러나며 문을 닫았다. 강신혁이 침대에 걸터앉아 한숨을 쉬는데, 다시 조심스레 문이 열렸다. 방금 나갔던 그 엘프였다.
“미처 드리지 못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뭔데요?”
“모루님의 밤시중을 들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강신혁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관리자의 메시지가 그의 망막을 가득 채웠다.
- 회원님, 이미 멸망한 세상에 불필요한 흔적을 남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회원님, 제 메시지가 보이십니까? 회원님?
“이 세상에서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후일을 염려하실 필요도 없으니…… 불쾌하지 않으시다면 부디.”
관리자의 말을 정면에서 반박하는 엘프. 아니 물론 그에겐 관리자의 뜻을 알 길이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의 손에 들린 종이는, 만약 강신혁의 눈이 맛이 가지 않았다면, 여성의 이름이 적힌 목록이었다. 무슨 목록인지는 두려워서 묻기 싫었다.
“아, 아니 괜찮아요! 아직 미성년이라!”
비로소 정신을 차린 강신혁이 다급히 대꾸하자 엘프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미성년…… 그러셨군요. 알겠습니다. 아이들에게는 그렇게 전해두겠습니다.”
“뭘 어떻게 전하겠다는 건데!?”
“멸망한 세상인지라, 즐길 거리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다들 헤일로님께 말로만 듣던 모루님을 실제로 뵙게 되어 무척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만……."
앞뒤가 연결이 되는 듯한 되지 않는 듯한, 무척 뒤숭숭한 말을 남긴 엘프가 다시 물러갔다. 강신혁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그가 엘프에 대해 품고 있던 환상이 깨지고 있었다.
“엘프…… 엘프가 원래 모두 이래요? 모두…… 이렇게 밝혀요?”
- 멸망한 세상이니까요. 적어도 관리자가 아는 엘프는 저렇게 죽은 눈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해해주게, 모루 영감.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가능하다면 아이들을 돌봐줬으면 좋겠군. 히어로 유니버스의 섭리에 따라, 보상은 그에 맞게 추가될 테니.]
관리자와 대화를 나누던 도중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은 헤일로가 끼어들었다. 아까 품에 집어넣었던 나뭇잎을 통해서였다. 강신혁은 그 나뭇잎을 꺼내어 지그시 노려보며 대꾸했다.
“돌봐달라는 게 무슨 의미에요? 설마…… 그, 그렇고 그런 의미에서?”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생존한 아이들은 친척관계인 경우가 많다보니, 무리 안에 제 짝이 없어 욕구를 풀지 못하고 있는 아이들도 제법 있거든.]
“그런 지나치게 생생한 상담은 듣고 싶지 않았는걸……."
아직 고1인 자신에게는 과분한 상담이었다. 하다못해 자신이 조금만 더 성숙한 어른이었으면, 아니 지금 좋아하는 사람만 없었어도 못 이기는 척 유혹에 넘어갔을지도 모르는데!
“……일단 방문은 잠가둘까.”
- 5,000HP 보너스!
“고마워요.”
지구인들이 감히 쫓아갈 수 없는 신비로운 미모의 엘프들과 야밤의 데이트를 할 수 있는 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한 대가로 강신혁은 클레어에 대한 순정과 관리자의 호감도를 지켜내는 데에 성공했다.
- 누나 보고 싶어요.
- 바텐더 님의 귓속말 : 얘는 갑자기 뭐래니.
하지만 너무 억울했기 때문에 그걸 티내기 위해서라도 괜히 클레어한테 어필을 한 번 더 해두기로 했다. 클레어는 시원스레 그의 말을 받아넘겼지만 마냥 효과가 없었던 건 아닌 모양이었다.
- 바텐더 님의 귓속말 : 응? 지금 전화 안 되네. 차원 퀘스트 중이야?
- 네.
강신혁은 차원 너머로는 통신이 되지 않는 것을 원망했다.
- 바텐더 님의 귓속말 : 누나한테 말했으면 같이 가줬을 텐데.
- 이번 퀘스트는 혼자만 할 수 있더라고요. 그리고 아마 은아 선배한테 비밀로 둘이서만 차원 퀘스트를 했다는 걸 들키면 장난 아니게 삐질걸요.
- 바텐더 님의 귓속말 : 바보 아냐? 당연히 몰래 해야지. 다음엔 가기 전에 나한테만 말해. 둘이서 여행하자.
애초에 은아도 그를 이끌고 둘이서만 게이트를 전전했으니 쌩쌩이 아니냐며 말을 덧붙이는 클레어의 메시지가 그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문을 잠그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 명심할게요.
- 바텐더 님의 귓속말 : 그래, 어디 다치지 말고 돌아와. 치킨 쏠 테니까. 누나도 신혁이 보고 싶네.
클레어와의 대화를 마친 후 강신혁은 후우, 만족스럽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누웠다. 클레어는 그를 마냥 남동생 같은 존재로만 생각하는지 몰라도, 이런 관계가 유지되는 것만으로도 그에겐 적잖이 감동스러운 일이었다.
“좋아, 힘내자.”
- 몇 시간 전까지 전생의 기억으로 괴로워하시던 모습과는 딴판이시군요.
“네? 그야……."
관리자의 메시지에 살짝 가시가 돋은 것처럼 느낀다면 이상할까. 강신혁은 머리를 긁으며 그녀의 말에 대꾸했다.
“원래 사람이 어른스러웠다 애 같았다 하는 거죠. 같은 일로 심각해질 수도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는 거고……. 그렇다고 아까 느꼈던 그 감정이 가짜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냥 둘 다 제가 갖고 있는 거죠.”
- ……500HP 보너스!
"응?"
방금 강신혁이 대수롭지 않게 한 그 발언은 굉장히 어른스러운 발언이었다는 것을, 그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하하, 역시 모루 영감은 그대로야.]
“그대로라는 말을 하면 또 조금 심정이 복잡해지는데요.”
여태껏 잠잠하다 다시 끼어드는 헤일로에게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며 대꾸하는 강신혁. 헤일로가 말을 덧붙였다.
[아까 했던 얘기로 돌아와서 말인데, 내가 아이들을 돌봐달라고 했던 것은 비단 ‘그런 의미’에서만이 아니야, 영감.]
“그럼?”
[이곳은 많은 것이 부족해. 모루 영감이라면 이들에게 부족한 것을 많이 채워줄 수 있을 것이라고 보네.]
“과연…… 대장장이로서?”
[역시 영감은 똑똑해.]
헤일로의 말에 강신혁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야 돌봐달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제법 시간이 걸릴 텐데.”
[어차피 족쇄를 만들려면 시간이 많이 들 테니, 겸사겸사라고 생각하세나.]
얼추 그럴 거라 생각하고 있기는 했지만 헤일로 이 사람, 일을 생각하는 단위가 강신혁과는 비교도 안 되게 거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신혁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랭크의 기준을 채우고서야 간신히 받을 수 있게 된 퀘스트라 뭔가 싸울 일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가능하면 이곳에서 황룡투기를 다루는 법을 완전히 몸에 익히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그의 중얼거림에 헤일로가 뜻밖이라는 투로 대꾸했다.
[충분히 그럴 기회가 있을 거야. 자네의 몸에 깃든 노룡의 기운을 다룰 기회가.]
“무슨 일이기에……?”
답은 그 다음날 바로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밭을 가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