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 Chapter 22. 헤일로 퀘스트 - 2 >
마이 룸의 정경은 언제나처럼 삭막했다. 다만 딱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점이 있다면, 별 특징도 없는 방 한 구석에 예쁘게 잘린 양갱이 놓인 접시와 함께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이 놓여있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모루의 아내에게 바치는 츠쿠요의 정성. 죽은 이를 위한 몫을 마련하는 것은 지극히 동양적인 예절이었다. 과연 츠쿠요라는 이름값을 하는구나, 강신혁은 우습게도 그런 생각을 했다.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건데 이거 왜 안 식어요?”
- 상태보존 마법입니다. 그 불여우는 공교롭게도 시간과 공간을 다루는 데 능숙합니다.
시간과 공간이라고 하면 보통 마법의 끝판왕으로 여겨지는데, 츠쿠요가 그 두 가지 마법에 능하다는 말을 들으니 어딘가 자연스럽게 납득이 갔다. 그 여자가 두르고 있던 신비로운 분위기만 보아도 그랬다. 아니, 그보다 지금.
“이젠 그냥 대놓고 불여우라고 부르는구나.”
- 더구나 무슨 짓을 했는지 관리자의 힘으로도 떼어낼 수 없게……! 엄연한 침공행위입니다. 페널티를 줄까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요. 당분간은 그냥 놔두죠. 이거…… 나쁜 기분은 안 들어서.”
- ……회원님.
강신혁은 잠시간 김을 피워내는 찻잔과 양갱이 놓인 접시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감히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역시, 모르겠네.”
그가 불쑥 중얼거렸다. 관리자가 즉각 물어왔다.
- 무엇을 모르시겠는지요.
“글쎄요…… 전생을 떠올리는 게 과연 좋은 일이었는가, 새삼 그런 의문이 들어서.”
- 어른스러운 말이군요.
“아뇨, 정반대죠. 그냥 어린애 투정이에요. ……미안해요, 관리자님. 차원 퀘스트, 확인할게요.”
- ……알겠습니다.
강신혁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무너지는 세계]
[미로토즈는 멸망했습니다. 이제 그 세상에 새로운 것은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처 죽지 못한 것들은 아직 그곳에 남아있습니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아있고자 합니다. 내려 보는 자 헤일로는 그들을 위해 손을 빌려주기로 결정했으나,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부족했기에 당신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습니다.]
[당신은 배회하는 거인, 테로타의 발을 묶을 족쇄를 만들어야 합니다. 거인의 발을 묶을 수만 있다면, 나머지는 헤일로가 알아서 해결해줄 것입니다.]
[퀘스트 기한 - 101년 6개월 5일 21시간 40분 56초]
[지구와 미로토즈의 시간비율 - 1 : 1.5]
"와우."
차원 퀘스트는 여러 가지 의미로 강신혁의 기분을 바꿔놓았다. 여태까지 그가 경험했던 차원 퀘스트들도 결코 범상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그가 보고 있는 것처럼 영문을 모를 내용은 아니었는데!
“세상이 멸망했다는 부분만 빼고 아무것도 이해할 수가 없는데……. 어 그러니까, 헤일로가 사는 세상에 대한 부탁이 아닌 건가요?”
- 그렇다고도 할 수 있고 아니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헤일로 님께서 설명해주실 겁니다.
그 외에도 궁금한 점은 있었다. 거인의 발을 묶는 것이 세상의 멸망과 어떻게 연관된다는 것인지, 헤일로가 뭘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 …… 그리고 퀘스트 기한은 지나치게 넉넉한 것에 비해 시간비율은 왜 지구와 별 차이가 없는지!
- 시간비율에 대한 의문에는 대답해드릴 수 있겠군요. 그것은 퀘스트 내용에도 나와 있듯, 이미 이 세상이 멸망을 맞이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 세상에 더 이상 큰 변화는 찾아오지 않습니다. 모두 끝난 것이죠.
“……그렇다면 세상의 멸망의 기준은 대체 뭐죠?”
-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기준으로 삼게 됩니다. ‘근원’이라 불리는 세상의 핵심 에너지가 모두 소모되거나 갈취 당하면, 그 세상에서 더는 새로운 것이 태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명쾌한 기준이었다. 즉 지금부터 향하려는 세상은 이미 근원을 잃고 멸망하여,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낳지 못하게 되었다는 얘기. 굉장히 아득한 차원의 얘기였지만 어쩐지 모르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마도 모루가 품고 있는 원래 세상의 멸망의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키엘론은요? 그 세상도 멸망했다고 하지 않았었나요?”
- 멸망에 가까운 상황까지 몰렸으며, 실제로 스스로를 요르문간드라 칭하는 약탈자들 또한 더 이상 빼앗을 것이 없다고 여겨 그 세상에서 몸을 물렸죠. 그러나 그 세상에는 아직 미약한 근원이 남아있었으며, 그것을 살릴 불씨는 회원님께서 마련하셨습니다.
“……혹시, 밀리아?”
- 바로 그 불여우입니다.
그 말 왜 안 하나 했다.
- 그 여자는 왕실의 후예이며, 세상의 근원과 접촉할 수 있는 권한을 획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잘만 한다면 그 땅에 남아있는 기운을 끌어 모아 다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기반을 다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 결과 다시 요르문간드가 그 세상에 눈을 붙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만…….
“그때가 되면 다시 차원 퀘스트를 내줘요.”
- 회원님의 능력으로 해결이 가능한 일이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차원 퀘스트를 수행하실 때입니다.
강신혁은 굳게 고개를 끄덕이고 차원 퀘스트를 수락했다. 세상을 이동할 때 특유의 느낌이 그를 덮쳤다. 눈을 감았다가 뜨니, 그곳에는 아주 거대한 나무가 서 있었다.
"......응?"
강신혁이 두 눈을 격하게 깜박였다. 올려다본 하늘은 우중충한 붉은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고개를 내리니 그곳엔 하늘과 마찬가지로 죽은 회색의 대지가 펼쳐져 있었다.
오직 그 둘을 잇는 나무만이 푸르렀다.
[나의 친구, 모루. 드디어 와주었는가.]
그 나무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별은커녕 나이도 짐작할 수 없는, 한없이 비인간적인 목소리. 강신혁은 본능적으로 그 나무가 헤일로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헤일로……?”
[모루 영감과 직접 만나게 될 날이 오다니 정말이지 반갑군. 아니…… 아직 직접은 아닌가.]
“하……."
헤일로의 영문 모를 소리에 강신혁은 그저 짧은 한숨을 내쉴 따름이었다. 설마 히어로 유니버스에 나무가 회원으로 소속되어 있었다니!
[난 나무가 아니라네, 영감. 이건 내 본체가 아니라 영혼의 조각을 일부 품고 있는 단말에 불과하니까.]
“본체? 단말……?”
[만져보면 알 테지. 영감, 나를 만져보겠나.]
“영감은 아니지만, 알겠어요.”
강신혁은 헤일로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나무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그에게서 뻗어나간 영력이 헤일로의 거대한 몸통 안을 흐르는 영력과 동조했다.
아니, 동조라는 표현은 우습다. 접촉한 순간 느껴지는 막대한 영력의 흐름에 놀라 엉거주춤하며 물러서다, 간신히 그 실체를 조금 엿보는 데 성공했을 뿐이었다.
헤일로의 말이 맞았다. 이것은 그의 본체가 아니었다. 하물며 생명조차 아니었다.
이것은 무척 거대한 영력의 의사생명체…… 즉 골렘이었다.
“어떻게 이런, 터무니없이 막대한 기운이 흐르고 있는데……."
[이 나무를 단말기로 삼아 기운을 보내고 있을 뿐이지. 이 세상을 조금이나마 더 지탱하고 싶어서 말이야.]
헤일로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의 세상을 지탱하고 있다고, 방금 그는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것도 본체도 아닌 이 나무를 통해!
터무니없는 그 말에 사정을 모르는 이라면 코웃음을 칠 터…… 그러나 그의 기운을 느낀 강신혁은 감히 그럴 수 없었다. 그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영력을 각성하고 여태껏 다뤄오며 적어도 이 분야에서는 자신이 제법 앞선 것이 아닐까, 하는 우습지도 않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지만 헤일로와 만난 덕분에 그 망상을 깔끔하게 폐기할 수 있었다. 히어로 유니버스는 정말이지 괴물들의 집단이었다.
이 나무가 헤일로의 단말이라면 그의 본체는 어디에 있는가. 헤일로는 어떻게 해서 이 세상에 단말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인가. 궁금한 점은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궁금한 점은 이것이었다.
“이 힘이라면 뭐든지 스스로 할 수 있을 텐데 어째서 굳이 나를 부른 거죠?”
[방금 말하지 않았나, 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다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으로 거인을 상대하려다간 금방 세상이 무너져버리고 말 거야.]
"......."
[그렇다고 해서 그 녀석을 방치할 수도 없지. 거인의 발걸음은 지금 이 세상에는 너무 무거워. 앞으로 100년 정도가 더 지나면 녀석의 난동을 이기지 못해 바닥이 무너질 거야.]
설마 세상이 무너진다는 것이 물리적인 이야기일 줄은 몰랐다. 순간 강신혁의 머릿속을 지구평면설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마도 이 세상은 정말로 평면일지도 모른다.
“대체 얼마나 거대한 놈이기에?”
[보여주지.]
강신혁의 눈앞으로 헤일로가 가지 하나를 드리웠다. 가지의 끝부분이 동그랗게 말려 고리를 만들어내더니, 구멍에는 물방울이 맺혔다.
강신혁은 그것이 망원경임을 깨닫곤 눈을 거기에 가져다댔다. 처음엔 초점이 맞지 않았지만 곧 선명한 광경이 눈에 비추어졌다.
그러니까…… 어…… 하늘에서 아주, 아주 거대한 검은 기둥 하나가 천천히 떨어져 내리고 있는 광경이.
“설마.”
[놈의 다리야.]
"......."
거인이라는 말을 듣고 처음 떠올린 것은 판타지 영화에 나오는 6미터 크기의 거인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일본 만화에 나오는 30미터 크기의 거인이었다.
하지만 설마…… 육안에 전부 담지도 못할 만큼 거대한 기둥이 한쪽 다리에 불과하다니.
저 다리만 해도 둘레가 수백 미터는 될 터였다. 길이가 아니라, 둘레가.
그런데 그것을 붙든다고? 농담으로밖엔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서 영감을 부른 거야. 영감이라면 놈의 발을 묶을 족쇄를 만들 수 있겠지.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이 몸으로도 그 녀석을 죽이는 정도는 가능하니까. 어떤가, 모루. 가능하겠지?]
강신혁은 뭔가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다가는 그대로 다물었다. 너무 아득하게 느껴져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입을 뻐끔거리다가, 간신히 질문거리가 떠올랐다.
“저 거대한 놈을 묶을 족쇄라면…… 재료도 특별한 걸 준비해야 할 텐데.”
[물론 준비했지.]
헤일로는 웃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분명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음에도 그 외의 정보는 전혀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사람을 묘한 기분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좀 쉬게나, 영감. 아이들이 영감을 안내해줄 거야.]
“아이들?”
강신혁은 그 말을 듣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머리 위로 나뭇잎이 한 조각 떨어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 나뭇잎이 그의 머리 위로 사뿐히 내려앉는 순간, 눈앞의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숙소야. 아이들에게 얘기해두었으니 그들을 따르면 된다네.]
나뭇잎을 통해 헤일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신혁은 두 눈을 몇 번인가 깜박였다. 머리 위에서 천천히 빛을 발하는 나뭇잎을 들어, 우선 그것을 품에 집어넣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창문 하나 없이 어둑어둑한 벽이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그로마스에도 이 비슷한 느낌의 시설이 있었다. 아마 이곳은 지하겠지. 세상이 멸망하면 어떤 세상이든 인류는 모두 지하로 기어드는 모양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루 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그를 안내해줄 ‘아이들’이 등장했다.
강신혁은 그들을 보며 두 눈을 깜박였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들은 전부 터무니없이 아름다웠으며, 피부가 이 어둠 속에서 스스로 반짝일 만큼 새하앴고, 남녀를 가릴 것 없이 마르고 키가 컸으며, 귀가 무척 길었다.
강신혁은 판타지 소설에서 이런 존재를 무어라 부르는지 알고 있었다.
“엘프?"
“우리 종족을 알고 계신다니 영광입니다.”
개중 가장 앞에 나와 있던 남자가 재차 그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대꾸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세상이지만, 부디 편하게 머무르시기를.”
초인 양성 학교 1학년의 여름 방학.
강신혁은 엘프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