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 Chapter 21. 마지막 휴가 - 3 >
엘레노어는 강신혁이 인벤토리에서 여러 물품들을 꺼내는 것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티팩트 하나에 보관되어 있다고 하기엔 너무나 다양한 물품들이 너무나 많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초인협회에서 정말 확실하게 지원해주는구나…… 큿."
“그럼 전 작업 시작할게요.”
엘레노어가 있지도 않은 협회의 지원을 두고 착각을 하도록 그냥 놔두고 화덕에 융금목 장작(1kg에 8,000HP)을 던져 넣는 강신혁. 일단 불은 피웠지만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는 쉽게 정할 수 없었다.
이만우가 과거 그랬던 것처럼 안장을 만들까도 생각해봤지만, 아직 가죽가공 위주로 작업을 하여 완벽한 아티팩트를 만들어낼 자신은 없었다. 뭣보다 자신의 뜻을 담아내기에 좋은 재료가 없다.
‘베놈 프린세스 소울은 재료와 완성품의 목적이 거의 동일했을 뿐더러 재료의 품질 자체도 터무니없이 높았으니까 생각보다 수월하게 만들 수 있었지만…….'
기간이 한정된 게이트 탐사,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그렇다면 그가 잘 만들 수 있는 금속 제품으로, 그것도 테이밍에 적합한 형태의 물건을 만드는 것이 가장 성공확률이 높을 터였다.
“좋아.”
마음을 정한 그는 인벤토리에 있던 잿빛의 금속덩어리를 꺼냈다. 신은아와 함께 클리어한 게이트 중 하나에서 얻은 ‘로우드 터틀의 배갑(背甲) 파편’이라는 것인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금속질의 등딱지를 갖고 있는 거북이를 죽여서 얻은 전리품이었다.
“구경해도 될까?”
“몬스터들이 덮쳐오지만 않는다면요.”
“아."
강신혁이 워낙 자연스럽게 작업에 돌입하다보니 엘레노어도 그만 여기가 게이트 내부라는 사실을 잊어먹은 모양이었다. 다급히 랜스를 치켜들고 전투 준비를 하는 엘레노어. 그 옆에선 플레임 와이번이 멜로이에게 계속해서 아양을 떨고 있었다.
“아, 또 와."
엘레노어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또 온다니 뭐가? 강신혁은 배갑을 녹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저 하늘 위에서 둥글게 원을 그리며 날고 있는 와이번 무리가 보였다.
“……와이번은 희귀종이었을 텐데요.”
“응, 나도 그랬던 걸로 기억하는데.”
기가 막혀 중얼거리는 강신혁의 말에 대꾸하는 엘레노어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원래 이 게이트는 이렇게 와이번을 사냥하는 게이트가 아닌데.”
“그랬으면 저한테 선배가 진즉 얘기를 해주셨겠죠.”
지속성 게이트에 들어오기 전 사전조사를 하는 것은 필수사항. 당연히 강신혁도 장미정원 게이트에 대한 정보를 그녀로부터 전달받아 확실하게 외워두고 있었다.
장미정원 게이트는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와 간혹 나타나는 돌산을 필드 배경으로 삼는 게이트로, 특정 시간 이상을 움직이다보면 땅에서 움직이는 그레이트 웜이 나타나며 이들을 상대하며 전리품과 경험치를 획득하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지하를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그레이트 웜을 상대하기 위해선 경계능력과 반사신경이 필수적이며, 방어력이 높은 그레이트 웜의 피부를 뚫으려면 상응하는 공격력도 필수.
게이트가 개방된 지 제법 되어 보스(그레이트 록 웜)를 포함해 숨겨져 있던 보물들도 다 털린 게이트지만, 대량으로 나타나는 강적을 상대로 전투능력을 갈고 닦기엔 이만한 게이트도 없었다. 특히나 근거리 전투를 전문으로 하는 기사 계열 초인에게는 말이다.
엘레노어 역시 이 게이트에서 강신혁의 전투능력과 판단력을 확인할 겸,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어 했던 것이리라.
- 쿠르르르르르르!
- 키이이이이이!
“그레이트 웜과의 지상전, 와이번과의 공중전으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숙지하고 있던 장미정원의 정보와는 동떨어져 있었다.
물론 게이트 안에서는 언제든 상정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족히 열 번 이상 클리어되었을 게이트에서 관측되지도 않았던 와이번이 나오는 것은 너무 심한 변화였다.
- 쿠우오오오오오……!
- 구르르르르!
“여, 열 마리도 너모……!”
설령 같은 랭크라고 해도 지상 몬스터와 공중 몬스터의 위협수준은 다르다. 지저를 돌아다니며 인간을 급습하는 그레이트 웜도 무섭긴 하지만 적어도 놈들은 나타났을 때 칼을 휘두르면 맞기라도 하지 않는가.
반면 와이번은 어떤가.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입장에선 아득히 불리하고, 설령 와이번에 타고 요격에 나선다 해도 공중전에 익숙하지 않은 그들이 애를 먹으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음, 일단 진정해 봐요. 아마 괜찮을 테니까.”
하지만 강신혁은 그것을 보면서도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단순한 배짱이 아니다. 당연히, 아까 확인한 자신의 특성의 힘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딱 봐도 여기 있는 플레임 와이번보다 강한 놈은 없어 보이는데. 특성으로 테이밍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위축시키는 거라면 숫자가 아무리 많아봤자 달라질 것도 없고.’
아주 만약에 그의 특성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다면 그땐 잡아버리면 그뿐이다. 투창기도 가지고 있고, 사정권 내라면 번개거미줄과 독 거미줄로 묶어 내동댕이칠 수도 있었다. 무기가 많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천연덕스레 금속을 녹이고 있는 그의 모습에 엘레노어 역시 침착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신혁이 그렇게 말한다면……."
사실 그녀가 당황한 것은 기껏 철저히 준비를 하고 들어온 게이트 안에서 예상외의 상황이 계속 일어나,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강신혁의 안전에 혹여나 문제가 생길까 걱정했기 때문. 그녀 혼자라면 와이번 수십 마리 정도 상대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 쿠오오오오오……!
그때였다. 멜로이의 환심을 사려고 안달을 내던 플레임 와이번이 돌연 고개를 들더니 허공을 향해 큰 울음소리를 냈다. 선회비행 하던 와이번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리더니, 일제히 괴성을 내질렀다.
- 구아아아아아아아!
족히 열 마리는 넘는 숫자의 와이번이 호흡을 맞춰 내지르는 괴성에 강신혁의 귀까지 얼얼해졌다. 그러나 놈들은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그들이 있는 곳을 노리고 일제히 하강해왔다. 날개를 접고 떨어지듯이 수직하강을 하는 것이 멜로이와 완전히 똑같았다.
- 그루루루…….
- 구오오!?
마치 다이빙을 하는 선수들을 평가하듯 엄격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는 멜로이. 차례차례 하강해오던 와이번들은 멜로이의 모습을 발견하곤 차례차례 움찔하며 날개를 펼쳤다. 플레임 와이번이 그런 놈들을 보고 눈을 부라렸다.
- 구오오오오오!
- 쿠아아아!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 주위에 빙 둘러 착지한 와이번들이 조심스럽게 멜로이를 향해 다가갔다. 그런 멜로이를 지키듯이 앞에 나선 것은 바로 플레임 와이번. 와이번들이 그르렁거리며 대치하는 모습을 보며 강신혁은 확신했다.
“혹시 여기 애들 멜로이 빼고 다 수컷인 거 아냐?”
“불쌍해……."
많은 숫자의 와이번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는 것도 나름 재밌었겠지만 지금 상황은 어째 전투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멜로이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가운데, 플레임 와이번을 비롯한 수컷들이 알아서 결투의 장을 만드는 모양새!
“굉장해. 설마 게이트에서 이런 진행이 가능할 줄이야. 아마 테이밍한 암컷 와이번을 게이트 안에 데려오는 게 조건이었겠지, 어쩌면 우리가 숨겨진 공략을 발견했는지도 몰라.”
그 광경을 보는 엘레노어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답지 않게 제법 긴 문장으로 현재 상황을 해석하기까지 했다. 반면 강신혁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게 바로 연상의 매력이라는 건가…… 아니, 미안해 멜로이. 내가 잘못했어.”
-그루루루…….
강신혁은 그의 머리카락을 죄다 뽑아버릴 기세로 물어뜯는 멜로이에게 진심으로 사과해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역시 오래 살아서 그런지 사람의 말을 잘 알아듣는구나. 앞으론 속으로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럼 이제 어떡하지?”
“테이밍 아티팩트를 만들어서 이긴 놈한테 씌우면 되죠. 제일 센 놈을 데려나가고 싶으니까.”
아마 플레임 와이번이 이길 것 같긴 하지만.
강신혁은 혹여나 놈들이 그들에게 위해를 끼치려 들지는 않을까 잠시 경계했지만 녀석들은 오직 멜로이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그도 안심하고 작업을 재개하기로 했다. 어느 정도 녹았으니 이제 형태를 잡을 차례였다.
- 깡! 깡! 깡!
“화덕 때문에 상당히 더울 거예요. 조금 떨어지는 게 나을 걸요.”
“보고 있을게.”
“음…… 뭐, 네.”
다들 뭐 볼 게 있다고 땀 흘리면서 작업하는 걸 지켜본단 말인가. 강신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엘레노어가 굳이 그의 곁에 붙어있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녀의 친구인 이나희에게서 들은 말이 원인이었다.
‘쇠를 두드리고 있을 때는 연상처럼 보여서 조금 멋지다고 했었지. 나희가 남자 얘기를 그렇게 즐겁게 하는 건 처음 봤어.’
이나희는 예전에 말을 가볍게 했다가 남자가 끈질기게 달라붙은 경험이 있어 어지간하면 자기 입으로 남자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그런 그녀가 강신혁에 관해 소극적으로라도 호의적인 말을 했다는 것은, 사실 그녀는 이미 강신혁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갖고 있다는 얘기! 대체 강신혁이 야금을 하고 있을 때 어떻기에 콧대 높은 이나희가 호감을 품게 되었는지 궁금했었는데, 때마침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사실 이나희는 이나희대로 ‘평소엔 남자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던 엘레노어가 후배 얘기를 하는 시점에서 이건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녀들은 서로 완전히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 깡! 깡! 깡!
그리고 직접 보게 된 강신혁의 대장일은…… 과연, 이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을 만큼 훌륭했다. 똑바로 작업물에 시선을 집중하며, 한결같은 표정으로 쇠를 두드리고 있는 모습에서 평상시 모습과는 사뭇 다른 진중한 매력이 묻어났던 것이다.
‘신기하네. 진짜 연상처럼 느껴져.’
대장일에 몰입한 나머지 저절로 특성이 발동하여, 짙은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강신혁의 두 눈. 엘레노어는 규칙적으로 내리쳐지는 망치질 소리를 들으며 그 눈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언제까지라도 보고 싶을 만큼 차분해지는 모습이었다.
‘응, 하지만 역시 검을 잡고 있을 때가 더 멋지려나.’
강신혁의 색다른 모습을 충분히 즐기기는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다. 아마 자신이 장인이 아니기 때문일까. 하지만 반대로, 이나희 역시 강신혁이 휘두르는 검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터였다.
엘레노어는 비겼다고 생각하며 가볍게 혀를 차다가, 대체 뭐가 비겼다는 것인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했다.
시간이 제법 흘렀다. 주위를 경계해야 할 엘레노어가 강신혁의 작업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으니 큰 일이 났어도 이상할 게 없었지만, 와이번들이 한 군데 모여 난리법석을 떤 덕분인지 그레이트 웜은 나타날 기미도 없었다.
매력적인 암컷을 차지하기 위한 수컷 와이번들의 경쟁이 뜻밖에도 강신혁이 작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 그 덕에…… 그들이 게이트에 입장한지 네 시간이 지난 시점에, 강신혁은 드디어 목적했던 물건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록월 초커]
[A랭크]
[특수능력 : 조련, 보호]
*조련 : 이 초커를 목에 차고 있는 대상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 단 대상은 몬스터에 한정되며, 마땅한 능력을 증명하지 못하면 조련이 거부될 수 있다.
*보호 : 조련의 대가로서 주어지는 능력. 전신을 경화시켜 충격으로부터 보호한다.
[역사를 새로 쓰는 대장장이가 간단하게 만들어낸 작품. 자신의 격을 증명한 자만이 사용할 수 있다. 사용자를 바꾸기 위해선 초커 중앙부의 마석을 교체해 새로운 사용자의 피를 묻힐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단단한 잿빛의 금속 초커 목걸이. 그리 크지 않은 크기였지만 사실 제작 과정에서 상당한 양의 등딱지를 뭉쳐 압축시켜 만들어낸 물건이었다.
그리고 중앙부에는 사용자 인증 용도로 그의 피를 묻힌 마석을 삽입했다. 강신혁 혼자 쓸 물건이라면 사실 필요 없는 과정이었지만 기사단에서 대대로 물려주기 위해선 필수적인 기능이었다.
“이 자리에서 A랭크 아티팩트를!?”
“하하.”
강신혁도 될 것이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설마 첫 시도로 바로 목표했던 물건을 완성시킬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아티팩트가 무엇인지,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하는 것인지 그가 서서히 깨달아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한계는 커요. 아마 S랭크쯤 되면 조금도 통하지 않을 테고, 애초에 이쪽에 호감이 없는 상태면 A랭크 몬스터라도 구속하기 힘들 겁니다.”
“대신 힘의 차이를 입증하고 나면 순순히 따라준다는 거구나.”
“맞아요. 몬스터볼 같은 거죠.”
- 직관적인 회원님의 설명에 2,000HP 보너스!
때마침 플레임 와이번이 마지막 도전자를 너덜너덜하게 패고는 놈의 등 위에서 승리의 포효를 내지르고 있었다. 강신혁은 씩 웃으며 놈에게 손가락을 까딱여보였다.
- 쿠오오오오오
무척 못마땅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플레임 와이번. 녀석의 목에 초커를 달자, 놈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의 뺨을 핥았다. 순종의 뜻이겠지만 무척 따가웠다.
“된 거야?”
“됐어요.”
강신혁은 마치 오닉스와 처음으로 연결됐을 때처럼 자신과 플레임 와이번 사이에 연결고리가 생겨나는 것을 느꼈다. 아마 마석을 교체하면 이것을 다른 이에게 양도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터다.
“그러면 이제.”
강신혁은 플레임 와이번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주고는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 너덜너덜해진 채 바닥을 구르고 있는 와이번들의 모습이 있었다.
“숨겨진 공략을 한 번 제대로 해볼까요.”
“응? 얘네 죽이면 끝이지?”
“그럴 리가 없잖아요. 선배는 가끔 무서운 소리를 하네요.”
강신혁에겐 다른 생각이 있었다.
어째서 이 게이트에 장미정원이라는 이름이 붙었는가를 생각해보면 지극히 간단했다.
아마도 이 게이트는 제대로 클리어 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리라.
아마도 와이번들은, 잡아야 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잡아야 할 것은 따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