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 Chapter 21. 마지막 휴가 - 2 >
한 가지 구원이 있다면 약속장소가 다른 사람들의 이목에 잘 안 뜨이는 장소라는 것이었다. 왜냐면, 지금 신영에 있어서 비룡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모르는 이는 없었으니까.
“설마 우리 얘 타고 가요?”
- 쿠르륵!
비룡기사단을 상징하는 와이번, 멜로이(암컷)가 강신혁의 뺨을 핥으며 기분 좋게 울었다.
와이번의 혀는 무수히 많은 돌기가 솟아있는 만큼 무척이나 까칠까칠해 체력 스테이터스가 낮으면 피부가 그대로 갈려나가는 수가 있었지만 강신혁의 체력은 신은아와의 집중훈련 덕에 A+랭크까지 상승해 있었던 덕에 다행히 무사할 수 있었다.
“응. 실습은 몰라도 방학 중 개인과제에는 얼마든지 대동하는 것이 가능해.”
멜로이의 등에 타고 나타난 엘레노어가 멜로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그녀는 단정한 드레스 셔츠에 방어구 용도의 가죽조끼, 가죽바지를 입고 등에는 비룡기사단의 단장 전용 망토를 두르고 있었는데, 게임 속에 나올 법한 기사의 느낌과 현대의 패션이 언밸런스하게 뒤섞인 느낌이 정말이지 장난이 아니었다. 무척 매력적이었지만.
“과제…… 일단 과제였구나. 대체 누가 과제로 A랭크 던전을 돌아요?”
“이것도 학교 눈치를 봐서 일단 낮춘 거야. 이 이하로 가면 아예 우리한테 도움이 안 되잖아.”
“글쎄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강신혁은 그녀의 말에 모르는 척을 하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참고로 1학년의 평균은 D+랭크, 역대 신인왕의 평균 랭크는 B랭크였다.
신영의 우수함을 잘 알게 해주는 지표지만, 보통 B랭크 초인이 - 그것도 초인교육을 모두 이수하지도 못한 초짜가 - A랭크 게이트에 들어가 봤자 순살 당할 뿐이었다.
“숨길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데. 무척 멋졌어, 죽음의……."
“그럼 출발하죠!”
강신혁은 그녀의 말을 다소 억지로 끊으며 멜로이의 등에 올랐다. 일전 강신혁이 개조한 바 있는 안장은 두 사람 정도라면 넉넉히 타고도 남을 공간이 있었다.
“내 허리 잡아.”
“제 균형감각이 그렇게 형편없진……!?”
엘레노어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그렇게 대꾸하려던 순간, 멜로이가 수직으로 상승했다. 강신혁은 그대로 고꾸라지기 직전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전신을 두들기는 바람이 몹시 상쾌했다.
“안 잡아도 되겠어?”
“이래봬도 신인왕이거든요? 이 정돈 여유예요.”
사실 S랭크의 윈드 마스터리가 없었더라면 제법 아슬아슬했을 것이다. 강신혁은 자신의 몸 주위를 휘덮는 기류를 조절하며 자세를 바로잡고는, 상공 100미터 이상 높이로 올라와 비행을 시작하는 멜로이의 등을 두들겨주며 엘레노어를 살짝 째렸다.
“솔직히 말해 봐요. 카렌이 이렇게 하라고 시켰죠.”
"응."
엘레노어는 정말로 솔직했다. 그는 카렌에게 나중에 각오하라는 메시지를 보내두었다.
“미인계를 구사할 대상은 제가 아니라 더글러스 페인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 사람은 싫어.”
“손만 살짝 내밀어주면 알아서 뭐든 할 텐데요.”
“그 사람이랑 손잡기 시로.”
“에라 나도 모르겠다.”
출발할 때 모습이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았기를 기도할 따름이다. 강신혁이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중에도 멜로이는 하염없이 창공을 가르고 비행했다. 강신혁은 문득 궁금해져 물었다.
“와이번 덩치가 보통이 아닌데, 이렇게 비행하고 있으면 문제되는 것 아녜요?”
“문제없어. 비행허가는 받아놓고 있으니까.”
“비행허가!?”
듣자하니 아티팩트, 마도구, 그 외 테임드 몬스터를 이용한 비행에는 국제면허가 필요하며, 그 면허만 있으면 간단한 사전신고를 해두는 것으로 얼마든지 비행할 수 있다고 한다.
“일일이 사전신고를 하는 건 귀찮다고 대충 넘기는 사람들도 많지만 딱히 문제되지는 않아. 그래도 우리는 학생이니까."
“특히 법을 준수해야 된다 이거죠.”
"응."
미리 얘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다. 강신혁은 푸른 소에 관해서도 신고를 하고 면허를 따야 하는 것인가 고민했지만 우선 관두기로 했다. 그 녀석을 그대로 타고 다닐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푸른 소를 어떻게 개조해야 강하고 멋지다고 온 동네에 소문이 날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자니 엘레노어의 침착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닿았다.
“아, 이제 곧 도착이야.”
- 그루루루루!
멜로이가 힘차게 울며 하강을 개시했다. 날개를 접고 수직으로 멋지게 내리꽂히는 그 모습은 마치 한 줄기의 뇌전과도 같았다!
“이 녀석 각도에 엄청 신경 쓰네!”
“허리 잡을래?”
“글쎄 괜찮다고요!”
게이트가 육안으로 확인 가능할 때가 되자 멜로이는 몸을 젖히고 날개를 펼치며 순식간에 감속했다.
녀석이 사뿐하게 착지하자, 근처에서 게이트를 지키고 있던 검은 옷의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경례를 올려붙였다. 그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전형적인 포시 악센트(posh accent)의 영어였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하!”
“신영의 기사학과 2학년생 엘레노어 R. 알제입니다.”
멜로이의 등에서 뛰어내린 엘레노어가 전하라는 호칭을 화려하게 무시하며 한국어로 대꾸했다. 그 말에 한 순간 당황하더니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경직되는 남자. 강신혁은 둘 다 못 들은 척 해주기로 했다.
“가자.”
“네."
허가증을 꺼내 바리케이드를 여는 엘레노어의 뒤를 멜로이의 고삐를 잡은 강신혁이 따랐다. 남자는 강신혁의 모습을 보곤 ‘전하께서 남자를!?’따위의 말을 지껄이며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강신혁은 살짝 불안해졌다.
“혹시 제가 노려지는 건 아니겠죠.”
“중세도 아니고, 공주의 남자친구 정도로 호들갑을 떠는 사람은 없어.”
강신혁은 엘레노어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의 의미를 깨달은 엘레노어는 뒤늦게 얼굴을 붉히며 대꾸했다.
“네가 내 남자친구로 보여도 딱히 널 노리지는 않을 거라는 뜻이엇소.”
“……그럴 수는 있겠죠.”
하지만 어쨌든 강신혁 한 명만 데리고 던전에 들어가는 것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 그녀 스스로도 깨닫고 있다는 뜻이렷다.
강신혁은 처음 시상식 때 그녀를 보고 느꼈던 고고함이나 강직함 따위의 인상이 눈에 녹듯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 여자는 그냥 허당이었다.
“드, 들어가자.”
- 키르르륵!
그녀는 강신혁의 손을 다소 억지로 잡아끌며 게이트에 진입했다. 게이트 이름은 [장미정원(A)], 미리 보고를 들은 대로 하늘이 있어 와이번도 활동이 가능한 곳이었다.
“멜로이, 부탁해.”
- 키르르르!
게이트에 들어오자마자 우선 멜로이가 혼자 하늘로 날아올랐다. 보통 와이번은 B랭크부터 시작인데, 멜로이는 와이번 중에서도 강한 개체인 만큼 A급의 게이트 안에서도 문제없이 활동할 수 있었다.
“전투는 이대로 하실 건가요? 멜로이 등에 안 타고?”
“매력적으로 들리는 말이긴 하지만.”
엘레노어가 작게 웃었다.
“멜로이와는 내년 말에는 헤어져야 하니까. 기승전투는 남들 앞에서 보여줄 수 있는 만큼만 연습하고 있어.”
“과연.”
와이번은 비룡기사단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 대대로 단장에게 전해지는 만큼 언제까지고 함께할 수는 없다. 강신혁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안장을 고치면서 테이밍용 아티팩트를 어떻게 만드는지 작은 깨달음을 얻었었는데.’
그 후로 워낙 다른 만들 것들이 많아 잊어먹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슬슬 오닉스한테도 뭔가 장비를 만들어주고 싶기도 했고, 연구를 시작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일단 헤어지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연습해보죠.”
"......?"
강신혁의 제안에 엘레노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곧 그의 말의 의미를 깨닫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이번을 테이밍하겠다고?”
“해보기 전까진 모르지만요. 그리고 새로운 와이번을 찾아내야 한다는 문제도 있어요.”
와이번은 그리 흔한 몬스터가 아니었다. 동급 몬스터 중에서도 유독 강하고, 빠른 창공의 지배자. 그런 녀석들이 넘쳐났으면 지금쯤 지구의 비행기는 전멸이다. 다행히도 놈들은 모든 개체가 엘리트까지는 아니어도 충분히 희귀한 취급을 받는 존재였다.
“그러니까 그 문제는 일단 어디까지나 가능성이 있다 정도로 알아두시고……."
“어……."
“네?”
엘레노어가 이상한 목소리를 내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따라 시선을 하늘로 옮긴 강신혁의 두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멜로이가 그들을 향해 빠르게 날아오고 있는 것은 그렇다 쳐도, 그 뒤를 따라 날아오는 다른 무언가가.......
“……저기 있는데. 와이번."
“그러게요……"
멜로이의 뒤를 따라 멜로이보다 몸집이 더 큰, 붉은 피부를 지닌 와이번이 날아오고 있었다. 아니, 기껏 와이번이 희귀하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멜로이가 위험해. 구해야겠어.”
“잠깐만요.”
엘레노어가 자신이 착용하고 있던 팔찌에 손을 뻗어 그 안에서 거대한 랜스를 끄집어냈으나, 강신혁이 그런 그녀를 말렸다.
“공격을 받고 있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제가 알기로 붉은 가죽은 플레임 와이번의 상징인데, 불을 뿜고 있지도 않잖아요.”
“그러면?”
“곧 알게 될 것 같은데.”
- 쿠르르르르르르르!
강신혁이 말을 흘린 직후 멜로이가 수직으로 하강하여 강신혁의 등 뒤로 착지했다. 슬며시 강신혁에게로 다가붙는 것이 마치 그를 방패로 삼아 숨는 모양새였다.
- 쿠오오오오!
반면 멜로이를 쫓아온 붉은 가죽의 비룡…… 플레임 와이번은 그것을 보더니 짜증스레 울며 뒤따라 착지했다. 강신혁을 향해 강하게 한 발을 디디며 노란 두 눈을 부라리는 플레임 와이번. 그러나 강신혁이 째려보자 녀석은 금방 움츠러들었다.
- 쿠오오오…….
“굉장해.”
“그러게요. 저 녀석 능력이면 저랑 한 번 해볼 만한 것 같은데.”
플레임 와이번은 와이번 중에서도 특히나 강한 분류에 속했다. 여태껏 발견된 플레임 와이번의 최소 랭크는 A-. 하지만 이 녀석이라면 A랭크를 넘어 A+랭크까지도 노려볼 수 있을 듯했다. 즉 강신혁과 능력 면에서 그렇게까지 차이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곧장 쫄아버리네.”
- 쿠오오오.
강신혁이 손을 뻗자 녀석은 순간 찔끔하더니, 이윽고 순순히 고개를 낮추어 순종했다. 그것을 보며 강신혁은 비로소 확신했다. 이전 멜로이를 대상으로도 같은 경험을 했기에 바로 납득할 수 있었다.
‘내 특성 이름에 용이 들어가는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던 거야.’
가이아 시스템의 설명이 불충분한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자신의 특성의 숨겨져 있던 능력을 찾아내고 개발하는 초인들의 얘기도 질릴 정도로 들었다.
당장 강신혁 자신만 해도 금안의 환룡을 제작에 써먹는 등 몰랐던 면모를 발견해내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용족에 대한 호감도…… 혹은 지배력을 높여주는 뚜렷한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강신혁은 혹시나 금안의 환룡의 진화의 조건 중 남은 한 가지가 이것이 아닐까 싶어 가이아 시스템의 메시지를 가만히 기다렸으나 특성이 진화하는 일은 없었다. 아무래도 이건 금안의 환룡에 당연히 딸려있는 부수효과인 모양이었다.
“역시 비룡기사단의 단장은 내가 아니라 네가 되어야 해.”
“아, 전 곧 퇴부할 거라 괜찮아요.”
강신혁과 플레임 와이번이 접하는 장면을 영화라도 보듯이 멍하니 바라보던 엘레노어가 문득 내뱉은 말에 강신혁이 단호히 대꾸했다.
엘레노어의 두 뺨이 코앞에서 보면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미미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강신혁의 태도가 철벽같았으므로 곧 포기하고 화제를 전환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어떻게 하지?”
- 쿠오오오오오.
- 그루루루!
플레임 와이번은 강신혁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어떻게든 멜로이에게 접근하려 하고 있었다. 반면 멜로이는 강신혁의 등 뒤에 숨으며 녀석을 경계하는 것이, 꼭 동네 놀이터에 나와 처음으로 만난 남자애를 경계하며 아빠 등 뒤에 숨는 딸 같았다.
“아니 그냥 그 그대론데.”
“멜로이는 올해 몇 살일까.”
“비룡기사단 결성 당시에 한 살이었다 쳐도 지금 우리들보다는 나이가…… 아니, 미안해 멜로이.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강신혁은 그의 머리를 무는 멜로이에게 정중히 사과하고는 눈앞의 플레임 와이번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정중히 따님을 소개시켜달라고 고개를 숙여보였다.
“이대로 데리고 나갈 순 없겠죠.”
“테이밍이 되지 않은 몬스터는 게이트 밖으로 데려갈 수 없어. 신혁, 테이밍 있어?”
“없어요.”
아마 지금 저놈의 상태는 테임드가 아닐 것이다. 그저 강신혁을 자신보다 상위의 존재로 파악하고 예의를 갖추고 있을 뿐. 강신혁과 떨어지면 바로 난리를 피울 테고, 그런 녀석을 멋대로 게이트 밖으로 데려나갈 수 없다.
“그렇다고 잡아버리는 것도 좀 아닌 것 같죠.”
“이 녀석을 비룡기사단으로 데려가면, 내가 멜로이를 데리고 졸업할 수도 있을 거야.”
“그럼 남는 방법은 하나뿐이네.”
강신혁이 손을 뻗자, 그 자리에 간이 모루와 화덕이 튀어나왔다. 이런 일도 있을까 해서 준비해두고 있던 것이었다.
“지금부터 테이밍 용품을 만드는 수밖에.”
이렇게 해서 단 둘의 게이트 탐험은 극적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