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 Chapter 20. 특무부의 비밀병기 - 5 >
푸른 소가 완전히 잠잠해졌다. 녀석의 체내에서 떠돌던 푸른빛도 은은해져, 전투 당시가 활성화 상태였다면 지금은 명백한 비활성화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몬스터가 아니야?”
“네. 아티팩트예요.”
“응…… 하긴, 그도 그렇구나.”
강신혁의 짧은 설명을 들은 신은아가 납득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어쩐지 전투력 수준이 낮은 세상인 것치고는 묘하게 파수꾼의 수준이 높다고 생각했거든.”
파수꾼. 아마도 멸망의 파편을 지키고 있는 몬스터를 이르는 말일 것이다. 강신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물었다.
“이 녀석이 나타났을 때 당황했던 것도 그 때문이죠?”
“응. 비석의 기록을 읽어보면 분명 이 사람들에겐 그 정도 수준의 몬스터를 테이밍할 능력이 없었어. 그래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S랭크에 준하는 몬스터가 나타나서.”
“S랭크인가. 그야 흠집도 못 낼만 하네요.”
실제로 신은아의 손아귀에는 땀이 흥건했다. 자신의 실수로 강신혁이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 나머지 크게 긴장했던 것이다.
물론 그녀의 능력이라면 그가 죽기 전에 얼마든지 푸른 소를 막아낼 수 있었겠지만, 그래도 순간적으로나마 그를 위험에 처하게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교만하면 안 되는데, 또 방심했네.”
“괜찮아요. 몬스터였던 것도 아니고. 애초에 이 녀석의 영력이 아니었으면 여길 찾아내지도 못했을 테니까 결국 이렇게 될 예정이었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물론 멸망한 세계의 당사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그들조차 푸른 소를 완벽히 제어하지 못했는데 설마 이곳을 찾은 강신혁이 푸른 소의 소유권을 손에 넣을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아, 그러고 보면.”
강신혁은 얌전해진 푸른 소의 이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 겉으로만 보면 골렘 같은 몬스터로 보이지만 이 녀석은 엄연한 아티팩트. 그렇다면 정보를 감정할 수도 있어야 할 터였다.
본디 녀석의 수준이 높아 강신혁의 감정이 통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소유권을 인정받은 덕분인지 어떻게든 알아낼 수 있었다.
[푸른소]
[SS-랭크]
[특수능력 - 낙뢰, 섬전, 뇌신]
*낙뢰 - 적에게 번개를 떨어트린다. 하늘 아래에서 시전할 경우 위력이 배가되며, 우천 시에는 또한 배가된다.
*섬전 - 벼락과 같이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 영력을 소모해 그 속도를 더할 수 있다.
*뇌신 -벼락으로 벼린 몸. 매우 단단해지며, 뇌전에 대한 완전내성을 획득한다. 외부의 기운을 흡수해 스스로를 회복한다. 뇌전을 받아들일 경우 특히 단단해지고, 강화된다.
[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벼락폭풍에 내던진 신수가 새로 거듭난 모습. 오랜 세월이 흐르며 여러 세상을 방랑하고, 분수에 맞지 않는 이들의 손에서 구른 탓에 능력이 대폭 감소했다. 영력을 다루는 대장장이가 오랜 세월에 걸쳐 기운을 불어넣고 보수하지 않는 한 원래의 능력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마치 강신혁, 아니 모루를 정확히 집어 지명하는 듯한 문구가 떠올랐다. 아니, 어쩌면 강신혁이 감정했기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일지도 모르지.
그는 시험 삼아 푸른 소에 영력을 불어넣었다. 푸른 소의 눈동자를 대신하고 있는 푸른 스파크에 조금 힘이 더 들어갔지만, 역시나 그 정도로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수리를 해주려고 해도 어차피 전투로 흠집도 안 났고.”
강신혁은 새삼 자신이 정면으로 이 녀석을 이기려고 했던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것을 가능케 할 것 같은 신살검의 사기성 또한 새삼 깨달았다.
- 쿠우우우.......
강신혁의 영력이 마음에 들었는지 얌전한 울음소리를 뇌는 푸른 소. 그것을 인벤토리에 넣으려 했더니 별 어려움 없이 들어갔다.
“고마워요, 선배 이렇게 좋은 물건을 얻게 될 줄은 몰랐는데.”
“S급 게이트를 단독 토벌해도 그렇게 좋은 아티팩트는 못 얻어. 할부지 능력 덕분에 얻었을 뿐이야.”
원래였다면 게이트의 수준에 비해 명백히 높은 보스에게 좌절해 도망치거나, 죽거나, 혹은 토벌한다고 해도 푸른 소가 남긴 파편으로 만족해야 했을 것이다. 신은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꾸하곤 결계 중앙으로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공동 중앙에 작은 돌멩이가 떠올라 있었다. 그것은 마치 공동을 둘러싸고 있던 비석을 작게 압축해놓은 듯했다.
“압축한 게 맞아. 모든 정보가 여기 들어가 있어. 멸망의 파편은 대개 이렇게 생겼어. 세상이 다른데 어째설까.”
그녀가 멸망의 파편을 회수하자, 공동 전체…… 아니, 게이트 전체에 둔중한 소리와 함께 진동이 퍼졌다. 강신혁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 게이트 [벨라토스(A+)]가 클리어되었습니다. 게이트가 소멸합니다. 게이트 내부의 모든 이를 외부로 배출합니다.
“아."
강신혁은 그것을 보고 짧은 감탄사를 냈다.
“지속성 게이트라면서요.”
“보스가 잡히지 않았는데도 폭주하지 않고 오랜 세월 유지되는 걸 보고 다들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아니었네.”
그저 처음부터 폭주하지 않게끔 강제로 안정화시킨 게이트였을 뿐이다. 왜? 이 게이트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멸망의 파편을 다른 세상에 전하는 것이었으니까!
“이거, 우리가 한 게 들키면 대형사고 일어나는 거 아녜요?”
“할부지가 원하면, 감출게.”
신은아가 그렇게 말하며 멸망의 파편을 세게 쥐었다. 금방이라도 깨져나갈 것 같은 모습에 강신혁은 다급히 소리쳤다.
“아니, 괜찮아! 괜찮으니까, 은아…… 선배가 주도해서 처리한 걸로 하죠. 제 존재가 감춰진다면 좋겠지만 이미 우릴 본 사람도 있으니까…… 그렇지, 신인 교육을 나왔다가 우연찮게 게이트의 비밀을 발견해서 보스를 토벌했다는 식으로.”
사실 그는 그 말을 하면서도 은아가 반발하겠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강신혁을 띄우려 안달이 난 그녀가 실제로 그가 세운 공적까지 감추자는 제안에 긍정적인 반응을 하는 모습이 도저히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그녀를 설득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다시 한 번.”
강신혁을 빤히 바라보는 신은아의 두 눈이 찬란한 황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다시 한 번만 말해줘.”
“으, 응?”
“은아 선배라고.”
“어, 아니 그건.”
사실 신은아와 함께 행동을 하다 보니 전생의 이미지가 일부 겹쳐진 나머지 모루가 그랬던 것처럼 스스럼없이 이름을 부르게 되었을 뿐이고, 뒤늦게 그것을 깨닫고 정정하려다 보니 호칭이 겹쳤을 뿐이다…… 라는 설명을 구구절절이 하기에는, 신은아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음...... 은아 선배?"
“좋아.”
“뭐가?”
“앞으로는 그렇게 불러줘."
“……공석에서도?”
"응."
확실히 ‘신은아 선배님’이나 ‘선배’보다는 훨씬 친근감이 느껴지는 호칭이기는 했다. 강신혁은 약간의 떨떠름함을 느끼면서도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럼…… 알겠어요, 은아 선배.”
“좋아.”
대체 뭐가 좋다는 것일까, 얘는 정말 미스터리의 극치라니까……. 강신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고개를 들었다.
어느덧 자신의 몸을 휘감는 압력이 느껴졌다. 게이트 밖으로 쫓겨나는 순간. 그는 자신이 가면을 쓰고 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가능하면 이 자리에선 그대로 빠져나가죠.”
“물론. 다음 게이트로 가야 하니까.”
그러고 보니 그랬었다. 이 게이트는 강신혁의 실력을 측정하기 위해 찾아왔을 뿐이었던 것이다! 너무 농밀한 경험을 한 나머지 신은아와 함께하는 게이트 탐색이 끝났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자신을 외부로 추방하려는 게이트의 압력에 몸을 내맡기며, 강신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데이트’라느니 ‘텐트’라느니 이상한 말을 지껄이기 시작하는 신은아를 향해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래도 일단 위에 보고는 해둬요.”
“응, 문자로 할 거야. 30자 정도로 간추려서."
“적어도 100자로 합시다?”
"응."
@@@
강신혁의 실력을 대략적으로 파악한 신은아는 꼬박 일주일 동안 강신혁을 데리고 온갖 게이트를 순회했다.
강신혁은 일주일 동안 집중적으로 게이트를 탐사할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도 ‘매일 밤마다 한다는 뜻이구나’ 정도로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신은아는 후배를 교육한다는 명목으로 아예 일주일치 일정을 잡아놓고, 그 기간 내내 강신혁과 함께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응, 끝. 이 정도면 초인협회 특무부 대원으로서 부족함은 없어.”
“지쳤다……."
신은아에게서 끝이라는 말이 나온 그 순간 강신혁은 벽에 등을 기대고 주르륵 미끄러졌다.
지난 일주일 동안 족히 열 개가 넘는 지속성, 단발성의 흡수형, 방출형 게이트를 번갈아 체험한 끝에 협회로부터 보고가 들어온 A랭크의 이레귤러 게이트의 위치로 곧장 공간이동, 강신혁 혼자 그것을 처리하게끔 한 후에야 간신히 듣게 된 말이었다.
“이걸로 단순한 능력자와 초인은 다르다는 걸 알았지?”
그 말은 능력자가 넘쳐나게 된 이 세상에서, ‘능력을 각성한 순간부터 초월적인 능력을 갖게 되는 이들이 어째서 굳이 초인양성학교 같은 곳에 소속되어 시간을 낭비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그대로 관통하는 한 마디였다.
그저 강한 힘을 휘두르고 있을 뿐이라면 초인이 아니라 단순한 맹수, 아니, 그것도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위험물에 불과하다.
진짜 초인은 자신의 적이 무엇인지 명확히 파악하고, 자신이 지켜야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게이트 안에서의 행동수칙을 철저히 몸에 익히며, 온갖 상황에 대처하는 마음가짐과 그런 상황을 준비하는 요령을 가져야만 한다.
지난 일주일간 강신혁이 배운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아니, 아마도 그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강신혁은 눈을 지그시 뜨며 그녀에게 말했다.
“단순한 초인과 특무부 대원은 또 다르다는 것도 알았는데요.”
“응, 그걸 알았으면 됐어. 역시 할부지야.”
방긋이 웃으며 말하는 신은아.
외모 하나는 한국 초인 중 원탑이라는 얘기가 있는 만큼(까딱하면 한국 원탑이었다.) 그녀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그 미소 한방에 녹아웃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눈부셨다.
그러나 그녀의 본성을 잘 알고 있는 강신혁은 볼을 약간 붉히면서도 맥없이 반박할 뿐이었다.
“게이트 주위에 사람들 있으니까 할부지라고 하지 마……."
“결계 쳐놨으니까 괜찮아. 아무도 못 보고 못 들어.”
“그런 문제가 아니거든? 요?”
뾰로통한 표정으로 반문하는 강신혁을 그대로 깨물어먹고 싶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신은아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일주일 동안 고생했어. 호텔 준비해놨으니까 가서 쉬자.”
“아니, 기숙사 가서 잘 건데.”
"우."
자신의 제안을 싹둑 자르는 강신혁의 모습에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 신은아. 하지만 강신혁은 그녀의 꼬임에 넘어가줄 생각이 없었다. 안 그래도 지난 일주일, 쉬는 동안 기회만 있으면 달라붙으려 드는 통에 그가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 하는 짓은 하나같이 귀여웠지만요.
말 그대로였다. 무릎을 베고 자게 해달라든가, 자장가를 불러달라든가, 밥을 먹여달라든가. 전부 아이가 부모에게 해달랠 만한 행동이었다.
“은아 선배는 성인이잖아요? 어리광에선 졸업해야죠.”
“그래도 할부진데.”
“그래서 조금 받아줬잖아? 하지만 언제까지고 받아줄 순 없어.”
신은아는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그렇다. 강신혁이라고 전생의 영향이 없는 것이 아닌지라 마냥 신은아를 냉정하게 떨쳐낼 수 없었고, 결국 어리광을 조금씩은 받아줬던 것이다.
그녀도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를 호텔로 끌고 가려는 것은(말만 들으면 보다 흉악한 무엇인가였다.) 포기했는지 어깨를 축 늘어트린 그녀는 이윽고 그의 옷자락을 살며시 잡아당기며 물었다.
“그럼 뽀뽀는?”
"......."
“고생했으니까 뽀뽀."
한 손으로는 강신혁의 옷자락을 붙들고, 한 손으로는 자신의 뺨을 톡톡 두들기는 신은아의 표정은 무척 귀여웠다. 하지만 어째설까, 그 모습은 할아버지에게 뽀뽀를 조르는 손녀딸보다는 남자친구에게 키스를 조르는 여고생처럼 보였다.
‘판정은?’
- 사형입니다.
‘판결 말고 판정이요.’
- 사형입니다.
관리자는 단호했지만 강신혁은 그녀가 바라는 대로 해주기로 했다. 이것이 그녀가 제시한 타협선인 것이다. 강신혁 안의 모루는 이것까지는 봐줘도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신은아의 매끈한 뺨에 가볍게 입술 흔적을 남겼다. 담백한 마찰음이 났다.
“이걸로 됐어?”
“으, 응. 아니, 그게.”
신은아의 뺨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가 순순히 해줄 줄 몰랐던 것이겠지, 두 손을 파닥거리며 당황스러워하더니, 이윽고 ‘먼저 갈게!’하고 뾰족하게 외치고는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 사형. 사형. 사형.
“진정해 봐요.”
강신혁은 자신의 코에 남는 신은아의 향수 냄새(감귤 향이었다.)를 아련히 맡으며…… 어떤 종류의 위화감을 느꼈다.
모루와의 동화율이 높아졌기에 알 수 있었던, 지극히 치명적인 위화감이었다.
‘혹시…… 은아 선배.’
아니, 아닐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설마 그렇게까지 삽을 푸는 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그래도 설마.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돌아가죠.”
- 회원님께선 ‘그럴 리가 없지’라는 발언에 따른 사건 발생확률의 변동 개념을 알고 계십니까?
“그냥 플래그라고 해요.”
- 사형!
강신혁은 기숙사로 돌아가 12시간동안 잤다.
다음날 국영방송에 초인협회 특무부에 대형 신인이 나타났다는 뉴스가 특급으로 떴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날 저녁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