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 Chapter 20. 특무부의 비밀병기 - 4 >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혹은 자신들이 마지막이라고 착각하는) 인류가 그 세상의 기록을 어떤 형태로든 남기고자 하는 것은 그리 특이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요르문간드와의 충돌을 겪은 만큼 다른 세상의 존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의 세상과 다른 세상이 연결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자신들의 의지를 담은 특별한 게이트를 제작했다.
그것이 바로 신은아가 말한 멸망의 파편. 정확히는 히어로 유니버스에서 흔히 쓰는 표현이라고 한다.
“이걸로 마지막. 아마 보스가 나올 거야. 가능하지?”
“후우우…… 오케이.”
그들은 자신들이 남긴 기록이 적당한 힘과 자격을 갖춘 이에게 계승되기를 바랐다. 복잡한 구조의 함정을 설치하고, 몬스터를 끌어내 싸우게 하는 것도 모두 그것을 위함이었다.
강신혁 역시 지구에 나타나는 게이트들에서 다른 문명의 향기를 느낀 적이 있었던 만큼 게이트가 다른 세상의 일부일 수 있다는 말에도 그리 놀라지 않았고, 그 세상의 인류가 게이트에 일부나마 간섭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오히려 안심할 정도였다.
지구는 아직인 모양이지만, 그 연구가 이루어지면 요르문간드라는 초월적인 집단에 대항할 수단도 갖출 수 있을 테니까.
“그럼, 준비해.”
신은아의 마력을 받은 마지막 비석이 깔끔히 가라앉자 여태껏 무수한 몬스터를 토해냈던 마법진이 이번엔 검푸른 빛을 뿜어내 공동을 가득 채웠다.
- 크우우우…….
그 안에서 기이한 울음소리를 내며 나타난 것은 이 던전에서는 볼 수 없었던 형태의 몬스터였다. 아니, 그것을 몬스터라고 해도 좋을까? 얼핏 보기엔 푸른 금속질의 몸통으로 이루어진 괴물소…… 고르곤처럼 보였으나, 강신혁은 곧 자신이 착각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그저 겉껍질만 있을 뿐, 속은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정확히는 황소의 상체를 따온 금속 갑옷 안에 검푸른 빛이 응집해 불규칙적으로 발광하고 있었다.
외피에는 강신혁이 알아볼 수 없는 복잡한 형태의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으며, 몸도 다리도 없는 그것은 허공에서 천천히 부유하며 천천히 마력을 발하고 있었다.
“골렘?”
“리빙 아머의 일종일지도. 조심해!”
강신혁의 중얼거림에 무심코 대꾸해주던 신은아가 갑자기 소리쳤다. 강신혁은 곧장 그 자리를 이탈했다. 직후 쾅! 끔찍한 굉음과 함께 그가 있던 자리에 푸른 번개가 내리쳤다.
- 크우우…….
놈은 자신의 공격이 빗나갔다는 것을 인식하고는 천천히 강신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황소의 형태를 취하고 있을 뿐인 줄 알았지만, 다시금 그와 마주한 황소의 텅 빈 눈동자 안에서는 명백히 이질적인 푸른 스파크가 튀어 오르고 있었다.
"칫!"
이번엔 신은아가 말해줄 것도 없이 강신혁이 먼저 도약했다. 먼젓번과 마찬가지로 바닥을 내리찍는 벼락.
감히 신은아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강신혁이 맨몸으로 받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뭣보다 단순한 마력이 아닌 이질적인 힘…… 아마도 그가 지닌 영력과도 비슷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 크우우우……!
“내가 할게!”
“아뇨.”
강신혁의 수준에 비해 명백히 높은 레벨의 적임을 알아차린 것이겠지, 신은아가 즉각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강신혁은 그것을 단호히 거절했다.
“진짜 힘들어지면 그때 부탁할게요.”
다시 벼락이 떨어졌다. 이번엔 제법 피할 만 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며 착지한 직후 눈앞이 번쩍였다. 앞뒤 잴 것도 없이 윈드 마스터리까지 동원해 몸을 반대편으로 날렸지만, 방금 자신의 대처가 늦었다는 것은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아프지 않지? 그러고 보면 순간적으로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는데…….'
깊게 생각할 것 없이 깨달을 수 있었다. 아마도 신살검의 네 번째 특수능력, ‘수호’가 발동한 것이리라. 수호는 주인의 몸에 위기가 닥치면 자동으로 보호막을 만들어내는 능력인데, 지금은 아공간에 들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때 방어막이 나타나준 것이다.
'그렇다고 이걸 믿고 뻗댈 수는 없고.'
수호는 어디까지나 신살검에 저장된 영력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주인을 지킬 뿐이다. 과거 아무리 대단한 검이었다 해도 지금은 A랭크에 불과한 터, 몇 번이고 적의 공격을 막아 주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
‘두 번은 안 당한다.’
놈이라 해도 두 번 연속으로 번개를 떨어트리는 것은 조금 힘든 일이었는지,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있었다. 공격을 시도할 절호의 타이밍!
강신혁은 자신의 특성으로 베놈 프린세스 소울을 최대한 강화, 다섯 줄기의 독거미줄을 놈의 몸통에 날렸다. 번개거미줄은 상성 면에서 밀릴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배제했다.
- 쿠우우우우우.......
“칫."
지금 그가 시도할 수 있는 공격 중에서는 가장 강한 독거미줄 5연격은, 그러나 허무하게도 황소의 갑옷을 조금도 베어내지 못하고 튕겨났다.
직후 덮쳐오는 번개를 피하며 재차 거미줄을 쏘아내, 이번엔 예기 대신 독기를 최대한 강화해 녹여보려 했지만 갑옷이 희미하게 반짝이더니 오히려 거미줄이 소멸했다. 강신혁은 그 순간 감지했다. 저 갑옷, 방금 강신혁의 거미줄을 흡수해 그 안에 담긴 에너지를 갈취했다.
‘극천신주랑 같은 능력이잖아!?’
물론 극천신주에 비해서는 상당히 소극적인 능력이긴 하지만, 이래서야 독거미줄로 놈을 칭칭 감싸 무력화한다는 작전은 써보지도 못한다.
무기 하나 버리는 셈 치고 흑호저극침을 하나 날려봤지만 다행히 흡수되지 않았을 뿐 놈의 갑옷에 흠집 하나 내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
이렇게 된 이상 신살검을 쓸까? 비록 랭크는 베놈 프린세스 소울보다 떨어지는 A랭크지만, 그것이라면 저 갑옷을 벨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아니, 그래도.’
조금 상대하기 까다롭다는 이유만으로 곧장 신살검을 꺼내드는 것도 좀 아닌 것 같았다. 지금 곁에는 그를 유사시 상황에서 보호해줄 수 있는 신은아도 있다.
그렇다면 조금 더 이대로 녀석을 상대하며 분석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겠는가. 터무니없이 단단하고, 섬뜩한 번개를 마구 날려대는 녀석이지만 언제까지고 저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을 터였다. 강신혁은 그렇게 믿고 재차 몸을 날렸다.
- 쿠우우우우우......!
적…… 갑옷 황소의 울음소리가 공동을 울렸다. 놈은 자꾸만 번개를 피해내는 강신혁에게 명백히 분노하고 있었다. 어쩌면 조금 초조해하는 것처럼도 느껴졌다. 놈의 능력이 무한하지 않다는 증거였다.
“아티팩트의 능력까지 포함해도 민첩이 S-랭크일 텐데, 어떻게 저렇게 잘 피하는 거지……?”
강신혁이 움직일 때마다 결계 내부에 번개가 작렬하며 사방 땅바닥을 마구 긁어냈다. 강신혁의 목숨이 위험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고 전투를 구경하는 신은아. 그녀의 의아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어오자 강신혁은 나직이 웃었다.
'역시 영력인가.'
놈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놈은 영력을 다루고 있다. 당연히 영력에 민감한 강신혁은 놈이 공격을 가해오는 타이밍에 맞추어 회피할 수 있었다.
마력에 관해서는 도저히 강신혁이 따라갈 수 없는 초월적인 능력자인 뇌제 신은아가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그렇다면.’
적이 영력을 다룬다면 자신의 영력으로 직접 놈의 영력과 접촉해보는 것도 방법이지 않을까.
놈이 다루는 영력은 아마 강신혁보다 방대하겠지만, 신풍의 보주를 수리하거나 극천신주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강신혁은 자신이 영력과 영력의 맞대결이라면 아마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 콰지지직!
"흣!"
연달아 떨어지는 번개를 세 번 연속 놀라운 반사신경으로 회피해낸 강신혁은 단검을 던지거나 거미줄을 사출해 놈을 견제하는 대신 자신의 순수한 영력을 뻗어내 놈과 접촉했다. 그 순간 놈의 대략적인 정보가 그의 뇌리로 흘러들어왔다.
‘설마 했는데 몬스터보다는 자아를 가진 아티팩트에 가까운 놈이었나. 이름은…… 우리나라 식으로 번역하면 푸른 소. 아, 타고난 이름이 아니라 벨라토스인들이 붙인 이름이구나. 그 너머의 기억은 아직 읽어낼 수 없는데.’
다만 저것이 아티팩트이든 몬스터든, 벨라토스에서 생산된 물건이 아닐 가능성은 높아졌다. 놈에게서 뽑아낸 기억 중 벨라토스인들이 저것을 보고 놀라는 장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명백히 그 기억 속의 모습보다 지금 저놈의 힘이 강했다. 봉인되어있던 동안 능력이 강화된 것인지 다른 요인이 작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사실 그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놈을 침묵시킬 수 있는가. 강신혁은 놈이 품고 있는 정보들을 빠르게 훑으며 보다 강하게 영력을 뻗어냈다.
자신의 영력으로 적을 구속하고 약화하고자 했다. 그의 눈동자가 찬란한 금빛으로 번쩍였다. 효과가 있었다. 놈의 움직임에 순간이지만 분명한 딜레이가 생긴 것이다.
- 쿠우우우우우우!
과연 영력을 다루는 몬스터답게 강신혁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지 빠르게 깨달은 아티팩트, 푸른 소가 분노의 고함을 내질렀다. 그때 재차 번개가 내리쳤다. 강신혁을 향해서가 아니라, 놈 자신을 향해서였다.
“하."
놈과 자신을 잇던 영력의 연결이 단박에 끊어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푸른 소의 전신에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놈의 외피 가득 새겨진 마법진이 활성화되어 푸르게 번쩍이는 것을 본 강신혁은 어쩌면 저게 진정한 놈의 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쿠우우우우우우우우우!
놈이 공간으로 가르고 돌진해왔다. 강신혁이 몸을 날린 다음 순간 놈의 거대한 동체가 결계를 들이 박으며 쾅! 대포알이 터지는 소리를 냈다. 강신혁의 회피가 타이밍에 맞았던 것은 그가 놈의 움직임이 아닌 영력의 흐름을 읽어낸 덕분이었다.
"미친."
단지 움직임이 빨라진 것뿐만이 아니다. 놈의 돌진 경로에 줄줄이 떨어져 내리는 낙뢰는 절로 침을 꼴깍 삼키게 했다. 무지막지한 힘을 품은 돌진과 낙뢰를 동시에 피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다만…… 저래서야 에너지의 소비가 더 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이대로는 위험해.’
강신혁은 재차 영력을 뻗어냈으나, 푸른 스파크가 휘감고 있는 놈의 동체에는 영력조차 쉬이 접근할 수 없었다. 더구나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힘까지 강화된 것인지 그의 영력 일부를 놈이 흡수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것만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강신혁은 이를 악물고 움직여 놈의 돌진과 낙뢰를 피해내며 재차 놈에게 영력을 뻗어냈다. 강신혁의 영력이 마음에 든 것일까, 그것은 곧장 그의 영력을 흡수해 취하려고 했지만…….
‘어딜.’
이번엔 그의 영력이 쉬이 흩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놈의 영력 속으로 파고드는 과정에서 몸집을 불려, 그 내부를 마구 헤집었다.
강신혁은 신풍의 보주를 수리하던 순간이나, 극천신주를 만들어내던 순간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아마도 착각이겠지만…… 그 순간, 형체가 없어야 할 그의 영력 덩어리가 금빛의 용으로 화한 것처럼 보였다.
‘응?’
순간 그의 뇌리로 짧은 이미지가 흘러들어왔다. 벨라토스인, 다시 말하면 이 게이트를 만들어낸 마지막 벨라토스인이 푸른 소를 만지고 있는 장면이었다.
영력을 감지할 수는 있지만 다루지는 못하는 인간이었던 것일까, 그는 마력을 뻗어 제법 서투른 조작으로 푸른 소를 통제하고 있었다.
그래, 통제하고 있었다.
‘이거다!’
그 이미지를 확고하게 받아들인 바로 그 순간, 영력으로 몸을 얻은 황금룡이 푸른 소의 텅 빈 갑옷 내부에서 부풀어 올라 일순 놈을 집어 삼켰다.
그저 시시한 발악에 불과한 확산은 금세 주인이 없는 에너지로 화하여 푸른 소에게 흡수되어야 할 터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이미지 속의 인간이 그랬던 것보다 더욱 빠르게, 보다 정교하게…… 푸른 소의 외피를 덮은 마법진 위를 강신혁의 영력이 내달리고 있었다.
- 치잉!
강신혁의 귓가에 맑은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푸른 소의 외피를 덮고 있던 마법진 일부가 깨지며 지워지는 소리였다. 애초에 통제가 어설펐던 탓에 그것을 지우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 대가로 강신혁의 영력도 일부 소실되었지만, 마법진이 깨지며 푸른 소의 움직임이 멈춘 덕에 추가로 영력을 주입하는 것은 더 이상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쿠우우우.......
푸른 소의 전신을 뒤덮고 있던 스파크가 일순 사라졌다. 잔뜩 흥분한 것처럼 들리던 놈의 울음소리도 천천히 잦아들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강신혁의 영력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놈의 몸통 외부, 내부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새기고 있었다. 놀랍게도, 결계 밖에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신은아도 미처 이해하지 못할 만큼 난해한 움직임이었다.
“전투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응?”
결계가 사라졌다. 그것을 감지한 신은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 푸른 소가 사라지지 않았는데 결계가 사라지다니, 전투가 완벽히 끝났다고?
“됐다.”
그런 신은아의 의문을 눈치챈 것일까. 강신혁은 자신의 마지막 영력까지 모조리 푸른 소에게 쏟아 부으며 씩 웃었다.
“이제 탈 것도 생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