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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 Chapter 19. 여름의 시작 -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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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이 밝았다. 신영 1학기의 마지막 주간이며, 동시에 학생회 선거가 개최되는 주간이기도 했다.

수업은 거의 없어 출석도장만 찍고 나면 교실에 모여 떠들든 운동장에서 운동을 하든, 동아리 활동을 하든 자유(단 기숙사방에 처박히거나 학교 밖으로 나가는 것은 금지였다).

신영의 여름방학 실전 과제가 상당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이 한 주간이 가장 편하게 쉴 수 있는 기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희 선배한테 들었는데.”

학교 전체가 묘하게 나른한 분위기에 휩싸여 강신혁마저 괜히 졸음기가 쏟아지는 오전, 조회가 시작되기 전에 카렌이 강신혁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그저께 네 방에서 뇌제랑 연금술사랑 다 모여서 난리도 아니었다며?”

“뭐?”

그 말에 반응한 것은 강신혁이 아니라 그 옆에 있던 백인하였다. 강신혁은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다행히도 그 말고 대화를 들은 이는 없었다.

“너희 다른 데 가서 떠들고 다니지 마라. 믿는 사람도 없겠지만.”

“뭐래, 금요일날 경연대회에서 연금술사가 직접 너한테 말 거는 거 내가 봤거든? 거기 우리학교 학생들도 몇 명 있었으니까 이제 학교에 소문 다 퍼질걸.”

“이놈의 학교는 왜 이렇게 가십을 좋아해……."

“그보다 시녹이 너!”

강신혁이 한숨을 내쉬는데 백인하의 그런 그의 양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댔다.

“내가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고생하는 동안 넌 꽃밭을 굴렀다고!”

“그냥 치킨을 먹었을 뿐인데?”

물론 그것만으론 끝나지 않았다.

이나희를 과도하게 견제하는 신은아와 그런 신은아를 단속하는 클레어, 클레어에게 존경심이라도 품고 있는지 눈을 빛내며 그녀에게 질문을 퍼부어대던 이나희. 떠올리기만 해도 귀가 아플 정도로 시끄러운 순간이었다.

간섭했다간 괜히 귀찮아질 것이 뻔했기에, 강신혁은 여자 셋이 그러라고 놔두고 열심히 치킨을 퍼먹었다. 그러니 거짓말은 하지 않은 셈이다.

……하지만 열심히 치킨을 먹는 그를 여자들이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본인만은 모르고 있었다.

“토요일은 그렇다 치고 일요일은?”

“일요일은 아르바이트 했고.”

이젠 바텐더 노릇에도 제법 익숙해졌다. 바에 와서 굳이 그를 지명하는 손님도 많아졌을 정도였다. 다만 그 대다수가 여성인지라, 그에게 추파를 던지는 손님들을 부드럽게 받아넘기는 것이 조금 힘들었다. 덤으로 신은아가 바에 있을 때는 그녀를 말리는 것이 힘들었다.

“알바? 그건 또 언제 시작했는데?”

“좀 됐어. 야, 선생님 들어오신다.”

1학년 C클래스의 담임, 시아라 베르트랑이 드물게도 활짝 웃는 얼굴로 교실에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토요일자 신문. 한국 신문이 아니라 영자신문이었지만 1면에 실린 사진은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강신혁과 이나희의 사진이다.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대회 맞구나.’

아니, 경연회장에 모여든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그야 확실히 알 수 있는 일이긴 했지만 새삼 놀라웠다.

“여러분, 오늘은 조회 시작 전에 여러분에게 알릴 것이 있습니다.”

시아라 베르트랑은 학생들을 자리에 앉게 하고는 신문 1면을 들어보였다. 이미 그것을 알고 있던 이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지만 주말 동안 인터넷을 소중히 하지 않은 학생들은 화들짝 놀랐다.

“강신혁 이나희 선배랑 진짜 친한가본데!?”

“알제 선배랑 친한 것만도 울분이 터지는데!”

“마도왕이 빡쳐서 덤볐던 게 이해가 간다 레알루.”

“그렇다고 덤비지는 마라. 너도 마도왕처럼 된다.”

“이야, 또 얘기가 그쪽으로 가네.”

월드 루키즈 크리에이터 경연대회에서 강신혁이 대상을 수상했다는 것, 그가 이나희와 함께 제출한 아티팩트의 랭크가 무려 B랭크에 달한다는 것을 알게 된 학생들은 전부 어안이 벙벙해졌다.

신인왕이 된 후로 그가 보여준 행보만 해도 까무러칠 정도였는데 이젠 아예 그가 같은 세상 사람이라고 느낄 수도 없게 된 것이다.

“모두 강신혁 학생한테 박수.”

힘없는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강신혁은 그들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자신이 강해진 것과 아티팩트를 만드는 능력을 얻게 된 것이 같은 맥락이라고 말해봤자 저들 중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터였다. 자신은 정말로 그들과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올해 신인왕은 정말 역대급이네.”

“지금부터 친하게 지내면 나중에 아티팩트 하나 만들어주지 않을까.”

“난 그것보다 이나희 선배 소개해줬음 좋겠다. 그 모성애 넘치는……."

“다들 조용.”

시아라 베르트랑은 여전히 흐뭇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교탁을 탁탁 두드려 학생들을 조용히 시켰다.

“이번 주는 학생회 선거가 진행되는 주간입니다. 각 후보 알림과 선거운동 일정은 스틱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투표는 목요일, 개표 및 취임사는 금요일에 있을 예정이니 빼먹지 않기를. 이 반에서도 선거에 나가는 학생이 있습니다. 다들 백인하 학생을 응원해주세요."

“와아아아!”

“그래, 썩어도 학년 랭킹 1윈데 백인하가 당선되어야지!”

“백인하가 학생회 들어가면 우리 반에 좋은 거 아냐?”

여자애들에겐 다소 인상이 나쁜 백인하도 이럴 때 보면 인지도로는 여전히 하늘을 찔렀다. 강신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급우들을 상대로 온갖 퍼포먼스를 취하고 있는 백인하를 보며 역시나, 하고 생각했다.

‘지금도 이 정돈데 평소에 나대지 않았으면 아예 학교 전체가 떠받들었을 거야. 정말 알 수 없는 녀석이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시큰둥하니 박수를 쳐주던 강신혁은 문득 교탁에 선 시아라 베르트랑과 눈이 맞았다. 착각인가 생각했지만 시아라 베르트랑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면 착각이 아닌 것 같았다.

“조회는 이것으로 마칩니다. 강신혁 학생은 잠깐 와주세요.”

강신혁이 그녀를 따라 복도로 나가자, 시아라 베르트랑은 외부인이 없는가 확인하고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정말 잘했어요, 강신혁 학생. 그 나이에 아티팩트를 만들어낸 것도 훌륭한 일이지만, 이만우 선생님의 기운을 되찾아준 것, 고마워요. 그분께서 그렇게 환하게 웃으시는 것은 오랜만에 봤습니다.”

음? 그러고 보면 이전에도 그녀가 이만우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강신혁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이만우 선생님과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사이신가요?”

“……음. 그건 아닙니다만.”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괜찮겠죠, 하고 중얼거리고는 그와 얼굴을 마주했다.

“저는…… 아니지, 프랑스는 그분께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망치를 놓게 되신 데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고…… 무척, 무척 죄송스러운 마음을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도 그분이 신영에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놀랐습니다.”

“프랑스.”

강신혁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프랑스가 왜? 그러고 보면 올해 가을에 프랑스에서 세계초인회의가 열린다고 했었지.

“마법학과에 재학하고 있는 이나희 학생의 어머니가 프랑스인이라는 것은 알고 있나요?”

“아뇨. 하지만 듣고 보니 납득 가네요.”

프랑스인이라. 이나희의 건강한 갈색 피부와 시원시원한 서구형의 이목구비를 떠올린 강신혁은 절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실로 그럴듯했다.

“며느리가 프랑스인이었으면 선생님이 프랑스와 얽힐 일도 충분히 많았겠네요.”

"이만우 선생님의 자제분은 한때 그분을 넘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듣던 천재 야장이었습니다. 그분의 공방이 프랑스에 있었죠……."

“아뇨, 그 이상은 됐어요. 그 말만 들어도 신기하게 이야기를 전부 들은 기분이 드네요.”

“네, 이야기 자체는 흔한 비극입니다. 굳이 얘기할 필요 없겠죠.”

강신혁의 스톱 사인에 시아라 베르트랑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만우의 아들이 아버지와 같은 야장이었다는 것은 알겠다. 어쩌면 이나희가 인챈터가 된 것은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영향이 있었는지도…….

“……가만, 혹시 그분의 아내가 인챈터였나요?”

“아, 맞아요.”

강신혁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시아라 베르트랑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들은 것처럼 두 눈을 크게 떴지만 이내 본인도 강신혁과 같은 것을 깨닫고는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띠었다.

“강신혁 학생의 책임이 막중하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후후. 올 가을 프랑스에 가면 저희 집에 초대할게요. 이나희 학생과 함께 놀러와 주세요.”

“아, 선생님도 동행하시는구나.”

하긴 인솔자도 없이 학생들만 보낼 리도 없고, 기왕 프랑스에 가는 것 프랑스 출신 교사를 기용하는 게 좋겠지. 강신혁은 절로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나희 선배도 프랑스에 가나요?”

“이나희 학생은 마도왕전 4강까지 진출했어요. 모르고 있었나요?”

“몰랐는데요……."

하지만 절로 납득이 갔다. 확실히 그녀는 젊은 세대에서는 압도적인 실력을 갖춘 인챈터. 전투의 소양이 없다고 해도, 서로의 마법을 겨루는 마도왕전에서는 제법 유리한 고지를 점할 확률이 있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강신혁 학생도 백인하 학생을 도와 선거운동을 하겠죠? 바쁜 사람을 붙잡고 있었네요.”

제 할 말을 다 하고 개운해진 그녀는 반대로 심경이 복잡해진 강신혁을 놔두고 그 자리를 떠나갔다. 강신혁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니, 안 도와줄 건데요......."

하지만 괜히 찔렸기 때문에 일단 아는 사람들에게는 백인하가 포함된 회장단을 찍어달라고 얘기하고 다니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금요일 개표 결과 백인하가 포함된 회장단이 무려 90% 가까이 표를 몰이하며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기 때문이다.

[백인하 : 딱 기다려라 다음 주부터는 나도 로열 클래스다.]

[나 : 그래그래, 축하해. 그런데.]

[백인하 : 그런데?]

[나 : 나 다음 주부터 여행 감.]

[백인하 : ?????]

[나 : 여자랑 둘이 감.]

[백인하 : ???????????]

백인하가 무사히 학생회 부회장으로 낙점된 그 날 저녁, 다시 말하면 방학식날. 강신혁은 언제나처럼 프론트라인 바에서 마른 천으로 글라스를 닦고 있었다. 도중에 날아든 백인하의 문자에 대충 답해주고 잔을 마저 닦았다. 이제 곧 개점할 시간이었다.

“신혁아.”

“네."

그런 그의 옆에서 테이블을 닦고 있던 클레어가 문득 그를 불렀다. 대답하며 돌아보는데 그녀의 입에 담배가 물려있었다.

“누나 담배 피워요?”

“아니, 이거 초콜릿이야. 그냥 멋있어 보이려고 물었어.”

"......."

강신혁은 대꾸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담배 모양 초콜릿을 와작와작 깨물어먹으며 보충해 설명했다.

“한때 진짜로 피워볼까 고민했는데 감각이 둔해진대서 그만뒀어. 물론 초인이니까 담배의 독성 정도는 해결할 수 있지만, 마음만은 순수한 바텐더로 있고 싶으니까.”

“과연. 하지만 어느 쪽이든 이해가 가요. 멋있어 보이죠.”

“그치, 멋있어 보이지?”

“누가 어떻게 피우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바보 같은 그녀의 말에 바보 같은 말로 응답해주는 강신혁. 클레어는 그의 말에 키득키득 웃으며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살며시 그를 찌르듯이 물었다.

“은아랑 둘이서 게이트 들어간다고 했지?”

“네. 일단 대규모 던전에서 제 능력을 파악한 후 본격적으로 움직일 예정이에요.”

백인하에게 여자와 둘이 여행을 간다고 했던 것은 바로 이 얘기였다. 이번 여름, 강신혁은 한계까지 자신을 몰아붙여볼 생각이었다.

"음......."

클레어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강신혁을 보며 어딘가 갈팡질팡하는 기색이었다.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살피자, 그녀는 이내 결심한듯 말했다.

“나도 갈까? 둘만 보내면 불안해서.”

“아뇨, 괜찮아요. 저라고 계속 누나한테 어리광만 부릴 수는 없죠.”

“넌 괜찮겠지만 은아가 불안해서.”

“괜찮아요. 그 사람은 그냥 어리광이 심할 뿐이에요. 익숙해지면 제법 귀여워요.”

다만 지금은 7대3 정도의 비율로 짜증날 때가 더 많다는 것이 소소한 단점이지만.

그런 강신혁의 생각을 모르는 클레어는 살짝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네. 게다가 조금씩이긴 해도 나아지는 것처럼도 보이고. ……아마 저를 전생의 모루와 똑같이 대할 수는 없다는 걸 본인도 조금씩 깨닫고 있는 게 아닐까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녀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아야 할까, 클레어는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자신이 끼어들어봤자 더 피곤해질 뿐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닫고 있었으니까.

대신.

“그럼 고생해. 무사히 돌아오면 방학 중에 누나가 데이트 한 번 해줄게.”

“두 번이라도 괜찮은데요!”

강신혁은 곧장 그녀의 미끼를 물었다. 클레어는 한쪽 입가를 끌어당기며 만족스레 웃었다.

“신혁이 넌 밀당이라는 걸 모르니?”

“거짓말은 서툴러서요.”

“그걸 보니 충분히 잘하는 것 같은데?”

눈을 반짝이며 덤벼드는 강신혁의 이마에 딱밤을 먹이며, 그녀는 말했다.

“자, 그러면 영업 시작하자.”

출입구가 열리고 첫 손님이 들어왔다.

눈이 돌아가도록 바쁜 여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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