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 Chapter 19. 여름의 시작 - 4 >
동아리방 문을 연 순간 전신에 스며드는 한기를 느낀 강신혁은 혹시 자신이 동아리방이 아니라 이레귤러 게이트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저 동아리방 한가운데에 신은아가 서 있을 뿐이었다.
……덤으로 이나희도 있었다. 신은아와 당당하게 대치하고 선 모습이 실로 용감했지만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어서 말짱 꽝이었다.
강신혁은 자신도 거기에 휘말려 몸이 그대로 굳어버릴 것만 같은 압박감을 이겨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음…… 선배, 대체 무슨?”
“회식 전에 작업을 할 거라고 들어서 구경이나 할까 해서 왔어.”
“야, 이 사람 좀 어떻게……."
그의 말에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하고 직후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면 두 사람 다 선배라고 부르고 있었구나. 그가 정정 하려는데 신은아가 먼저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 와중에도 시선만은 이나희에게 고정한 채였다.
“이 애, 인챈터라고 들었는데. 평소 작업도 같이 하는 거야?”
“음, 반반 정도죠.”
“후배 실력이면 인챈터는 필요 없지 않을까? 경연에 냈던 것도 평소 실력에 비하면 별로였던 것 같은데.”
“윽!?”
신은아의 대담한 공격! 이나희는 실드 가디언의 장검이 당시 강신혁의 최선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만큼 조금 찔린 기색이었지만, 이내 두 눈을 부릅뜨며 반박했다.
“그건 처음 만나서 서로에 대해 잘 모를 때 만들었던 거고, 지금은 호흡이 제법 잘 맞거든요! 야 후배, 이 사람한테 그거 보여줘! 그거!”
“아, 음…… 네. 뭐 그러죠.”
이나희가 어째서 신은아에게 대항하고 있는 것인지 전혀 감이 안 잡혔지만 일단은 순순히 그녀와 함께 만든 최고 걸작, 번개거미줄을 인벤토리에서 꺼내 신은아에게 보여주었다.
동아리 방의 조명 아래 반투명하게 반짝이는 황금색의 가느다란 실을 보며 신은아는 본능적으로 감탄사를 냈다.
“예뻐……! 어제 그거야?”
“네, 그거."
“그래서 얘가 후배가 신은혁이라는 걸 알고 있었구나……."
강신혁이 없는 사이 둘 사이에 말이 오갔었단 말인가.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눴기에 분위기가 그렇게 엉망진창이었던 것인지 무척 신경이 쓰였지만 하염없이 번개거미줄을 관찰하고 있는 신은아를 앞에 두고 차마 추궁을 할 수가 없었다.
“와아, 너무 예뻐. 역시 할부지, 크음.”
“흐음……?”
입을 헤에, 크게 벌리며 어린애 같은 감탄사를 내던 신은아였으나 직후 이 방에 둘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곤 표정을 굳혔다. 이나희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빤히 그녀를 바라보자, 신은아는 애써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반격의 봉화를 올렸다.
“확실히 섬세한 인챈트 기술이긴 하지만, 후배라면 인챈트 없이 더 좋은 물건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분명해. 그 증거로.”
신은아가 강신혁을 빤히 바라보았다. 강신혁은 한숨을 내쉬며 인벤토리에서 그것을 꺼냈다. 그가 꺼내든 것은 바로 베놈 프린세스 소울(A+). 이번엔 이나희가 경악할 차례였다.
“윽, 어제 나머지 한쪽에는 이걸 차고 있었던 거야? 뭐야, 이거 완전 사기템이잖아. A+랭크……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선배랑 같이 번개거미줄을 만든 덕에 만들 수 있었던 물건이니까 그렇게 기죽을 필요 없어요. 재료 덕도 컸고요.”
“재료가 좋다고 다 A+랭크 아티팩트를 만들 수 있었다면 지금 하이랭커들은 전부 이런 아티팩트로 도배하고 있겠다!”
감탄을 넘어 바닥을 치며 절규하는 이나희의 모습에, 그제야 만족한 듯 입가에 잔혹한 미소를 띠며 신은아가 말했다.
“결국 넌 후배의 통과점에 불과해.”
“크윽......!”
“선배는 왜 우쭐대는 건데요?”
이미 라이프가 제로가 되어버린 이나희를 대신해 신은아에게 태클을 건 강신혁은 한숨을 내쉬며 상황을 정리했다.
"보아하니 많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고, 바로 작업 시작하죠. 선배…… 이나희 선배도 괜히 신은아 선배한테 맞춰주지 말고 일어나고. 신은아 선배는 우리 작업 방해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요.”
“후배, 나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 심한 것 같아.”
“자업자득이잖아요.”
“오, 오오…… 후배 대단하다.”
하이랭커 중에서도 손꼽히는 무력을 지닌 신은아를 상대로 당당히 면박을 주는 강신혁의 모습에 이나희가 감탄사를 냈다.
지금도 이러는데 신은아의 진면모를 그녀가 알게 된다면 아마 까무러치겠지. 신은아는 아까도 무심코 할부지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좀 더 입을 조심해줬으면 하는 의미에서 한 번 더 신은아를 째렸더니, 그녀는 볼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뇌제만 아니었으면 이마에 한 방 먹였을 것이다.
“친동생 아니지?”
“이나희 선배가 그걸 믿으면 어떻게 해요.”
좁은 공방 안에 들어가며 이나희가 하는 말에 강신혁은 어처구니가 없어 대꾸했다. 이나희는 그 말에 살짝 인상을 굳히더니.
“좀 더 편하게 불러. 완전 남 같잖아.”
또 생뚱맞은 말을 했다. 강신혁은 영하니 반문했다.
“예를 들면?”
“누나.”
“죽어도 싫어요.”
결국 성씨는 떼고 나희 선배라고 부르기로 했다. 묘하게도 어제 있었던 사건 이후로 제법 그녀와 사이가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흑역사를 공유했기 때문일까. 이렇게 해야만 사람과 친해질 수 있다면 사양하고 싶었다.
“그래서 오늘은 뭐 만들 거야?”
“신은혁으로 활동할 때 다룰 투척 무기를 만들까 해서요. 마침 좋은 재료를 얻었거든요.”
“투척무기가 따로 필요한가? 네가 어제 실 다루는 거 보니까 원거리부터 근거리까지 완전히 커버하던데?”
"당연히 필요하죠. 상상 해봐요. 제가 다루는 열 가닥의 실을 경계해서 정신없이 몸을 날리던 찰나 사각에서 날아든 단검에 심장을 찔려 죽는 적의 모습을.”
“확실히 그럴싸하네…… 근데 너 되게 신나 보인다.”
"......."
강신혁은 그녀의 말에 반문하지 않고 얌전히 인벤토리에서 재료들을 꺼내어 늘어놓았다. 바로 어제 강신혁이 게이트 통째로 털어버린 말벌들의 독침! 수십 센티미터 길이, 가늘고 길며 예리한 독침은 투척무기를 위해 만들어진 듯했다.
“심지어 이것도 독이잖아? 죽음의 인형사가 아니라 독거미 인형사라고 하는 게 낫겠다.”
“죄송한데 별명 늘리지 말아주실래요? 특히 SNS에는 절대 올리지 마세요.”
강신혁은 모든 독침에 새길 인챈트로 이나희에게 공통된 두 가지 능력을 요구했다. 첫 번째는 은밀함이고, 두 번째는 바람이었다.
“바람?”
“여기 봐요.”
감을 잡지 못하고 반문하는 이나희의 코앞에 강신혁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보였다. 곧 이나희는 그의 손가락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미약한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두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너 속성까지 다뤄!?”
“사실 어제 실을 자유롭게 다루는 데에도 바람의 능력을 조금 썼어요.”
강신혁의 환룡무가 아무리 모든 무기에 능통하게 해준다 해도, 열 가닥의 실을 다루는 섬세한 작업을 완벽하게 해내는 것은 지나치게 기운 빠지는 일. 그것을 보조해주는 것이 그의 의지에 따른 공기 흐름을 만들어내는 바람의 힘이었다.
더욱이 실에 바람을 둘러 예기를 증폭시켜주는 것도 가능하니, 윈드 마스터리는 번개거미줄과 베놈 프린세스 소울을 더욱 사기적으로 만들어주는 스킬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실 윈드 마스터리가 있었기에 그가 이런 까다로운 무구를 만들 생각을 했던 것이기도 하다.
“특성은 아닐 테고 그럼 속성 마스터리 스킬을 얻은 걸 텐데, 와. 멋진 건 혼자 다 하네 진짜.”
“선배도 이레귤러 게이트를 단독 격파하다 보면 혹시 얻을지도 모르죠.”
“내가 미안했어. 멋진 거 네가 다 가져.”
둘은 시끄럽게 떠들면서도 곧장 작업에 착수했다. 이젠 같은 공간에서 작업을 하는 것도 익숙해져 제법 합이 잘 맞았다. 한편 그것을 밖에서 지켜보던 신은아는 역시 이나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볼을 부풀렸다.
“할부지한테는 인챈터 같은 건 필요 없는데……."
“그건 은아 네 생각이고.”
“아, 클레어.”
어느덧 신은아의 등 뒤에 클레어가 나타나 있었다. 먼저 아티팩트 제작 동아리 부실로 가겠다는 신은아의 연락을 받고 혹시 또 이 녀석이 사고를 치는 게 아닐까 싶어 클레어가 허겁지겁 따라온 것이다.
공방의 두 남녀와 그 바깥에 홀로 남겨진 신은아의 모습을 보며 자신이 한 발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저 애 앞에서 말실수는 안 했고?”
“내가 애인 줄 알아?”
“신혁이 앞에서는 애잖아.”
"......."
실제로 말실수를 했기에 차마 반박을 하지 못하고 슬며시 고개를 돌리는 신은아. 클레어는 어처구니가 없어 그녀의 이마에 딱밤을 먹였다.
“아얏!”
“쟤한테 뭐라고 했는지 순순히 불어.”
“그, 그냥 자기 소꿉장난에 후배를 끼어들게 하지 말라고 했을 뿐인데.”
“본심은?”
“확실히 동세대에선 비견될 사람이 없는 인챈터라고 생각해, 아앗!”
이나희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말을 했단 말인가! 클레어의 눈이 가늘어지자 신은아는 변명하듯 말했다.
“하지만 후배의 능력은 그 정도가 아니니까. 후배는 혼자서도 완벽한 아티팩트를 만들 수 있단 말이야. 쟨 방해야.”
물론 신은아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클레어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후, 이래서 전투계열 능력자는 안 된다니까.”
“……그 말 되게 마음에 걸리는데? 내가 후배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 같잖아.”
안 그래도 평소 클레어가 강신혁과 둘만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던 신은아는 그 말을 듣곤 본능적으로 전의를 일으켰다. 그러나 클레어는 신은아가 주먹을 말아 쥐는 모습에 본능적으로 반걸음 뒤로 물러나면서도 자신의 말을 물리지는 않았다.
“적어도 제작계열에 있어서는 이해 못하는 게 맞지. 봐봐. 저게 억지로 어울리는 얼굴인가.”
“으, 음."”
신은아는 클레어의 손짓을 따라 공방 안에서 독침을 가다듬고 있는 강신혁의 모습에 눈길을 주었다.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작업과 마주하고 있는 강신혁의 얼굴을 본 신은아의 입가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헤……."
“……이거 진짜 안 되겠네.”
평소엔 그렇게나 똑 부러지는 아이인데 어째서 강신혁과 연관되기만 하면 이런 바보가 될까. 클레어는 나직이 탄식하며 공방에 시선을 주었다.
그야 확실히, 신은아가 넋을 놓고 감상하는 마음도 마냥 모르지는 않았다. 열정적으로 작업에 몰두하는 사람의 모습은 매력적이다. 작업을 할 때의 강신혁은 특히나 그랬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진중한 모습, 초월적인 집중력. 어쩌면 저 모습이야말로 그가 모루의 환생이라는 결정적인 증거일지도 모른다.
‘음, 괜찮긴 해.’
하지만 어제 연회장에서 활약했던 것도 좋았지. 그의 모습을 보며 무심코 어제 있었던 테러 사건을 떠올린 클레어는 혼자 음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천생 장인 같은 모습과 대비되는, 열 가닥의 실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며 몬스터고 테러범이고 상관없이 모두 내동댕이치고 썰어버리는 그의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무심코 영상을 반복재생모드로 틀어놓고 하루 종일 볼 정도로.
‘역시 나랑 마음이 잘 통한단 말이야……? 어디서 저런 애가 나타나가지고.’
설마 자신도 막연히 상상만 했던 것을 현실로 옮겨올 줄은 몰랐다. 신은아가 아니었으면 감격한 나머지 멋지게 활약하고 돌아오는 그를 끌어 안아버렸을지도 모른다.
하다못해 나이가 세 살만 더 많았으면 좋았을 텐데.
“……클레어?”
그때였다. 신은아의 날카로운 시선이 클레어의 왼쪽 뺨에 꽂혀들었다. 클레어는 그만 자신이 넋을 놓고 강신혁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곤 화들짝 놀라 자세를 고쳤다.
“큼! 그래서, 신혁이가 억지로 어울리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잘 알았지?”
“응,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클레어한테 묻고 싶은 것도 생겼는데.”
“아마 착각일 거야.”
“흐으으음.......”
그들은 싸늘하게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서 가만히 강신혁의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 후, 작업을 마치고 나온 강신혁이 클레어를 보자마자 반색하여 누나라고 외치며 달려드는 모습을 보고 이나희가 정색했지만 그것은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