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스타일 (5)
-------------- 284/300 --------------
봉 감독이 찾는다는 스탭의 말에 난 고개를 수그린 채 천천히 걸었다. 처음엔 긴 머리카락이 눈을 가려 제대로 걷기도 힘들었다.
현장에 널린 게 촬영 장비에 소품이라 몇 번이나 장애물에 부딪혀 끙끙대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요령이 생겨 지낼 만은 했지만, 여전히 불편한 게 있었으니. 그건 바로 밥 먹기가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먹다 보면 머리카락을 함께 씹는 날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조금만 더 참으면 되겠지 하며 버텼는데, 벌써 한 달이 훌쩍 넘는 시간이 흘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제작진이 사용하는 천막으로 들어가자 봉 감독이 반겼다.
“어서 와요. 시내야, 선율 씨 그거 드려.”
“예에.”
강시내는 코를 훌쩍이며 내게 편지봉투를 건넸다. 눈가가 벌게진 게 운 모양. 궁금했지만, 봉투 안을 살짝 벌려보자 금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엠마의 손편지군요.”
“예. 그것 때문에 정말 간 떨려 죽는 줄 알았습니다.”
봉 감독이 엄살에 시동을 걸었다. 그러나 난 들어줄 생각이 없어 그대로 봉투를 그에게 돌려주었다.
“사라 앞에서, 어? 안 읽어보세요? 이거 편지 낭송까지 제가 공손하게 마이크 들고 녹음해 왔는데요. 일부러 감정 잡기 편하라고요.”
“촬영 때 편지를 보겠습니다. 녹음한 건 감사하지만,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미리 들으면 오히려 감정 잡기 힘들 것 같아서요.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난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자리를 떠났다.
단순한 변덕 때문에 편지를 보지 않은 건 아니다. 물론 봉 감독이나 강시내는 그리 생각하지 않겠지만.
하지만 난 강시내의 운 흔적을 발견한 뒤 편지를 읽지 않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제3자가 눈물을 흘릴 정도라면 보지 않아도 충분했다.
그리고 연습을 많이 하는 것만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었다. 때론 첫 감정이 가장 생생하고 눈에 잡힐 듯 확연히 느껴질 때가 있다.
특히나 지극한 슬픔을 느껴야 하는 장면에서는 더더욱. 너무 힘을 빼버리면 막상 연기할 때 억지로 눈물을 짜내야 하는 참사가 발생할 수 있었다.
물론 기계적으로 눈물을 흘릴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감정은 메이슨이 아닌 선율의 것. 때문에 일부러 편지를 보지도 않고 돌려준 것이다.
“몰입해야 할 땐 미친 것처럼 몰입하고, 느슨하게 풀어줄 땐 확실히!”
다시 한 번 각오를 입 밖에 내며,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 * *
촬영 대기 중 먼발치에 떨어진 아희가 보였다. 오피스 룩의 원피스를 입은 모습이 늘씬해 정말 잘 어울려 보였다.
육식동물 때도 대부분 오피스 룩이었는데, 이번 첫 호흡을 맞추는 씬도 오피스 룩이라······. 묘한 기분이다. 그러나 이내 시선을 거두고 바닥만 바라보며 감정을 끌어올렸다.
단 하나의 콜린스
S#59 거실 (S)
엠마의 변호사가 가족 모두를 소집했다. 모르는 사람과 절대 마주치기 싫었지만, 엠마의 이름은 항거할 수 없는 법칙과도 같았다.
최대한 고개를 숙여 그녀의 시선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데 올리버의 성난 목소리가 거실을 흔들었다.
“설마 유언장?! 네가 뭔데 엠마가 곧 죽을 것처럼 굴어!”
평소 같았으면 당장 뜯어말릴 노아도 화난 눈빛으로 변호사라는 여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리아라도 있었더라면 사정이 나았겠지만, 병원에 있어 이 자리에 올 수 없었다.
“닥쳐 올리버!”
변호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믿기 힘든 당찬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다른 형제들도 놀랐는지 멍하니 입을 벌리고 그녀를 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면 조용해질 거라고 엠마가 알려주더군요. 일단 올리버 당신은 틀렸어요.”
“뭐, 뭐라는 거야?”
“일단 전 아까 소개한 것처럼 엠마의 변호사예요. 그리고 지금 여러분께 나눠드리는 것은 유언장이 아니에요. 그녀가 직접 쓴 편지일 뿐이죠.”
그녀는 손에 든 봉투를 우리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컷! 오케이!”
오케이 사인이 나자마자, 잭은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레이디가 저기 앉아 있는 덜떨어진 놈보다 박력이 넘치는군.”
“닥쳐 잭!”
우린 다시 한 번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희의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왔으니까.
“네가 왕년에 잘나갔는지 따위는 중요치 않아. 네 그 지저분한 입이 열릴 때마다 현장의 팀워크가 흔들린다는 게 중요하지. 한 번만 더 그딴 식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간 술에 쩌든 그 누런 이들을 죄다 뽑아주겠어.”
아희가 서릿발 같은 기세로 쏘아붙이고 몸을 돌리자, 톰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우헤헤헤! 임자 제대로 만난 거 같은데?”
“닥쳐!”
난 일어나 얼굴이 시뻘게진 잭 앞에 섰다. 그리고 슬쩍 고개를 수그려 그와 눈을 마주쳤다.
“쓸데없이 소란피우지 말고 감정이나 제대로 잡고 있어.”
“뭐?”
“다음 씬에 네가 뭘 해야 하는지 잊지 않았지?”
잭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모습에 톰이 얼른 끼어들어 재차 놀리기 시작했다.
“올리버 울면 볼 만하겠다. 내가 우리 레이디를 위해 손수건을 따로 준비해야겠는걸?”
“닥치라고 했지!”
“둘 다 그만해.”
힘이 실린 어조에 둘은 살짝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내게 위협을 느껴서가 아니라 지금껏 보아왔던 것과 다른 모습이었기에 놀란 것일 테지.
둘이 입을 열기 전에 손을 들어 제지했다.
“다음 촬영 중요한 거 알지? 괜히 스탭들 앞에서 망신당하기 싫으면 미리미리 준비해.”
“흥! 질질 짜는 것 말고 잘하는 거나 있나?”
“최소한 누구처럼 주정은 안 부리지. 그리고 그 질질 짜는 걸 이제 네가 해야 하잖아? 나랑 비교당할 텐데 괜찮을지 모르겠군, 왕년의 스타.”
아희의 말투를 따라 하자, 톰은 폭소를 터트렸다. 잭은 와락 표정을 구겼지만, 난 무시하고 조용한 구석으로 가 눈을 감아버렸다.
* * *
웅성거리는 소리에 슬그머니 눈을 뜨자, 놀랍게도 노라가 보였다. 이곳에서 노라의 촬영은 끝난 지 오래. 그렇다는 건 우리의 연기를 보러 왔다는 건데······.
스탭들이 웅성거릴 만도 하네. 대배우라는 수식어가 훈장처럼 따라붙는 그녀다. 그런데 까마득한 후배들의 촬영을 보겠다고 이렇게 행차하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
그렇다고 일어나 쪼르르 달려갈 수는 없었다. 촬영이 임박했으니까. 오히려 눈을 감고 조금 전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스탭들과 인사를 나누는 노라의 모습을 지워버렸다.
단 하나의 콜린스
S# 60 메이슨의 방 (S)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었다. 익숙한 필체가 눈에 들어오자, 손의 떨림은 더욱 심해졌다.
「메이슨. 사랑하는 내 아들. 널 떠올리니, 여러 감정에 휩싸여 좀처럼 펜을 움직일 수가 없구나.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방에만 있는 널 볼 때마다, 모든 게 내 탓은 아닐까 자책한단다.
어쩌면 내가 모든 것을 망친 것은 아닐까 지금도 후회하고 또 후회하게 되는구나.
나는 늘 네가 안쓰러웠다. 널 가장 많이 품에 안았지만, 어쩌면 흉터를 감추기 위해서였을지도 몰라. 네 흉터는 내 주홍글씨이기도 했단다. 그걸 볼 때마다 그날이 떠오르며, 내 죄를 추궁당하는 끔찍한 기분이었어.
누가 네 화상 자국을 보며 병신이라고 욕을 하거나 조롱하면, 난 똑같이 욕을 하며 주먹을 휘둘렀지. 그런데 진짜 너를 병신이라고 생각하는 건 어쩌면 나였을지도 몰라. 손만 대도 부서질 것만 같아, 널 다 큰 성인으로 대하지 않았다. 널 세상의 못된 것들로부터 지키려고 방에 숨기기만 했구나. 미안하구나. 내가 모든 것을 망친 거야.
널 처음 본 순간 직감했단다. 내 아들이라는 것을. 그리고 집에 널 처음 데리고 온 날, 올리버와 마리아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지금도 그 광경을 떠올리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단다.
그렇게 사이좋던 아이들을 내 잘못으로 망쳐버린 건 아닐까 지금도 후회가 되는구나. 올리버가 화를 낸 건 네가 아닌 나를 향한 것이었어. 그러니 그를 용서해주지 않으련?
자책하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네 탓이 아니야.
빌리가 갑자기 사고로 떠난 뒤 난 모든 것을 포기할까도 생각했었어. 그러나 널 보며 정신이 번쩍 들더구나. 살아야겠다. 이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잘 살아야겠다. 그렇게 난 네게 용기를 얻었단다.
사람들은 내가 널 보호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오히려 네가 날 지탱해준 거야.
넌 이미 오래전부터 혼자 설 수 있는 아이였지. 다만 아주 착해서 내 곁에 머물러 있었던 거란다.
너무 슬퍼하지 마. 사람이 죽는 건 그냥, 아무 일도 아니야.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지. 그냥 그런 일인 것뿐이야. 너희의 엄마로 살아온 세월은 정말로 근사했단다. 그러니 미안해하지도 말아라. 그리고 용기를 내렴.
내 아가 사랑한다.」
중간부터 눈이 흐려져 제대로 글자를 읽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뚝뚝 떨어지는 눈물로 엠마의 글자가 점점 번졌다.
당황해 얼른 소매로 문질렀지만, 오히려 글자는 형체를 잃어갔다.
“어어으으어, 이 쓸모없는 자식! 난 왜 매번 모든 걸 망치는 거야!”
엠마가 암이 걸렸다는 걸 알고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터지자, 걷잡을 수가 없었다.
숨이 턱턱 막혀 꺽꺽대며 난 등을 구부린 채 이를 악물었다. 답답해 죽을 것만 같아 주먹으로 가슴을 내리치며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입만 열면 그녀에게 상처 주는 말만 했던 날 저주했다.
후회는 늘 한발 늦게 찾아온다. 엄마 없는 삶은 상상해본 적도 없다. 괴로워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헐떡이며 몸부림쳤다.
쾅!
“너 설마!”
올리버가 방에 뛰쳐 들어왔다가 멍하니 서서 날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어 바닥에 놓인 편지를 주워 읽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야? 메이슨 괜찮아?!”
뒤늦게 노아가 방에 뛰쳐 들어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설마 올리버 울어?”
“시끄러워. 눈에 먼지가 들어갔을 뿐이야.”
“큰 먼지가 들어갔나 봐?”
“네 눈에도 먼지가 들어간 것 같으니 신경 꺼.”
난 눈물을 줄줄 흘리며 형제들을 바라보았다. 도움이 필요했다.
“엄마에게 데려가 줘. 제발.”
내가 내민 손을 올리버와 노아가 붙잡았다.
* * *
선율의 연기를 지켜보던 스탭들 몇몇이 코를 훌쩍였다. 편지를 소매로 문지르며 자책할 땐 덩치 큰 남자 스탭들이 소리 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눈물을 닦는 촌극이 벌어졌다.
그만큼 선율, 아니 메이슨이 토해내는 슬픔은 전염성이 지독하리만큼 강했다. 아마 노라의 편지 내용을 알았더라면 스탭들의 울음소리로 NG가 났을지도 몰랐다.
현장에서 오직 단 한 명만이 입꼬리를 올리고 선율을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후 잭과 톰까지 눈물을 억누르느라 어깨를 들썩이는 모습에 노라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그러나 봉 감독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 그녀의 미소는 자취를 감췄다.
“어떻습니까?”
봉 감독은 슬쩍 뒤를 돌아보며 노라에게 물었다.
“한 번에 오케이를 외친 사람이 할 질문은 아닌 것 같은데?”
“단순한 감상을 묻는 거니까요. 젊은 배우들의 연기가 노라의 눈에 어떻게 비췄을까 궁금하거든요.”
“연기? 저건 연기라고 불러선 안 돼. 그저 내 아이들이 나를 떠올리며 울어주는 거니까. 이제야 철이 든 것 같구나. 못된 녀석들 같으니라고.”
투덜거리며 몸을 돌린 노라는 자랑스러운 아들들을 떠올리며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