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 Chapter 18. 죽음의 인형사 신은혁 - 4 >
강신혁은 닥쳐올 불안한 미래 앞에 부들부들 떨면서도 순순히 번개거미줄과 번개거미집, 베놈 프린세스 소울, 신은아가 마련해준 제복, 클레어가 준 정체 숨기기용 가면, 그 외에도 어제 만들어둔 ‘신은혁 전용 장비’를 모두 장비 슬롯 세트 2번에 저장했다.
왜 굳이 1번 슬롯을 비워뒀는가 하면, 언젠가 만들 자신의 최강 장비 세트를 위해서였다.
[이나희 : 10시에 정문 앞으로 집합.]
옷을 갈아입고 방에서 간단하게 단련을 하고 있자니 스틱에 이나희의 문자가 날아들었다. 강신혁은 그것을 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회답했다.
[나 : 선배 오늘 무슨 일 있어도 놀라지 말고 저 아는 척하지도 마세요.]
[이나희 : 너 뭔가 하게?]
[나:저도 정말 하기 싫은데 그렇게 될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그땐 모르는 척 해주세요.]
잠시 답장이 없던 이나희는 곧 눈동자에서 별이 쏟아져 나오는 캐릭터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불안하기 그지없는 답변이었다.
[이나희 : (이모티콘)]
[이나희 : 기대하고 있을게!]
[나 : 아니 기대하지는 말고.]
[이나희 : 화질 좋은 카메라 들고 갈게!]
[나 : 들고 오지 마. 찍지 마.]
단련을 마친 후 씻고 교복을 입었다. 로열 클래스 전용식당으로 가니 느긋하게 아침을 즐기는 학생들의 모습이 군데군데 보였다.
“신혁아!”
“그래그래.”
이젠 아침마다 카렌, 엘레노어와 함께 식사를 하는 것도 자연스럽게 굳어졌다. 강신혁은 콩소메 스프를 접시 째로 들고 입에 털어 넣곤 한숨을 내쉬었다. 카렌이 그런 강신혁을 어처구니없다는 눈빛으로 보다 물었다.
“오늘 등교해?”
“아니.”
이번 한 주간은 시험기간으로, 시험이 끝난 학생들은 굳이 출석하지 않아도 된다. 다음 주에는 학생회 선거가 치러질 뿐 딱히 빡세게 수업을 하지는 않고, 그 다음 주부터는 방학. 시험에서 해방된 학생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라고 할 수 있었다.
“잘 됐다, 그럼 우리랑 놀러가자! 부단장님, 전시회에 갈까 고민 중이라고 하셨었죠?”
“나, 나도?”
카렌의 말에 다른 누구도 아닌 엘레노어 본인이 화들짝 놀랐다. 이젠 엘레노어와 자신을 붙여놓으려는 속내를 숨길 생각도 없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카렌을 보며 강신혁은 그저 기가 찼다.
“초대권 받으셨다고 했었잖아요, 부단장님.”
“으, 응. 받았오……. 같이, 갈래?”
그리고 엘레노어는 강신혁과의 친밀도를 높이기 위해 기세를 몰아 제안해왔다. 강신혁은 참으로 유감스럽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그것을 거절했다.
“선약이 있어요. 이나희 선배랑 친하시다면서 못 들으셨어요?”
“나희?”
엘레노어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렇구나. 신혁도 월드 루키즈 크리에이터 경연에 나가는구나. 심지어 본선에까지 오르다니.”
“저도 나가는 게 아니라, 선배랑 같이 나가는 건데요. 합작이에요. 동아리 이름으로 나갈 걸요.”
“그렇구나. 둘이 같은 동아리라는 얘기는 들옸는데.”
확실히 둘이 친하긴 한가 보다. 어떤 인연으로 친해진 것일까. 기사왕과 마도왕의 스토킹을 당하는 피해자 모임이었을까? 다소 무례한 강신혁의 생각을 읽지 못하는 엘레노어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나희, 예쁘지?”
“그쪽 화제는 무시할게요. 그리고 그냥 선후배 관계입니다.”
“신혁이 똑똑한데……."
“그렇구나. 실은 오늘 가려던 곳도 거기였는데.”
강신혁이 멈칫했다.
“거기라니 어디요? 월드 루키즈 크리에이터 경연 대회?”
“응. 초대장, 나희한테 받았오.”
"......."
강신혁의 입가가 푸르르 떨렸다.
“엘레노어 선배, 오늘 거기 좀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안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신혁도 가는 거지?”
“……네.”
“그럼 갈 거야.”
그야 그렇겠지! 강신혁은 끝내 모든 것을 체념하고 고개를 숙였다.
부디 회장에서 별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일어난다 해도 자신이 들키지 않기를, 이나희가 번개거미줄을 알아본다 해도 부탁대로 입을 다물고 있어주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침식사로 나온 팬케이크와 소시지는 무척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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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이 하나, 금상이 하나, 은상 하나, 동상 하나에 장려상도 하나. 본선이 열 팀이니 그중 딱 절반이 입상하는 셈이네요.”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재능을 지닌 이들이 모여드는 대회다. 본선에 진출한 것만으로 경력에 한 줄 추가하기엔 충분하겠지.”
회장으로 향하는 길. 강신혁의 중얼거림에 운전대를 잡고 있던 이만우가 대꾸해주었다. 동아리의 이름으로 나가는 것이니 담당교사인 이만우가 인솔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저한텐 입상해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그건 너희가 신영이니까 그런 거지.”
“과연.”
비록 생산계열 전문교육을 실시하지는 않는다 해도 신영은 세계 최상위 엘리트 교육기관. 입상하지도 못할 거라면 어중간하게 생산 계열에 손을 댈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넌 지금 입상 걱정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나머지 놈들과 얼마나 큰 차이로 대상을 타느냐가 중요하지.”
“얘는 야금술 금수저라 지가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 할아버지.”
“너는 너무 우쭐해하지 마라.”
“아 쫌.”
호텔에 도착한 일행은 도어맨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섰다. 강신혁과 이나희가 각각 신영의 제복을 단정하게 갖추어 입고 있었기 때문인지 대단한 주목을 받았다. 어쩌면 이나희의 미모 덕분인지도 몰랐다.
“봐봐, 저기 여자. 신영이야.”
“혹시 경연에 참가한 건가?”
“무슨, 구경하러 온 거겠지. 신영에 제작자 없잖아.”
호텔에서 경연이 열리는 만큼 그들과 비슷한 목적으로 온 다른 학생들도 제법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이 강신혁과 이나희를 보고 화들짝 놀라하며 소곤거리고 있었다.
강신혁은 새삼 신영의 위세를 실감했다. 히어로 유니버스니, 연금술사와 뇌제니 하는 양반들과 어울리다 보니 솔직히 신영도 자그만 우물처럼 보일 때가 많았지만…… 아마 저들에겐 다르겠지. 묘한 기분이었다.
“흐음, 예전에 신영에 진짜 대단한 제작 계열 능력자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 말을 한 것은 학생이 아닌, 그들을 인솔하고 있던 청년이었다. 아마 교사일까. 그의 시선은 이만우를 향해 빤히 꽂히고 있었다.
“선생님, 괜찮은 거예요?”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이다. 너를 키우려 마음먹은 시점에서 이미 각오하고 있었으니까.”
"......."
걱정스레 묻는 강신혁, 코웃음을 치며 대꾸하는 이만우. 그런 이만우를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째려보는 이나희. 다소 특이한 구성의 3인은 직원의 안내를 받아 곧장 17층 컨벤션 홀로 향했다.
“와, 경비 삼엄한 거 봐. 아티팩트 때문에 이러는 거야?”
"그것도 있다만 이 자리는 아티팩트 제작업계의 미래를 판단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온갖 산업체의 대표들과 무력 길드의 대표들은 물론 각국 정부도 주목하고 있지. 요인들이 많다는 얘기다.”
“여기서 대상 타면 진짜 짜릿하겠다.”
이만우의 말에는 조금의 과장도 없었다. 본선에 오른 팀은 열 팀에 불과하지만 경연을 보러 온 사람의 숫자는 그 백 배는 되는 듯했다. 그나마도 참가 권한이 있는 사람들을 거르고 걸러 이렇게 된 것이니 감히 이 경연의 위상을 알 법 했다.
실제로 회장에는 강신혁이 뉴스에서 본 인물들이 많았다. 신영 체육대회에 찾아왔던 손님을 상위 10%로 압축하면 이렇게 될 것 같았다.
“야, 후배. 우리 역시 그걸로 내자.”
“이미 늦었다니까요. 그리고 그거 말하지 말라고.”
“음? 뭐냐, 저번에 둘이 만들던 걸 말하는 거냐? 녀석들, 내가 모르는 데서 사이가 많이 좋아졌구나.”
강신혁의 속도 모르고 흐뭇하게 웃는 이만우의 모습이 괜히 얄미웠다. 그러는 동안에도 회장 안에 점점 사람들의 모습이 늘어났다. 그 가운데에는, 당연하지만 뇌제와 연금술사의 모습도 있었다.
“뇌제다! 야, 뇌제야. 가서 인사하자. 나도 소개시켜줘.”
“아 지금 일하는 모습인 거 안 보여요?”
뇌제가 강신혁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얘기를 이만우로부터 들은 바 있는 이나희가 깐족대며 강신혁을 놀렸다.
그러나 지금 뇌제, 신은아는 어디까지나 협회의 정복 차림으로 경계를 서는 모습. 실제로 그녀에게 관심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다가가고 있었지만 그녀는 싸늘한 시선 한 번으로 그 모두를 뿌리치고 있었다.
“오, 신혁이 왔다!”
“헉!”
대신 강신혁을 아는 척 하는 이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클레어.
레이스가 달린 블라우스에 쫙 달라붙는 스키니 진을 입고 상큼한 매력을 발산하며 회장 내부의 시선을 자석처럼 끌어당기고 있던 그녀가 대뜸 다가와 강신혁의 어깨에 애교스럽게 몸통박치기를 한 것이다.
"어......."
몸통박치기를 당한 것은 강신혁인데 뒤로 물러난 것은 어째선지 이나희였다. 덤으로 주위 사람들도 그 비슷한 모습이었다. 강신혁은 제 이마를 짚었다.
“클레어 누나, 모르는 척 하는 거 아녔어요……?”
“에이, 지금은 괜찮잖아. 그보다 너 사람들 앞에 나가서 대상 받아야 되는데 머리도 안 세웠어? 가만 있어봐, 내가 직접 개발한 왁스로 세팅해줄게.”
“괜찮거든요? 진짜 괜찮거든요? 그리고 대상 받는다고 정해진 것도 아니거든요?”
더구나 왁스를 바르고 있다가 변신(변신이라고 스스로 말하고 말았다!)하게 되면 정체가 그대로 들통 나지 않는가!
“헐, 후배 너……."
“뭐야, 이 예쁜 애는? 아, 동아리 선배? 안녕! 나 연금술사야.”
“네, 넵. 안녕하세요.”
대체 누가 누구보고 예쁘다고 하는 걸까, 이나희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클레어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클레어는 두어 번 가볍게 손을 흔들더니 놓고는 이번엔 이만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 그쪽이 대야장님이신가보네.”
“……그렇소만.”
“만나서 반가워요. 신혁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클레어는 이만우에게도 악수를 청했다. 이만우가 당황하면서도 그녀의 악수를 받아들이자, 그녀는 만족스럽게 웃곤 말했다.
“여태 신경 많이 써주신 것 같던데, 앞으로도 신혁이 잘 부탁해요. 얘가 노련한 것 같으면서도 묘한 부분에서 어리숙한 데가 있어서. 이쪽에서 해나가려면 업계 대선배의 도움이 절실하거든요.”
“누나가 제 엄마예요?”
“아니, 실은 비밀을 품은 소년의 보호자 신분으로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주위 사람들에게 당부를 남기고 사라지는 역할을 한 번 해보고 싶었어.”
“그 말 때문에 완전히 엉망이 됐잖아요.”
클레어의 중2병은 오늘도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소원은 성취했다는 듯 뿌듯하게 웃고는 마지막으로 강신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대상 타면 치킨 사줄게. 그럼 좀 있다 봐!”
그 말을 남기고 떠나가는 클레어에게 주위 사람들이 여럿 달라붙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들 대부분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줄 뿐 제대로 상대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모습에 그 이만우조차 멍한 표정을 지었다.
“……후배.”
그러던 중 클레어와 악수를 했던 자신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나희가 조용히 말했다.
“나 후배가 누구한테 차였다는 건지 이제 알겠어.”
“조용히 합시다 좀.”
“상대가 연금술사면 차여도 인정…… 와…… 놀려서 미안……."
“지금 그게 놀리는 거거든요?”
“나보다 예쁜 데다 가슴까지 나보다 큰 여자는 레알 처음 봄……."
“진짜 뻔뻔하네 이 사람.”
한편 이만우는 자신의 손녀와는 다른 방향으로 감탄했는지, 떠나가는 클레어의 뒷모습을 보며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친하냐?”
“네, 뭐어.”
“차였지만.”
“놀려서 미안하다면서요.”
“네게 도움이 많이 될 사람이구나. 이거 우리 손녀도 지지 않으려면 분발해야겠어.”
“우리 이제 그만 자리 가서 앉죠.”
강신혁은 어느덧 자신의 뒤통수에 꽂히는 싸늘한 시선…… 아마도 신은아의 것일 터인 그 냉혹한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일행을 이끌고 이동했다.
그로부터 30분 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모으며 비로소 경연 대회 본선 결과 발표식이 진행되었다.
말해두자면, 장려상을 탄 작품은 D+랭크의 아티팩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