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 Chapter 18. 죽음의 인형사 신은혁 - 3 >
“신혁아, 너 무슨 일 있었구나?”
“왜 바로 들켰죠!?”
그 날 밤, 프론트라인 바에 출근해(이젠 혼자 오가고 있었다.) 제법 익숙해진 수트 차림으로 갈아입고 나온 강신혁을 보며 클레어가 대뜸 그런 말을 내뱉었다. 강신혁이 기겁하여 물러서자 클레어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냥 발걸음이 묘해서. 침울한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활달해지고, 꼭 장마철 하늘 같이.”
“명탐정이세요?”
“그래서 무슨 일인데? 여자? 아, 얼굴표정 변하는 걸 보니 여자 맞네.”
고작 몇 마디 만에 정답이 나와 버리고 말았다. 강신혁은 제 얼굴을 가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츠쿠요라고 아시죠.”
“아, 은아가 맨날 욕하는 여자.”
“그 여자가 마이 룸에 찾아왔었거든요.”
“헐, 그럴 수도 있구나. 지구로 들어온 거야?”
“그건 아니고 제 마이 룸에만 있다가 원래 세계로 돌아간 것 같아요.”
마이 룸은 차원과 차원을 잇는 중간차원의 공간. 엄밀히 말하면 어떤 차원도 아니라고 할 수 있고, 따라서 다른 회원의 룸을 방문하는 것은 해당 차원을 방문하는 것보다는 훨씬 허들이 낮았다. 물론 이것도 VIP씩이나 되어야 가능한 일이긴 했지만 말이다.
“가만, 그 여자가 네 신상을 위협한다고 하지 않았었어? 만나서 괜찮았던 거야?”
클레어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강신혁의 마음에 푹 꽂혔다. 누나는 이렇게 순수하게 나를 걱정해주고 있는데 나는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아니, 내가 당한 거지만!
“제가 작업하는 걸 봤거든요. 아무래도 모루로 인정해줄 모양이에요.”
“응? ……그렇다는 건?”
전생의 모루를 사랑하던 츠쿠요는 강신혁이 모루의 아이디를 쓰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며 그에게 아이디를 지우라는 메시지를 보내 왔던 여자지만, 강신혁이 작업을 하는 것을 보고 그를 모루로 인정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남는 수순은 하나뿐인데, 하고 살짝 긴장된 표정을 짓는 클레어. 강신혁은 도무지 그녀를 속일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을 뿐더러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에게 이런 사실을 숨기기도 꺼림칙해 그만 순순히 털어놓고 말았다.
“키스를 당했습니다.”
“역시나! 은아보다 과격한 성범죄자잖아!”
지금 그 문장에는 ‘은아는 상대적으로 덜 과격한 성범죄자’라는 뜻이 담겨있는데 그 부분은 괜찮은 걸까, 일단 신은아가 그에게 노골적으로 성적인 접촉을 한 적은 없는데……. 두 사람의 우정을 걱정하는 강신혁의 마음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채 클레어가 물었다.
“아니, 그래도 아직 몰라. 입술만 닿았어?”
“입 속 동굴 탐험단이라도 다녀간 것 같았어요.”
“그 여자 최악이네!”
아직도 그녀의 혀가 그의 입 안을 더듬고 지나간 감촉을 떠올리면 등골이 오싹하며 절로 몸이 긴장되었다. 사춘기 청소년에게는 지나친 자극이었다. 만약 모루의 기억이 없었더라면 오늘 내내 방 안에 뻗어있었을지도 몰랐다.
“괜찮아? 누나가 대신 따져줄까?”
걱정스러운 눈으로 강신혁을 살피며 한편으로는 츠쿠요에게 화를 내는 클레어의 모습에 강신혁은 살짝 묘한 기분이 들었다. 기쁘면서 동시에 살짝 서운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누나는 화 안 내요? 누나 좋아한다 해놓고 다른 여자랑 키스한 건데.”
“그야 짜증은 나지만, 네가 당한 건데 너한테 화를 내면 그건 번지수가 틀린 거잖아?”
클레어는 그렇게 말하며 강신혁을 다독여준 직후 자신이 말실수를 했음을 깨닫고 경직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 담긴 의미를 강신혁이 곰곰이 씹어보기도 전에 다행히도 출입구가 열렸다.
“나 왔어!”
"......!"
"!"
몸에 딱 맞는 검은 수트, 초인협회 특무부 제복을 입은 신은아가 바를 찾아온 것이다. 오늘은 머리를 올려 묶어 목덜미를 고스란히 노출하고 있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강신혁과 클레어는 그녀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시선을 교환하며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츠쿠요와 있었던 일이 신은아에게 들키게 되면 그냥은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둘 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서 와요, 선배.”
“응? 할부지…… 후배 무슨 일 있었어?”
그러니까 다들 그걸 어째서 보자마자 안단 말인가! 강신혁이 클레어에게 필사적인 사인을 보내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내가 장난 좀 쳤거든. 하여간 귀엽다니까.”
“헤에 …… 무슨 장난?”
“은아야, 부탁이니까 그렇게 웃는 거 그만두지 않을래? 진짜 별일 안 했으니까……."
"......."
신은아는 드라이아이스보다 차가운 시선을 클레어에게 꽂았으나 이내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도 친구에 대한 믿음이 의심을 상회한 모양이었다.
“후배, 이번 주 금요일 바빠?”
“금요일이라면 네, 아티팩트 경연에 참가하게 되어 있어서.”
“오, 신혁이 나가는구나. 다 쓸어버리겠네.”
“..어라?”
클레어가 화제가 전환된 것에 안도하며 느긋이 박수를 치는 반면, 신은아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말을 이었다.
“실은 금요일에 신은혁 명의로 임무를 수행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물론 나랑 같이.”
강신혁은 여름방학이 되면 본격적으로 신은아와 함께 이중신분, 신은혁의 이름으로 여러 던전과 게이트를 탐색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특무부 대원이라고 해서 마냥 게이트 전투에만 매진할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그리 부담되지 않는 외부 임무도 몇 개 같이 수행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그 임무 얘기인 모양인데…….
“저녁이라면 시간을 낼 수 있을 거예요. 발표를 할 때까지만 거기 머무르다가 빠져나오면 되거든요.”
“그게 사실 임무수행지가 거기라서……. 월드 루키즈 크리에이터 아티팩트 경연대회 맞지?”
“마, 맞아요.”
경연은 서울 종로구의 초인상가와 인접한 5성 호텔 루브론의 17층 컨벤션홀에서 진행된다. 본선에 오른 이들은 모두 해당 호텔에 공짜로 1박을 할 수 있었다. 본선 진출자라고 해봤자 열 팀 밖에 되지 않았지만.
“실은 그곳이 노려질 수가 있어서.”
“초인상가가 코앞인데?”
“중요한 인물들이 많이 참가해. 클레어 너도 알잖아.”
어라, 이게 그렇게 대단한 대회였단 말인가? 강신혁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자니 클레어가 갑자기 폭탄을 터트렸다.
“하긴 나도 거기서 대상 타고 많이 유명해졌지.”
“클레어 누나가!?”
“놀랄 일이야? 나 연금술사잖아.”
“아뇨, 거기에 놀란 게 아니라…… 혹시 이 대회 규모가 그렇게 커요?”
“앞에 월드라고 붙었잖아.”
“월드만 붙여놓고 실제로는 지역구 사업인 경우가 많잖아요.”
“이건 진짜 세계구급이야.”
강신혁도 이만우의 얘기를 듣고 전국구 정도까지는 기대하고 있었지만 설마 정말로 전 세계의 젊은 장인들이 모조리 모여드는 대회였을 줄은 몰랐다.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제라도 다른 걸로 교체하면 안 되나.”
“네가 신경 쓰이는 부분은 거기구나.”
“이번에 제출한 거 B급밖에 안 된단 말이에요.”
“대상이네.”
“그러게, 대상이네.”
신은아가 짝짝 박수를 치다 말고 문득 본제를 떠올렸다.
“어쨌든 잘 됐어. 후배는 평범하게 참가자로 들어가. 대상 받고 나서 안 들키게 옷 갈아입고 나랑 합류하면 되니까.”
“중간에 사건 터지면 재밌겠다. 시상식에 참가한 일반 학생 강신혁이 그 자리를 비우더니 갑자기 정체를 감춘 협회의 엘리트가 나타나서 적들을 상대하는 거야.”
“본격적으로 중2병 같아지기 시작하니까 그만해요, 누나.”
게다가 왠지 있을 법한 일이라 더 불길하게 들리지 않는가! 강신혁이 팔에 돋은 소름을 쓸어내리는데, 클레어가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신은아에게 말했다.
“은아야, 거기 나도 갈 수 있지? 신혁이가 대상 타는 거 볼래.”
“클레어가 와주면 고맙지.”
신은아가 반색하며 곧장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강신혁은 점점 더 자신이 대상을 탈 수 있을지 불안해지기 시작했지만 클레어는 그 여부는 전혀 의심하지 않고 흥겨운 콧소리를 내며 잔을 닦았다.
그때 마침 문이 열리고 오늘의 첫 손님이 들어왔다. 손님은 뇌제가 있는 것을 보고도 조금도 놀라워하지 않고 들어와 바 테이블에 앉았다.
“뇌제님은 오늘도 여전히 바텐더 친구를 노리나보네요.”
“뭘로 드릴까요?”
괜한 소리 하지 말라는 투로 강신혁이 빠르게 손님의 말을 차단했다. 프론트라인 바에서 며칠 일을 하다 보니 이젠 현역으로 활동하는 초인들을 상대로도 태연히 접대를 할 수 있게 된 강신혁이었다.
“진 피즈. 오늘은 젊은 친구가 만든 걸로 부탁합시다.”
“알겠습니다.”
그로마스에서 두 달간 클레어로부터 강습을 받은 강신혁은 타고난 손재주나 특성의 덕도 있어 그녀의 칵테일 기술을 모조리 흡수하는 데 성공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연금술사인 그녀가 타는 칵테일에는 딱히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아도 특별한 힘이 깃든다는 것인데, 그런 만큼 더 비싼 값을 받기 때문에 앞으로 사냥을 나갈 예정이 잡혀있지 않은 손님들 중에서는 강신혁에게 칵테일을 부탁하는 손님도 제법 늘었다.
“그래서 젊은 친구.”
“네, 손님.”
중년을 향해 가는 현역 초인 아저씨가 세이커에 진과 레몬 주스를 붓고 있는 강신혁을 향해 툭 던졌다.
“친구 얼굴을 딱 보니 알겠는데, 어떤 여자랑 잔 거야?”
“아니거든요!?”
콧대 위로는 가면으로 가리고 있는데 뭘 어떻게 얼굴을 보고 알아낸단 말인가!
“누가 누구랑 자!?”
“안 잤어!”
“아, 그럼 남자인가?”
“아니라니까!?”
기껏 화제를 돌리는 떼 성공한 때 터져버린 뇌제라는 이름의 폭탄을 수습하기까지 꼬박 세 시간이 걸렸다. 참고로 아무렇지도 않게 폭탄을 터트린 손님은 뇌제가 폭발하는 것을 보며 조용히 퇴장하려고 했지만 그렇게는 되지 않았다.
클레어는 신은아에게 한 달간 프론트라인 바 출입금지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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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경연대회가 열리는 금요일 아침이 찾아왔다.
- 오늘의 로그인 보너스로 공격력 증가 버프가 적용됩니다. 만으로 24시간, 모든 공격 행위에 30%의 긍정적 보정이 주어집니다.
잠에서 깬 강신혁의 눈앞에 떠오른 로그인 보너스 메시지는 실로 공격적이었다.
예전에 스킬 효과가 증폭되는 버프를 받은 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그것의 상위호환 느낌이 들었다. 다만 타이밍이 실로 떨떠름했다.
“왜 하필 오늘이죠. 꼭 오늘 뭐가 일어날 것처럼.”
- 로그인 보너스는 룰렛과 달리 완벽한 랜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회원님, 오늘이야말로 룰렛을 돌리는 것이 어떨까요.
“제 말 제대로 들으셨어요? 관리자님 지금 그 말은 오늘 뭔가가 일어날 거라고 확신하는 걸로밖에 안 들리는데!?”
이전 룰렛 코인 다섯 개가 모인 이후 관리자는 줄곧 룰렛을 돌릴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룰렛 코인은 일단 5매가 모이면 그것을 쓰기 전까지는 새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라며.
다만 강신혁은 룰렛 코인을 받지 못하면 그 대신 다른 로그인 보너스…… 즉 스테이터스 성장에 도움이 되는 버프를 받을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가만히 놔두고 있었다. 애초에 룰렛을 돌려야 할 정도로 뭔가가 절실히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 룰렛 코인은 로그인 보너스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보상입니다. 5매가 모일 때마다 돌려두는 것이 좋습니다.
“알았어요, 알았어…… 돌리죠 뭐.”
이제 강신혁도 어느 정도 실력에 자신이 붙었고, 딱히 위험한 일에 도전할 예정도 없었으니 이쯤에서 관리자의 말을 따라주기로 했다. 사실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관리자의 말을 따라서 손해를 볼 것이 없었다.
- VIP 룰렛을 돌립니다. 원하는 타이밍에 다트를 던져주세요!
강신혁은 어느덧 손에 들린 다트와 짧은 공명을 했다. 그리고 무심을 가장하여 휙 내던졌다. 다트가 반대 벽면의 룰렛에 명중해, 그것이 천천히 돌아가다 멈추었다.
- 축하드립니다, 회원님! 히어로 유니버스의 히든 시스템이 오픈되었습니다!
“오?”
관리자의 오색으로 반짝이는 메시지가 강신혁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러고 보면 VIP 룰렛에는 개인의 업을 초월한 영역의 보상도 숨겨져 있다고 했었지. 설마 그것인가? 잔뜩 기대하는 강신혁의 눈앞에 관리자의 메시지가 재차 떠올랐다!
- 장비 슬롯 기능이 오픈됩니다! 총 세 개의 장비 슬롯에 옷과 무기를 비롯한 장비를 저장해두었다가, 그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순식간에 전신 장비를 교체할 수 있게 됩니다. 장비 슬롯에 저장한 장비는 능력이 10% 증폭됩니다!
“역시 오늘 뭔가 일어나는 것 맞잖아!”
클레어가 말했던 상황에 그대로 들어맞는 기능이 아닌가! 강신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 질렀다.
……아니, 물론 엄청나게 좋은 기능인 건 맞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