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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 Chapter 17. 성장이 너무 빠른 남자 - 4 >

“이번엔 네 마음대로 만들어도 돼.”

강신혁과 마찬가지로 셔츠를 벗어던지고는 민소매 셔츠 차림이 된 이나희가 허리에 양팔을 얹고는 등을 쭉 당겨 기지개를 켰다. 순간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매혹적인 광경이었다. 역시 일부러 저러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이나희는 강신혁의 그런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제 할 말만 했다.

“오해하지는 마. 저번에 할아버지한테 들었거든. 내 뜻대로 만들다가 실력발휘를 제대로 못하는 바람에 삐졌다며. 그러니까 이번엔 네 마음대로 해보라고. 내가 너한테 맞출 테니까.”

“감사한 제안이네요…… 일단 재료 확인 먼저 하시죠.”

강신혁은 인벤토리에서 미리 정련해둔 금속 주괴를 한 덩이 꺼냈다. 그로마스에서 얻은 금속 중에서는 베나딜라이트 다음으로 품질이 좋은 희귀도 A랭크의 금속, [라이트닝 우로트]였다.

“뭐야 그거, 나 모르는 건데. 미확인 아냐?”

“맞을 걸요. 저번에 실습으로 들어간 게이트 안에서 운 좋게 얻었어요.”

“거짓말 같은데.”

이나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강신혁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포기했는지 어깨를 으쓱였다.

“나야 좋은 물건만 만들어내면 되니까.”

“맞아요. 경연에 낼 것도 아니고.”

“그럼 그냥 순수하게 이걸로 나랑 같이 뭔가가 만들고 싶어서?”

“그런 셈이죠. 설욕전이요.”

이나희는 그 말을 듣고 ‘나한테 수작 걸고 싶어서 이러나?’하고 순간 생각했지만, 강신혁의 진지하기 그지없는 눈을 보고 역시 그건 아니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더구나 듣자하니 막 여자한테 차인 참이라지 않는가.

“막 차여서 더 그럴 수도 있긴 하지만…… 일단 믿어볼까.”

“죄송한데 선배님, 그 얘기 계속 하실 거?”

“아이고 재밌다.”

정색하는 강신혁을 본 이나희가 건성으로 박수를 치며 테이블 위에 굴러다니던 종이를 당겼다. 도르르 말려있던 백지를 잡아당겨 펼치고는 그 위에 손을 뻗으며 강신혁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마법금속의 특성 같은 건 있어? 내 감정 능력으로는 그걸 아직 읽어낼 수 없어.”

“간단한데요. 뇌속성이에요.”

“? 금속 자체에 속성이 있는 거야?”

“그런 셈이죠?”

속성을 품고 있는 금속은 무구의 재료로서 최상급이다. 발로 만들어도 속성무기가 되기 때문이다. 아티팩트가 될 확률도 높다. 당연하지만 무척 희귀하고, 부르는 게 값이었다.

라이트닝 우로트는 이전의 그로마스에는 없던 금속이다. 신은아가 베나딜라이트를 받아들여 성장한 후, 요르문간드의 침입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발한 뇌전에 영향을 받아 세상을 이루던 일부 금속이 변화한 결과물이었다.

특수한 상황에서 특수한 능력과 특수한 금속이 만나 탄생한 금속. 당연히 채굴량도 적었고, 그로마스에서 이것저것 만들면서 소모한 탓에 지금 남은 양도 얼마 되지 않았다.

물론 그 덕분에 거래 게시판에서 거래를 하며 새로운 사람들과 안면도 트고, HP도 벌어들일 수 있었으니 후회는 하지 않지만.

“야야야......."

금속을 바라보는 이나희의 시선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처음부터 흔쾌히 도와주려는 모습이긴 했지만 지금은 아예 열정이 흘러넘쳐 활활 타오를 것만 같았다. 씩 웃고 있는 강신혁에게 이나희가 대뜸 외치듯이 말했다.

“우리 스태프 만들자!”

“사욕이 철철 흘러넘치는 말씀이네요.”

“아, 들켰어?”

그야 욕심을 숨기려는 생각도 없었으니까. 강신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번엔 제가 만들고 싶은 게 있어서요.”

“너 제법 사람 약을 올릴 줄 아는구나……!”

“아직 남아있으니까 실망하지 마세요. 저도 그렇게 사람이 나쁘진 않거든요.”

“심지어 더 있어!?”

강신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혼자 생각하던 이나희는 생각을 정리하듯 손뼉을 쳤다.

"좋아, 앞으로 네 모든 생산활동에 전면적으로 협력할 테니까 내가 졸업하기 전에 그거랑 똑같은 주괴로 내 무기를 하나 만들어줘. 어때.”

“좋은 조건이네요.”

이나희의 실력은 저번 협업으로 이미 확인한 바. 물론 그녀보다 더 뛰어난 인챈터들도 찾아보면 있겠지만 같은 학교에서 동아리 활동으로 함께하며 많은 시간을 낼 수 있는 인챈터는 그녀뿐일 것이다. 주괴 하나를 조건으로 그녀와 원활한 협력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면 강신혁에게도 충분히 남는 조건이었다.

사실은 굳이 조건을 달지 않아도 같은 동아리의 선배인 만큼 신경을 써줄 셈이었지만 본인이 먼저 그렇게 말해오는데 그럴 필요 없다고 사양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강신혁이 제안을 수락하자 이나희는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

“그럼 교섭 성립이네. 내가 마음대로 부려먹는 남자는 있어도 날 마음대로 부려먹는 남자는 네가 처음이야. 영광이지?”

“영광이긴 한데 표현 일일이 그런 식으로 해야 하나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는 강신혁에게 이나희가 물었다.

“그래서 뭘 만들 거야?”

“아, 그렇죠. 여러 모로 생각을 해봤는데 좀 실험적인 시도를 해보고 싶어져서요.”

강신혁은 이나희에게서 펜을 받아들어 백지 중앙에 선을 쭉 그었다. 이나희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이게 뭔데?”

“실이요. 당연히 그냥 금속 실을 만들자는 얘기는 아니고……."

“그야 제작의도가 있겠지만…… 너 지금 나한테, 가느다란 실 위에 마법진을 그리라는 얘기를 하는 거야?”

역시 이만우의 손녀딸답게 제작과 관련된 얘기를 할 때는 이해력이 터무니없이 좋았다. 강신혁은 히죽 웃으며 말없이 엄지를 세웠다. 이나희는 그의 엄지를 부러트려버리고 싶었다.

“실패하더라도 상관없어요. 만들어보고 싶어요. 도와주실 거죠?”

이나희는 역시 그만두자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강신혁의 입은 웃고 있어도 눈은 어디까지고 진지한 채였다. 그녀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곤, 뇌속성 스태프, 뇌속성 스태프, 하고 중얼거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 이번엔 삐지지 마.”

“저번에도 안 삐졌었거든요.”

“그래서 결국 무슨 실을 만들고 싶은 건데?”

“복잡한 걸 바라지는 않습니다만, 일단은……."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설계도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조금 늦게 부실 안에 들어온 이만우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곤 멈칫하곤, 이내 다시 조용히 부실을 나섰다.

‘이거 어쩌면 우리 손녀한테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겠어.’

노인이 야심찬 손녀사위 계획의 시동을 거는 순간이었다. 그 예비 손녀사위가 오늘 밤에 연금술사와 뇌제 사이에 둘러싸이게 되리라는 것은 차마 모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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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기간에 본격적으로 돌입한 신영의 실전교육은 한층 난도가 높아졌다. 거기에 더해 필기 수업 시간에는 과제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학생들은 정말로 지난 주일이 그들의 마지막 휴일이었음을 통감했다.

“강신혁 왜, 저렇게 잘 달려……!”

“신인왕이잖아, 신인왕.”

“왜 우리 반에 강신혁이랑 백인하가 다 있는데……! 야, 그만 뛰어!”

그러는 와중에도 강신혁만은 유독 쌩쌩했다. 스테이터스는 이미 1학년 수준을 한참 벗어난 데다, 필기는 원래부터 1학년 탑에 가까웠으니 실기 필기 양면으로 부담을 받을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으어어어…… 시녹, 헬프……!”

“한국말로 해라.”

“강 선생님, 과제, 과제가 완전히 모르겠어요……!”

덤으로 백인하는 실기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탑이지만 필기에서 발목을 잡히는 타입이었다. 본인은 하면 되는 아이라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강신혁은 그래봤자 진짜로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게 시험기간에 놀러가자는 얘기나 하고 있으니까.”

“그건 페이크였고 사실은 뒤에서 선거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그 얘기엔 신빙성이 좀 있어보였다. 기말고사가 끝난 학기말에 치러지는 학생회 선거, 백인하는 그 선거에 나갈 예정이었던 것이다.

“흠…… 좋아, 보여줄게.”

“시뇨기 사랑해!”

“개소리하면 안 보여준다.”

“죄송합니다, 강 선생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백인하가 학생회 부회장이 된다면야 아무래도 강신혁의 학교생활도 조금 편해지겠지. 그런 타산 하에 강신혁은 백인하의 과제를 조금씩은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과제를 베껴서 해결하는 것으로 필기과목 시험까지 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얘들아, 오늘 3교시에 대련한다는데.”

“시험공부로 쌓여가는 스트레스를 반 친구를 상대로 풀라는 의민가.”

“그리고 거기서 지면 평가점수가 깎이겠지.”

“최악이네 진짜.”

3교시에 있는 수업은 [무기술 단련2] 과목이다. 강신혁은 주위 애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어딘가 그리움마저 느꼈다.

강신혁이 영력을 얻고 처음으로 도우진을 꺾었던 것이 바로 그 수업이지 않던가.

“오늘도 도우진 상대려나.”

“너랑 나랑 붙이지 않을까?”

강신혁의 과제를 베끼고 있던 백인하가 별 감흥도 없이 말했다. 강신혁이 그를 빤히 바라보자, 백인하는 씩 웃으며 그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더 강해진 거 알고 있어. 이젠 진짜 나랑 해볼 만하잖아?”

“글쎄.”

대충 둘러대긴 했지만 내심 백인하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을 그도 하고 있었다.

그로마스에 다녀오기 전이었다면 여전히 무리였겠지만 지금은 그의 스테이터스도 평균 A랭크를 상회하지 않던가.

이전 측정했던 결과에서 변하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 민첩은 백인하가 S-랭크로 한 단계 앞서고 있지만 반대로 힘은 강신혁이 A랭크로 한 단계 앞서고 있다. A랭크와 S랭크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평균적으로는 크게 차이나지 않는 수준인 것.

물론 백인하는 특성으로 자신의 속도를 더 끌어올릴 수 있지만 특성으로 더욱 강해지는 것은 강신혁도 마찬가지.

그렇게 되면 남는 것은 마력의 랭크 정도인데…… 거기서 조금 차이가 난다 쳐도, 그는 마력이 아니라 영력을 갖고 있는 만큼 랭크보다 강한 힘을 낼 수 있었다.

“언젠가 올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이렇게 빨리 붙게 될 줄은 몰랐네. 대체 어떻게 된 성장세야?”

“글쎄다, 직접 붙어보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

둘 사이에 기분 좋은 긴장감이 피어났다. 마침 수업시간이 5분 남았음을 알려주는 예령이 울리자, 둘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갈까?”

“가자.”

“야야, 저 둘 오늘 한 판 하려나봐.”

“오오오오!”

두 사람이 전의를 불태우는 것을 본 반 학생들은 덩달아 달아올랐다.

입학할 때부터 최강이라며 학교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백인하와, 요즘 한창 신기록을 갱신중인 강신혁. 두 사람의 빅 매치를 드디어 볼 수 있는 것인가 기대하며(즉 시험기간이라는 현실로부터 도피하려 애쓰며) 그들의 뒤를 따르는 학생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그들의 기대는 성취되지 못했다.

“오늘은 보다 다양한 상황에서의 대처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마법학과 선배들의 도움을 받도록 하겠다.”

담당교사인 공준표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며 강신혁은 순간 이 사람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 옆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학생들…… 마법학과 교복에, ‘검정’ 넥타이를 착용한 이들을 보고는 그가 농담을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3학년 선배들과 대련을 하며 마법에 대응하는 훈련을 실시한다. 다들 시험기간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후배들을 도와주겠다고 나선 3학년 I클래스 선배들에게 박수.”

“아, 예. 예……?"

일제히 박수를 치면서도 이건 대체 뭐지, 하고 고개를 갸웃하는 학생들. 마법에 대응하는 훈련이라, 그야 물론 중요하지만 그래도 뭔가 석연치가 않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하필이면 이 시즌에? 3학년생들을?

“시뇩아.”

강신혁 역시 공준표의 대머리를 빤히 노려보며 저 새끼가 왜 이런 짓을 벌이는 걸까, 궁리하던 그때. 백인하가 그를 쿡 찌르며 말했다.

“마도왕이 너 겁나게 노려보는데.”

“마도왕?”

마도왕이라니, 3학년 I클래스에 마도왕이 있었던가. 강신혁이 고개를 드니 과연, 3학년생들 중에서 유독 그를 노려보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주 잘생긴 금발의 남성. 이름은 분명…….

“네가 내 피앙세에게 집적대는 놈이냐?”

그래, 나탄 보댕이었다. 강신혁은 성큼 앞으로 걸어 나와 그를 빤히 노려보는 남자와 마주하며, 어딘가에서 이 비슷한 상황을 겪지 않았던가, 하고 생각했다.

“……일단 묻겠는데 그 피앙세라는 게 누구죠?”

“2학년 K클래스의 이나희다.”

응, 역시 겪었던 것 같다. 강신혁은 웃으며 그에게 대꾸했다.

“잘못 알고 오신 것 같은데요. 물론 이렇게 말해도 안 믿겠죠.”

“나와라.”

마도왕이 오만하게 선언했다.

“네게 예절이라는 걸 알려주지.”

강신혁은 이 신영에 왕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들은 다 이상한 놈들밖에 없나보다 하고 생각했지만, 이내 자신도 그 왕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신인전 같은 건 역시 나가는 게 아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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