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 Chapter 17. 성 장이 너무 빠른 남자 - 2 >
“간단하네요.”
“사실 아주 약간의 암기 능력과 조금의 손재주만 있으면 조주기능사 자격증은 따 놓은 당상이지. 하지만 여기서부터야. 네 오리지널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바텐더라 자칭할 수 없어! 알겠어, 정체불명의 바텐더 케이?”
“신은혁이라고요. 아니 그것도 가명이지만.”
다음날, 강신혁이 장담한 대로 이틀 만에 모든 두더지의 발톱을 만들게 되자 클레어는 그를 대상으로 바텐더 수업을 개시했다.
아무래도 미성년임에도 불구하고 정체를 감추고 바텐더로 활동하는 의문의 능력자라는 설정에 단단히 꽂힌 것처럼 보였다.
‘으음, 아무래도 괜찮은 것 같네.’
클레어는 강신혁을 힐끔거리며 그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태연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어제 그의 고백을 멋지게 걷어찬 후 혹시나 그가 많이 상심하지 않았을까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도 충격이 그리 크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 그건 무척 다행인데 그러니까 괜히…….
‘열 받네. 이 새끼 이거 그냥 혹시나 싶어서 찔러봤던 거 아냐?’
물론 강신혁이 제법 노골적으로 그녀에 대한 호감을 드러내고 있었으니 그런 일은 없으리라 믿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태연한 것을 보면 날 그렇게 많이 좋아하지도 않았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살살 약이 오르는 것이다!
“누나?”
“아, 응.”
어느덧 강신혁이 그녀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요? 뭐 짜증나는 일이라도 있었어요?”
“아니, 아냐. 왜, 그런 일 있으면 네가 해결해주게?”
“당연하죠. 아니, 그래도 무력적인 부분으로는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진짜 얼마 안 걸릴 테니까.”
스스로에게 제법 자신감이 붙은 목소리에, 소년의 풋풋함과 어른의 여유로움이 적절히 조화되어 오묘한 매력을 지닌 표정.
클레어는 그 모습에서 자연히 어제 소년이 했던 고백을, 정면으로 그녀와 마주하던 진지한 눈동자를 떠올리곤 아주 조금 가슴이 두근거렸다. 음, 역시 장난은 아니었던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이 소년은 오스카 남우주연상이다.
그녀는 애써 마음의 동요를 무시하곤 강신혁의 이마에 손가락을 튕겼다.
“얘가 또 폼을 잡네. 뭐가 당연한지 설명해봐.”
“제 입으로 말하라고요? 아무리 그래도 이틀 연속으로 차이면 좀 상처가 남는데요?”
“어쭈우. 그 표정 뭐야, 어? 어?”
“자꾸 찌르면 집중이 안 돼서 비율 틀린다고요!”
그렇게 두 사람이 겉으로 보기엔 커플이 꽁냥대는 것으로밖엔 보이지 않는 수업을 계속하던 찰나, 문득 밖에서 거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두 사람이 일시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알지?)”
“(넵.)"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조금 떨어졌다. 서로에게 품는 생각은 조금 다를지 몰라도 은아를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두 사람의 의견이 같았던 것이다!
그 직후 시어머니…… 아니, 신은아가 공방 문을 두드렸다.
“들어갈게.”
"응."
신은아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테이블 위에 펼쳐진 칵테일 잔과 도구들을 발견하고는 인상을 썼다. 단박에 지금 무슨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은아 너, 후배는 아직 신체적으로 미성년인데.”
정신적으로도 미성년이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는 강신혁 옆에서 클레어가 태연히 대꾸했다.
“하지만 ‘신은혁’은 성인이잖아. 술을 먹이는 것도 아니고 바텐더 좀 하면 어때?”
“중요한 건 내용물이야. 더구나 너, 지금 목적과 수단을 헷갈리고 있는 것 아냐?”
“진짜 누구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건지……."
어깨를 으쓱이며 짧은 한숨을 내쉰 후, 클레어는 딱 한 마디를 내뱉었다.
“신혁이가 직접 타주는 칵테일 마시고 싶지 않아?”
“마시고 싶어.”
“바 테이블에 앉아서 우아하게 칵테일을 마시며, 맞은편에서 마른 수건으로 글라스를 닦으며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는 신혁이와 담소를 나누고 싶지 않아?”
“나누고 싶어.”
두 번 다 조금의 고민도 없이 나온 즉답이었다. 클레어가 훗, 하고 웃으며 신은아에게 악수를 청했다. 신은아도 스스럼없이 손을 뻗어 그녀와 악수했다.
“그럼 오케이인 걸로.”
“응, 고마워.”
“어이!”
신은아가 클레어에게 감사인사를 하는 모습에 강신혁은 참지 못해 태클을 걸고 말았다! 게다가 방금 묘사는 또 왜 이렇게 구체적이란 말인가! 클레어의 중2병의 범위는 대체 어디까지인가!
“바텐더 교육 잘 부탁해, 클레어.”
“나한테 맡겨둬. 내 이상을 구현해보일 테니까.”
“누나는 언제부터 저를 육성하고 있었던 거죠……."
“그보다 후배.”
신은아가 강신혁을 불렀다. 그것은 클레어를 추궁할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강신혁을 순식간에 제정신으로 되돌리기에 충분했다.
“금은서족이 후배를 찾고 있어.”
“제 말대로 됐나보네요.”
강신혁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신은아는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 후배처럼 성실한 노력가에, 재능이 넘치는, 열정적인, 포기를 모르는, 진취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
“적당히 해 이 팔불출아 진짜.”
“무슨 게임 캐릭터의 키워드 소개처럼 됐는데요. ……아무튼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어요. 일단 만나보죠.”
그는 각오를 다지고 밖으로 나갔다. 때마침 시간은 밤. 금은서족이 바깥으로 돌아다닐 수 있는 시간대였다.
“모루님.”
“모루님!”
그를 발견한 두더지 한 마리가 반갑게 외치자 그 뒤를 이어 두더지들이 불쑥불쑥 나타났다. 순식간에 수천 마리의 두더지들이 나타나 그를 둘러싸고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우리를 도와주세요! 우리에겐 모루님뿐입니다!”
“알고 있어요.”
강신혁은 작게 웃으며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은 대량의 발톱, 발톱! 모든 두더지들이 장비할 수 있는 만큼 많은 발톱이었다.
“당신들을 위해 준비했어요. 이제 당신들 힘으로 땅을 팔 수 있겠죠?”
“오오오오오! 역시 모루님……!”
“역시 이분밖에 없어!”
“그래, 전대 지저왕께서는 분명 그것까지 생각하시고 모루님을 모셔온 거야!”
“……음?”
두더지들은 그의 은혜에 탄복했다는 듯이 다시 열정적으로 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강신혁은 그들의 말에서 어딘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분밖에 없다니? 그것까지 생각했다니 그게 뭔데?
그 의문은 금방 풀렸다. 두더지들이 일제히 그에게 절하며 이렇게 외쳤던 것이다.
“우리의 새로운 왕이 되어주세요!”
“모루님, 아니, 모루폐하!”
“폐하!”
두더지들의 말을 강신혁은 순간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녀석들이 뭐라고……?
“2대 지저왕이 되어주세요!”
“길을 잃은 우리를 이끌어주세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주세요! 폐하!”
“우리를 위해 남아주세요!”
"......."
강신혁이 할 말을 잃고 그들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어느덧 뒤에서 다가온 신은아가 그의 팔을 쿡 찔렀다. 그는 거기에 반응할 기력도 없어 고개를 푹 숙였다.
“애초에 기대하지 않으면 배신당할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지. 그래도 기왕이면 여기선 멋진 장면을 보고 싶었는데…… 태생의 한계려나. 이것까지 포함해서 지저왕의 업보라고 생각해, 나는.”
클레어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칵테일이나 만들러 가자. 지금부터는 버진…… 음, 논알콜 위주로 알려줄게.”
“아니, 그래도.”
“좀 더 기다려볼까?”
신은아의 말이었다. 그의 기분을 배려해주는지 섬세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러나 여기서 더 기다린다고 뭐가 바뀔 것 같지도 않았고, 한편으로는 그들을 이끌어줄 이를 찾는 금은서족의 심리가 이해갔기에 괜히 나서서 억지를 부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뇨…… 의미 없을 것 같아요.”
“그래. 잘 생각했어. 은아는? 어떻게 할 거야?”
“글쎄, 어떻게 할까.”
신은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뭐라 들리지 않는 말을 중얼거리더니 강신혁을 힐끔거렸다. 이내 어깨를 으쓱이고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알람 결계 정도는 설치해둘게.”
“아구 우리 은아 착하다.”
“기왕 칭찬받는 거라면 할…… 후배한테 받고 싶어. 그것도 기왕이면 무릎베개가 좋겠어.”
“진짜 쓸데없는 부분에서 솔직하네……."
“모루님!?”
“저희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강신혁이 힘없이 돌아서자 두더지들이 그를 붙잡으려 들었다. 앞발도 두 개고 뒷발도 두 개이거늘 홀로 서지 못하는 가련한 생물들. 불쌍하기는 하지만, 솔직히 지금은 환멸감이 들었다.
그런데 강신혁이 조금 강하게 거절하려던 그때였다.
- 뀨.
그의 품에서 얌전히 자고 있던 오닉스가 돌연 그의 품을 벗어나 두더지들 한가운데에 착지했다. 어리둥절해하며 오닉스를 바라보는 두더지들.
그러나 강신혁만은 오닉스가 무엇을 하려는지 이해했다. 정확히는, 녀석이 입에 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했다.
“이 자식 언제 저걸.”
- 뀨뀨우웃!
오닉스가 힘차게 울며 입에 물고 있던 것을 씹어 삼켰다. 강신혁이 지저왕에게 만들어주었던 A랭크 발톱형 아티팩트를!
- 뀨웃뀨우우웃!
“아앗, 이 녀석이!”
“이 망할 고슴도치가 선대 폐하의 유품을!”
엄청나게 맛있다며 연신 감탄사를 발하면서도 야무지게 아티팩트를 씹어 먹는 오닉스! 녀석이 지저왕의 물건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경악하는 두더지들!
인간 셋이 멀뚱히 서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느덧 아티팩트를 완벽히 먹어치운 오닉스가 기운찬 울음소리와 함께 기합을 주었다. 녀석의 등에 나 있던 무수한 가시가 점점 부풀어 오르며 보다 단단해지고 날카로워지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녀석의 쇠붙이 포식(S+) 스킬로 흡수한 것의 능력을 고스란히, 혹은 개조하여 발현하는 구현(SS) 스킬이 발동한 것이다.
“저거 저대로 괜찮아? 왠지 일본 게임 회사에서 고소가 들어올 것 같은 형태로 변하고 있는데?”
“우리만 입 다물고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요?”
구현을 완벽히 활성화한 오닉스는 한 차례 높이 울더니 전신의 가시를 날카롭게 세웠다. 놀랍게도 그 가시들이 드릴처럼 회전하기 시작했다!
“아, 고소 안 들어오겠네요. 다행이다.”
“하지만 더 위험해 보이는데!?”
- 뀨우우우우우웃!
“오오오오오!”
“이럴 수가……!”
오닉스는 회전하는 가시로 땅을 팠다. 그 속도는 가히 지저왕에 비견될 정도! 두더지들은 순식간에 지하로 사라지는 오닉스를 보며 경악성과 감탄사를 흘렸다.
“그렇다면 저분이……!"
“뒤, 뒤를 따르자! 새로운 지저왕께서 우리를 이끌고 계셔!”
“우오오오오오!"
“발톱, 발톱 챙겨!”
오닉스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것도 잊고 저마다 장비를 챙겨 다급히 지하로 몸을 던지는 두더지들. 수천 마리가 호들갑을 떨며 움직이는 모습이 실로 가관이었다.
마지막 두더지가 구멍 안으로 몸을 던져 사라지는 것까지 확인하곤, 클레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저것들 진짜 저걸로 괜찮은 거야?”
“아마도 괜찮지 않을까요? 두 달 후면 오닉스는 사라지고 없겠지만…… 그때쯤이면 저들도 자리를 잡겠죠.”
이렇게까지 해주는데도 적응하지 못한다면 그때야말로 어쩔 수 없다. 강신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재차 신은아에게 부탁했다.
“오닉스도 끼어있으니까…… 부탁할게요, 선배.”
“응. 지켜줄게.”
신은아의 마법 설치까지 완벽하게 끝난 후, 그들은 한숨을 내쉬며 원래 머무르던 시설로 복귀했다.
그때부턴 무엇을 하든 그들 자유였다. 강신혁은 제법 단단히 마음을 먹은 클레어에게서 바텐더가 되기 위해 필요한 기술과, 덤으로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연금술의 기초까지 교육을 받았고, 신은아는 클레어의 도움도 받아가며 이 세상의 마도를 연구했다.
강신혁은 본격적으로 신체와 무예를 단련하고(성장 증폭 포션의 효과를 확인한 그는 결국 매일 21만 HP를 희생하는 부르주아 식 자가단련에 매진하게 되었다.), 자신이 만들고 싶은 무구가 떠오를 때마다 공방에 처박혔으며, 그 외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두 보주와 신살검을 함께 연구했다.
급성장을 반복하느라 부족했던 여유와 리듬을 찾고, 자신만의 수련법을 정착시켰으며, 두 선배들과도 나름 괜찮은 관계를 구축했고, 뭣보다도 그가 만든 무구들을 히어로 유니버스 거래 게시판에 올리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한 달 반이 흘렀다.
일행은 두 달의 기간을 꽉 채운 차원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복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