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 Chapter 17. 성장이 너무 빠른 남자 - 1 >
만약 만화나 소설이었다면, 이런 쓰레기 같은 전개가 있을 수 있는가 하고 욕이라도 잔뜩 퍼부어주었을 것이다.
지저왕국이 무너진 것을 계기로 종족의 본능을 각성한 금은서족과, 노쇠했지만 지식만은 풍부하게 갖고 있던 늙은 왕. 그의 도움으로 종족은 다시금 이 세상에서 살아갈 요령과 마음가짐을 손에 넣게 된다…….
그런 멋진 장면이 완성되기 직전에 아무런 전조도 없이 나타난 몬스터들에 의해 지저왕이 죽게 되다니. 너무 엉망진창이라 뭐라 불평할 기운조차 나지 않았다.
“전조는 있었잖아.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지을 것 없어, 후배.”
“아뇨, 그건 저도 알지만요. 그래도 여기선 뭔가 이렇게…… 아아, 진짜 답답하네.”
“면목 없습니다. 내 잘못이야.”
클레어가 드물게도 신은아와 강신혁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미 지저왕의 장례식은 끝나고, 금은서족은 모두 기운을 잃고 망연자실하게 근처에 퍼질러 앉아 있었다.
“이 세상의 몬스터들이 곧 활동을 시작하리라는 건 나도 알고 있었거든? 그런데 연구도 그만둘 수는 없어서…… 기척을 감지하고 곧장 달려갔지만 그땐 이미 늦어있어서.”
“네 잘못은 없잖아. 우리가 지저왕의 호위 퀘스트를 수행하던 것도 아니고.”
신은아는 다소 냉정하게 들리는 말을 했다. 다소 얄궂지만 어디까지나 이치에서 벗어나지는 않은 말이었다.
“그의 발톱을 만들어준 것으로 퀘스트는 완료됐어. 남은 두 달의 체류기간은 그에 따라오는 보너스 같은 거지. 그 기간 동안 지저왕을 호위해야 한다는 조건은 없었어.”
“하지만 너 …… 아니, 아냐.”
그렇게 매몰찬 발언을 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반박하려던 클레어였으나 바로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바로 어제, 신은아가 요르문간드의 침공을 막아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은아는 그들이 나설 필요는 없다는 말을 하면서도 가장 먼저 이 세계를 덮친 위협을 상대해 물리친 것이다. 비단 이 세계만을 위해서가 아닌 강신혁을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했겠지만. 적어도 지키지 못한 클레어에게 신은아를 매도할 자격은 없는 것이다.
클레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신은아의 독설은 이어지고 있었다.
“결국 이 녀석들은 끝까지 지저왕에게 의지하기만 했을 뿐이야. 그가 사라지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봐.”
“방법을 모르고 있을 뿐이에요. 아직 지저왕으로부터 기술을 모두 배우기 못했기 때문에……."
강신혁이 클레어 대신 변론했지만 신은아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한심해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술? 그런 건 그냥 구실이잖아. 애초에 땅을 파겠다며 지저왕에게 모두 달려드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었어. 발톱이 있으니 땅을 파면 되잖아. 기술 같은 건 땅을 파는 데에 조금이나마 익숙해진 다음에 생각해도 될 문제고.”
아직 제대로 기지도 못하는 주제에 나는 법을 배워 무엇 하겠냐는 지적이었다.
실제로 금은서족이 지저왕에게 기술을 가르쳐달라고 매달렸던 것은, 여태껏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땅 파기를 맨몸으로 도전하기는 불안하니 지저왕에게 의지했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지저왕에게 기술을 배운다고 당장 그것을 응용할 수 있었으면 그 녀석이 차기 지저왕이 되었겠지.
“이미 이 세상의 몬스터가 활동하기 시작했다는 걸 알려줬는데, 리더가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저렇게 주저앉아 있는 건 변명도 되지 못해. 솔직히 말하면…… 저 녀석들은 물러도 너무 물러.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정신상태가 유아나 다름없는 수준이란 말이야.”
“그걸 은아 네가 말하니까 설득력이 전혀…… 아니, 아무 것도 아냐. 죄송합니다.”
“아무튼! 클레어 네가 죄책감을 가질 것은 없어. 이 녀석들이 멸망한다면 그거야말로 이 녀석들 탓이야.”
그것도 맞는 말이긴 했다. 강신혁은 지저왕이 죽은 현장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그때 금은서족은 이 세상의 몬스터의 존재를 확실하게 인식했을 터였다.
그렇다면 머리를 맞대 의견을 모으든 몸을 움직이든 어떤 식으로든 대처를 해야 하는데, 저들은 아예 생각을 포기한 것처럼 근처를 굴러다니고 있을 뿐이니…….
‘지저왕의 카리스마가 너무 거대했던 탓이지. 적어도 저들에게 있어서는 무슨 일이든 척척 해결하는 지배자였으니까…….'
저들이 땅을 파야 한다는 본능을 각성한 그때에도 지저왕은 훌륭히 그들을 이끌어주었다. 새로운 환경에 내동댕이쳐져 불안해하는 때에도 흔들림 없이 종족을 이끄는 지배자……. 실로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이 아닌가.
그런데 그것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렸으니 금은서족이 저렇게 망연자실해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저는 금은서족에게 마음을 다스릴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선배, 적어도 앞으로 사흘만 저들을 보호해줄 수는 없을까요?”
“사흘?”
신은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강신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때까지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으면 우리도 이들을 떠나도록 하죠.”
“그럼 그 사흘 동안 신혁이 너는 뭐하게?”
그때 클레어가 어딘가 떠보듯 강신혁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이미 들킨 것 같은데. 강신혁은 희미한 미소를 띠며 대꾸했다.
“사흘이면 모든 금은서족의 발톱을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쓸모없게 되지만 않으면 좋겠네요.”
“짜식, 폼 잡기는.”
우울해하던 클레어도 그의 말에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좋아, 신혁이 네 생각대로 되면 누나가 선물을 하나 해줄게.”
“선물?”
방금 강신혁이 했던 말이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었던 것이리라, 클레어가 새하얀 이가 보이도록 씩 웃으며 그의 어깨를 쿡쿡 찔렀다.
“그래,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내고 있는 우리 귀여운 신혁이한테 딱 맞는……."
“야한 건 안 된다고 생각해.”
클레어의 말을 끊어버리듯이 끼어들며 신은아가 말했다.
“야한 건, 안 된다고, 생각해.”
필시 무척 중요한 말이기 때문이리라, 그녀가 말을 반복하며 한 마디 한 마디 강조했다.
신은아의 눈은 위험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능력을 사용할 때면 나도 저렇게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걸까, 그렇다면 좀 무섭겠는데…… 강신혁은 그런 생각을 했다.
“으, 응. 알겠어. 건전한 거, 건전한 걸로……."
“좋아.”
신은아는 클레어의 확답을 듣고서야 안심한 듯 물러서더니,
“사흘이지. 알겠어. 그동안은 내가 저들을 지킬게. 클레어는 신혁이를 지켜줘.”
“오?”
“야한 건……."
“안 해!”
지금부터 바로 시작하려는 것일까, 신은아가 자리를 비웠다. 그제야 안도한 것처럼 후우 한숨을 내쉬는 클레어에게 강신혁은 어딘가 신기한 기분이 되어 물었다.
“의외로 깔끔하게 납득해줬네요. 선배는 저한테 어리광을 부릴 때를 제외하면 굉장히 냉철하고 자기 생각을 굽히지 않는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그냥 네 말에 납득한 것 아닐까? 저래 봬도 생각이 꽉 막힌 애는 아냐. 단 사흘이 지날 때까지 저 녀석들이 그대로라면 조금 문제가 되겠지.”
공방 바깥에선 여전히 금은서족들이 오열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지금은 햇빛이 없는 밤이니 괜찮다고 쳐도 날이 밝으면 어떻게 하려나. 설마 어두운 건물 안으로 들어가 단체로 곡을 하려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보기 싫은데……."
“좋아, 그럼 작업 시작하자. 나도 도와줄 수 있는 게 있지?”
“아, 네. 물론이죠. 고마워요, 누나.”
“앞으로 바텐더로 부려먹을 거니까 나도 이 정도는 도와야지.”
“……바텐더? 누나, 저한테 바텐더도 시킬 생각이었어요?”
“조주기능사 자격 하나 따놓으면 좋잖아?”
“그렇게까지!?”
단조 작업이었다면 클레어가 끼어들 부분이 얼마 없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금형을 마련하고 틀에 쇳물을 부어 굳히는 등의 장인이 아니어도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은 주조 작업에는 클레어가 아주 많은 도움이 되었다.
특히 작업의 골자를 파악한 클레어가 금형에 뭔가를 새겨 넣은 순간부터 쇠가 굳는 시간이 비약적으로 앞당겨진 것이 아주 좋았다. 강신혁의 야금술이 B+랭크가 된 것도 있어 작업 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라진 것이다.
“사흘이 아니라 이틀도 안 되어 끝낼 수 있겠는데요.”
“좋아, 그럼 남은 하루는 조주기능사 수업이야.”
“이 사람 정말로 날 바텐더로 만들 생각이야……."
처음부터 굳이 그를 바의 서버로 삼겠다며 데려왔을 때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하지만 그녀가 마음먹은 이상 강신혁이 빠져나갈 길은 없었다. 사실 빠져나가기 싫은 것이 컸다.
만약 그것까지 눈치 채고 강신혁을 자신의 취미영역으로 끌어들인 것이라면 그녀는 정말 영악한 여자라고 할 수 있었다. 사람이 품고 있는 호감을 이용하다니!
“물론 미성년자니까 그냥은 안 되지만, 우리 바에서 일할 땐 신은혁이니까 말이야. 으으으음…… 역시 신은혁이란 이름은 좀 구린 것 같은데, 우리 깔끔하게 스미스라고 하지 않을래?”
“그 이상 제 신분을 늘리지 말아주실래요?”
강신혁은 투덜거리며 대꾸하면서도 빤히 클레어를 바라보았다. 클레어가 왜? 하고 시선만으로 답했다.
역시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얽혀오는 것을 보면 분명 그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은데 또 확고하게 남녀관계는 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을 긋고 있으니…….
성급하게 움직이는 것은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이 이상 애매하게 있는 것도 성에 차지 않았다.
작업을 한 차례 마친 후, 틀이 식기를 기다리며 강신혁은 결국 그 말을 입 밖에 냈다.
“누나, 연하는 진짜 안 될까요?”
“와, 대담한 거 봐.”
거의 고백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발언이었다. 강신혁도 자신이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이런 갑작스러운 어택은 클레어 같은 베테랑에게는 깜짝 효과조차 주지 못할 것이다. 태연히 대꾸하며 웃음을 터트리는 클레어의 반응을 보면 일목요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와 물러날 수도 없는지라 강신혁은 조금 더 솔직해져보기로 했다.
“혹시 아시나 모르겠는데 제가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을수록 불타오르는 타입이라.”
“그야 네가 마력도 못 다루면서 신영에 입학한 걸 보면 대충 감이 오긴 하는데.”
“그래서 연하는 안 된다고 하면 더 포기하기가 싫어지는데요, 게다가 선배랑 얘기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절 연애대상에서 배제했잖아요? 그러니까 오히려 더 약이 오른 달까, 그……."
큼, 헛기침을 한 차례 하곤 클레어의 붉은 눈을 빤히 바라보며 강신혁은 패배를 알면서도 기적적인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제 한몸 믿고 전장에 출두하는 전사의 마음가짐으로 고백했다.
“누나, 많이 좋아해요.”
“마음은 정말 고맙지만 안 돼.”
물 흐르듯이 차였다. 강신혁은 마음을 다지며 재차 그녀에게 물었다.
“연하라서 안 되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면 솔직히 말씀해주셔도 돼요.”
“다른 이유를 대면 이번엔 또 그것 때문에 더 불타오르는 거 아냐?”
“그럴지도 몰라요.”
진지하게 대꾸하는 강신혁에게 클레어는 귀찮은 녀석이라고 대놓고 말했다.
“신혁이 넌 같은 나이 학생들이랑 어울리는 게 제일 좋아. 너랑 나랑은 네가 너무 아깝잖아.”
“결국 나이 문제잖아요. 그 외에는?”
“경험 문제도 있는데?”
“그런 건 완전 괜찮은데요.”
사실 완전히 괜찮지는 않지만 지금은 괜찮은 셈 치기로 했다. 하지만 클레어에게 그 동요를 숨길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쿡쿡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래서 애들은 금방 뜨거워져서 안 된다니까. 너도 나중에 정신 차리면 엄청 후회할걸.”
"......."
일부러 자극적인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강신혁도 알았다. 얼굴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모습에 강신혁에게는 그런 수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파악한 클레어가 크흠, 헛기침을 하곤 보다 진지하게 말했다.
“정말 미안, 여태 내가 너무 친근하게 굴었는지도 몰라. 그래도 유혹하려거나 그런 건 아니고 진짜 네가 편하게 느껴져서 그런 거니까 용서해줘. 알잖아? 우리 얘기 엄청 잘 통하니까.”
강신혁은 생각했다. 이 말은 그를 꼬시고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냥 순수하게 얘기가 잘 통한다는 얘기가 하고 싶었던 것일까? 성인 여성은 복잡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입은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저도 이득 보고 있었으니까 괜찮아요. 얘기가 잘 통하는 것도 그렇고, 앞으로도 잘 통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안 돼.”
거기까지가 강신혁의 한계였다. 끈질기게 달라붙는 건 오히려 클레어에게 민폐가 될 뿐더러, 여태까지 쌓은 관계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리라 생각했으니까.
“작업 때문에 조금 피곤해졌네. 오늘은 먼저 들어가서 쉴게. 내일은 남은 작업 모두 마치고 조주기능사 수업 할 거니까 단단히 각오 해둬.”
“네, 알겠어요.”
강신혁은 어쩔 수 없이 어깨를 으쓱이며 물러섰다.
"내일 봬요, 누나. "
"응."
거듭해서 차였는데도 강신혁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이것은 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하고 클레어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파악하기 위한…… 말하자면 적아의 전력 파악 수순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편 성인 여성답게 방금 자신이 찬 소년에게 여유로이 손을 흔들어주며 나온 클레어는…….
‘너, 넘어갈 뻔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 단계에서 사귀기라도 했다간 무조건 은아한테 살해당할 거야……!’
결코 비현실적이지 않은 공포에 사로잡혀 덜덜 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