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 Chapter 16. 멸망한 세계의 스캐빈저 - 5 >
- 오늘의 로그인 보너스로 스킬 성장 속도 버프를 얻었습니다! 앞으로 만 사흘 동안 모든 스킬의 성장 속도가 50% 증폭됩니다!
“오.”
한창 쇠를 두드리던 도중 갑자기 눈앞에 떠오르는 로그인 보너스 메시지에 강신혁은 나지막이 감탄사를 흘렸다.
그도 그럴 것이 지구와의 시간비율이 24대 1인 이 세상에서 로그인 보너스가 나타났다는 것은 그가 제법 오랜 기간 이 공간에 체류하고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으니까.
“로그인 보너스라는 게 정확히 몇 시에 주어지는 거죠?”
- 오전 6시입니다.
“시각선정까지 게임 같네요……."
강신혁이 일행과 함께 그로마스로 출발한 것이 대충 오후 4시쯤. 지금이 지구 기준으로 오전 6시라면 14시간, 즉 그로마스의 시간으로는 2주일을 머무르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어쨌든 정말로 버프가 나타나기 쉬워지긴 했나보네요. 그것도 모든 스킬의 성장속도를 절반 가까이 증폭시켜주는 효과가 사흘이나 지속되다니.”
- 이것이 바로 VIP 회원의 진정한 혜택입니다. 회원님께서 동화율 50%를 달성해 3차 해방을 이루신다면 로그인 보너스가 다시 한 번 강화될 테니 기대해주시길!
“관리자님은 정말 상품을 잘 파네요. 지금 저한테 광고해봤자 아무 의미도 없긴 하지만.”
2주일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강신혁은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발톱을 만드는 데에 투자했다.
아무리 뭐래도 수천 마리가 넘는 금은서족의 발톱을 일일이 수제작, 즉 단조법으로 만드는 것은 말도 안 되었기에, 지저왕의 것을 만든 후로는 그것을 참고로 여러 개의 금형을 만들어 거기에 쇳물을 부어 굳혀, 형태가 잡힌 것을 다듬어 완성시키는 주조법을 택했다. 작업 시간은 단숨에 몇 배로 뛰었다.
“국왕 폐하의 발톱은 저렇게 반짝반짝 빛이 나는데 왜 우리 것은……?”
“우리 것도 괜찮긴 하지만 좀 더 멋지게 만들어줄 수는 없나요?”
“꼬우면 네가 지저왕 하든가요.”
단 주조법으로 만들어지는 물건은 아티팩트로 완성시키기가 무척 힘들다. 애초에 모든 두더지를 아티팩트로 무장시킬 수도 없었던 만큼 강신혁도 그 부분은 타협을 했다.
다만 그것은 강신혁에게 꼭 필요한 경험이었다. 여태껏 하나하나 정성껏 물건을 만들어본 경험밖에 없는 강신혁에게, 일정한 품질을 확보할 수 있는 물품을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또한 색다른 경험치를 쌓게 해주었던 것이다.
- 대량생산의 감을 잡기 시작합니다. 야금술 스킬이 B+랭크로 성장했습니다! 물품을 대량생산할 때의 작업속도가 더욱 빨라지며, 완성품의 품질이 평균적으로 높아지게 됩니다!
“오오오오, 역시나!”
여태까지 해왔던 작업과는 아예 다른 방향성의 작업이어서일까? 스킬 성장 속도 버프를 얻고 반나절 만에 기어이 강신혁은 야금술을 B+랭크로 성장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자 당연하게도 작업이 더더욱 빨라졌다!
“오늘은 저곳을 판다!”
“알겠습니다, 폐하!”
새로운 발톱을 얻어 젊음을 되찾은 듯 활기차게 변한 지저왕은 스스로 땅을 파려 드는 기특한 백성들을 이끌고 왕국 재건을 위해 힘쓰고 있었다.
비록 여태껏 선조들이 파내려온 구멍은 베나딜라이트 입자의 폭주로 인해 깔끔하게 막혔지만, 구멍이 한 번 뚫렸던 곳은 이전에 비해 파기가 쉽다. 그들은 그것을 기준점으로 삼아 이전보다 넓고 살기 좋은 지하왕국을 건설하겠다며 의기를 불태우고 있었다.
“……무리하기는.”
지저왕이 원하는 대로 그의 발톱을 만들어주기도 했던 만큼 강신혁은 그런 모습에 일일이 뭐라 태클을 걸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가 무리하는 것을 보며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실제로 땅파기 작업을 시작한지금, 지저왕은 자신의 노쇠함을 절실하게 깨달았을 것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깨닫고 있었지만 여태까지 거기에 눈을 돌리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저렇게 무리하다간 오래 버티지 못할 텐데.”
“하지만 잘하고 있는 거야.”
어느덧 그의 곁으로 다가온 신은아가 조용히 그런 말을 했다.
"금은서족은 땅속에서 태어나게끔 만들어진 종족이야. 지상의 햇빛에 기적적으로 적응해 돌연변이로 살아남는 것보다는 땅속에서 살아가는 게 더 나아. 저들을 위해서도.”
“저들을 위해서도……?”
"응."
신은아의 말은 강신혁이 알아듣기에 조금 모호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당장 거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대신 지금은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듣기로 했다.
“저 두더지, 굉장히 필사적으로 일하고 있어. 그렇게 하면 자신이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고 있는 거야.”
“어째서죠?”
“움직일 수 있을 때 최대한 기술을 가르치려고.”
“……과연.”
지저왕을 제외한 나머지 금은서족은 오랜 세월 평화가 지속된 탓에 모두 발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여태까진 지저왕 스스로도 그것에 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영원히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비로소 자신의 사후를 걱정하고 종족들에게 땅을 파는 기술에 대해 가르치게 된 것이다.
솔직히 강신혁이 상상도 못했던 이상적인 전개였다.
“정말 이상한 일이네요. 완전히 일그러져 고칠 도리가 안 보였는데 이렇게 간단하게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다니.”
“나쁜 녀석들은 아니었으니까. 단지 모르고 있었을 뿐이지.”
“지상으로 내쫓았던 게 도움이 됐으려나.”
“굉장히 극단적인 해결책이기는 했지만.”
살짝 짓궂은 강신혁의 중얼거림에 신은아가 쿡쿡 웃으며 대꾸했다. 순수한 즐거움이 담긴 미소에 강신혁의 마음도 부드러워지는 듯 했다.
할부지라고 부르며 끈적하게 달라붙는 것도 아닌, 그렇다고 찬바람 쌩쌩 부는 사회인 모드도 아닌 이 적당한 거리감의 신은아를 강신혁은 남몰래 하이브리드 모드라고 부르고 있었다. 맨날 이러면 좋을 텐데.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은 연구 안 해요?”
“응. 슬슬 때가 된 것 같아서.”
"때?"
“응. 그러고 보면 아직 얘기를 안 했구나.”
신은아는 금형에서 굳은 금속 덩어리를 떼어내 모양을 잡는 강신혁을 보며 짧게 설명했다.
“몬스터의 습격이 있을 거야.”
"......응?"
강신혁의 움직임이 멎었다. 몬스터? 아니, 그런 것들은 베나딜라이트 입자 때문에 다 죽지 않았던가?
“후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저 두더지들도 여태까지 살아남았는데, 몬스터라고 해서 전부 죽었으리라는 법은 없잖아?”
“그야, 그렇긴 한데……."
“더욱이 요르문간드는 질겨. 이 세상이 다시 부활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 손을 써올 거야.”
“잠깐만요, 그 부분.”
강신혁이 손을 들어 스탑을 외쳤다. 주조 방식으로 작업을 하다 보니 작업 중에도 제법 여유가 생겨나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대체 요르문간드라는 게 뭐예요? 지구에 있을 때는 분명 초인집단에 반하는 반 초인연합이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 이 세상에서도 요르문간드라는 얘기를 들었단 말이죠. 멸망한 인류가 남긴 녹음에서 분명히 들었어요.”
“안 그래도 슬슬 얘기를 해주려고 했었어. ……하지만 그래, 역시 기억을 다 되찾으려면 조금 시간이 걸리나보네.”
신은아는 일순 쓸쓸한 표정을 지었지만 - 곧 늠름한 얼굴을 하며 설명을 시작했다.
“요르문간드는 반 초인연합이 맞아. 지구인들은 아직 그렇게만 알고 있어. 활동의 주축이 되는 것도 인간일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 아냐. ‘다른 세상의 얘기’를 듣고 비로소 나도 알게 됐어.”
아마도 히어로 유니버스에서의 교류를 말하는 것이리라. 강신혁은 거래 게시판에는 자주 들어가도 다른 게시판에서는 별로 얘기를 한 적이 없어서 몰랐다. 지금의 자신에게는 필요 없는 얘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차원 퀘스트를 보다 적극적으로 수행하기로 마음먹은 지금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강신혁은 신은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기분 탓인지 조금 얼굴을 붉힌 채 그녀가 말을 이었다.
“요르문간드의 주축이 되는 세력은 인간이 아닌 몬스터. 모든 몬스터의 정점에 서 있으며, 인간보다 인간에 대해 더욱 잘 아는 자들 …… 인간을 이용해 인간을 파멸시키려는 자들이 바로 요르문간드야.”
“그 말인즉 지구의 요르문간드 세력의 뒤에도 몬스터가 있다는 얘긴가요? 거기에 더해서…… 히어로 유니버스 회원처럼 차원을 넘나드는 세력이라고요?”
“응. 범차원적인 거대세력. 대부분 세계의 침공에는 이들이 관계되어 있다는 것이…… 대부분 히어로 유니버스 회원들이 내린 결론이야.”
지구라고 처음부터 몬스터가 넘쳐나는 세상은 아니었다. 어느 한 순간을 계기로 그렇게 되었다.
인간이 능력자로 각성하게 된 것도 그와 마찬가지 타이밍이었다. 어쩌면 그들의 침략이 인류를 변화시킨 무언가의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렇게도 생각해. 히어로 유니버스의 목적은 이 요르문간드를 막는 것이라고. 그도 그럴 게 요르문간드 역시 여러 차원을 넘나드는 힘을 갖고 있으니까.”
“뭔가…… 좀 잘 짜맞추어진 연극 같은 느낌도 드네요.”
보통 이런 때 보면 오히려 히어로 유니버스처럼 인간을 지키려는 집단이 사실 뒤에서 모든 일을 조종하는 흑막이거나 하던데. 강신혁은 관리자에게 물어보았다.
‘그래서 실제론 어때요?’
- 그 질문을 한 것이 회원님이 아니셨으면 회원직을 박탈했을지도 모르는 폭언이네요. 500HP 보너스!
‘어라? 폭언인 거죠? 폭언인데 보너스를 준 건가요?’
- 회원님으로부터 받는 자극은 어느 쪽이든 즐겁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색다른 맛이 있는 만큼 보다 과감한 발언이라도…… 1,000HP 보너스!
음, 관리자에게 묻는 것은 포기하기로 했다.
“물론 히어로 유니버스는 우리에게 답을 주지 않아. 우리도 답을 원하는 건 아냐. 그저 회원 대부분이 요르문간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만큼, 서로 협력할 수 있는 부분은 협력해서 요르문간드를 상대할 뿐.”
“선배는 그래서 협회에 들어간 건가요? 요르문간드의 소재를 파악하고 상대하기에 가장 적합한 기관이라고 생각해서?”
“절반은.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비밀.”
신은아는 그렇게 말하며 작게 웃어보였다. 하이브리드 모드의 신은아는 역시 강력했다. 강신혁은 부끄러운 마음을 감추려 애써 화제를 전환했다.
“그래서? 요르문간드 세력이 그로마스에도 잠복하고 있다는 얘긴가요?”
"아마도. 그 숫자가 적든 많든 상관없어. 요르문간드는 모든 몬스터의 의식을 지배할 수 있으니까. 한 마리라도 남아있으면 그것을 바탕으로 세계의 좌표를 계산해 토벌세력을 보내올 거야.”
“뭐야 그거 개사기잖아……."
더구나 어디서 들어본 듯한 사양이다. 가만, 그렇다면 혹시 저번 실습 당시의 소동도……?
“순수하게 인간만 관계되어 있었다면 그런 건 불가능했겠지. 요르문간드에 게이트에 간섭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건 이미 얘기했지? 세상과 세상을 잇는 방법을 알고 있는 놈들이기에 이레귤러 게이트를 만들어내는 방법도 구사할 수 있었던 거야. 설마 게이트 안에서 다시 이레귤러 게이트를 만들어낸다는 말도 안 되는 방법을 써올 줄은 몰랐지만. 그때 할부지를 잃을 뻔했던 걸 생각하면……."
아, 다시 철부지 손녀 모드로 돌입했다. 강신혁은 주위에 두더지들이 없는 틈을 타 자신을 껴안으려는 신은아를 적당히 밀어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두더지들은 어떻게 해요?”
“그래서 땅을 파는 게 좋다고 한 거야. 여태까지 해왔던 것처럼 도망다니고 있으면 일단 죽을 확률은 줄어들 테니까.”
“하, 과연.”
그런데 강신혁이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바로 그때, 신은아가 인상을 딱딱하게 굳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오늘이었네. 곧 균열이 열릴 거야. 거대한 에너지가 느껴져.”
“그런 건 어떻게 측정해요?”
“감. 나머지는 야누스의 조언.”
“야누스 그놈은 안 끼어드는 데가 없구나.”
허탈해져 웃음을 흘리면서도 강신혁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능적인 움직임이었지만, 신은아는 그를 제지하듯 한 팔을 내밀어 막으며 작게 웃었다.
“전엔 제대로 힘을 보여주지 못했지. 맡겨둬.”
“아니, 저번에도 충분히 보여줬는데……?”
오히려 그 이상으로 강한 모습을 보여줬다간 그가 설 자리가 없는데!
하지만 신은아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어느덧 그녀의 전신을 황금의 번개가 감싸고 있었다.
“혼자면 충분해. 이 세상에서 얻은 힘 덕분에 충분하게 됐어…… 그러면, 다녀올게.”
뇌제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아마도 그녀가 뿜어내는 강대한 마나의 기척에 이끌린 것이리라, 허공에 거대한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뱀의 아가리가 열리고, 세상에 다시 요르문간드의 독이 토해내졌다.
토르를 대신해 몸에 번개를 두른 여신이 그에 맞섰다.
그로부터 전개된 모습은 신화와는 달라도 한참은 달랐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