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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 Chapter 16. 멸망한 세계의 스캐빈저 - 4 >

지하가 무너져 강제로 지상으로 내몰린 그 날 금은서족은 떠올렸다.

태어날 때부터 안온히 살아온 두더지들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지옥과 같은 나날들을 보내온 선조들에 대한 기억을, 그들과 완전히 똑같은 환경에 내동댕이쳐진 그 순간 기적적으로 떠올린 것이다.

그것은 마치 발톱을 잃고 한심한 꼴로 전락한 후예들에게 보내는 선조들의 선물처럼도 여겨졌다.

"끄아아악, 너무 밝아서 눈을 뜰 수도 없어요!”

"땅으로 들어가고 싶어요, 들어가게 해주세요!”

"으아아아아아아! 땅을 팔 수가 없어!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팔 수가 없어!”

……어쩌면 그저 목숨의 위기를 맞이한 두더지들이 여태껏 무시해왔던 본능에 이제야 간신히 순응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쪽이든 한심하긴 매한가지였다.

"저 자식들 의식개혁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할까 고민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진 건 다행이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지저왕에게만 맡기고 있던 두더지들의 모습에 불만족스러웠던 강신혁으로선 제법 기꺼운 일이었다. 다만 저렇게 바닥에서 구르며 비명을 질러대고 있는 모습은 그만 좀 봤으면 했다.

"알았어, 너희 발톱 전부 만들어줄 테니까 그때까진 빛이 들어오지 않는 건물에라도 들어가 있으면 되잖아.”

"지상에 있다는 걸 못 견디겠어! 각성한 선조님의 기억이 우리를 땅으로 부르고 있어!”

"저것들 전부 그냥 콱 죽어버렸으면……."

"너희 시끄러워.”

강신혁이 투덜거리고 있으려니 어느덧 가까이 다가온 신은아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손가락을 허공에 대고 휘저었다.

수천 마리에 달하는 두더지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마침 그 타이밍에 입구가 열린 거대한 건물 안쪽으로 짐짝처럼 한꺼번에 내동댕이쳐졌다. 무척 아플 것 같았다.

"고마워요.”

"할부지한테 어리광을 피우는 데 방해가 되서 치웠을 뿐이야.”

신은아는 시크한 말투로 더없이 한심한 말을 지껄이더니 강신혁에게 살포시 안겼다. 이전에도 안겼던 적이 있지만 그때와 비교해도 한층 압도적인 풍만함이 강신혁의 의식을 순간적으로 날려버렸다.

‘화, 확실히 옷 너머로도 차이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커졌…… 스탑,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그러고 보면 지금은 클레어도 근처에 없고, 두더지들은 그녀가 직접 날려보낸 후.

그야 단둘만 있을 땐 애교를 부려도 된다고 했지만 이런 물리…… 아니지, 마법적인 수단까지 동원할 줄이야. 강신혁은 기가 막혀 허허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클레어 누나는 어떻게 한 거야?”

"마음에 드는 물건을 발견해서 연구를 시작한 틈에 살짝 빠져나왔어.”

신은아는 그런 말을 하며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세상의 모든 마나를 사역하는 듯하던 그 압도적인 위엄, 기세! 그런 것은 지금 그녀에게서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할부지이.”

"끄응.”

혀짧은 목소리를 내며 달라붙는 스물다섯살 손녀. 강신혁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마음을 단단히 다지고는 그녀의 얼굴을 밀어냈다.

"이제 그만. 다 큰 처녀가 그렇게 달라붙으면 못 써.”

"하지만 직접 만나게 되면 많이 안아줄 거라고 할부지가 그랬는데.”

거짓말이었으면 했지만 동기화가 20% 넘게 진행된 지금은 강신혁에게도 분명 그것과 관련된 기억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에 보다 단호하게 그녀를 떼어낼 수 있었다.

"그건 어렸을 때 얘기지. 언제까지고 어린애로 있을 수는 없잖아?”

"윽......."

신은아는 그의 냉정한 말에 기가 죽어 물러났다. 살짝 울상을 짓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은아가 어렸을 때 찾아와줬으면, 좋았을 텐데.”

"윽......."

이번엔 강신혁이 찔릴 차례였다.

만약 스스로 모루라는 실감이 적었더라면 모루의 행적에 본인이 죄책감을 느낄 일도 없었겠지만, 동화율이 높아지며 은아와의 추억을 제법 떠올려낸 지금은 은아가 이렇게 된 데에 분명 모루, 그러니까 자신의 책임도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

‘그 빌어먹을 영감탱이가 지키지도 못할 약속만 공수표처럼 남발하는 바람에. 아니, 전생의 나지만.’

정말로 친딸처럼 소중히 대할 것이었다면 세상과 함께 잠들 것이 아니라 vip권한을 이용해 그녀를 직접 찾아가주기라도 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적어도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그런데 마지막에 가서 지 혼자 미련은 없다는 듯이 깨끗하게 죽어버리면 그 전까지 모루에게 크게 의지하고 있던 은아는 어쩌라는 것인가. 하다못해 작별인사라도 제대로 했으면 이 아이가 이렇게 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글쎄 남 얘기처럼 말하고 있지만 결국 내 얘기잖아!’

강신혁은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나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신은아를 그대로 내버려둘 수도 없었기에, 결국 조심스럽게 그녀를 끌어안아주었다. 신은아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아.”

"어렸을 때 못했던 것만큼만 벌충하는거야.”

“……응! 할부지이이.”

신은아는 잃어버린 장난감을 되찾은 것처럼 기쁜 목소리를 내며 그의 목덜미에 볼을 문댔다. 강신혁은 최대한 태연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역시 오래는 못 버티겠네.’

신은아는 할아버지로 생각하고 달라붙는지 몰라도 사춘기 청소년에겐 지나치게 가혹한 시련이다. 부디 이러는 사이에 신은아가 정신적인 여유를 되찾을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저기…… 두 분 사이가 좋은 건 기쁜 일인데요.”

"응?"

그때였다. 발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그곳에는 여전히 강신혁의 다리를 붙들고 있는 지저왕의 모습이 있었다.

"이제 슬슬 정말로 제 발톱을 만들어주셨으면 좋겠는데……."

반쯤 울고 있는 지저왕의 모습을 보며 강신혁은 신은아에게 조용히 물었다.

“……‘선배’, 다 쫓아낸 거 아니었어요?”

"굴욕이야. 그래도 히어로 유니버스 회원이라고 버텼나봐……!”

지저왕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쿨시크 모드로 돌아온 신은아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강신혁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 혼이 덜 난 게 분명하다.

그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렇게 됐으니 전 슬슬 작업을 시작해볼게요.”

"으응…… 조금 부족한 것 같지만, 그래도 이건 선금이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선금?”

"응, 선금.”

그럼 잔금이 남았다는 얘긴가? 곤혹스러워하는 강신혁에게서 떨어져나온 신은아가 작게 웃으며 뒷걸음질쳤다.

"그럼 난 클레어 찾으러 가볼게. 힘내.”

"그, 그래. ……선금?”

끝까지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하며 떠나가는 의붓손녀의 뒷모습에 고개를 갸웃하는 강신혁이었으나 신은아는 의문에 답하는 일 없이 떠나갔다. 혼자 남은 강신혁을 지저왕이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학습이라는 것을 했는지 더 이상 ‘그래서 제 발톱은요?’ 같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이렇게 가만히 바라보는 쪽이 더 짜증났다.

"내가 진짜 끝장나는 걸로 만들어줄 테니까 지켜보고 있어요.”

“오오! 그러시다면, 제가 아까 화덕이 있는 공방 같은 곳을 발견했는데요……!”

그로부터 세 시간 후, 강신혁은 정말로 이 세상의 고유 금속(물론 베나딜라이트가 아닌 다른 금속이었다.)을 활용해 무려 A랭크의 발톱 형태 아티팩트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지저왕의 기대에 부응했다.

문제는 그 뒤를 이어 강신혁에게 발톱을 만들어달라며 매달리는 수천 마리의 두더지들이었으니……두 달에 이르는 지옥의 노가다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

"어라, 클레어?”

클레어를 찾아나선 신은아는 의외로 금방 친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근처 풀밭에 쪼그려앉아 지구에선 보지 못 했던 희귀 식물을 채취하고 있었다.

"그 마도구는?”

"일단 챙겼어. 생각해보니까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연구할 수 있는 것보단 지금 여기서밖에 연구할 수 없는 것에 주목하는 게 더 낫겠더라고. 이것 봐봐.”

클레어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보랏빛 꽃잎이 달린 풀을 뜯어내며 말했다.

"생체병기니 마도구니 하면서 인류를 멸망으로 몰고 간 그 마도술식이 얼마나 끔찍했는지는 알지만, 그 덕분에 긍정적인 변화를 맞이한 것도 있어. 마도술식의 대상이 되지 않는 식물들 말이야.”

"오랫동안 그 입자에 노출되어 있던 탓에 변이를 일으킨 거야?”

"바로 그렇지. 이 풀들, 마나를 무엇에도 빼앗기지 않고 비축하며 유지하는 형태로 진화했어. 어째서 그런 형태로 진화했는지는 굳이 입 아프게 설명 안 해도 되겠지? 그보다 더 흥미로운 건 그런 진화의 과정에서 얻게 된 부산물이야.”

클레어는 신이 나서는 연금술사의 안목에서 비롯된 그로마스 생태계의 변화에 대해 얘기를 늘어놓았다. 신은아는 순수하게 좋아하는 것에 몰두하는 친구의 모습이 실로 눈부시다고 느꼈다.

"하지만 클레어, 뭘 하든 일찍 마쳐둬야 할 거야.”

"아…… 알지. 응,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어.”

뜯어낸 풀들을 자신의 인벤토리에 넣으며 클레어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안 끝난 거지?”

"반대야.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이 세상에도 요르문간드의 마수가 닿고 있다는 걸 아까 확인했잖아.”

신은아는 한숨을 내쉬며 그런 말을 하곤 클레어의 옆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두 사람은 비단 멸망한 세상의 마도문명을 탐사하기 위해 돌아다니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보다 중요한 다른 목적이 있었는데, 그 결과가 ‘예상대로’ 그리 좋지 않았다.

"신혁이는 모르겠지?"

"할…… 후배는, 아직 그렇게 기감이 좋지는 않아. 벌써 이 정도로 성장한 것만도 충분히 대단한 거지만. 성장속도만은 나보다 빠를지도 몰라. 아까 SS랭크 아티팩트를 간단하게 만들어내는 거 봤어? 기적의 올 크래프트에 천재적인 전투의 재능까지 더해졌으니 금방 나도 뛰어넘겠지……."

"팔불출도 적당히 해 바보야. 아까 그건 대단하긴 했지만 운도 제법 있었잖아. 오히려……."

강신혁이 극천신주를 만들어내던 순간을 떠올리며 눈을 반짝이는 신은아의 모습에 클레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투로 대꾸하다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스왈로잉 펑거스를 무한히 빨아들이며 마나를 방출하던 그때, 강신혁도 마침 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마 그녀는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런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만두었다. 불에 기름을 붓는 꼴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아무튼 억지로라도 쫓아와서 다행이었어. 정말로 후배가 위험할 뻔했으니까……."

"그건 지저왕 녀석을 패주는 걸로 타협 보자. 그보다, 달라진 몸에는 좀 익숙해졌어?”

마도술식을 받아들여 한순간에 진화한 신은아의 몸은 아무래도 그녀에게 계속해서 위화감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신은아는 입술 끝을 비틀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율 끝났거든. 완전히 익숙해졌어.”

"오, 그게 조율이었어? 난 신혁이 몸에 네 체취라도 묻히려는 줄 알았잖아.”

“……봤어?”

신은아가 살짝 볼을 붉히며 묻는 말에 클레어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보면 연인인 줄 알겠어.”

"여, 연인은 무슨…… 그냥 사이 좋은 할아버지랑 손녀잖아.”

"흐음.”

부끄러워하는 신은아를 바라보는 클레어의 눈빛이 보다 가늘어졌다. 지하에서도 그런 생각을 했지만, 방금 있었던 일을 보고 그녀는 강한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은아야?”

"그야 물론이지…… 실제로도 그렇잖아?”

"그래."

클레어가 고소했다.

"그럼 무의식이려나.”

“무의식?”

"응, 뭐어. 하지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건 그리 좋은 방식이 아냐. 기억해둬. 난 분명히 말했다?”

"응?"

은아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 자리에서 뽑아낼 약초를 모두 뽑아낸 클레어는 읏차, 하고 기합을 주어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녀의 이마에 살짝 딱밤을 먹였다.

"아야!”

"하여간 여우라니까.”

"으으으응?"

그렇게 해서, 그로마스의 위기는 그로마스에 도착한 바로 그날 해결되었다.

그러나 강신혁을 비롯한 세 명의 히어로 유니버스 회원의 이세계 소풍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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