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 Chapter 16. 멸망한 세계의 스캐빈저 - 2 >
그 거대했던 지저왕국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렸다. 두더지들은 공포에 휩싸여 비명을 내지르며 도망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이젠 더는 두더지들의 마나를 빨아먹는 스왈로잉 펑거스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
“내, 내 왕국이……!"
“왕국은 다른 곳에 세워요.”
본인은 왕국을 세웠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흙 안에 파묻혀있던 대피소를 발굴했을 뿐이 아니었던가.
아마도 수십 년 전 지저왕의 활약에는 과장된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히어로 유니버스에 가입했던 만큼 그 능력이 완전히 거짓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와, 정말로 이 거대한 시설이 전부 이 단말로 응축되고 있잖아…… 이 세상 사람들의 마도문명은 터무니없는 수준이었구나. 그래서 망한 거겠지만.”
한편 클레어는 여전히 강신혁이 한 손에 꼭 쥔 채 시설 바닥에 박아 넣고 있는 단말(이었던 무언가)을 보며 감탄사를 흘리고 있었다.
통짜 베나딜라이트로 이루어져있던 시설이 스르르 무너지며 그 모든 금속이 한 점으로 응축되는 장면은, 그야 그 누가 봐도 장관으로 느껴지긴 할 것이다.
“시설 하나로 끝나지 않으니까 문제죠. 이거 감당할 수는 있으려나 모르겠는데.”
“꽉 붙들고 있어. 누나가 포션이든 뭐든 만들어줄 테니까.”
“……두더지들, 이쪽으로.”
한편 신은아는 어차피 들킨 것, 자신의 마력을 있는 한껏 펼쳐내어 일대를 보호하는 무형의 장막을 펼쳐냈다. 강신혁과 클레어는 물론이고 광범위한 영역 내의 모든 두더지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 우우웅
작디작은 인간이 두 팔을 뻗어 일으킨 힘에 작은 도시 규모의 보호막이 생겨나 유지된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이고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마법 발현이…… 더 빨라진 느낌이야.”
“거기서 더 빨라졌다고?”
"응."
이전의 신은아는 자원은 무한하지만 출력과 운용 면에서 세계의 정점에 비해 아주 조금 부족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 세상의 인간들이 남긴 술식을 흡수해 신체가 진화하며 마법의 발현 속도와 파괴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그 약점이 완벽하게 메꿔진 것이다. 아까 클레어는 신은아가 마력이 무한해도 탑 랭커는 아직 넘지 못한다고 했었지만, 그것도 어느덧 옛말이 된 것이다.
“늙은이들이 알면 깜짝 놀라겠네.”
“숨길 거야. ……아주 조금 정도만 드러내고. 다음 순위는 100위가 좋겠네.”
신은아는 그 말을 하곤 아직까지 단말을 붙들고 있는 강신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눈에 담겨있는 감정은 강신혁이 미처 읽어낼 수 없을 만큼 깊었다.
“후배 덕분이야. 보답이 하고 싶어.”
“저도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으니 고마워할 건 없는데…… 일단 기다려봐요. 이쪽은 아직 안 끝났으니까.”
“다들 서둘러! 보호막 안으로 몸을 옮겨!”
“왕국이! 왕국이 무너진다!”
두더지들의 대이동이 이어졌다. 보호막 안에 있던 두더지들은 보호막 바깥에 있는 두더지들의 대피를 도우려 움직였고, 어떻게든 두더지들 전원이 대피를 완료할 즈음에는 이미 시설을 이루고 있던 모든 금속이 완벽하게 단말로 응축되어 있었다.
이미 그것은 원래의 형체를 잃고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에도 꾸물거리며 온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모든 베나딜라이트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이곳에 계속 있는 건 좋지 않겠는데요. 나가야겠어요.”
“내 생각도 같아. 이동하자.”
“저, 저희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와 반대방향으로 움직여요! 나중에 합류를 하든 어쩌든 일단은 살 길을 찾아요!”
신은아의 마나가 무한하지 않았더라면 두더지들 중에도 제법 사상자가 많이 나왔으리라. 그녀가 보호해주는 사이 두더지들은 강신혁이 지시한 대로 순순히 대피를 시작했다. 비록 땅을 팔 수 없다고 해도 오랜 세월 동안 선조들이 파내려온 구멍을 따라 움직이는 것 정도는 가능할 터였다.
한편 강신혁은 더 이상 베나딜라이트라고도, 스왈로잉 펑거스라고도 부를 수 없는 덩어리를 손에 쥔 채(신기하게도 무게는 그리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클레어, 신은아와 함께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지상으로 나가야겠어요. 선배, 혹시……?”
“응. 이제 가능해.”
지저왕국의 모든 두더지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한 신은아는 즉시 보호막을 세 명을 간신히 감싸는 크기의 구체로 줄였다. 그리곤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는데, 그 순간 보호막 주변을 파직거리는 스파크가 뒤덮었다.
“조금 빠르게 갈 거야.”
“설마.”
“꽉 붙잡아!”
- 쾅! 콰과과과광!
뭘!? 하고 외칠 틈도 없었다. 뇌기를 두른 보호막 구체는 그 안에 세 사람을 담은 채 즉시 솟구쳤다! 눈앞을 가로막는 흙이며 광맥 따위를 모조리 분쇄하며 위로, 위로!
고위의 무예를 익히고 있는 강신혁은 보호막 구체가 급발진하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중심을 잡았지만 원래 몸을 움직이는 데에는 자신이 별로 없는 클레어는 그렇지 못했다.
“꺄아아아악! 후위직 배려 좀!”
“앗."
"윽......."
설마 이런 무식한 방법으로 탈출할 줄은 몰랐던 클레어가 넘어지기 전에 어떻게든 강신혁을 붙들고 매달리자, 보호막의 중심에서 마력을 뿜어내던 신은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은 그녀 자신이면서!
한편 그러는 와중에도 베나딜라이트 입자의 응집은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땅속을 거슬러 오르는 보호막을 베나딜라이트 입자만은 지극히 미세하게 나뉘어 꿰뚫고 들어오며 강신혁의 손에 들린 덩어리로 뭉쳤다.
보호막 구체가 워낙 빠른 속도로 상승하다 보니 입자의 안개가 그것을 뒤따르듯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짙은 자색의 안개가 커튼처럼 나풀거리는 모습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곧 지상이야.”
“지상…… 정말 괜찮은 거지?”
“스왈로잉 펑거스의 구동 메커니즘이 달라졌으니까요.”
“지금!”
쾅! 보호막 구체가 마지막으로 굉음을 내며 거세게 솟구쳤다. 지면을 뚫고 상공으로!
순식간에 지상으로부터 수십 미터 높이에 도달한 보호막 구체는 그 지점에서 멈추었다. 클레어가 간신히 숨을 고르며 강신혁에게서 떨어지자 그는 속으로만 아쉬워했다. 한편 신은아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클레어, 후배한테 너무 스스럼없이 스킨십을 하는 게 아닐까?”
“야, 방금은 네 탓이었잖아!”
“평소에는?”
“평소에는…… 그, 귀여운 동생한테 하는 정도?”
“저기.”
일이 다 끝났다는 듯이 하등 의미 없는 말다툼을 벌이는 두 명의 매력적인 성인 여성을 향해, 강신혁은 여전히 자신의 손아귀에 들린 덩어리를 향해 집중되는 베나딜라이트 입자를 주시하며 서늘한 말투로 말했다.
“두 분 다 그런 쓸데없는 걸로 싸우지 말아주실래요. 지금 좀 집중 중이니까.”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공간이 한정되어 있던 지하를 벗어나 지상으로 나왔기 때문일까, 베나딜라이트 입자의 수렴 활동은 더더욱 속도를 불려나가고 있었다.
단말을 통해 골렘이 말했던 메시지처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베나딜라이트 입자가 한 점에 모여들고 있는 것이니까. 여태껏 덩어리가 흡수한 베나딜라이트는 기껏해야 대피소 1개 분량 정도. 그것이 이 세상 곳곳에 족히 수십 개 이상 건설되어 있었고, 그 외에도 베나딜라이트가 포함되어 있는 건물이나 무기가 제법 많았다.
그리고 스왈로잉 펑거스가 그 모든 베나딜라이트에 스며들어 그것을 분해시키고 이곳으로 끌어오고 있었다.
아깐 커튼이라느니 소박한 표현을 했지만 지금은 아예 하늘에 자색 안개의 파도가 몰아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두 분, 저한테서 떨어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흡수가 점점 더 격해질 것 같거든요.”
“알겠어. 은아야, 신혁이한테 부유 마법은 걸어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이미 걸었어.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
“금방 끝날 거예요.”
강신혁은 자신의 어깨 위를 지키고 있던 오닉스마저 클레어에게 넘겨준 후 상공에 홀로 남았다.
두 사람이 자신에게서 떨어져 안전한 곳에 착륙하고 다시 보호막으로 몸을 감싸는 것을 확인한 강신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이제껏 억제하고 있던 입자의 흐름을 완전히 자유롭게 풀어놓았다.
-샤아아아아
강신혁의 전신이 자색의 안개에 휩싸였다. 지상에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신은아가 비명을 질렀지만 클레어가 그녀를 진정시켰다.
이 녀석들은 생체병기가 되는 것을 포기한 결과물. 강신혁의 몸에 파고드는 일은 없이, 오직 그의 손에 들린 덩어리만을 노리고 모여들었다.
모여들고, 또 모여들고, 그저 모여들고…….
그 과정에서 강신혁이 깨달은 것이 있었다.
“큿, 이거 이대로는 안 되겠는데……!”
지금 그는 모든 영력을 덩어리에 쏟아 부어, 실시간으로 그것과 교감하고 있는 상황. 그렇기에 덩어리에 응집되고 있는 베나딜라이트 입자의 변이작용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도 당연한 것이, 애초에 이 마법은 생체병기를 탄생시키기 위해 발현된 것이었다.
그것이 실패하는 것을 조건으로 삼아 발동되는 마도병기 연성마법은, 과거 이 세상을 멸망으로 몰아간 생체병기 연성마법‘보다도’ 불완전한 마법!
콩고물을 주워 먹은 것은 좋았지만 그것도 공짜는 아니었던 것이다. 만약 이 끔찍한 밀도로 압축된 베나딜라이트 집합이 잘못되어 다른 방향으로 폭주하기라도 한다면 이번에야말로 이 세상이 깔끔하게 망하리라.
‘후우…… 아니, 할 수 있어.’
강신혁은 여전히 그칠 기미를 모르고 몰려드는 베나딜라이트 입자의 흐름을 느끼며 지그시 자신의 두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의 두 눈이 황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강화하는 대상은 바로 자신의 손에 들린, 무언가로 거듭나고자 하는 덩어리! 자색으로 가득했던 덩어리에 놀랍게도 황금빛이 섞이기 시작했다!
‘이것만으론 안 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마법의 폭주를 막을 수 없다. 금안의 환룡의 효능은 강화와 증폭에 지나지 않는다. 아직 태어나지 못한 무엇인가를 부화시키는 능력은, 미완성으로 남은 마법술식을 완성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강신혁은 거기에 더해 다른 능력을 발동했다.
바로 야금술이었다.
‘모루도, 망치도 없지만.’
바꿔 말하면 그것만 없을 뿐이다.
모루도 망치도, 결국 물건의 형태를 잡기 위해 필요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물건에 담는 마음이다.
아까 강신혁도 단순한 금속 클로를 골렘 시설의 접속 단말로 만드는 것으로 증명하지 않았던가?
그가 얻은 야금술이란 스킬이 단순히 쇠를 두드리는 스킬이 아니라는 것을.
‘거기다…… 라고 말하기는 좀 뭐하지만.’
지금 그의 손아귀에 있는 것은, 마법이 섞였다고는 하나 어쨌든 금속이지 않은가.
이미 수십 톤 이상 한 덩어리로 섞였음에도 불구하고 손아귀에 느껴지는 무게는 고작 500그램도 되지 않는, 터무니없는 물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금속인 것이다!
'시작하자.'
마음속으로 하나의 모루를 상상했다. 손아귀의 덩어리를 그 위에 올려놓고, 상상 속의 망치를 만들어내어, 그것을 강하게 내려쳤다.
그 망치질에 담은 것은…….
‘멸망하기 이전의 사람들이, 생체병기를 만들면서 어떤 마음을 품었는가.’
그들은 강해지고자 했다. 신을 초월할 만큼 강해지고자 하는 마음을 하나로 모아 터무니없는 마법을 만들어냈다. 그 결과로 인류가 멸망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의 열망마저 비웃을 수는 없다.
강신혁 또한 그 누구보다 절실하게 힘을 원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 현재진행형이었다. 그렇기에 지금도 아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이념이나 계산 따위 복잡한 개념은 들어갈 필요도 없다. 그저 강하고자 했다. 모든 구속과 부자유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쟁취하게 해주는 강함!
그에게서 피어난 영력이 무수한 세월 지상에 남아 표류하던 마법의 입자들 속으로 스며들어…… 그 너머, 오랜 옛날 이 무구를 만들고자 했던 이들과 연결되었다.
그들의 근원을 읽어내고, 그들의 열망을 현실로 끌어내어.
망치를 내려쳤다.
‘내가 지켜야 하는 이를 지킬 수 있는 강함.’
깡!
망치가 쇠를 두들기는 소리가 울린 것만 같았다.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무너트리는 강함.’
깡!
한 번, 다시 한 번.
‘타인에게 기대지 않고 홀로설 수 있게 하는 강함.’
깡!
망치가 모루 위의 쇳덩이를 거세게 내리쳤다.
- 역시 회원님은…….
관리자의 메시지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작업에 집중할 때면 흔히 그러했듯 강신혁은 이번에도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저 손을 들어 올렸다가, 내리쳤다.
눈에 그치지 않고 그의 전신으로부터 피어난 황금빛이 일순, 그의 손에 들린 덩어리 한중간으로 수렴했다가…….
다음 순간, 온 세상을 가득 채울 기세로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