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 Chapter 15. 지저세계의 손님 - 4 >
- 뀨우웃!
맹렬한 기세로 뛰쳐나간 오닉스는 다짜고짜 광맥에 매달렸다. 녀석의 전신에 놀랍게도 은은한 묵빛을 발하는 마력이 흐르는 것이 보였다.
“이게 금(金)마력이구나. 이 새끼 여태까지 한 번도 안 보여주다가 밥 먹을 때 되니까 보여주는 거 봐라.”
“금마력…… 펫이 속성마력을 다루고 있었어?”
역시 신은아는 금마력에 대해 알고 있었다. 강신혁이 자세히 설명해달라는 눈빛을 보내자 그녀가 기꺼이 입을 열었다.
“속성마력이라는 건, 해당 속성만을 다루도록 특화된 마력이야. 일반적인 마력에 비해 강력하고 고유의 특성까지 지니고 있지만 다른 마법은 발휘하기 힘들어져.”
“그러면 혹시 선배도?”
뇌제라고 하면 역시 압도적인 파괴력의 번개가 유명하지 않은가. 강신혁의 질문에 그녀는 거침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는 뇌마력을 다뤄.”
“하지만 일반 마법도 잘 다루잖아요?”
“그건…… 비밀. 나중에 둘만 있을 때 알려줄게.”
그럼 굳이 안 들려줘도 되는데.
하지만 신은아는 이미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금마력은 나도 처음 봐. 굉장하네.”
- 뀨우우!
오닉스가 다루는 금마력이 정확히 어떠한 힘인지 강신혁은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 녀석이 하고 있는 짓이 무엇인지는 대충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눈앞의 자색 광석이 다량 포함된 광맥은 워낙에 단단하여 오닉스의 이빨도 안 들어갈 정도였으나, 녀석은 금마력을 광맥을 향해 뿜어내는 것으로 인해 놀랍게도 전면의 금속을 물렁물렁하게 만들고 있었다. 금마력에는 금속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음에 분명했다.
그렇게 부드럽게 만든 금속 일부를 정신없이 물어뜯으며 녀석이 강신혁에게 의사를 전달했다.
- 뀨우뀨우뀨우웃!
“지금 잘라내면 된다고? 오케이.”
오닉스의 금마력은 확실히 굉장했지만 문제는 녀석의 마나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 강신혁은 신살검을 뽑아, 광맥이 다시 굳어버리기 전에 빠르게 검을 전방에 그었다.
"흡!"
신살검의 특수능력 중 하나, 살의제어! 오직 자르고 싶은 것만을 자르도록 보조해주는 이 능력은 검이 광맥 한중간에 박히는 일 없이 정확히 떼어내고자 하는 부분만 깔끔하게 베어낼 수 있게 해주었다.
벽에서 흙이 후두둑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눈부신 자색의 광석이 덩어리째 튀어나와 바닥을 굴렀다. 강신혁은 그것을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이상했다. 무엇이 이상하냐면, 아직 제련을 거치지 않은 원석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순도가 높은 것이 이상했다.
“꼭 이미 한 번 제련을 했던 금속을 그대로 벽에 묻어놓은 듯한…… 느낌인데. 착각이려나.”
- 뀨우우우.
그 즈음해서 마력이 다한 오닉스가 바닥으로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그 와중에도 이미 입으로 들어간 금속은 야무지게 씹어 먹고 있었다. 자색 광석을 주워든 강신혁은 아이템의 정보를 보고자 했으나 역시나 불가능했다.
“선배, 감정 가능해요?”
"응. ‘베나딜라이트’라네. 무척 단단하고…… 그 외에도 옵션이 있는 것 같지만 확인할 수 없어. 히어로 유니버스에선 본 적 없는데......."
- 이 세계 고유의 광물입니다. 지저왕이 이 광물을 캐내는 데 성공한 적이 없으니, 당연히 히어로 유니버스에도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신은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관리자의 해설이 이어졌다. 강신혁은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광석을 받아들었다. 어느덧 지저왕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제 발톱을 만들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저희가 살아남기 위한 방법은 그것뿐이에요!”
“쯧……! 후배, 이 두더지는.”
“아뇨.”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지저왕을 보며 신은아가 더는 못 견디겠다는 듯 앞으로 한 발 나섰지만, 강신혁은 다급히 그녀를 만류하곤 지저왕과 마주했다.
“해볼게요. 이걸로 만들어보죠.”
신은아의 우려가 무엇인지는 강신혁도 알고 있다. 지저왕과 만나 얘기를 듣기 시작한 순간부터 깨닫고 있었다. 이 의뢰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여기서 이 바보 같은 두더지와 어울리는 것을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이것이 어쩌면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여기는 자신이 있었다. 자신이 대장장이로서 성장할 기회 말이다.
강신혁은 신살검을 칼집에 넣곤, 괜히 그것을 세게 한 번 쥐며 말했다.
“불과 빛이 제법 요란할 거예요. 금은서족이 접근하지 못하는 공간을 내어주세요.”
@@@
강신혁은 두더지들에게 안내받은 공동에 들어와서는 먼저 이전 구해두었던 간이 화덕과 모루를 꺼냈다.
검으로 순도 높은 베나딜라이트를 분리해내는 데 성공했으니 제련은 굳이 따로 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래도 이것을 가공하려면 적절하게 녹여야 한다. 그냥 장작이면 될까? 강신혁이 고민하고 있자니 관리자가 추천해주었다.
- 마법금속을 마력분해와 손실 없이 녹이기에는 역시 우노티아의 융금목이 최고입니다.
“최소 단위로 맞춰서 구매할게요.”
- VIP 회원 보너스로 특별 할인가 40만 HP를 지불하여 우노티아의 융금목 장작 50kg을 구매했습니다.
거침없이 질렀지만 생각보다 비쌌다. 꼭 판매 최소 단위가 50kg이어야만 했는가, 멈칫한 강신혁이었으나 이미 지른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작업 지켜볼래.”
“지루할 텐데요.”
“절대로 안 지루해.”
신은아는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관전 모드에 돌입해 있었다. 말똥말똥 강신혁을 바라만 보고 있는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잇값을 못하는 꼬맹이 모드에 다시 돌입한 그녀가 지금은 제법 귀엽게 느껴졌다.
강신혁은 느슨해지려는 입가를 가리곤 화덕에 융금목 장작을 던져 넣었다. 불은 금세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온도가 오른 것을 확인한 후 베나딜라이트를 불 속에 집어넣어 녹인 후 적당한 크기와 형태로 나누어 성형했다.
‘만들어야 하는 건…… 발톱.’
지저왕의 손에 맞추어 다섯 개의 발톱을 우선 따로따로 만들고, 그것을 지저왕의 손에 고정할 기구를 또 만들어야 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물건을 제대로 만든다고 해도 결과는 그리 좋지 않을 거야.’
백 년도 더 전에 이뤄낸 성과를 철석같이 믿고 발톱만 돌아오면 어떤 위기든 스스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는 지저왕.
그러나 그는 겉으로 보면서도 알 수 있을 만큼 약했다. 젊었던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으리라 예상할 수 있지만, 150살을 먹은 지금은 단지 늙어 죽을 날만 기다리는 한 마리의 두더지에 불과하다. 신은아가 혀를 찼던 것은 그것을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다.
대대로 지저왕의 치하 아래 평온하게 살아온 결과, 지저왕이 노쇠했음도 깨닫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그를 믿고 따를 뿐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의지가 없는 금은서족.
‘설령 지저왕이 발톱을 얻어 땅을 파낸다 해도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알 수 없지.’
과연 이 종족에 미래는 있을 것인가. 아니, 강신혁은 당장 이들의 내일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달랑 발톱 하나 만들어주고 돌아선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스스로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이대로 작업해봤자 저번 장검의 반복이 될 뿐이야. 마음이 동하질 않아.’
강신혁은 이번 이나희와의 협업을 통해, 작업을 할 때 자신의 마음가짐에 따라 결과물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검에 방어능력이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강신혁이 그렇게 생각하고 주춤했기 때문에 미지근한 결과가 나왔던 것이다. 자신이 만든 검을 두고 강신혁이 실망하던 그때 보란 듯이 우월한 방어능력을 각성한 신살검만 봐도 확실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내 마음을 담아야 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만 만든다면 그건 그냥 무기를 자급자족하는 전사에 불과하다. 무엇을 목표로 무엇을 만들든, 거기에 강신혁의 진심을 담아낼 수 있어야 했다.
남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진정한 대장장이가 되기 위해선 그래야만 했다.
‘후회하지 않을 수 있도록, 이 물건이 진짜로 가치를 발휘할 수 있도록……
주어진 조건이, 상황이, 자신이 만들어야 하는 물건이 탐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전력을 다해, 마음을 담아 물건을 만들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떤 상황이든 타파할 수 있도록 끝내주는 물건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스스로도 웃음이 나올 만큼 단순한 일이었다. 그 간단한 답을 내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몸이 좋으면 머리가 고생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있지.’
그렇게 만들어주지.
눈앞에 산재한 문제를 우직하게 정면으로 돌파할 수 있도록.
이 답도 없는 종족을 어떻게든 연명시킬 수 있도록.
강신혁은 망치를 들어, 모루 위의 금속을 내리쳤다.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오며, 그의 영력이 금속을 감싸 안았다.
@@@
한편 오닉스는 계속해서 광석을 먹고 있었다. 녀석에게 있어서 금속이란 주식이자 마력과 체력을 회복시켜주는 포션과도 같은 것! 마력이 떨어지면 광석을 먹고 다시 마력을 채울 수 있으니 녀석의 식사는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특히나 이 세상의 금속은 여태껏 녀석이 맛보았던 것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주인이 만들어주는 아티팩트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순수하게 맛이 뛰어나다.
그래, 주인이 만드는 아티팩트가 5성급 호텔의 세프가 정성껏 대접해주는 풀코스라면 이 광석은 최상급의 식재료! 워낙 맛있어서 생으로 먹어도 요리를 뛰어넘는 수준의 궁극의 식재료!
- 뀨우뀨우우!
그렇게 얼마나 먹고 있었을까. 문득 오닉스는 속이 이상해지는 것을 느꼈다.
요동치는 심장, 불타버릴 것만 같은 열기! 격해진 혈류가 오닉스의 작디작은 몸에서 날뛰며 혈액의 비트를 새기고 있었다.
- 뀨우우.
오닉스는 이윽고 깨달았다. 이미 자신의 위 안으로 들어간 금속들이 놀랍게도 반항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화되지 않으려, 오닉스에게 속하지 않으려 저항하는 것.
이것이 어느 때에 가능한 일인가 하면, 바로 대상이 아직까지 살아있을 때에 가능했다.
- 뀨.…….
오닉스는 깨달음의 울음을 울고는 물끄러미 광석이 떨어져 나온 벽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이미 먹어치운 것들은 금마력을 발휘해 어떻게든 소화해낼 수 있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남은 부분이다.
그러니까, 이 벽의 광물들이 살아있다고 한다면…….
- 우우우우웅
- 뀨우우우우우우우우!
대지가 격한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사방의 벽이 일제히 울음을 울고 있었다.
오닉스는 자신의 눈앞에서 ‘무언가’가 잠에서 깨어나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곤 비명을 내지르며 내달렸다!
- 뀨우우우우우우!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금속으로 이루어졌던 왕국 내부의 벽들이 일제히 구조를 바꾸며, 표면을 자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왕국의 두더지들도 문제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어오르고 있었다. 오닉스는 그런 두더지들 사이를 빠르게 지나쳐 주인에게로 향했다.
“잠깐만, 이거……."
한편 작품을 완성시킨 순간, 강신혁도 오닉스와 마찬가지로 그 사실을 깨달았다.
오히려 너무 늦게 깨달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니, 그 전에 신은아가 감정을 했을 땐 이런 정보는 나오지 않았잖아?
- 감정 스킬의 수준이 낮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한 것입니다.
관리자의 메시지가 어딘가 얄밉게 들렸다. 강신혁은 푸욱 한숨을 내쉬며 모루 위에서 멋대로 진동하고 있는 두더지 발톱…… 클로를 바라보았다.
- 외피 손상을 확인…… 수면 모드 해제, 시스템을 기동합니다. 생명체를 탐지합니다. 자격을 지닌 이를 발견했습니다. 단말로 적합한 파편을 탐지, 시스템 접속 권한을 부여합니다.
인공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간 전체에 웅웅 울리는 그 목소리는 결코 크지 않았음에도 공간에 있던 이들 모두에게 들려왔다.
“할부지, 이거……."
“아마.”
- 사령관, 제32 대피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제32 대피소로서 제작된 시설 골렘입니다.
이번엔 클로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신혁은 그것을 들었다.
두더지의 사이즈에 맞춰 제작한 것이라 무척 앙증맞았다. 이쑤시개 다섯 개를 겹쳐 든 듯한 모습이었다.
- 접속 완료. 외부 상황을 확인한 후 명령 대기 모드에 돌입하겠습니다.
“……아무래도 단순한 광석이 아니라 골렘이었던 모양이네요.”
강신혁의 눈앞에 떠오르는 아이템 정보.
그는 그것을 읽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로마스 제32 대피소 접속 단말]
[A-랭크]
[대피소 시설을 이루던 골렘의 파편을 떼어내어 충분한 양의 영력과 강한 의지를 담은 결과, 잠들어있던 시설을 다시 운영할 수 있는 단말이 되었다.]
[특수능력 - 부스트]
*부스트 - 이 단말과 연동하고 있는 시설을 폭주시켜 내재된 성능 이상을 끌어낸다. 다만 이 능력을 발현할 경우 시설에 영구적인 손상이 가해진다.
……아, 요즘은 정말 뭐 하나 마음대로 만들어지는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