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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 Chapter 15. 지저세계의 손님 - 3 >

강신혁은 일단 눈에 라이트를 껐다. 처음엔 헤맸지만 굳이 눈을 번쩍이게 만들지 않아도 어둠을 꿰뚫어볼 수 있게 되었다. 눈 자체는 여전히 황금빛이었지만.

“환영합니다, 구원자님들. 다시 한 번 인사드리겠습니다. 제가 지저왕입니다.”

다른 두더지들에 비해 머리 하나만큼 커다란 두더지가 앞으로 나서 인사했다. 빛이 사라져서인지 아까보단 자신감을 얻은 말투였다. 강신혁은 그의 인사를 받아주며 물었다.

“제가 모루입니다. 그런데 닉은 왜 그렇게 정했어요?”

“죄, 죄송합니다. 전 가입 당시엔 설마 그런 대단한 분들이 모여드는 곳인 줄은 모르고……."

“그럴 수도 있죠. 그래서 왜 닉이 지저왕인데요?”

“그, 그건……."

두더지는 다시 자신감을 잃었다! 클레어가 옆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신혁이는 의외로 남을 괴롭히는 걸 좋아하는구나.”

“그냥 순수하게 궁금했을 뿐이에요. 사실 누나도 궁금하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자그마한 두더지가 그런 멋진 닉네임을 어떻게 떠올린 걸까?”

“그쪽이었어요?”

도움을 청하는 입장에서 뭘 숨길 여유도 없었던 것일까, 지저왕은 자신이 히어로 유니버스에 들어가게 된 경위를 숨김없이 알려주었다. 듣자하니 놀랍게도 그는 모든 세상에서 제일가는 굴착의 재능을 타고났다는 모양이었다.

“지저세계는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보다 단단한 땅이 나옵니다. 우리 금은서(金隱鼠)족은 외적이 침입해올 때마다, 인구가 늘어 날 때마다 땅을 깊게 파고 들어가며 자원을 얻고 주거공간을 늘려왔죠. 그래서……

은서(隱鼠)라 함은 두더지를 부르는 표현 중 하나다. 그 앞에 붙은 금은…… 아마도 그들의 발톱이 금속같이 날카로워서 붙은 말이 아닐까. 아마도 그들 세상 고유의 단어를 한자어로 변환한 결과이겠지. 강신혁은 대충 그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단한 땅을 보다 잘 파는 금은서가 대접 받는다 이거죠?”

“바로 그렇습니다. 저는 당대 최강의 굴착 능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지저세계에 잠든 무수한 재화를 얻고 지저의 왕으로 군림하며 히어로 유니버스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지저왕의 부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아마도 여태까지 이런 녀석들이 히어로 유니버스 거래 게시판에 희귀한 금속을 대량으로 판매하고 있었던 것이겠지.

강신혁은 그제야 어째서 관리자가 그에게 ‘회원님께 도움이 되는 세상’이라고 했던 것인지 이해했다. 금속으로 가득한 세상이라면 대장장이가 바라마지 않는 세상이 아니겠는가.

“문제는 제 능력이 너무 뛰어났다는 건데……."

“거기서 다시 자랑이 나오네. 자세히.”

“저 혼자서 앞으로 수백 년은 걸릴 굴착 작업을 해치우는 바람에, 다른 금은서족은 일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세대가 교체되고, 또 교체되고…… 일을 할 필요가 없게 된 금은서족은 점점 나태하게 되어, 발톱을 쓰지 않게 되어…… 끝내는 발톱이 퇴화되고 만 것이죠.”

“잠깐만요. 당신 나이가 몇 살이에요?”

“올해로 150살입니다. 평균수명이 30년인 금은서족 중에서는 무척 오래 산 편이죠.”

아마 히어로 유니버스의 회원이 되어 몸에 좋은 걸 이것저것 챙겨먹은 덕이겠지!

아무리 그래도 원래 수명의 다섯 배를 넘게 살고 있다는 것은 굉장히 충격적인 소식이었지만, 여하튼 중요한 것은 이 자그마한 두더지가 강신혁의 나이의 열 배쯤 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계속 얘기해도 될까요?”

“아, 네.”

지저왕이 어떻게 해서 왕국의 주인이 되었는지, 히어로 유니버스에 접속해 부를 얻었는지, 왕국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모두 들었다. 그럼 이제 남는 것은 왕국에 닥쳐온 위험에 대한 얘기뿐이다.

차원 퀘스트의 메시지로는 새로운 악이 태동하고 있다는 얘기밖에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 부분에 대해 묻자 지저왕은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독입니다. 왕국 내부로 독이 침투해오고 있어요. 지상의 대기에 있는 독과 동일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독이라는 것만은 분명해요.”

“독이라고!?”

강신혁은 다급히 체크했지만 자신의 몸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이 공간에 독이 있었으면 그의 레지스트 포이즌 스킬이 활약을 했으리라.

“그렇게까지 강한 독은 아닐 겁니다. 당장 저희 금은서족의 성체에도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다만 문제는 갓 태어난 연약한 아이들입니다. 독의 존재를 확인한 것도 새끼들이 죽기 시작해서 간신히 알 수 있었죠.”

성체가 무사하다 해도 새끼가 죽고 있다면 왕국, 아니 종족의 미래가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 과연 위기라고 부를 만했다.

“통로를 막아보기도 하고 히어로 유니버스의 상품으로 독기운을 빨아들여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죠.”

“관리자님한테는 물어보셨어요?”

“예? 관리자…… 그게 뭔가요?”

설마 관리자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강신혁은 그의 말에 그저 입맛만 다시고 말았다.

종족의 존속이 걸린 상황에서는 좀 도움을 줘도 될 텐데 관리자도 은근히 야박한 면이 있지 않은가. 관리자가 모든 히어로 유니버스 회원에게 상냥하다는 생각은 슬슬 접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강신혁에게 위험하다며 이번 차원 퀘스트를 추천하지 않으려 했던 것도 그렇다. 따지고 보면 다른 회원의 위기를 방치하려 했던 것이니까.

생각에 빠진 강신혁을 놔두고 지저왕이 말을 이었다.

"금은서족에게는 전투능력이 없습니다. 하물며 뭔가 다른 생산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죠. 히어로 유니버스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게 된 이상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습니다.”

과거 조상들이 그래왔듯, 위험이 닥쳐오지 않는 곳까지 땅굴을 파 도망치는 것.

오랜 세월 구축해온 왕국의 모든 것을 버리고, 더 이상 위험하지 않을 때까지 땅을 파고 또 파서.

“하지만 이번에는 그것도 불가능했습니다. 모두 발톱이 퇴화된 탓에……."

“지저왕 씨는요?”

“저는.”

지저왕이 자신의 앞발을 들어 올려보이자 강신혁은 절로 납득했다. 그의 앞발에 달린 발톱이 모두 끝부분까지 닳아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긴 홀로 모든 종족이 수백 년에 걸쳐 이룰 굴착 작업을 홀로 이루었으니 발톱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그러니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게 새로운 강력한 발톱을 만들어주세요. 백성들을 이끌고 이 저주받은 땅을 떠나 새로운 정착지를 찾을 수 있게끔……!”

“……과연, 이제 대충 전모를 파악했어요. 대장장이가 필요하다는 것도 그래서였군요.”

이것으로 어째서 자신이 불렸는지는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여전히 그의 말에서 한 가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당신만 굴착을 하겠다는 겁니까?”

“이 중요한 작업을 백성들에게 맡겨둘 수는 없지요. 저 혼자 하면 충분합니다! 제가 발톱이 없어서 그렇지 제대로 된 발톱만 다시 얻을 수 있다면!”

"......."

강신혁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지저왕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눈 자체가 워낙 작아 찾기 힘들었지만) 그를 마주보았다.

자기자신에 대한 의심 따위는 조금도 없이, 오직 자신의 백성들을 책임지고자 하는 왕으로서의 책임감과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눈빛이었다. 100년이 넘는 세월 군림한 지배자에게 어울리는 눈이다.

“당신의 발톱만 만들어주면 된다 이거죠.”

결국 강신혁은 고개를 끄덕여주고 말았다.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지금 강신혁이 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적어도 지금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 광물들을 뚫어낼 수 있는 발톱만 있다면 반드시 독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 겁니다!”

“오오오오! 구원자 모루님께서!”

“대왕님의 발톱을 만들어주신대!”

발톱을 만들어주겠다는 한 마디를 했을 뿐인데 두더지들은 어쩔 줄 모르며 환호하고 있었다. 지저왕에 대한 믿음이 철석같은 모양이었다. 하긴 세대가 몇 번이 바뀌도록 지저왕을 왕으로 떠받들고 살았을 테니 그도 당연한 반응이기는 했다.

“그러면 바로 이동하죠. 깎아내야 한다는 땅의 상태가 어떤지는 알아야 발톱을 만들 테니까.”

“좋은 말씀입니다! 게다가 사실 그것을 깎아내려면 발톱도 똑같은 광석으로 만드는 수밖에 없을 겁니다……!”

“심지어 전부 광석지대야? 완전히 계 탔네요.”

그런데 강신혁이 두더지들의 안내를 받아 이동하려던 그때, 누군가 뒤에서 강신혁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클레어였다. 어둠 속에서도 잘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난 지금부터 혼자서 움직여볼게. 정말 이 두더지들을 위협하는 위기의 정체가 독이라면, 내 능력도 충분히 도움이 될 테니까.”

“고마워요, 누나. 그런데 독을 연구하다 잘못되면……."

“나 레지스트 포이즌 희귀도 SS랭크에 숙련도 S랭크야.”

강신혁은 바로 납득했다. 하긴 누가 누굴 걱정한단 말인가. 이미 몇 년도 전부터 히어로 유니버스에서 활동하며 대량의 HP를 벌어들였을 그녀인데!

그 말을 듣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은아를 바라보니 그녀는 말없이 허공에 S를 두 개 그려보였다. 이쪽은 숙련도까지 SS랭크라는 얘기였다. 연금술사보다 숙련도가 높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우리 주적은 독을 많이 사용하니까. 레지스트 포이즌은 될 수 있는 한 빨리 최고 등급까지 익혀야 해.”

“주적이라면?”

“요르문간드.”

신은아는 짧게 답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눈에 숨길 수 없는 적의가 타오르고 있었다. 대체 요르문간드라는 조직과 그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의아해질 정도였다.

“클레어, 슬슬 내 후배한테서 떨어져.”

“아, 그것 때문이었구나.”

“어휴, 질투가 그렇게 심하면 미움 받는다? 아무튼 난 지금부터 따로 움직일게.”

“빨리 가.”

클레어가 자신의 가방 하나 챙겨든 채 어둠 속으로 휘적휘적 걸어 들어갔다. 몇몇 두더지들이 내부로 들어가면 위험할 수도 있다며 그녀를 말리려 들었지만 그것은 지구의 하이랭커를 물로 보는 소리였다.

"그녀도 히어로 유니버스의 회원이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요. 저와는 따로 움직이면서 독에 대해 조사해보기로 했으니까 잘 대해주세요."

“도, 독을 말입니까!?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데……."

“그런 걸 알아내는 게 저 사람 역할이죠.”

하지만 그 말에는 강신혁도 조금 신경이 쓰였다. 독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데 무턱대고 땅을 파면 더 안 좋은 것이 아닐까……? 물론 가만히 있는 것도 바보 같은 일이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지만.

총체적 난관이란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쓰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직 관리자가 간섭하지 않는 것을 보면 당장 강신혁이 위험해질 일은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럼 가죠.”

“알겠습니다.”

결국 강신혁은 지저왕을 독촉해 왕국의 가장 바깥, 지저왕에 의해 마지막으로 굴착이 된 지역까지 이동했다.

모두 똑같은 어둠 속에서 유독 통째로 보랏빛을 발하는 지대가 있었으니 알아보긴 어렵지 않았다.

“제가 굴착 작업을 멈춘 것은 우리 금은서족이 충분히 먹고 살 만큼의 재화와 공간을 확보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실은 이 알 수 없는 광맥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지저왕이 감회 깊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광맥을 쓸어내렸다.

“그 전까지도 상당히 단단한 광맥 지대를 파헤치고 있었지요. 하지만 이것은 격이 달랐습니다. 도저히 제 발톱으로는 이놈을 부수고 파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이 광맥을 놔두고 파헤칠 수 있는 다른 영역을 모조리 파내고 완성한 것이 지금의 왕국입니다.”

“즉 왕국의 경계에는 모두 이 금속이 박힌 광맥이……?”

"맞아요. 동서남북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땐 그래도 괜찮을 줄 알았죠. 설마 이 이상 땅을 파내야 할 일이 생길 줄은 차마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위로 올라가는 것은 생존을 포기하는 것과 같고, 아래로 내려가자니 땅을 더 파낼 수가 없다.

그래서 금은서족은 이 땅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연원을 알 수 없는 독이 그들 왕국을 습격해오기 전까지.

“근시안적이야.”

신은아가 한숨과 함께 그런 말을 토해냈다.

“대기의 독이 무서워 땅속으로 숨어든 것은 이해하지만, 위기가 닥쳐올 때마다 더 깊숙이 숨기만 할 뿐이었다니.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어. 무수한 세월, 연구하고 대처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더구나 히어로 유니버스의 권능이 있었는데도 사태가 이렇게 되도록 방치하다니.”

"......."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했더라면 그게 도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거야.”

“끼이이.”

신은아의 차갑기 그지 없는 매도에 지저왕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찍 소리도 못하는 지저왕, 그런 지저왕을 한심하다는 듯 째려보는 신은아…… 그리고 그 신은아를 멍하니 바라보는 강신혁. 솔직히 신은아가 이성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신은아가 그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왜 그래?”

“아니, 전부 다 맞는 말이어서요.”

"으헤......."

차마 솔직히 말할 수는 없었기에 칭찬으로 둘러대는 순간 차갑고 도도했던 신은아의 표정이 아이스크림처럼 사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래서 이성이 뭐 어쨌다고?

“후회, 후회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두 번 다시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네에, 뭐. 일단 재료부터 얻어내 볼까요.”

이미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그 말은 아직까지는 아껴두기로 했었지. 강신혁은 한숨을 쉬며 앞으로 나섰다. 지저왕이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내왔다.

“이 광석은 정말로 단단합니다. 재료를 채취하는 것도 힘들 텐데……."

“아, 채취는 걱정하지 마시고.”

강신혁은 팔을 앞으로 뻗으며 외쳤다.

“가라, 오닉스! 너로 정했다!”

- 뀨우뀨우우우!

금속에 대한 얘기를 듣는 순간부터 몸이 근질거려 뛰쳐나가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던 오닉스가, 비로소 이 천국(광맥)의 한복판에서 해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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