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 Chapter 15. 지저세계의 손님 - 2 >
금요일 수업이 끝난 오후, 차원 퀘스트를 받아들여 출발하기 전. 강신혁은 자신의 무장을 모두 챙기고 마지막으로 신살검을 점검했다. 신살검무의 진체를 익히는 데에 정신이 팔려 아직까지 신살검의 업그레이드된 성능을 확인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신살검]
[A랭크]
[특수능력 - 날붙이 포식, 회귀, 살의제어]
[특수능력 개방- 수호]
[영핵(靈核) - 없음]
*수호 - 주인이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주인을 보호하는 영력의 방어막을 생성한다. 신살검에 저장된 영력이 많을수록 강한 방어막을 만들어낼 수 있으며, 검을 지니고만 있으면 상시적용된다.
강신혁은 실로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하필이면 자신이 방어능력이 붙은 검을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해 좌절하고 있던 상황에 신살검이 방어능력을 개화하다니.
물론 히로익 실드를 흡수한 덕에 방패가 지니고 있던 권능을 특수능력으로서 개방한 것이겠지만, 그 타이밍이 공교롭다는 점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신살검이 내게 도움을 주려 하는 것일지도.’
신살검에 담겨있던 야누스의 기억을 열람하며 강신혁은 신살검이 단지 자신의 전사로서의 능력을 성장시켜주는 보물이라고만 생각 했었는데, 어쩌면 그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신살검은 모루가 만들어낸 최후의 역작이며, 강신혁이 영력을 깨우치고 야금술을 익히는 데 막대한 영향을 끼친 물건이기도 하다. 그런 녀석이니 이번에도 그에게 무구를 대하는 자세에 대한 가르침을 주려고 한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고맙다. 노력해볼게.”
강신혁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신살검을 쓰다듬었다. 검 주제에 건방지다는 소리를 하기엔 신살검의 격이 격이지 않은가. 아직 전생의 능력을 1할도 제대로 꺼내지 못하고 있는 자신에 비하면 신살검이 훨씬 대단했다.
‘그 외에 또 달라진 점이라고 한다면…… 영핵인가. 이 영핵이라는 건 아마 드래곤 하트를 대신할 물건을 말하는 거겠지.’
신살검의 검날과 손잡이를 가르는 크로스가드 부분의 정중앙에 뚫린 구멍. 여기에는 원래 드래곤 하트가 박혀있었지만, 그것이 소실 되고는 휑하니 보기 싫게 뚫려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A랭크의 격을 되찾은 지금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가드 부분에 구멍이 뚫려있는 것은 변함이 없지만 억지로 뜯어내진 듯했던 상처가 말끔하게 사라지고 구멍 안쪽으로 깔끔하게 테두리가 조성되었으며, 구멍 중앙에서는 간헐적으로 파직거리는 스파크가 일고 있었다.
이렇게 대놓고 ‘핵을 넣으면 굉장해진다!’라고 광고하고 있으니 강신혁도 절로 입맛을 다시게 되었다.
“뭐라도 일단 끼워보고 싶게 만드네……."
“왜 대낮부터 검을 들여다보면서 외설적인 농담을 하고 있는 거야? 머리 괜찮아?”
그의 방에서 한가로이 홍차를 마시고 있던 클레어가 그런 말을 툭 내뱉었다. 대낮에 남학생의 기숙사 방에까지 쳐들어와서 중2 컨셉을 잡고 있는 사람에게 듣고 싶지는 않은 말이었다.
“제 머리보다는 누나 머리를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여기요, 한 번 보면 이해할 거예요.”
“오, 오오…… 오오오?”
강신혁은 신살검을 허공에서 한 번 멋지게 휘두르곤 클레어에게 가드 부분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그것을 보더니 사색이 되었다.
“미쳤네, 진짜. 여기 아무거나 넣으면 큰일 나니까 조심해.”
“아시겠어요?”
“응. 적어도 어지간한 몬스터의 마석 정도는 이 안에 넣는 순간 흔적도 못 남기고 소멸할 거라는 것 정도는 알겠는데?”
그러고 보면 연금술사 역시 감정에는 일가견이 있는 직업군이었다. 강신혁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굉장히 에너지가 풍부한 물질이 필요하리라는 것 정도는 추측하고 있어요.”
“그것도 반영구적으로 재생하는 물건이어야겠지. 믿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정말 까마득히 높은 랭크의 몬스터들은 자신만의 특성을 담은 마석을 통해 체내마력 발전을 일으키거든? 적어도 그쯤 되지 않으면 안정적으로 운용할 수 없을 거야. 그러니까…… SS랭크 정도? 그런 물건은 나도 한 번도 본 적 없으니 포기하고, 응. 그래도 최소한 S+랭크.”
“SS랭크라, 그렇죠. 구하기 힘들겠죠.”
강신혁은 그 말을 하며 입가에 고소를 머금었다. SS랭크라, 실로 공교로운 표현이다. 마침 강신혁에게는 SS랭크의 마석과 비슷한 물건이 있지 않던가. 그래, 바로 [신풍의 보주]다.
신풍의 보주는 끊임없이 영력을 만들어내는 물건이며, 아직 강신혁이 알지 못하는 가능성마저도 품고 있다. 그 공능은 필시 신살검과 발군일 터였다. 문제가 있다면 아직 신풍의 보주는 SS랭크에 걸맞은 위용을 되찾지 못했다는 것.
신풍의 보주는 강신혁의 인벤토리 안에서 천천히 상처를 회복시키고 있었다. 영력을 그러모으고, 부실한 내부를 수복하는 작업에 한창이다. 강신혁도 매일 밤 꾸준히 자신의 영력을 불어넣어 보주의 기운을 북돋워주고는 있었지만 하루 이틀 걸릴 작업은 아니었다.
‘당분간은 손을 써볼 도리가 없겠네. 그래도 핵이 될 만한 물건을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인가.’
강신혁은 검날을 괜히 한 차례 쓰다듬었다. 하긴 지금은 아직 신살검무조차 제대로 습득하지 못했는데, 걸음마를 배우기도 전부터 날려고 들 필요는 없겠지.
“그런데 할부지, 클레어는 왜 여기 있는 거야?”
한참 전부터 소파에서 쿠션을 끌어안고 앉은 채 뚱한 표정을 짓고 있던 신은아가 한 마디 툭 던졌다. 강신혁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클레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야 나도 자게의 글을 읽었으니까. 너만 신혁이를 걱정하는 줄 아니?”
“그, 그건…… 그렇지만 할부지는 나랑.”
“그리고 너, 그 호칭은 신혁이랑 둘이 있을 때만 쓰기로 했다며?”
반박하려는 신은아에게 추가 공격을 넣는 클레어. 신은아가 휘청거리면서도 어찌어찌 대꾸했다.
“하지만 클레어는 가족이나 마찬가지니까 들어도 괜찮은데.”
“그렇게 생각해주는 건 고맙지만 내 입장에선 족보가 꼬일 뿐이니까 그만하렴.”
"윽."
일전에는 강신혁의 존재를 숨겼던 클레어가 말리는 분위기였는데 오늘은 클레어가 일방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과연, 신은아도 그땐 분노에 몸을 맡겨 폭주했을 뿐 항상 그렇게 막나가지는 못하는 것인가. 강신혁은 마음속으로 클레어를 응원했다.
“……알았어, 안 하면 되잖아.”
“좋아.”
“오오오."
강신혁은 기어이 신은아의 항복 선언을 받아내고 마는 클레어를 존경을 담아 바라보았다. 그녀는 하, 코웃음을 치며 한껏 폼을 잡았다. 귀엽다.
“그럼 뭐라고 부르면 되지?”
“그냥 이름으로 부르면 되잖아. 아니면 서로 선배 후배라고 불러도 되고. 위장신분으로 다닐 때를 대비해서라도 익숙해져.”
“이름을 부르는 건 너무 힘드니까, 그럼…… 후배.”
“네, 선배.”
"......흐."
신은아가 볼을 붉혔다. 마냥 싫은 호칭은 아닌 모양이었다.
클레어는 그런 그녀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은아 너, 설마……."
“뭐, 뭐가?”
“아냐, 슬슬 출발하자.”
말을 중간에 끊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클레어의 모습에 신은아는 이를 빠득 갈았지만 뭐라 하지는 못했다. 좋아, 앞으로 클레어가 신은아를 마크해준다면 강신혁도 꺼릴 것이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출발하기 전에 둘에게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는 오후 간식으로 강철을 씹어 먹고 있던 오닉스를 회수해 어깨에 얹고는 그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둘 다 하이랭커면서 어떻게 그렇게 한가해요?”
“한가한 게 아니야, 우리 프론트라인 바의 소중한 직원인 너를 위해 시간을 낸 거지.”
“할…… 소중한 후배를 위해서니까 망설임 없이 연차를 썼어.”
두 여자의 목소리는 굳건했다. 음, 역시 한가한 게 맞는 것 같은데. 강신혁은 의심하면서도 더는 추궁하지 않았다.
“셋이서 함께 마이 룸에 들어갈게요.”
- 다른 두 명의 회원에게서 입장료를 징수합니다. 20만 HP를 얻었습니다!
강신혁은 다른 사람의 마이 룸에 들어가는 데 입장료를 내야 하는 줄은 몰랐기에 움찔했지만 두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입장료를 냈다.
10만 HP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인가. 과연 경력자들은 뭔가 달라도 달랐다. 하지만 마이 룸 안의 황량한 실태를 보고는 그 둘도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아무것도 없는 곳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오게 되다니.”
“차원 퀘스트를 많이 하면 환경이 바뀐다는데 제가 아직 차원 퀘스트를 한 번 밖에 하지 않아서.”
“앞으로도 계속 같이 가. 도와줄 테니까.”
클레어는 그저 쓴웃음을 짓고 있는 반면 신은아는 강신혁의 마이 룸을 이렇게 형편없는 상태로 방치할 수는 없다는 사명감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강신혁은 모든 차원 퀘스트에 다른 회원을 동행시킬 수는 없다는 얘기를 할까 말까 고민하다 입을 다물었다.
관리자가 바로 그들의 눈앞에 차원 퀘스트의 내용을 띄웠기 때문이었다.
[지저의 그림자]
[대기에 유독가스가 가득해 땅 위에서는 생명체가 살지 못하는 세상, 그로마스는 그 대신 지저에 풍부한 마나와 청정한 산소를 머금고 있습니다. 자연히 지상 위의 생명체는 모두 죽거나, 지저에서 살아가기 위한 진화를 일으켜 땅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모든 생명체가 지하에서 생활하는 지저세계는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그로마스의 지하에도 새로운 악이 태동하고 있습니다. 지저의 생명들은 다가오는 멸망을 피하기 위해 서식처를 옮기고자 하지만 안타깝게도 과거 날카롭고 단단했던 그들의 발톱은 오랜 평화에 찌들어 연약해져버린 지 오래입니다.]
[단단히 굳은 지반을 뚫어낼 힘을 잃은 그들에게 다시 날카로운 발톱을 달아주어, 새로운 서식처를 찾을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당신의 임무입니다. 혹은…….]
[퀘스트 기한 : 2달]
[지구와 그로마스의 시간 비율 - 1:24]
“와."
화끈한데. 뭐가 화끈하냐면, 지구와 그로마스의 시간 비율이 화끈했다. 이 정도면 퀘스트 기한인 두 달 동안 그곳에서 쭉 머무르다 와도 간신히 월요일 아침이 되는 것이 아닌가!
강신혁은 이 믿기지 않는 비율에 감탄하며 관리자에게 그 비결을 물었다.
“어떻게 이런 시간 비율이 가능해요? 그 지저왕이라는 사람은 저랑 동시간대를 사는 인물인 줄 알았는데……."
-세계의 시간 흐름은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다른 세계와 비틀리게 됩니다. 대표적인 비틀림을 낳는 것이 바로 ‘세상의 위기’입니다. 그 세상에 심각한 위기가 닥쳐올수록 다른 세상과의 시간 비율에 현격한 차이가 일어나게 되는데, 바로 그 상황에서 그가 직접 회원님께 의뢰를 넣은 것입니다.
“제가 감수해야 하는 페널티 같은 건 없나요?”
- 본래 시간비율에 차이가 날수록 차원간의 이동, 체류에 막대한 양의 HP를 소모하게 됩니다. 실제로 회원님께서 다시 키엘론을 찾으신다면 지구 시간으로 하루에 100만 HP의 체류비를 지불하셔야 합니다.
“그런 얘긴 전에 못 들었는데!”
그러니까 지금 해주는 거겠지, 젠장! 안 그래도 지구와의 시간비율이 1대 10인 키엘론에 찾아가서 수련이나 하고 올까 생각했는데 그런 함정이 있었다니!
가만, 그래도 100만 HP로 시간을 살 수 있다면 남는 장사가 아닐까? 더욱이 다른 세상에 머무를 때는 노화도 진행되지 않는 모양인데.......
- 키엘론의 가장 큰 위기를 회원님께서 타파하신 덕에 세상이 크게 안정되어, 지금 지구와 키엘론의 시간비율은 1:5까지 줄어들었습니다.
“세상에 정말 거저란 없군요……."
- 하지만 처음 퀘스트를 받아 진행할 때만은 거저가 됩니다. 첫 번째의 차원 퀘스트는 히어로 유니버스에서 제안했던 것인 만큼 히어로 유니버스에서 HP를 지불하였고, 이번 차원 퀘스트는 의뢰의 형태가 되는 만큼 의뢰인이 HP를 지불했습니다.
“지저왕 떼부자였네!”
심지어 클레어와 신은아의 비용까지 모두 지불한다고 하니 그 재력이 얼마나 되는지 실감이 갔다. 혹은, 그만큼 지금 그쪽의 상황이 절실하다는 얘기가 될 수도 있었다.
“좋아, 이거 처음엔 도와주려는 생각뿐이었는데 알고 보니 나한테도 득 보는 장사였잖아? 역시 우리 신혁이가 복덩이라니까.”
“사사로이 터치 금지.”
“안 뺏는다니까 진짜.”
팬들의 무분별한 접근을 막는 보디가드처럼 아이돌 강신혁을 보호하는 신은아에게 가로막힌 클레어가 입맛만 다셨다. 강신혁은 과분한 사랑에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망설일 것도 없으니 지금 바로 가죠.”
- 세상 그로마스에 접속합니다.
그 순간, 세상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계속 어두웠다.
“뭐야 이거.”
- 뀨뀨우?
강신혁이 살짝 긴장된 목소리를 냈다. 그 순간 어둠속에서 뭔가가 그를 덥석 껴안았다. 따스한 감촉과 함께 느껴지는 시트러스 계열의 향수 냄새. 요즘 자주 안겨봐서 잘 안다. 신은아의 향이었다.
“선배?”
“할…… 으, 응. 후배가 안전한지 확인하려고 했어.”
신은아의 목소리도 조금 긴장되어 있었다. 그녀의 몸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무서운 것일까.
문득 그녀가 측은해져 손이라도 잡아주려는데, 마찬가지로 어둠 속에서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클레어였다.
“구라치지 마 요년아, 너 정도 되면 이런 어둠은 그냥 꿰뚫어보잖아.”
“아, 아냐. 그렇지 않아.”
반박하는 신은아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리는 것을 보니 구라가 맞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클레어까지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니 강신혁도 마음이 놓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영력을 끌어올려 눈에 집중시키니 신기하게도 어둠이 밝아졌다. 아니, 그럴 것도 없었다. 어느 순간 절로 특성이 발동하는 느낌이 들더니 주위가 대낮보다 환하게 인식된 것이다.
“와. 신혁이 눈 황금색으로 빛나는 것 좀 봐, 헤드라이트인줄.”
“특성이에요. 저도 설마 이런 데서 도움이 될 줄은 몰랐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의외로 무척 넓은 공간이었다. 지저라서 그런지 빛은 하나도 없었지만 곳곳에 세워진 멋들어진 금속 기둥, 금속 천장까지 인공적인 미로 가득한 신전과도 같은 공간이었다.
……아니, 근데 왜 전부 다 금속이지?
“저, 저기!”
그때 또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밑에서, 들려왔다.
“그 눈에 불 좀 꺼주시면 안 될까요! 저희가 눈이 좀 약해서……!”
강신혁은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아아아악! 구원자님들이 너무 눈부셔서 앞이 보이질 않는다!”
“내 눈! 내 눈!”
“모, 모루님은 어느 쪽이시죠? 전 지저왕이라고 하는데요……. 아니, 그 전에 눈에 라이트 좀!"
작고 귀여운 두더지들이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