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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 Chapter 15. 지저세계의 손님 - 1 >

그는 어둠 속에 서 있었다.

한손에는 아직 드래곤 하트가 박혀있는 신살검을 쥔 채, 자신의 그림자 속에서 솟아나오는 징그러운 괴물들을 끊임없이, 끊임없이 베어내고 있었다.

‘신살검무.’

멋대로 그런 이름을 붙인 검무가 그의 손아귀에서 보다 완벽한 형태로 펼쳐지고 있었다. 이전 겪었을 땐 경지가 미천해 미처 보지 못 했던 가능성의 궤적이 그곳에 있었다.

‘저번엔 뿌연 모니터를 통해 보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지금은 자신이 직접 몸을 움직여 신살검을 휘두르고 있다. 아니, 그 표현은 적합하지 않다. 단지 의식이 이 몸 안에 머무르고 있을 뿐, 자신의 의지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좋았다.

‘기억하자.’

자신의 육신과는 신체 구조도 지닌 힘도 완전히 딴판이지만.

검을 어떻게 휘두르는지, 발을 어떻게 내딛는지, 허리에 어떤 식으로 힘을 주며 시선을 어디에 두는지, 심장에서 시작되는 기운의 흐름이 전신으로 어떻게 퍼져나가며 그 힘을 강화시켜주는지.

그 모든 것을 직접 겪고 있는 것만으로 자신의 신살검무를 성장시킬 동력원으로 삼을 수 있었다. 그것은 여태껏 자신이 했던 수련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농밀한 체험이었다.

‘야누스일까. 아마 야누스겠지.’

단지 의식만 깃들어있을 뿐 스스로의 얼굴을 살피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그것이 조금 답답했다.

그가 육체의 주인에 대해 알 수 있는 점은 그가 남자라는 것, 극한으로 단련된 육신의 주인이라는 것, 마지막으로 영력을 다룬다는 것.

‘영력이 섞인 검의 궤적이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것이 느껴져. 물리 영역에서 시작된 움직임이 두 눈으로 보면서도 해석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으로 치환되고 있어. 역시 그랬던 건가…….'

어째서 자신이 신살검무에 그토록 끌렸는지 이제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초월적인 검기도 검기지만, 그보다는 이것이 영력에 기반을 둔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하긴 아무런 힘도 없는 단순한 동작이 기적에 가까운 결과를 낳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영력으로 펼쳐지는 검술, 이것은 앞으로 강신혁에게도 중요한 화두가 되어 주리라.

그저 검을 휘두르며 거기에 영력을 주입해 파괴력을 더할 뿐인 움직임이 아니라, 반드시 영력이 더해져야만 완성되는 신비. 마나의 대체재로서가 아닌 영력 고유의 권능으로만 가능한 기술.

이것을 무기술 전반에 적용시키려면 앞으로 제법 머리를 굴려야겠지만 일단은 단초를 얻은 것으로 충분했다. 강신혁도 무재(武才)라면 다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부터가 시작이었다. 환룡무를 그 너머의 스킬로 도약시킬 가능성이 열린 순간이었다.

- 발버둥 쳐봤자 소용없어.

그러나 강신혁이 신살검의 궤적을, 그 안에 깃든 영력의 작용을 모조리 뇌리에 새기며 해석하려 애쓰던 그때. 남자의 그림자 속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 변하는 것은 없어. 네가 그곳에 존재함으로 인해, 결국 우리가 태어나게 되니까.

차가운 여자의 목소리. 남자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 목소리를 끊어버리려는 듯 자신의 그림자 속에 신살검을 박아 넣었다.

드래곤 하트가 번쩍, 황금의 빛을 발했다. 남자의 영력을 받아들이더니 그것을 증폭시켜 검신에 흘렸다.

그로써 드래곤의 권능이 되살아났다. 오만한 전능자들이 갖고 있던 가능성, 신살의 힘이 발현되는 순간이었다.

‘신살검은 저렇게 쓰는 거였나.’

의식을 잃기 전 눈앞에 떠올랐던 메시지에는 분명 신살검이 A랭크가 되어 ‘핵’을 활용한 운용이 가능해진다고 했었다.

아마도 핵이란 저런 것을 말하는 거겠지. 신살의 가능성을 지닌 드래곤 하트를 핵으로 삼았기에 신살검은 비로소 신살의 힘을 갖게 되었다. 그럼 그 드래곤 하트를 잃어버린 지금은 무엇인가, 말만 신살검이지 신살의 권능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다는 얘기가 아닌가!

‘다시 드래곤 하트를 찾아서 박아 넣으면 되겠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냐고.’

하지만 생각해보자. 핵을 활용한 운용이 가능하다고는 했지만 그 핵이 꼭 드래곤 하트여야만 한다고는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차피 강신혁이 신을 죽여야 하는 것도 아니고, 신살검을 강화하기 위해 드래곤 하트를 대체할 만한 핵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그때 그의 상념을 끊어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재밌는 무기를.

- 친구의 유작이지. 아마 많이 아플 거다.

그 짧은 사이 쇠약해져 갈라진 여자의 목소리에, 비로소 남자가 입을 열어 한 마디 했다. 평소 까불대던 야누스의 인상과는 정말 많이 다른 침착하고도 진중한 목소리.

그림자가 펑펑 터져나갔다. 사방에서 넘실대던 괴물들도 차례차례 소멸했다. 신살검이 빛을 토해낼 때마다 세계가 뒤흔들리고 일그러지며, 균열이 생겨났다.

- 야누스, 야누스. 어리석은 발버둥은 그만둬.

남자는 그 말을 듣지 않고 검을 어둠 속으로 더욱 깊이 박아 넣었다. 세상 전체에 거대한 충격이 내달렸다.

- 네가, 우리를…… 만…….

세상을 잠식한 어둠에도 한계는 있었던 것일까, 그 일격에 어둠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지막 발악이었을까, 무너지는 어둠이 순식간에 신살검을 삼켜버렸다.

- 앗.

남자가 명백히 실수했다는 목소리를 내며 손을 뻗었지만 이미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덧 남자 홀로 남은 세상에서…… 그는 나직이 빌어먹을, 하고 중얼거리며 손으로 이마를 덮었다.

그리고 강신혁은 주인을 잃은 신살검과 함께 어둠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바닥을 모르고 한없이 떨어져 내리며 끔찍한 부유감에 전율하던 찰나…… 번쩍 눈을 떴다.

- 굉장히 심오한 영역의 무예를 경험하며 깨달음을 얻어 일부를 체득했습니다. 환룡무(S+) 스킬의 숙련도가 A-랭크로 성장합니다.

- 영력의 심화 운용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영력이 A-랭크로 성장합니다.

"......."

강신혁은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읽을 틈도 없이 검을 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당장이라도 검을 휘둘러야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행히 로열 클래스로 방을 옮긴 이래 자신의 방에 운동을 위한 개인실이 따로 마련되어, 번거롭게 아래까지 내려갈 필요도 없었다.

- 우웅

방음설비가 된 넓은 수련실 안에 들어서자마자 신살검을 뽑아 정신없이 몸을 놀리기 시작했다. 신살검 역시 금방 그에게 호응해주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영력이었다. 검은 시원하게 뻗을 수 있는데 꿈속에서 보았던 영력의 특유의 흐름은 쉬이 재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역시 어렵네.’

여태껏 강신혁은 영력을 섬세하게 운용해본 적이 없다. 그저 필요한 순간 터트리고 흘려보내고…….

강약을 조절한 정도는 있어도 꿈속에서 야누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체내에서 체내로, 체내에서 체외로 이어지는 고유의 흐름을 만들어낸 적은 없다. 상상도 해본 적이 없다.

‘검기는 이제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래도 역시 안 돼.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내려면 먼저 영력 운용을 연습해야겠어.’

다행히도 야누스가 검을 휘두르며 만들어내던 영력의 흐름은 기억 속에 모두 생생하게 남아있다. 이젠 자신도 그것이 가능하게끔 영력을 다루는 연습을 하는 것 뿐!

어쩌면 자신만 모르고 있었을 뿐이지 마나를 다루는 검술이나 스킬에도 이런 심화과정이 있었던 것일까. 강신혁은 그런 생각을 하다 말고 웃어버렸다. 마치 자신이 무협지에나 나오는 무공을 수련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래도 제법 성장했다 생각했는데 이제 겨우 한 걸음 뻗은 셈이었구나.’

여태까진 수박 겉핥기식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을 뿐. 그저 영력을 뭉쳐 검을 강하게 하는 것이 아닌, 영력과 조화를 이루어 신비와 이적을 낳는 제대로 된 검술을 드디어 배우게 된 것이다!

- 고마워, 야누스.

- 야누스 님의 귓속말 : 뭐야, 왜 갑자기 그래?

- 네 덕분에 무림의 존재를 실감했어.

- 야누스 님의 귓속말 : 할배, 머리 괜찮아?

야누스는 언제나처럼 속없는 말로 대꾸했지만 강신혁은 야누스의 그런 모습마저 대단해보였다. 역시 히어로 유니버스는 굉장한 공간이었다.

- 여태까진 그냥 검에 영력을 때려 박아 휘두를 뿐이었거든. 하지만 신살검에 담긴 네 기억 덕분에 진짜 검술이 뭔지 깨달았어.

- 야누스 님의 귓속말 : 뭐? 내 흑역사를 멋대로 감상…… 잠깐만. 그 흐름을 읽어냈다고? 내 영력의 흐름을? 그건 검술 같은 게 아니라 보다…… 아, 음, 뭐 됐다.

야누스는 강신혁의 설명을 듣고 뭔가 망설이는 듯하더니.

- 야누스 님의 귓속말 : 그래, 정진해보도록! 할배가 내 검술을 이해하면 다음에 만들어줄 신살검도 더 훌륭한 놈이 나오겠지!

- 그래. 그것도 언젠가 반드시 만들어줄 테니까…….

지금은…… 내 뜻대로 검도 한 자루 만들어내지 못하는 반푼이일 뿐이지만. 아까 있었던 일을 떠올린 탓에 검술을 배워 한껏 고조되었던 강신혁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야누스가 말을 이었다.

- 야누스 님의 귓속말 : 검을 이해하는 능력을 지닌 할배라면 언젠가 무력에서도 나를 앞설지도 모르지.

- 이해라…….

- 야누스 님의 귓속말 : 응? 왜 그래, 할배. 내가 이상한 말 했나?

- 글쎄.

- 야누스 님의 귓속말 : 아, 그렇지. 자게에서 누가 할배 찾던데. 할배는 원래 자기 물건 사주는 놈하고밖엔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는 것도 모르고. 쯧쯧.

- 내가 속물인 것처럼 묘사하는 건 그만둬.

히어로 유니버스에는 몇 개인가의 게시판이 있다. 그중 강신혁이 이용하는 것은 거래게시판 뿐이지만 다른 회원들은 자유게시판(자게)이나 팁게시판(팁게)에도 자주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사실 강신혁도 혹시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있을까 싶어 들어가 봤지만 자게는 고인물들의 멀티 채팅을 위해 마련한 공간이나 다름없었고 팁게는 지금의 강신혁이 도무지 알아먹을 수도 없는 이름과 형태를 가진 괴물들의 서식처나 사냥법, 혹은 세상에 상처 안 남게 차원 찢기 같은 터무니없는 얘기밖엔 없었다.

‘소설처럼 고수들이 자신의 특별한 수련법이나 마법을 가르쳐주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면 자신의 비전이나 다름없는 기술을 생판 타인에게 가르쳐줄 리가 없었다.

더구나 히어로 유니버스는 이미 자신의 능력을 입증한 이들만이 소속되는 곳. 이미 자신의 길을 확립한 이들만이 들어가는 곳이기에 타인에게서 굳이 뭔가 배워가려는 이도 없었다.

'......음?'

거기까지 생각하다 말고 강신혁은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방금 머릿속에 뭔가 걸리는 게 있었는데, 뭐였을까. 자신의 자격요건?

그야 모루는 히어로 유니버스의 회원이 되는 시점에서 모든 세상 최고의 대장장이임을 입증했고, 자신은 그런 모루의 환생체니까 영력을 각성한 순간 전생의 아이디를 되찾은 것뿐인데…….

“으으음, 모르겠다.”

중요한 일이라면 나중에 다시 생각나겠지. 강신혁은 히어로 유니버스의 팁게를 슥 확인해보곤 역시나 자신에겐 도움이 되는 게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한 후 자게를 열었다. 과연, 자신을 찾는다는 글을 바로 발견할 수 있었다.

[지저왕 - 대장장이 모루님을 찾습니다. 우리 세상에 도움이 간절히 필요합니다!]

강신혁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지저왕이라니 이런 유치찬란한 이름을 닉네임으로 사용하는 용기 넘치는 녀석이 있었단 말인가.

그 글에 달린 댓글들을 확인해보니 지저왕처럼 정신 나간 닉네임을 쓰는 이는 그 외에는 없는 것으로 보였다.

[아스칼던 - 모루와 이야기가 하고 싶으면 우선 그의 작품을 사야지. 뭘 모르는 놈이군. 신참인가?]

[미양 - 모루가 활동 안한지 벌써 20년이 다 되어 가는데 무슨 헛소리야. 활동 똑바로 안 하냐? 너 같은 놈들이 우리 고인물들을 욕먹이는 거야.]

[로키 - 너야말로 똑바로 해라. 모루 활동 재개했거든?]

[미양 - 뭐!? 언제!]

[로키 - 바로 얼마 전에. 망치를 손에서 놓은 지 오래 되서 실력이 많이 떨어졌는지, 웬 이쑤시개랑 딱지 하나씩 올려놓더라. 그래도 그리워서 내가 사려고 했는데 어떤 놈이 상회입찰해서 가져갔어.]

[은아 - 내가 가졌어야 했는데. 그거 상회입찰한 새끼 잡히면 죽여 버릴 거야.]

은아야.......

[지저왕 - 저도 어떻게든 그렇게 연락을 드리고 싶었지만 새로 물건을 올리시질 않으셔서…… 그래서 여기서 찾고 있는 겁니다. 혹시 그분과 개인적인 연락이 가능하신 분 계십니까?]

[츠쿠요 - 은아란 계집은 젖비린내 나는 입을 좀 다물어줬으면 좋겠군요. 그보다 지저왕이라고 했나요? 당신, 모루에겐 무슨 볼일이죠? 아니, 그전에 혹시 당신은 여자인가요?]

[지저왕 - 저 사람 아닙니다.]

[야누스 - 이거 웃긴 놈이네.]

댓글은 거기서 끊겨 있었다. 강신혁은 오히려 사람이 아니라는 부분이 무척 신경 쓰였지만 일단은 거기에 댓글을 달기로 했다.

[모루 - 무슨 일이시죠? 제 능력이 부족해서 도와드리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답글은 바로 달렸다.

[지저왕 - 오오오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차원 퀘스트를 수행하실 수 있는 대장장이는 오직 모루님뿐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부디 저희 세계에 와주실 수 있을까요?]

[미양 - 뭐? 이 미친 새끼가, 자게에서 차원 퀘스트를 의뢰한다고? 신참 주제에 건방지게.]

[로키 - 관리자 승인은 난 거야? 아니 잠깐만, 모루가 차원 퀘스트를 할 수 있다고? VIP야? 개쩌네!]

[야누스 - 모루 할배가 여태 팔아먹은 무구가 몇 갠데 VIP는 당연하지. 그런데 너, 지저왕이라는 놈. 모루 할배한테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그러냐?]

[지저왕 - 수작이 아닙니다! 우리 세상엔 정말로 대장장이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재료는 충분히 있으니 부탁드립니다! 아니, 재료를 채집하는 부분부터 조금…….]

[모루 - 차원 퀘스트…….]

대장장이의 도움이라, 그 세상에는 대장장이가 없기라도 하단 말인가? 아니, 하지만 인간이 아니라는 말도 했으니…….

“어때요, 관리자님.”

- 위험합니다. 회원님께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는 장소입니다만 그래도 제가 회원님께 말씀을 드리지 않았던 이유가…….

- 은아 님의 귓속말 : 할부지, 갈 거면 은아랑 같이 가! 위험한 데 또 혼자 가면 안 돼!

“음, 은아랑 같이 가면요?”

차원 퀘스트 중에는 다른 히어로 유니버스 회원이 동행할 수 있는 것도 있다고 했었지. 시기적절하게 날아든 은아의 메시지를 읽으며 강신혁이 묻자, 관리자는 짧은 메시지로 대꾸했다.

- 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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